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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항해는 이제 시작일 뿐!”
얼마 전, 익명의 독자로부터 한 통의 제보전화를 받았다. 멜버른에서 살고 있는 노부부가 자신들의 배를 타고 태평양을 횡단한 후 현재 브리즈번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였다. 그들이 퀸즐랜드에서 몇 주를 머문 후 또 어디론가 떠날 것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마음이 급해진 필자는 곧바로 인터뷰를 시도했다. 그들이 퀸즐랜드에 머무는 동안 꼭 만나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라, 그 긴 여정동안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났겠는가? 다행히 지난 11월 29일, 노부부를 만나 3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번 호 커버스토리에서는 표일세, 조명숙 부부를 소개한다. 글/채승웅
사진/이진우 채승웅 표일세, 조명숙 부부를 만나기 위해 브리즈번 동쪽에 위치한 리버게잇 마리나(River Gate Marina)를 찾았다. 이들이 타고 태평양을 건넌 배 <덧체스(Ducheesse)>호는 정비를 위해 뭍에 올라와 있었다. 덧체스 호 뒤편으로 배를 손수 정비하던 표일세 씨 부부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표일세 씨는 올해로 64세, 부인 조명숙 씨는 62세라고 자신들을 소개했다. 하지만 오랜 여행 동안 햇볕에 검게 그을린 피부와, 바다의 거센 바람을 이겨냈을 균형 잡힌 몸매는 이들의 나이를 쉽게 가늠할 수 없게 했다. 워낙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 ‘어떤 이야기를 먼저 듣는 게 좋을지?’ 고민했지만, 아무래도 옛날이야기부터 차근차근 듣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표 씨 부부가 호주로 이민을 온 것은 1982년 3월이다. 당시는 호주 기술이민의 문이 활짝 열린 시기였다. 한국에서도 눈에 띄는 활약을 하는 건축가였던 표 씨는 뛰어난 영어실력과 건축 경력을 바탕으로 무난하게 호주로 이민을 올 수 있었다. “한국에서 일을 하다가 중동에서 추진되는 프로젝트에 선발돼 파견을 많이 갔어요. 당시 영어에 능숙한 직원이 드물었기 때문에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중요한 일을 많이 맡게 됐어요. 제가 주로 하던 일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었습니다.” 중동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그는 문득, 사막에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호주였다. 그의 가족은 1982년 3월에 브리즈번에 도착했다. 당시 브리즈번에서 살고 있는 한국 가정은 다섯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브리즈번에 정착할까도 생각했지만 퀸즐랜드의 경기가 좋지 않아 일을 하기가 쉽지 않았다. 결국 그의 가족은 3개월 만에 애들레이드로 이사했다. “애들레이드로 이사한 후, 한 회사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제가 맡았던 프로젝트가 천연가스를 개발하는 일이었는데, 애들레이드 근처의 사막이 제가 일하는 곳이었죠. 사막에서 도망치려고 호주로 왔는데 결국 사막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호주에서 그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호주에서의 경력이 필요했다. 일을 하지 않고 언제까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프로젝트 매니저는 한 마디로 프로젝트의 책임자에요. 백인 매니저 대신 아시안이 매니저가 됐으니 직원들의 반발도 심했죠. 직원들이 말을 듣지 않아 처음 한 달은 정말 힘들었어요. 제가 있는 사무실에 돌을 던지기도 했죠. 그들을 찾아가 ‘왜 여기에 돌을 던지느냐?’고 물어보면 아주 당당하게 ‘겁을 주려고 그랬다’라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직원들을 해고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해고를 해도 다시 백인 직원들로 채워졌을 테니까요. 어떻게든 제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쉽게 풀리지 않던 문제는 헝가리에서 온 백인 측량사에 의해 해결됐다. 표 씨가 헝가리 측량사에게 속마음을 털어놓은 후, 그와 친구가 된 것이다. 많은 직원들이 헝가리 측량사의 말을 잘 따랐기 때문에 이후에는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이렇게 한 달 만에 신임을 얻어 일에 모든 것을 집중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1984년, 그가 다니던 회사가 큰 위기에 몰리면서 그는 직장을 잃고 멜버른으로 이사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으로 갈까도 생각했지만, 이곳까지 온 이상 앞으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멜버른은 호주의 옛 수도이고 인구가 많은 도시여서 그런지 그가 활약할 수 있는 기회가 훨씬 많았다. 멜버른에 오자마자 6백만 달러에 달하는 수영장 건설 프로젝트를 맡게 된 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부터 워낙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일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어요. 수영장 프로젝트가 끝난 후에는 D&M이라는 건축회사를 설립해 빅토리아 주의 퍼블릭 하우징 프로젝트를 맡기도 했습니다.” 그가 배를 사고, 크루즈를 즐기게 된 것이 이 시기이다. 워낙 예전부터 사냥, 다이빙 등 레저 스포츠에 관심이 많던 터라 집도 사기 전에 배를 먼저 구입했다. “사업이 안정되기 시작하면서 여유가 조금 생겼어요. 2만 달러를 주고 7m 낚싯배를 구입했죠. 배를 타고 근해에 나가서 다이빙을 해 전복을 많이 캐오기도 했어요. 아마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내 배를 타고 세계일주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요(웃음).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배를 타고 한국으로 갈 계획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비록 배를 타고 서울로 가려던 계획은 무산됐지만 그의 항해술은 날이 갈수록 향상됐다. “성격상 누군가에게 배우는 것 보다는 스스로 직접 체험하며 익히는 것을 좋아합니다. 항해술도 많은 책을 읽고 직접 항해하며 익힌 것입니다. 어느 정도 실력이 붙은 다음에는 태즈매니아와 오스트레일리아 사이의 배스 해협(Bass str.)을 건넜습니다.” 배스 해협은 물살이 빨라 뱃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건너기 힘든 해협 중의 하나로 꼽는 곳이다. 지금까지 그가 구입한 배는 6척이다. 현재도 덧체스 호 외에 한 척을 더 소유하고 있다. 덧체스 호 구입을 추진한 것은 슬슬 세계일주의 꿈을 행동에 옮기려 했던 3년 전이었다. 부인 조명숙 씨가 기존의 배보다는 더욱 성능도 뛰어나고 안정감 있는 배를 원했다. 오랜 시간 동안 물색한 끝에 결정한 것이 지금의 덧체스 호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어요. 배를 산 곳이 미국의 캐러비안 근처였거든요. 사람을 시켜 배를 가져오려고도 했지만 그렇게 되면 돈도 많이 들고, 오는 동안 배가 손상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인과 상의해 이 참에 태평양을 건너기로 했죠.”
캐러비안에서 출발해 표 씨 부부가 거친 곳은 파나마, 갈라파고스, 마쿠시스, 타히티, 보라보라, 쿡 아일랜드, 통가, 피지, 바나와투, 솔로몬제도 등이다. 이들은 2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스스로의 힘으로 태평양을 건넜다. 긴 여정에서 기억에 남는 일이 없을 수 없다. 폭풍을 만나 돛이 찢어지기도 하고, 암초와 부딪쳐 배가 고장이 나기도 했으며, 한 섬에서는 강도를 만나기도 했다. 항해 도중 번개를 맞아 자동항해장치가 고장나 별을 보고 방향을 찾기도 하고, 고래와 부딪치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그뿐인가? 비슷한 코스로 여행을 하던 벨기에 부부와 친구가 되고, 모험을 좋아하는 한국인 여성을 우연히 만나 얼마간 함께 여행을 하기도 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죠. 피지 근해에서 참치를 잡는 우리나라 원양어선을 만나 선원들과 친구처럼 지내기도 했습니다. 같이 밥도 먹고, 카드놀이도 하면서 며칠 동안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성격이 고약한 선장이 한 명 있더라고요. 자신의 선원들에게는 물론, 나이가 훨씬 많은 저에게도 말을 험하게 하는 등 예의가 없는 사람이었죠. 어쨌든 선원 일행이 우리 배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큰 배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폭풍이 몰아쳤습니다. 큰 배만 탔던 그 선장의 얼굴이 파랗게 변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능숙하게 파도를 피하고, 무사히 원양어선에 도착하자 갑자기 제 손을 잡고 ‘어르신’이라고 하더군요(웃음).” 호주로 들어오기 직전에 통과한 솔로몬제도에서는 큰 칼로 무장한 강도와 만나기도 했다. “한밤중에 강도 몇 명이 우리 배에 올라탔어요. 다행히 알람 장치가 되어 있어서 금세 알아차렸죠. 모두 큰 칼을 가지고 있어서 저도 지지 않고 조명탄 총으로 위협하며 ‘빨리 배에서 내리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런데 위협하기 위해 문을 연 것이 실수였습니다. 문 옆에 숨어있던 한 명이 제 뒤를 덮쳤던 것이죠. ‘아 이제 죽는구나’라는 생각이 드는 찰나, 부인이 둔기로 녀석의 머리를 때려 겨우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칼을 든 강도들이 가까이 오기 전에 다시 문을 잠그고 경찰에 신고했죠.” 좋지 않은 기억도 많지만 즐겁고 신기한 경험도 많다. 어른 키만 한 물고기를 잡기도 하고, 바나와투에서는 주민들로부터 코코넛크랩을 선물받기도 했다. “코코넛크랩은 뭍에서 살며 코코넛을 먹고 사는, 거미를 닮은 신기한 게에요. 코코넛을 먹고 살아서인지 배에는 항상 코코넛이 가득하죠. 섬 주민들에게 제가 입던 옷과 설탕을 조금 주자 코코넛크랩 다섯 마리를 잡아주더군요. 맛있다고 소문이 난 게라서 꼭 한 번 먹어보고 싶었는데, 먹어보니 정말 헛소문이 아니었습니다(웃음).” 조명숙 씨는 주민들 인심에 따라 좋았던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구분했다. “에콰도르와 바나와투가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주민들 인심이 좋고 욕심이 없었거든요. 섬이라서 먹을거리가 극히 제한되어 있잖아요. 대부분 감자 같은 음식을 먹었는데, 오래전부터 비슷한 음식만을 먹어서 그런지 다른 음식에 욕심이 없었어요. 외부인들에 대한 적대감도 없었고요.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바나와투가 세계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곳이더군요.” 배가 그렇게 크지 않기 때문에 항상 위험에 대비해야 한다. 특히 밤중에는 다른 배와의 충돌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항상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힘들었어요. 다른 배들과 항로가 겹칠 경우, 작은 배가 큰 배를 피해가야 했거든요. 신경을 곤두세우고 자다보면 1시간에 한 번씩은 일어나야 했습니다.” 항해 코스는 대부분 바람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에 표 씨 부부처럼 ‘횡단 여행’을 할 경우, 비슷한 코스로 가게 되어 있다고 한다. “피지에서 만난 벨기에 부부와 친분을 쌓았어요. 그분들도 저희처럼 부부가 여행을 하고 있었죠. 서로 다른 날 피지에서 출발했는데 바로 얼마 전 퀸즐랜드 번다버그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같이 여행을 하면서 가족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가까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원래의 계획은 솔로몬 제도를 경유해 파푸아뉴기니까지 가는 것이었으나 이제 곧 태풍 시즌이 돌아오기 때문에 계획을 수정했다. 그래서 선택한 곳이 바로 퀸즐랜드, 브리즈번이었다. 표 씨 부부가 브리즈번에 배를 정박한 이유는, 이곳에 아들 지호 씨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지호 씨는 브리즈번에서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 태평양을 건너는 데에 2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이유는 중간 중간 일 때문에 호주를 오갔기 때문이다. 캐러비안에서 출발한 뒤 파나마에 배를 정박하고 2개월 동안이나 멜버른에 머무르기도 하고, 아들 지호 씨의 결혼 때문에 잠시 돌아오기도 했다.
표 씨 부부는 정비를 마치고 12월 초에 멜버른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물론, 덧체스 호는 브리즈번에 정박해 둔 채 비행기를 타고 ‘잠시’ 가는 것이다. 2년 동안 집을 비워두었던 터라 정리할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라고. 여러 가지 정리를 끝내고, 태풍이 물러난 내년 3월이면 다시 브리즈번으로 올라와 덧체스 호를 타고 머나먼 여정을 떠날 생각이다. “다윈을 거쳐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태국, 필리핀, 한국, 하와이로 갈 생각이에요. 아프리카와 대서양 쪽으로도 가고 싶었는데 요즘 해적이 자주 출몰한다고 해서 일단 아시아로 갈 계획입니다. 그때그때 바다 상황이나 바람에 맞춰 여행지를 바꿀 수도 있습니다. 어디로 가든 저희 부부가 가고 싶은 곳으로 방향키를 맞출 것입니다.” 이들 부부의 태평양 횡단 이야기는 사실 다큐멘터리로 제작되어도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있을 만큼 재미있다. 하지만 표 씨가 웹사이트에 올리고 있는 사진을 제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필자는 안타까움을 느꼈다. 우연한 기회에 우리 잡지마저 취재를 하지 않았다면 표 씨 부부의 주위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들이 태평양을 건넌 것을 모르지 않았겠는가? ‘매일 매일이 새로움의 연속이었을 지난 2년의 시간을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도록 다큐멘터리 제작을 하는 것은 어떤지?’를 물었더니 표 씨는 “우리 두 사람의 기억으로 남는 것으로도 충분히 가슴 벅차고 재미있다”고 말했다.
흔히 인생을 항해에 비유한다. 한 사람이 살아오면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고난은 바다에서 만나는 파도와 비슷하고, 기쁜 일들은 시원한 바닷바람과 비슷하기 때문이리라. 이들 부부는 항해하는 내내 온 몸으로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피부로 직접 느꼈을 것이다. 표 씨 부부의 항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시작인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제 겨우 배를 사서 집으로 가져온 것뿐이지 않는가? 그들이 제대로 된 항해를 하기에는, 또 인생을 즐기기에는 그렇게 넓다던 태평양도 너무 좁은 느낌이었다. <교민라이프 69호 커버스토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