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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 AP 통신, 미국 시각 2012-10-15 아시아 시각 2012-10-16 (번역) 크메르의 세계
[심층] 캄보디아 시아누크 전임 국왕의 사망 : 공과 및 장례일정
Cambodia's former King Norodom Sihanouk dies at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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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AP Photo / Heng Sinith) 노로돔 시하누크 상왕이 서거한 10월15일 아침, 프놈펜 변두리에서 가족들을 태운 오토바이 한대가 시하누크 상왕 및 모니니엇 왕대비의 초상화 앞을 지나고 있다. |
기사작성 : Sopheng Cheang
(프놈펜) --- 그는 캄보디아에 여러 가지 의미를 갖는 사람이었다. 그는 전쟁과 학살로 점철된 반세기 동안의 역사에서 캄보디아가 항로를 찾도록 도왔던 인물이다. 또한 존경받는 독립 영웅이었고, 무자비한 군주이자 총리이기도 했으며, 공산주의자들의 협력자였고, 기묘한 플레이보이이자 열성적인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 1922년 10월 31일생) 전임 국왕은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생애를 통해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방식을 사용하여, 다른 어떤 정체성보다 특히 교활한 정치적 생존자이기도 했다.
바로 그러한 그가 월요일(10.15) 향년 89세로 중국 베이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금년 1월 이래로 베이징에서 자신이 지닌 다양한 질병들을 치료받고 있었다.
시하누크는 1941년 프랑스 식민 당국에 의해 나이 18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그후로 동남아시아 국가인 자신의 조국이 식민지에서 왕국으로 변하는 과정을 경험했고, 미국의 후원을 받는 친미 정권에서 미국의 공습 대상지로 변화는 과정도 지켜보았다. 또한 크메르루즈(Khmer Rouge) 정권이 자행한 킬링필드(killing field)가 오늘날 존재하는 연약한 민주주의의 실험장으로 변하는 모습도 경험했다.
그는 [젊은 날의 재임 시절] 봉건적 스타일의 절대군주로서 국가를 통치했지만,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는 잘 차려진 국빈 만찬에서 사랑의 노래들을 직접 불렀고, 평화 협상을 하는 자리에 자신의 애견인 프랑스 푸들을 데리고 나오기도 했다. 또한 그는 재클린 캐네디(Jacqueline Kennedy) 같은 외국의 유명인사들을 매혹시킬 수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그림도 그렸고, 왕궁 내에서 자신의 축구팀을 운영했고, 음악들을 작곡했는가 하면, 자신의 독자적인 재즈 밴드까지 만들기도 했다. 그의 취미는 자동차 경주, 식도락, 여성 편력에까지 미쳤다. 그는 최소 5번 이상 결혼했고(혹자는 최소 6번 이상이라고 말함), 14명의 자녀들을 둔 아버지였다.
1970년대 중후반 살인적인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잡았을 때, 그는 그들과 협력하여 욕을 먹었다. 그러나 결국 그 스스로도 크메르루주 정권의 죄수(볼모)로 전락했고, 그 정권 하에서 5명의 자식들을 잃었다. 이후 유엔(UN)이 후원한 평화협상을 통해 캄보디아가 오랜 내전을 종식한 1990년대에, 그는 스스로를 평화의 중재자이자 입헌 군주라는 지위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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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노로돔 시하누크(우측) 국왕은 1973년 망명처인 중국에 머물다 노로돔 모니니엇(좌측) 왕비와 함께 일시적으로 캄보디아를 비밀리에 방문한 후, 자신의 동맹세력이었던 크메르루주 공산 반군과 회의를 가졌다. 사진 중앙의 인물은 크메르루주 정권 수립 후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는 이엥 사리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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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사진) 1973년 시하누크 국왕은 캄보디아로 들어가 크메르루즈 지도부와 함께 "캄푸치아민족통일왕국정부"(GRUNK) 제1차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크메르루즈가 장악한 밀림 지역에서 열렸고, 그들의 군대가 호위했다. 사진 우측 끝의 헤드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이 시하누크 공이다. 맨 좌측에 웃음을 보이며 등을 돌려 얼굴을 보이는 사람이 이엥 사리(Ieng Sary)이고 그 옆이 호우 유온(Hou Yuon)이다. 테이블 반대쪽은 좌측부터 폴 포트(Pol Pot), 후 님(Hu Nim), 키우 삼판(Khieu Samphan) 순으로 앉아 있다. |
시하누크는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면서 결장암과 당뇨병, 그리고 고혈압 등으로 고통받았다. 시하누크 상왕의 보좌관이자 조카이기도 한 시소왓 토미쪼(Sisowath Thomico) 왕자는 상왕이 월요일 새벽에 별세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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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죽음은 캄보디아의 지대한 상실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을 민족과 국가 전체, 그리고 국민들을 위해 바쳤다." |
마르틴 네시르키(Martin Nesirky) 유엔 대변인에 따르면, 반기문(Ban Ki-moon) 유엔 사무총장은 시하누크의 죽음에 애도를 표하고, 다음과 같이 그의 공적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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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누크 공은] 자신의 조국을 위해 오랜 기간 헌신했고, 국가 통합의 지도자라는 자신의 유산을 통해 캄보디아인들로부터 추앙받고 있고, 국제사회로부터 존경받고 있다." |
네시르키 대변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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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또한 지속적인 사법개혁을 비롯하여 캄보디아의 국가적 치유과정의 진전에 전임 국왕의 유산이 수용되길 희망하고 있다." |
시하누크는 지난 2004년에 건강상의 이유를 들며 퇴위했다. 그같은 움직임은 자신의 아들인 노로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 국왕에게 왕위를 승계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시하누크 상왕이 사망하자, 시하모니 국왕은 월요일(10.15) 훈센(Hun Sen) 총리와 함께 부왕의 시신 수습을 위해 중국으로 떠났다. '캄보디아 국기'는 조기로 게양됐다. 정부 대변인인 키우 깐하릿(Khieu Kanharith) 공보부 장관은 발표를 통해, 수요일(10.17)에 상왕의 시신이 캄보디아로 귀환하면 일주일 동안의 공식적인 국장 기간이 진행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불교 전통에 따라, 3개월 이내에 다비식(=화장)도 거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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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Reutters) 캄보디아의 훈센(좌측) 총리와 노로돔 시하모니(우측) 국왕이 10월15일 아침 '프놈펜 국제공항'에서 만나 노로돔 시하누크 상왕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이들은 정부와 왕실의 주요 인사들과 더불어 시하누크 공의 유해를 캄보디아로 운구하기 위해, 함께 베이징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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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Xinhua / Ding Lin) 시하모니(중앙 좌측) 국왕이 10월15일 아침, 훈센(좌측 2번째) 총리 및 캄보디아 불교 승단의 제3 부(副)-승왕인 노이 쯔럭(Noy Chreok: 좌측 첫번째) 스님 등과 함께 베이징 국제공항에 도착하자, 양제츠(Yang Jiechi, 杨潔篪: 중앙 우측) 중국 외교부장이 나와 영접을 하고 있다. |
관리들은 시하누크 공의 유해가 귀국하는 날 '프놈펜 국제공항'에서 왕궁에 이르는 연도변에 최대 10만명 가량의 인파가 운집할 것으로 예측했다. 하지만 현재 프놈펜 시내의 즉각적인 분위기는 고요한 편인데, 이는 캄보디아가 현재 프쭘 번(Pchum Ben: 크메르 추석) 명절 연휴기간이라 많은 시민들이 지방으로 내려간 탓도 있다.
기자가 만난 추모 행렬 중에는 욧 섹짠타(Yos Sekchantha, 67세) 씨가 있었다. 그녀는 시하누크 공의 영면을 기원했고, 눈물을 글썽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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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하지만 상왕 전하가 정말 훌륭한 지도자였다는 점과 국가와 백성들을 돌봤다는 점은 알고 있다." |
하지만 캄보디아인들 중 많은 수는 지난 20년간 이 나라의 현존하는 강자 훈센 총리의 그늘에 가려버린 시하누크 공에게 감성적인 유대감을 갖기 어려운 젊은이들이다.
시하누크 상왕은 '지난 1월 공개한 유언장'에서 캄보디아 및 불교 전통에 따라 자신의 시신을 화장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 유언장에서, 가능하면 유골과 재를 황금빛 단지에 담아 왕궁 내에 위치한 탑에 봉안해달라고 말했다.
1922년 10월 31일에 태어난 시하누크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시대에 어린 시절을 보내며 유복하게 자랐다. 프랑스 식민당국은 1941년에 상대적으로 왕위계승권에 더욱 가까왔던 왕실 친인척들을 제쳐두고, 시하누크를 왕위에 등극시켰다. 그 이유는 땅딸막하고 낄낄거리는 이미지의 시하누크가 더욱 통제하기 쉬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시하누크를 과소평가했던 많은 이들 중 가장 첫번째 세력에 속했다. 1953년, 프랑스는 캄보디아에서 떠나야만 했다.
1955년, 시하누크는 [부친에게 양위한 후] 스스로 왕위에서 퇴위했다. 이후 그는 대중 정당인 성꿈 리어스 니욤(Sangkum Reastr Niyum: 대중 사회주의 공동체)를 조직한 후 총선에서 승리하여 총리가 됐다. 이후 그는 국가수반이나 정부수반이란 명칭 등으로 다양한 형태의 지위를 역임했다. 이러한 '그의 통치기'는 냉전시대의 최절정기에서 쉽지 않은 중립성을 유지했고, 그 스스로 비동맹 운동의 창립자 중 한명이 되기도 했다.
1965년,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이 고강도로 변하자, 그는 워싱턴 당국과의 관계를 파기했다. 1965년경에 이르자, 북-베트남 공산군이 캄보디아 영토를 이용하는 빈도가 증가한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이에 따라 시하누크는 중국과 거리를 두면서 미국과 새롭게 관계를 형성했다.
시하누크의 최대 우선순위는 캄보디아를 전쟁의 영향에서 비켜서 있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는 미국 공군이 캄보디아 영토 내의 베트남 공산군 기지들을 폭격하는 일을 묵인했고, 그러한 폭격은 점차로 정례화되어 갔다. 이러한 일은 대중적인 저항을 불러왔다. 미국 관리들은 시하누크가 사적으로 캄보디아 북동부 국경지대의 베트남 공산군 거점들을 미군이 폭격하는 일을 암묵적으로 허가하는 전술을 취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 사이 캄보디아는 국내적으로 원맨쇼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시하누크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가들은 그가 양복을 입은 크메르 제국 통치자의 재림이라면서, 그가 중세국가를 운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언젠가 시하누크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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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하누크다. 그리고 모든 캄보디아인들은 나의 자녀들이다." |
실제로 많은 이들이 시하누크를 거의 신에 가깝게 숭배했다.
1970년, 미국의 후원을 받은 쿠테타가 발생하여 시하누크는 실각했다. 당시 그는 프랑스에 위치한 체중감량 클리닉 등을 비롯한 해외여행에 나섰던 중이었다. 그는 몇년간 쓸쓸하게 보냈지만 중국의 베이징에서 호사스런 망명생활을 했다.
하지만 그는 왕위를 되찾기 위해, 실각 직후부터 크메르루주 공산주의자들이 주력이던 반군세력과 손을 잡았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그가 이끌던 정부는 도시와 시골지역에서 이 반군들을 탄압하고 있었다. 반군들의 수는 쿠테타 무렵까지도 분과 수백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하누크가 그들과 손을 잡자 반군은 이전까지 단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적법성(명분)을 부여받으면서 세력을 확장했다.
이러한 동맹은 시하누크로 하여금 그가 크메르루주 정권의 대학살의 길을 열어준 것이란 비판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그와 공산반군과의 동맹은 항상 긴장감이 도사린 것이었다. 시하누크는 1973년에 가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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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루주는 나를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울라라..... 그것은 내게 명확한 일이다. 만일 더 이상 내가 필요없게 된다면, '체리 씨를 이빨로 물고 찢는 경기'(cherry pit spitting)처럼, 나를 그렇게 찢어버릴 것이다." |
1975년, 크메르루주가 정권을 잡자, 시하누크는 귀국했다. 하지만 그는 연금 상태가 됐고, 크메루주는 그를 처형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국의 저우 언라이(Zhou Enlai, 周恩來) 총리가 개입하여 그의 목숨을 구했다.
크메르주주는 시하누크를 왕궁 내에 가택연금한 상태에서, 1975년 4월부터 1979년 1월까지 초 급진적인 마오주의 정권을 운영했다. 이들은 도시민들을 강제로 소개시켜 방대한 네트워크를 가진 강제노동 수용소들로 보냈다. 크메르루주 통치기간 중, 약 170만명 정도의 캄보디아인들이 처형을 당하거나 질병이나 굶주림으로 사망했다.
1978년 12월, '베트남 군대가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루주 정권을 붕괴(1월)시켰다. 이후 시하누크는 중국의 베이징과 북한에서 다시금 망명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또 다시 베트남 위성정권에 대항하는 반군 게릴라들의 명목적 수반으로 복귀하는 믿기지 않는 동맹을 결성했다. 이 반군들에는 크메르루주 정권의 패잔병들도 포함됐기 때문이다. 이 내전은 10년간 지속됐다.
'유엔이 주도한 과도행정기구'(UNTAC)의 통치기를 거쳐 1993년 최초의 총선이 실시되는 기간에, 시하누크는 국가 통합의 상징적 인물로 남아 있었다. 1993년, 그는 전통적인 크메르식 대관식을 치르면서 국왕에 복귀했다. 그는 왕궁을 복원하고, 북한에서 보내준 경호원들을 대동한 채 농촌지역들도 여행했다. 그는 이제 자신의 위상을 캄보디아의 사랑받는 아버지(국부)로 재정립했다. 심지어 많은 이들이 그를 숭배하기도 했고, 노년층들은 과거에 보았던 그의 직접 통치로 돌아갔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하기도 했다.
하지만 선거에 대한 밝은 약속들은 곧 빛이 바랬다. 최초의 총선이 있은지 4년 후, 훈센 제2총리가 '1997년의 폭력적인 유혈 쿠테타'를 일으켰고, 이후 훈센은 오늘날까지 총리로 재임 중이다.
자신의 인생 마지막 수년 동안, 시하누크의 인지도와 영향력은 감소했다. 농촌 지역의 노년층들은 여전히 그를 흠모하고 있지만, 젊은 세대들은 그를 과거의 인물로 여기면서, 부분적으로는 캄보디아 현대사의 비극에 책임을 지닌 인물로 보고 있다.
간혹 흥분된 어법을 구사하긴 했지만, 그는 글을 많이 올리는 온라인 블로거이기도 했다. 시하누크는 자신의 블로그에 현재의 시사성 있는 내용이나 과거에 관한 논란들에 관한 풍자적 게시물을 올리곤 했다. 그 대부분은 시하누크 자신의 손을 직접 거친 것이었다. 여기에는 편지 원문을 찍은 사진들도 있는데, 언제나 현란한 필기체의 프랑스어가 사용됐고, 자신의 관심을 끄는 신문 보도문 여백에 메모를 한 사진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베이징에서 의사들의 치료를 받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면서, 그가 올리는 게시물들은 점차로 줄어들었다.
시하누크는 고생을 한 탓에 1990년대부터 건강이 악화됐다. 그는 암과 투병했고, 뇌 손상과 동맥경화, 심장병, 간과 폐 질환, 안질 등에 시달렸다. 한동안 중국에 머물던 그는 '2011년 하반기에 귀국'하여, 자신은 두번 다시 조국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극적인 선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에 붙여진 변덕스럽다는 명성에 걸맞게, 몇달이 지나자 그는 다시금 베이징으로 치료를 받으러 떠났다.
* 이 기사의 작성에는 태국 방콕에 주재하는 본지 기고자들인 Kay Johnson, Grant Peck, Denis Gray, Todd Pitman이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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