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가해 연중 25주간 월요일
숨겨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
-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제가 처음 논산 훈련소에 들어갔을 때 느낀 것은 훈련병 모두가 밖에서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와 같이 그냥 대학 다니다가 온 사람들은 별 자랑거리가 없었지만, 부모님이 매우 부자여서 외제차를 타던 아이들과, 잘나가던 요리사, 미용사도 있었고, 은행이나 직장에 다니던 나이 많은 형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이 밖에서 얼마나 대단하게 살았는지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옷을 입혀놓고 같이 고생을 하다 보니 얼마 안 가서 누가 밖에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는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훈련하다 모두 함께 ‘어머니의 은혜’를 부르며 똑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소포로 온 초코파이를 서로 먹으려다 다 터지고 부스러져 아무도 그것을 먹지 못하게 된 일도 생겼습니다. 성당에서 주는 초코파이 대신 개신교에서 주는 떡이나 통닭을 먹으러 그 쪽 종교행사를 가는 친구들도 몇 있었습니다.
밖에서는 각자 멋진 옷을 입고 멋진 차를 타며 자신을 과시하고 다녔지만 같은 옷을 입혀놓고 같은 고생을 하다 보니 각자의 본성들이 다 드러났던 것입니다. 육체는 사람의 영혼을 가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가 영혼의 상태를 가리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영혼은 등불입니다. 그 등불은 육체가 아무리 가리려 해도 그 육체를 통해서 조금씩 새어나오게 됩니다.
물론 남을 속이기를 아주 잘하는 사람은 대부분의 사람을 속여 넘길 수 있습니다. 유다가 그렇게 나머지 열한 사도를 속이고 그리스도를 팔아넘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결코 속일 수는 없습니다.
옛날 어느 수도원에 훌륭한 원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제자들 중에 특히 한 아이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볼품없고, 지능이 뛰어나지도 않은 아이였습니다. 그러니 다른 제자들의 불만은 대단했습니다. 이에 수도원장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면 그 아이를 사랑하는 이유를 말해주겠다고 했습니다. 원장은 제자들에게 작은 새 한 마리씩을 주고는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해질 때까지 그 새를 죽여 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해질 녘이 되자 제자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하여 수도원 마당에는 죽은 새의 시체가 쌓였습니다. 그런데 원장이 특별히 사랑하는 아이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한참 뒤 돌아온 아이의 손에는 작은 새가 산 채로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새를 죽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아무리 조용하고 으슥한 곳을 찾아보아도 하느님은 보고 계셨어요. 그래서 새를 죽일 수 없었어요.”
물론 하느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도 믿지 않고, 남들을 아무리 잘 속여도 속일 수 없는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피타고라스의 제자 한 사람이 어느 날 가게에서 신발을 한 켤레 사고 난 후 주인에게 “돈은 내일 주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이 제자가 돈을 들고 찾아가니 주인이 죽어 있었습니다. 그는 신발을 공짜로 갖게 되었다고 속으로 좋아 했습니다. 그러나 기쁨은 잠깐, 양심에 걸려 매일 고통 속에 보내야 했습니다. 그렇게 좋아보이던 신발이 “흉측한 가시” 같았습니다. 결국 그는 돈을 들고 다른 사람이 주인이 된 그 가게를 찾아가 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그가 죽었지만 제게는 살아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도 ‘양심’이 있습니다. 자신이 자신을 속일 수는 없는 이유는 그 양심이 항상 자신을 지켜보기 때문입니다. 이 양심이란 것은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꼭 갚아줍니다.
사람은 누가 자신의 행동을 안 보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쁜 일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차피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모든 것에 있어서 진실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은 진실해야 하기에 자신의 잘못을 고쳐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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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5주간 월요일
우리는 드러나 보이는 외견에 관심을 가진다
- 오 요안 신부
내가 속한 개신교에서 회자되고 있고, 정설처럼 굳어지다시피 한 말 가운데 ‘서구 교회는 거의 죽었다’라는 말이 있다. 교회는 텅텅 비어 있고, 백발의 노인 몇몇이 커다란 예배당을 지키며, 관광객들에게 입장료나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신자가 넘쳐나는 한국 개신교회와 대비한다. 외견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런데 때로 교회의 사망선언이 하느님의 사망선언처럼 사람들에게 들리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겉모습으로 내면까지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겉이 화려한만큼 과연 내적 실속을 갖추고 있는지 묻고 싶다.
프랑스에 있는 떼제 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그곳을 찾은 방문객은 대략 5천 명이 넘었다. 저녁 미사 마치자 그때부터 새벽까지 무릎틀에 꿇어 앉아 기도하는 젊은이들을 볼 수 있었다. 한순간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섣부른 서구 교회에 대한 막연한 선입관이 어느 정도 무너지게 되고, 그곳 수사님들을 보면서 수도적 공동체 삶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드러나 보이는 외견에 관심을 가진다. 그래서 내면 문제를 외면할 때가 많다. 대부분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에 포만감을 가지고 스스로를 부유한 자로 생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숨겨진 우리의 내적 문제는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도 세상에 드러나게 마련이다. 우리가 가졌다고 자신하던 것은 어느 순간에 잃고 만다. 이것이 오늘 복음 말씀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내적 풍요로움을 제공해 준다. 이 은총의 빛나는 등불을 오늘 우리 삶의 등경 위에 올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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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5주간 월요일
김인한 신부님
제가 좋아하는 우리말 중에 ‘살림’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살림이라는 말은 단순한 집안일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본질적인 삶의 태도를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살림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에게 파급되는 행위로 다른 존재를 살린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삶의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결국 우리는 살림꾼이 되어야 함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철저한 살림꾼이셨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앓는 이에게는 기쁨을 전하고 악령으로 묶여 있는 이들을 해방시키신 철저한 살림꾼이셨습니다. 살림하는 분들이 그렇듯이 세세히 바라보고 다가가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사명은 바로 이 살림꾼의 사명이셨습니다.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살리기 위한, 죄악으로 죽어가는 우리들을 구원으로 살리기 위한 삶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바라는 등불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는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고 자신을 세우는 죽음의 문화가 판을 치지만,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세상과 우주 만물, 그리고 죽어가는 모든 것들을 내 작은 손길로 살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또 다른 그리스도, 또 다른 살림꾼 예수로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 부산교구 김인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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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불이 되어
- 윤경철 신부님
오늘의 복음인 ‘등불의 비유’ 에서 제기되는 문제는 ‘왜 등불을 가져오는가’ 입니다. 등불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으려고 가져왔겠습니까? 이 물음의 답은 물론 ‘아니다’입니다. 등불을 켜 등경 위에 두는 이유는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팔레스티나의 일반 가정집에서는 토기 등잔에 올리브 기름을 담아 불을 밝혔습니다. 등잔은 대개 다리가 긴 쇠등잔대에 놓았고 등불을 끌 때에는 흔히 됫박으로 덮었습니다. 곡물의 십일조를 재기 위해 어느 집이나 반드시 됫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등불을 됫박아래 두는 것은 불을 밝히기 위함이 아니라 끄기 위해서입니다.(예수를 따라 pp 139-140 참조. 성서와 함께) 이제 우리들의 존재의미는 어두운 세상을 밝게 비추는 등불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등불이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등불은 ‘오신 예수님, 오고 있는 하느님의 나라’ 를 말하고 있습니다. 해가 만물을 비추듯이 세상을 비춰주고 계시는 예수님의 존재를 널리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게 마련’이라는 약속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 다시 언급한 것입니다. 그 신비는 어떤 비밀스러운 지식을 가리키지 않고 등불처럼 드러나야 할 그 무엇입니다. 신앙인에게 그 신비는 참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유의 말씀을 누구나가 다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들을 귀가 필요합니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들으라는 말씀은 우리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에는 두 개의 귀가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바로 말씀을 듣는 귀와 듣지 못하는 귀입니다. 귀가 있다고 다 말씀이 들리는 것은 아닙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너희는 세상의 등불’이라고 단언하십니다. ‘세상의 등불이 되시오’ 라는 명령도 아니고 ‘세상의 등불이라면’ 이란 가정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든 사람을 세상의 등불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너희는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라고 말씀하시더라도 우리 자신이 불빛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신 자신이 불빛의 원천이며 불빛 그 자체이시고 예수님으로부터 나오는 빛을 받을 때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달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것은 해의 빛을 받음으로 이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등불을 켠 사람은 그 빛을 가리지 않습니다. 등경 위에 놓아 집안 곳곳이 비치도록 합니다. 그래서 등불을 됫박으로 덮어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모여든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받아들였겠습니까? 점점 더 사명감에 불타올랐는지, 아니면 나는 도저히 그러한 것이 될 수 없다고 꽁무니를 뺏는지도 모릅니다. 만일, 이 말씀을 지금의 우리들에게 직접적으로 하신다면 아마도 당황해 할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등불을 밝히고 싶지만, 자기 속 깊은 곳에 어두움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실재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키고 싶지만, 그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 마음의 빛과 밝음을 빼앗아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정직하게 그리고 겸허하게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의 등불이 되지 못하는 현실이 자기 자신 속에 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타락한 땅, 빛을 필요로 하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세상의 죄” 속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깨끗함과 빛을 잃어버린 세상. 그것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이후의 세상의 모습이라 말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이 깨끗함을 잃어버리고, 어두움이 퍼져있다고 하는 사실을 구약성경에서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네 아우의 피가 땅바닥에서 나에게 울부짖고 있다”(창세 4,10).
이는 카인이 질투 때문에 동생 아벨을 살해한 직후의 말씀입니다.
“세상은 타락해 있고 폭력으로 가득 차 있다”(창세 6,12).
이는 노아 홍수에 관한 이야기 속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더러워지고, 어두움이 되는 원인은 바로 인간의 이기주의와 욕망이라는 것이 분명해 집니다. 인간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이기주의와 욕망이 있는 한, 세상은 계속해서 더러워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의 타락한 정도와 어두움의 깊이는 우리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이기주의의 깊이와 욕망의 정도에 비례합니다.
우리들이 자신의 마음을 바꿀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한 것이며, 하느님의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활동입니다. 성령의 힘이 우리들의 마음에 사랑과 숨결을 불어넣어 줄 때, 비로소 우리들의 마음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 때 마음에 있는 욕망이 깨끗해지고 세상을 향한 등불이 될 수 있습니다. 등경 위에 놓인 등불이 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먼저 겸허하게 성령의 숨결이 들어오도록 마음의 문을 열어, 성령이 우리들의 어두움을 비추시어 사랑의 힘을 넣어주시도록 끊임없이 기도해야만 할 것입니다.
- 부산교구 윤경철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