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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朴尙鎭 (1884-1921)】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朴尙鎭)"
1884년 12월 7일 경상남도 울산군 농소면(農所面) 송정리(松亭里, 현 울산광역시 북구 송정동)에서 아버지 박시규(朴時奎)와 여강이씨 이석태(李錫泰)의 장남으로 태어나 백부 박시룡(朴時龍)에게 입양되었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자(字)는 기백(璣伯), 호는 고헌(固軒)이다. 1887년 경상북도 경주군 외동면(外東面) 녹동리鹿(洞里)로 이사하여 양부모 집에서 성장하였다.
1889년부터 10여 년 동안 사종형(四從兄) 창고(蒼皐) 박규진(朴煃鎭)에게 한학을 배웠다. 1898년 경주 대지주 최현교(崔鉉敎)의 장녀 최영백(崔永伯)과 결혼하였다. 경북 진보군(현 청송군 진보면) 흥구리(興丘里)에서 박규진을 따라 수학하던 중 1899년부터 허위(許蔿)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세 때인 1902년 상경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허위 외에도 생부 박시규와 양부 박시룡 등이 벼슬을 하고 있었다. 허위 문하에서 정치와 병학을 수학하면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침략을 직접 체험하였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 체결에 반대하여 의병 봉기를 촉구했던 허위의 배일격문(排日檄文) 등을 통해서 현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1905년 2월 양정의숙(養正義塾) 전문부 법률과에 입학하여 법률, 경제학 등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이때 백산(白山) 안희제(安熙濟)를 비롯하여 중국인 반종례(潘宗禮), 선교사 헐버트(Homer B. Hulbert) 등과 접촉하며 신문물과 신사상을 수용하였다. 1905년 중국인 반종례를 따라 중국 톈진(天津)을 여행하며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현장을 목격하였다. 1906년 의병장 신돌석(申乭石)을 만나 형제의 의를 맺었고, 1907년경에는 김좌진(金佐鎭)과 의형제가 되었다. 1907년 헐버트의 주선으로 헤이그 특사로 파견되는 전 평리원 검사 이준(李儁)을 만나기도 하였다. 1907년 9월 스승 허위가 경기도 연천에서 창의하자 5만 원의 자금과 무기를 제공하였다.
1908년 양정의숙을 졸업하고, 같은 해 3월 설립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에 가입하였다. 같은 해 9월 대구에서 조직된 달성친목회(達城親睦會)에도 가입하여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교남교육회 참여는 남형우(南亨祐)·안희제(安熙濟)·서상일(徐相日) 등과 동지적 결합을 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달성친목회 참여는 대구를 중심으로 펼치는 상업 활동과 독립운동의 기반이 되었다.
1908년 10월 21일 허위가 사망하자 혼자서 반장(返葬)하고, 나아가 초려(草廬)에서 상례(喪禮)를 다하였다. 1909년 1월 17일 순종의 남서순행 때 송병준(宋秉畯) 등을 처단하려 하였으나 동래온천에서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1910년 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 판사로 임명되나 곧 사임하고, 신민회(新民會)에 참여하였다. 1910년 봄부터 신민회의 독립군기지건설 과정에서 3차례 걸쳐 만주와 연해주, 그리고 중국 상하이(上海)를 방문하였다. 1910년 또 한 차례 만주를 여행하고 돌아온 뒤 서울에 있던 가족들을 귀향시켰다.
1911년 봄 다시 만주와 연해주의 우국지사들을 방문하였다. 남만주의 이상룡(李相龍)·김동삼(金東三)·이시영(李始榮)·허혁(許爀) 등을 방문하여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둘러보고 국내에서 지원하기로 하였다. 양제안(梁濟安)과 손일민(孫逸民)을 앞세워 안둥현(安東縣, 현 단동)과 신의주에서 안동여관을 경영함으로써 만주를 왕래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신채호(申采浩)·양기탁(梁起鐸)·이윤재(李允宰)·김좌진·손일민 등과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한 일환으로 국내외 연락망을 수립하고 국내지역을 담당하였다.
1911년 10월 15일 양부 박시룡의 회갑연을 계기로 국내 동지들을 소집하여 만주 소식을 전달하고 이민을 유도하여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이것은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목표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는 신흥강습소 후원 계획의 일환이었다. 또한 이민양병(移民養兵)을 목적으로 한 경천어동지회(敬天語同志會)라는 유세대(遊說隊)를 편성하였다.
1911년 말 상하이·난징(南京) 등지를 여행하면서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직접 목격하였다. 신해혁명을 보며 비밀(秘密)·폭동(暴動)·암살(暗殺)·명령(命令) 등의 방략을 통해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또한 만주 독립운동계를 돌아보며 방대한 군자금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직접 상회를 차려 운영하거나 동지들이 곳곳에 상회나 상점을 차릴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1912년 만주에서 돌아온 뒤 대구 혼마치(本町, 현 서문로 일대)에서 자본금 24만 원의 곡물상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한 연락본부로 삼았다. 곡물상으로 업종을 선택한 것은 독립운동 자금 송금과정에서 자금 출입에 대한 일본 경찰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13년 다시 상하이·난징 등지를 방문하였다. 쑨원(孫文)을 만나 일제의 한국 침략을 설명하고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역설하면서 사관(士官) 양성에 대한 지원을 호소하였다. 그 결과 중국 군관학교에 한국인 훈련을 위한 특별부가 설치되었다. 쑨원으로부터 미제 권총 한 자루를 기념으로 증정받았다. 하지만 한국 독립군기지 설립에 대한 협조 요청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가 있던 동삼성(東三省) 지방 군벌 책임자에게 미뤘다. 그 후 동삼성장 장쭤린(張作霖)과 10여 차례 독립운동기지 문제를 논의하였으나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1913년 봄 만주 여행에서 만난 양제안(梁濟安)의 소개로 이복우(李福雨)와 함께 풍기에서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던 채기중(蔡基中)을 만났다. 1913년 정월 풍기에서 결성된 광복단은 채기중·양제안 등을 중심으로 만주와 연락을 취하며 독립군기지를 지원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하고 있었다.
1913년 9월 대구의 서상일이 달성친목회를 재흥하자 참여하였다. 1914년 3월경 대구에서 상덕태상회와는 별도로 5천 원을 투자하여 포목무역상을 개설하는 한편, 군자금을 모집하며 만주를 왕래하였다. 1914년 (음)11월 중국에서 부민단(扶民團) 총재 허혁의 소개로 후일 광복회 황해도지부장으로 활동하는 이관구李(觀求)를 만나기도 하였다. 한편, 1912년 임병찬(林秉瓚)을 중심으로 결성된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에도 참여하였다.
1915년 1월 15일 대구에서 결성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중앙총부(中央摠部)의 단원으로 참가하였다. 의병활동과 관련을 가지고 있던 정운일(鄭雲馹)·변상태(卞相泰)·황병기(黃炳基) 등과 밀착하여 활동하였다. 1915년부터 만주나 노령을 연결하는 지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1915년 7월 15일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를 결성하고, 사령관 겸 본부회장을 맡았다. 우재룡의 자서전 『백산실기(白山實記)』에 의하면, “사령관 박상진(朴尙鎭), 지휘장 우재룡(禹在龍)·권영만(權寧萬), 지부장 채기중(蔡基中, 경상도)·김한종(金漢鍾, 충청도)·이병찬(李秉燦, 전라도)·김선호(金善浩, 경기도)·최봉주(崔鳳周, 함경도)·조현균(趙賢均, 평안도)·이해량(李海量, 황해도)·김동호(金東浩, 강원도), 본부회장 박상진 이하 최준(崔浚)·이복우(李福雨) 등, 만주사령관 이석대(李奭大), 국외 만주 안동여관 손일민·봉천 삼달양행정미소 정순영(鄭舜永)” 등이 광복회의 주요 인물이었다.
광복회 사령관 겸 본부회장으로서 풍기의 광복단(光復團), 문경의 민단조합(民團組合) 등과 제휴하였다. 풍기 광복단과 민단조합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으로 국권을 회복하고자 했던 의병계열 인사들이 조직한 단체였기 때문에 뜻을 함께 할 수 있었다. 또 우재룡·권영만 등 의병 출신과 조선국권회복단의 이시영李(始榮)·정순영(鄭舜永)·홍주일(洪宙一)·정운일·최준 등이 광복회에 참여하였다.
광복회 본부 회장을 맡아 재무부장 최준, 사무총괄 이복우 등과 조직을 이끌었다. 경주의 최준과 이복우는 혈연 관계로 맺어진 사이였다. 최준은 사촌 매제, 이복우는 가까운 친척이었다. 경주와 대구를 왕래하며 활동했기 때문에 경주 외동면 녹동의 집과 대구의 상덕태상회가 광복회의 본부로 이용되었다.
1916년 (음)9월 강원도 삼척의 김동호(金東浩)를 광복회 회원으로 가입시켰다. 김동호는 삼척군 원덕면장(遠德面長)을 역임한 인물로, 1913년 4월 삼척군 임원리(臨院里) ‘임야측량사건(林野測量事件)’으로 대구형무소에 갇혀 있었다. 1917년 (음)10월 초에는 서울 남문여관에서 김노경(金魯卿)을 가입시켰다. 이에 따라 광복회는 강원도와 서울까지 그 조직이 확산되었다.
광복회는 경상도 지역뿐만 아니라 충청·전라·경기·황해·평안도와 서간도·북간도 지역까지 각도별 지부장을 주축으로 하는 조직망을 구축하였다. 이리하여 1910년대 국내에 기반을 둔 최대의 독립군 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채기중·우재룡 등과 함께 광복회 조직 확산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광복회의 이념은 근대적 국민국가 수립을 위한 공화주의 실현을 목표로 삼고, 일제의 무단통치로부터 무력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한다는 무장투쟁노선을 표방하였다. 그 행동강령은 ‘비밀·폭동·암살·명령’이라는 4대 강령으로 나타났고, 이것은 ‘무력준비, 무관양성, 군인양성, 무기구입, 기관설치, 무력전’ 등으로 구체화되었다.
대한광복회는 근대 국민국가의 공화주의를 이념으로, 무장혁명노선을 투쟁 방략으로 표방했다. 결성 당시 대한광복회에서 채택한 결의문과 실천강령은 다음과 같다.
결의문
오인은 대한독립광복을 위하여 오인의 생명을 희생에 공(供 : 이바지함)함은 물론, 오인이 일생의 목적을 달성치 못할 시는 자자손손이 계승하여 수적(讐敵 : 원수인 적) 일본을 완전 구축하고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절대 불변하고 결심 육력(戮力 : 서로 힘을 모음)할 것을 천지신명에게 서고(誓告 : 조선 시대에, 임금이 중요한 국사를 종묘에 고하던 일)함.
실천강령
1. 부호의 의연금 및 일인이 불법 징수하는 세금을 압수하여 무장을 준비한다.
2.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를 세워 독립전사를 양성한다.
3. 종래의 의병 및 해산 군인과 만주 이주민을 소집하여 훈련한다.
4. 중국·아라사(俄羅斯) 등 여러 나라에 의뢰하여 무기를 구입한다.
5. 본회의 군사행동·집회·왕래 등 모든 연락 기관의 본부를 상덕태상회에 두고, 한만(韓滿) 각 요지와 북경·상해
등에 그 지점 또는 여관·광무소(鑛務所) 등을 두어 연락 기관으로 한다.
6. 일인 고관 및 한인 반역자를 수시(隨時)·수처(隨處)에서 처단하는 행형부(行刑部)를 둔다.
7. 무력이 완비되는 대로 일인 섬멸전을 단행하여 최후 목적의 달성을 기한다.
▲ 대한광복회 부사령 김좌진(1889~1930) 장군
군자금을 마련해 남북 만주에 군관학교 설립해서 독립군 양성, 국내외 요지에 독립운동 거점을 확보해 정보·연락망을 구성한 뒤 무력으로 민족독립 쟁취 등 결의문과 실천강령에서 드러난 것은 대한광복회의 혁명적 성격이었다. 또, 행동강령으로 대한광복회는 비밀·폭동·암살·명령의 4개 항목을 뒀다.
박상진은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에 추대됐고 부사령에는 황해도 평산 의병장 출신 이석대(본명 이진룡, 1962 독립장)가 선임됐다. 부사령은 이석대 순국(1918) 이후에는 김좌진(1889~1930, 1962 대한민국장)이 맡아 만주에 상주하면서 독립군 양성을 담당했다.
1915년 11월 17일 경주 광명리(光明里)에서 일본인이 불법 징수하여 마차로 운송하던 경주·영일·영덕 등 3군의 세금 8,700원을 우재룡과 권영만이 습격하여 탈취하였다. 이른바 ‘경북우편마차암습사건(慶北郵便馬車暗襲事件)’이었다. 이 사건을 배후에서 지휘하였고, 관련 정보는 최준이 입수하였다.
1916년 9월 4일 대구의 최병규(崔丙圭)·최준명(崔俊明)·김진만(金鎭萬)·김진우(金鎭禹) 등에게 명령하여 의연금 모집에 호응하지 않고 있던 서우순(徐佑淳)에게 군자금을 탈취하도록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것이 소위 ‘대구권총사건(大邱拳銃事件)’이다. 이미 1915년 4월경에도 최준명(崔俊明)으로 하여금 서창규(徐昌圭)를 만나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토록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6월에도 최병규(崔丙圭)·정운일·김재열金(在烈)이 권총을 소지하고 서창규를 만나 군자금을 요구하였으나 끝내 거절당한 바 있었다.
1916년 6월 이관구·성락규·조선환 등과 안둥현(安東縣)에서 조선총독 암살을 계획하였다. 이때 이관구에게 제공한 권총 2정을 성락규(成樂奎)와 조선환(曺善煥)이 각기 한 자루씩 가지고 서울로 잠입하였다. 곧이어 이관구도 서울에 왔으나 조선총독 처단은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당시 만주에서 귀국하여 서울에서 체류하고 있었는데, 권성욱(權成旭)을 보내 이 권총을 회수하여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 처단에 사용하고자 하였다. 이 일로 이른바 총포화약령 위반으로 붙잡혔고, 1917년 6월 1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8년 7월 만기 출옥한 후 침체된 국내 조직을 재정비하고, 신흥무관학교와의 관계 복원 등을 통해 강력한 투쟁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경북을 비롯한 전국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하였다. 먼저 경상·충청·강원·전라·황해도 등 각 도 자산가들의 주소와 성명, 재산액 등을 파악하여 명단을 만들었다. 이 명단을 토대로 할당액과 포고문 등을 동봉하여 중국 또는 국내에서 우송하였다.
‘대구권총사건’ 때와 같이 자산가들이 요구에 응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먼저 부호 1명을 암살함으로써 자금 조달을 용이케 하는 한편, 경각심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암살 대상으로 선택된 인물이 경북 칠곡의 장승원(張承遠), 충남 아산의 도고면장 박용하(朴容夏), 전남 보성의 양재학(梁在學), 벌교의 서도현(徐道賢) 등이었다. 광복회는 ‘장승원암살사건(張承遠暗殺事件)’과 ‘도고면장 박용하암살사건(朴容夏暗殺事件)’을 실행하여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장승원 암살은 1916년 권성욱을 시켜 두 차례에 걸쳐 시도했다가 실패한 후, 1917년 11월 10일 풍기 광복단의 채기중·강순필·유창순으로 하여금 단행토록 하였다. 장승원은 한말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하던 중, 당시 평리원장 허위에게 의병 자금으로 20만 원을 헌금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이를 지키지 않았던 인물로 허위의 제자에게 결국 처단된 것이다.
도고면장 박용하 암살은 1918년 1월 24일 김한종(金漢鍾)과 장두환(張斗煥)이 주관하여 결행한 것이다. 박용하는 악질 면장으로 지목되어 있었고, 또 부호로서 군자금 헌금을 배당받은 후 일본 경찰에 신고했던 인물이다. 박용하는 우재룡이 전달한 권총으로 김한종과 장두한의 지휘에 따라 김경태(金敬泰)와 임세규(林世圭, 일명 봉주 鳳柱)가 처단하였다.
1918년 1월 27일 천안군 성환에서 장두환(張斗煥)이 붙잡혔고, 곧이어 예산에서 광복회원 4인이 붙잡히면서 광복회의 전모가 노출되고 말았다. 이어서 경상북도 경무부에서도 엄밀한 수사에 착수하였다. 이때 경북 안동 이동흠(李東欽)의 집에 은신하며 국외 탈출을 계획하던 중, 생모의 생명이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가했다가 같은 해 2월 1일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2월 28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공갈, 살인 등으로 사형을 받고 항소하였다. 9월 22일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가 기각되자 다시 상고하였다. 그런데 1920년 3월 1일 고등법원이 원판결을 파훼(破毁)하고 사건을 대구복심법원으로 보냈다. 같은 해 9월 11일 대구복심법원 형사1부에서 재심을 거쳐 사형을 받았고, 그 해 11월 4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었다. 1921년 8월 11일 오후 1시 대구감옥에서 형이 집행되어 사망하였다. 묘는 경주 내남면(內南面) 노곡리(蘆谷里)의 등운산(藤雲山) 백운대(白雲臺)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