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대한민국 박사모 (박사모) 원문보기 글쓴이: 오두
- 오두 칼럼 -
국가기념일 된 '새마을운동의 날 - 4월 22일'의 역사적 의미
- '내 마을' 운동은 공산주의를 이기고 세계 73개국 이상으로 번져가고 있다 -
다가오는 4월 22일은 새마을 운동 기념일이다. 새마을 운동이 금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제정된 그 첫해이다.
내가 어렸을 때 마을의 4H 운동을 구경만 하시던 아버지는 새마을 운동에 적극 가담하셨다. 아침이 밝아오면 동장님이 새마을 노래를 틀어주면 콧노래로 따라 부르면서 늦잠자던 우리들을 깨우기도 하셨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
살기좋은 내 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
"면에서 시멘트 한 포씩 나눠준대"
아버지는 흙과 돌 몇개로 이어져 있던 뜨락 봉당을 시멘트로 바르셨다.
"면에서 시멘트 네 포대씩 나눠준대"
아버지는 돼지우리에 돼지 죽 주는 장치를 시멘트로 만드셨다.
죽주는 구멍으로 죽을 주니 죽줄 때마다 달려들던 돼지는 더 이상 달려들지 않고 죽 구멍으로 내려오는 죽이 죽통에 떨어져서 쉽게 죽을 먹게 되었다. 그 장치를 건너마을 아줌마들도 볼거리라고 구경들을 오곤 했다.
"면에서 시멘트가 또 나왔대"
아버지는 언덕 아래 화장실을 만들고 그 지붕 위에 소변기를 만들어 파이프를 통하여
소변이 화장실 바닥으로 이어내리는 새로운 시설을 만들었다.
"면에서 시멘트가 마을 단위로 나왔대"
마을에서 건너마을과 연결하는 시멘트 다리 만들었다.
그리하여 온동네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동네 이곳 저곳을 시멘트로 콘크리트로 다리도
만들고 집도 새로 짓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그때부터 면에서 뭐 해야 한다고 하면 마을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새마을 운동은 '면사무소 운동'이 아니었고 '내마을 운동'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국가지도자의 리더쉽에서 마을 사람들 멤버쉽 완성의 의미를 지닌 역사적 대 변혁이었다.
60년대 미국식 4H 운동은 젊은이 운동에 그쳤다. 그러나 새마을 운동은 남녀노소 온 마을 사람들의 '내 마을 운동'이 되었고 이웃마을과 연합으로 신작로를 새로 내고 도시와 공장에까지 확대되어 갔다.
1976년 이전까지 북한경제가 남한경제보다 앞서 있었던 것을 박정희 대통령이 결정적으로 추월하여 오늘에 이르게 한 바탕이 되게 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새마을 운동으로 '내마을' 의식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국민의식이 강화된 결과이다.
봉당 시멘트 바르기에서 경부고속도로와 '새마을호 열차'에 이르기까지 확대되어 간 국가발전의 기본정신이 된 운동이 새마을 운동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경제는 그 숫자의 의미가 아니라 그 정신적 기틀이 국민적인 참여의 바탕에 서 있는 새마을 운동을 기반하고 있다는데서 다른 나라들과 다른 경제발전의 패러다임을 가진다.
남한에 추월당한 북한에서는 새마을 운동의 '내마을'을 흉내내어 '내 나라'라는 말을 자주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 마을'의 의미가 아닌 '내 나라'라는 말은 뭔가 잘못된 전체주의 용어가 되고 말았다. '내 나라'는 오히려 자치의미의 한계가 지나치게 초월되었기 때문에 관제운동이 되기 때문이다. 북한의 '내 나라' 개념은 더 이상 남한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사회주의 경제의 실패로 북한은 경제 발전의 계기를 상실하고 말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은 대한민국을 넘어 공산주의보다 더 세계적으로 확되되어 갔다. 현재 103개국 사람들이 새마을 연수에 참가했고 74개국이 새마을 운동을 수입해 갔다.
금년 4월 22일은 처음으로 새마을운동 국가기념일로 지내게 된 것은, 지난 2월에 국회에서 발의하여 3월 8일 국회의결로 새마을 운동이 국가적 의미로 기념해야 한다는 사실을 공감하여 통과되었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 새마을운동이 계속 관심을 받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을'은 순 우리말이다. 경상도 사투리에서 마을을 '마실'이라고 하는데 '마실간다'는 말은 마을 사랑방의 커뮤니티에 간다는 의미도 되고 마을 골목에 나선다는 환경적 의미도 포함된다. 인간관계만을 의미하는 커뮤니티(community)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운동을 기본으로 시작하여 마을 공동체의 외연을 넓히는 운동이다.
영문 위키피디아에 새마을 운동을 'New Community Movement'라고 한 것은 그냥 'Saemaul Movement'로 바꾸어야 한다. 새마을이 가지는 그 개념은 대한민국의 새마을 운동만이 가지는 유니크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뉴질랜드 마오리족은 '마을'과 유사한 '마오리(Maori)'라는 것과 그들이 모이는 곳을 '마래(Marae)'라고 한다. 전통적으로 고래잡이 민족이 마오리족이다.
새마을 운동의 로고 마크를 보면 초록색 새 싹이 노란 태양 안에 새겨져 있다. 초록색 뿐 아니라 노란색은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에서 시작된 것이다. 그 초록색과 노란색의 새마을 운동 깃발은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대륙에서도 지금 펄럭이고 있다.
*아프리카의 새마을 운동 가운데 탄자니아 새마을운동
Saemaul Movement members hold a briefing session with locals in Tanzania, to explain the concept and meaning of the Saemaul Undong
*우간다 새마을운동.
Ugandan fishers look on at a fish farm that is participating in a Saemaul-related project
*콩고의 새마을운동
<새마을 노래>는 애국가 다음으로 많이 불려진 노래다. <새마을 노래>를 보면 종은 새벽종, 마을은 새마을, 아침은 새아침, 거기에 살기좋은 내마을을 위하여 우리힘을 모은다는 발상 간단하지만 대단한 철학적 구도를 가지고 있다.
*박정희 작사작곡 <새마을 노래>
*새마을 운동을 시찰하고 있는 박정희 대통령
봉건사회에서 중앙권력은 지방
호족들을 누르기 위하여 중앙관리를 파견하여 지방관아를 장악하는데만 주력했다. 마을 주민 중심체제는 새마을이 처음이었다. 새마을 운동은 마을 주민 중심의 '내 마을 운동'이었다는 것에서 역사적으로 새로운 자주적인 운동이 되었다.
새마을 운동은 박정희 대통령이 전통적인 마을 문화였던 향약, 계, 품앗이의 전통 정신을 발전적으로 살린 것으로 시작했다.
전통 사상으로 보자면 새마을 운동은 시멘트 운동이라는 새로운 개념변화를 가져왔다. 흙담 흙 뜨락에서 시멘트로의 변화는 흙에서 돌 즉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오행의 土에서 金과 水에로의 전진이었다.
새마을의 '새'는 동쪽이면서 쇠를 말한다. 새로운 날을 의미하면서 튼튼하고 확실한 콘크리타이제이션, 즉 느슨한 감상주의가 아니라 강력한 메탈릭 '락뮤직'의 상징성이 <새마을 노래>라 할 수 있다.
시멘트와 모래에 물을 붓고 삽으로 비벼서 돌과도 합쳐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마을사람들이 서로 합쳐지는 모습을 보는 것을 의미했다.
각각 다른 시멘트와 모래 물과 돌이 함께 힘을 가지고 바위처럼 버티는 것을 '내 힘으로' 만들어내는 일은
새로운 '마을 알캐미즘 운동'으로 번져갔다.
작은 장독대 하나도 튼튼하게 만드는 일에서 돌다리도 '서로 힘을 합쳐서' 마을 사람들의 정신력으로 만들어내게 했다.
집안과 시골 마을의 시멘트공사는 물렁하고 가변적인 마을사람들의 전통적인 느슨한 의식을 강한 시멘트처럼 결정력을 강화시켰다. 마을 자체에 대하여 튼튼한 콘크리트 심리의식으로 새로 개조하는 자신감을 부여시켰다.
시멘트 일은 계획을 해야 하고 마를 때까지 며칠을 기다리는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부셔지는 허망감을 돌처럼 강하게 해주었다. 흙으로 버티전 돌과 돌은 더 이상 흐터지지 않았다.
이 운동은 도시와 공장에까지 확대되어 가면서 국민들로 하여금 '하면 된다'는 산업화의 정신력을 키워주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작사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새마을 노래는 그 노래가 경쾌하고 가사가 참으로 쉽기도 하게 한글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70년대초에 이와같은 한글말 노래를 만든다는 것은 놀라운 발상이다. 1968년 '광화문' 현판을 한글현판으로 새긴 것은 새마을 노래의 배경이었던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새마을 노래의 '새아침이 밝았네'는 그야말로 '광화문'의 '광화'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새마을 운동 노래가 들리는 아침과 저녁 마을 사람들은 아침마다 새로운 마을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1970년도에 발의된 새마을 운동은 국가에서 지원하되 마을 사람들이 집행하게 하는 마을 운동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새마을 운동을 '너도 나도 일어나' 마을마다 성공적으로 진행되기 시작하면서 국가 예산은 점차 더 확대 지원해주기 시작했다.
1972년 33억원에서 격증하여 1973년 215억, 1974년 308억원, 1979년에는 4252억원까지 정부 예산 지원이 확대된 것은 초기부터 대환영을 받은 새마을 운동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국가지원만이 아니라 일이 잘되니까 주인이 많아짐녀서 민간단체의 지원과 성금도 꾸준히 들어와 1972년 17억원이던 것이 1979년 2032억원의 지원금이 모여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나선 운동에 국가는 후원자 위치에 서 있었다. 전혀 관제운동이 아닌 마을 동장이 지도자였고 나중에 동네에서 따로 새마을 지도자가 선정되기도 했던 마을 자치제였다. 한국의 지방자치제의 원천은 새마을 지도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새마을 운동은 북한경제를 따라잡고도 한국의 경제부흥의 모든 기초를 확립한 정신력의 원천이 되었다.
그러나 박대통령 서거 이후 한 때 주춤했던 새마을 운동은 1998년 김대중정부에서 '새마을운동 조직 육성법'이 다시 만들어졌다. 새마을운동중앙회를 중심으로 제2새마을운동을 벌이게 된 것은 그 역사적 가치가 국제적으로 계속 관심을 받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2새마을운동은 문화·시민의식의 선진화, 서로 돕는 복지공동체 만들기, 지역 활력 찾기, 친환경 조성, 국제·통일 협력사업 등으로 확대되어 갔다.
전 세계로 새마을 운동은 확대되어 가 개발도상국가들의 모델운동이 되어 있는 새마을 운동은 미국에서도 Village Movement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다.
2001년부터 보스턴의 Bacon Hill Village에서 시작된 빌리지 무브먼트(마을운동)은 코리아의 새마을 운동과 같은 마을 공동체의 운동이다. 이제 미국의 빌리지 무브먼트는 이웃마을과의 연대를 통하여 전국대회까지 하고 있다. 40년 전 한국의 새마을 운동을 배우는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녹색운동은 사실상 한국에서 70년대에 일어난 운동이었으며 주민자체의 '내 마을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 배경에서 환경운동 개념과 커뮤니티 운동을 겸하여 지금까지 마을과 대한민국을 넘어 전세계의 국가운동으로 파급되어 간 것이다.
*가봉, 세네갈, 코트디브아르, 가나, 튀니지 등 11개국 주한 아프리카 대사와 부인 20명 초청, 경북 구미에서 10일부터 11일까지 “아프리카 새마을운동 세계화” 관련 연수
*캄보디아 새마을운동 '마을 길 넓히기'
*네팔 새마을 운동
*중량천 쓰레기 수거 새마을 운동 현장
2011년 3월 11일 경제신문 파이낸셜뉴스
사실상 모텍동의 사상운동으로 부추겨진 농촌 혁명운동이나 스탈린의 도시 노동자 운동은 변증법적 정반합의 분열 대결을 조장한 운동이었다. 70년대를 전후하여 중국은 모텍동의 문화혁명으로 제자가 선생을 고발하고 자녀가 부모를 고발하던 때였다.
그러나 그시기 한국은 온동네가 뭉쳐서 '잘 살아보세'의 새마을 운동을 펼친 것은 중국과 북한을 이길 수 있는 국민적 단합의 힘을 일으키고 있었다.
등소평이 "박정희 경제개발 그대로 모방"하여 중국의 개혁에 불을 붙인 것은 모택동 사후에서야 가능했다. 등소평은 박대통령의 새마을 운동을 높이 평가하여 배우고자 했던 것은 그들의 70년대의 대반성을 의미하고 있었다.
미(美) RAND 연구소의 윌리엄 오버홀트(William H. Overholt)박사는 1989년 출판한 ‘Rise of China(中國의 浮上)'에서 “등소평은 한국의 박정희 모델을 그대로 모방하고 있다”고 썼다. 등소평이 1992년 2월 이른바 ‘남방순행강화(南方巡行講話)’로 알려진 중국 남부지방 시찰 길에 올라, 상해(上海), 주강(珠江), 광동(廣東)들을 돌아보고 홍콩(香港)에 인접한 신흥공업지구인 심천경제특구에 들렀을 때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광동성은 20년 안에 아시아의 네 마리 용(四龍) 즉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에 경제면 뿐 아니라 사회질서와 사회 정세면 에서도 따라 붙어야 한다”
이 말은 중국이 한국을 경제모델로 '따라 붙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으로 오늘날 중국인들이 아직도 메이드 인 코리아가 '명품'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때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모텍동과 김일성이 계급투쟁의 이름으로 가족과 마을을 양분하고 있었을 때 대한민국의 새마을 운동은 '내 마을' '우리마을' 운동으로서 '너와 나가 우리의 힘'을 만드는 운동을 전개하면서 전국민적 산업혁명을 성공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농촌과 도시 모두를 하나의 마을 개념으로 "너도 나도 일어나.. 우리힘으로 만드세"라는 구호는 변증법의 인위적인 힘보다 더 강한 자연과의 단합을 이끌어내게 했다.
새마을 운동이 성공하면서도 부작용이 없었던 것은 이러한 "너도 나도 일어나 새 마을을 만드세 / 살기좋은 내마을 우리 힘으로 만드세"라는 마을 화합 국민화합을 노래한 진정한 단합정신을 마을정신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엔 산하 아프리카 기구를 통하여 아프리카 각국으로 하여금 새마을 운동을 배우도록 유엔차원에서 권장되고 있다.
금년 4월 22일은 최초의 국가기념일로 새마을 운동의 날을 맞이한 것은 의미깊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1998년 달성에서 보궐선거로 국회의원에 처음 등장한 날은 4월 2일이었다. 4월 22일은 박정희 대통령이 제창한 새마을 운동 국가 기념일이 되었으니 4월은 '박사월'이 되었다.
새마을 운동이 국가기념일이 된 것은 세계 앞에 대한민국의 정신사상의 제1호의 확산을 의미한다. Made In Korea 는 상품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력도 수출하고 있는 것을 금년 2011년 4월 22일부터 국가적으로 기념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기념은 북한경제를 이기고 공산주의 경제를 이기고 중국이 한국을 따라하게 한 것을 기념하는 일이며, 세계 70여국가들이 한국을 따라 새마을 운동을 전개학 된 세계로 수출한 박정희 정신을 기리는 국가적인 기념이었다. 그리하여 전세계가 한 마을이라는 개념이 한국에서 시작하고 있는 그 자랑스러운 국가적 기념 말이다.
2011년 4월 16일
시카고 박사모
시카고 박정희기념사업회
오두 김성규 odunamsan@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