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락 > 임권택 소리를 보다
2012년 4월 4일 저녁 8시 한국문화의집(KOUS) 극장의 영화와 함께 감독과 즐기기 ‘ 영락(映樂), 임권택 소리를 보다 ’ 이글은 한편의 감상문이 아니다. 이 땅 영화사에 남을 한 위대한 인물이 들려준 이야기를 그냥 담고 있기에는 아쉬움이 남아 글로 정리 하였다. 임권택 영화감독은 우리 것 우리 소리를 통하여 우리문화를 남길 수 있었으며 오늘날 자신을 만들어 준 배경이 되었다 한다.
이날의 긴 이야기는 경서도 소리 무형문화재 보유자 이춘희 명창의 ‘ 이별가 ’로 시작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1998년 취임) 평양을 방문하여 대동 강변을 거닐다, 경서도 소리가 북한 사회의 정치이념과 맞지 않아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경서도 소리로 영화를 만들자 마음먹었다. < 이별이야 ~ 이별이야 ~ 님과 날과 이별이야 > 어느 날 출근길 라디오에서 이춘희 명창의 ‘ 이별가 ’를 방송으로 처음 듣고 가슴에 와 닿아 연출부 식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영상과 소리를 접목 시켜 서도소리로 취화선(2002년)영화를 만들었다.
판소리도 아닌 경서도 소리 ‘ 이별가 ’를 약 250석(보조석포함) 극장에서 영상이 없이 듣자 그저 그렇게 밋밋했다. 똑 같은 소리가 소리 내용 따라 펼쳐지는 영상 속 ‘ 이별가 ’의 감흥은 대단 했다. 영화 연출부가 왜? 반대 했으며 임권택 감독은 왜? ‘취화선’을 만들었는지 알 수 있었다. 우리 것 우리 소리의 멋과 아름다움이 저절로 감탄사를 만들었고 가슴을 가득 채우는 감동 이었다.
집안이 좌우 이념 대립시대에 좌익 쪽이어서 삶이 고생길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6.25 전쟁 이후 부산으로 가출하였고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구두를 수선하여 판매하는 사업자들과 어울렸다, 이들이 서울로 상경하며 구두사업을 넘겨주었으나 곧 망하고 방황하다. 상경한 이들이 영화 사업을 한다하여 찾아가 함께 한 것이 영화감독으로 첫 발이었다.(20살)
1962년(26살) 영화감독 데뷔 작, 독립군을 빙자한 액션물 <두만강아 잘있거라 >가 흥행에 성공 하였다. 이때 광주에서 먼 친척 되는 45살 영화 배급업자와 대낮에 기생집 술판에서 생애 처음 판소리를 접했다.
어릴 적 전남 장성 고향에서 농사철 들판 노동요와 나무지게 두들기던 민요 정도는 들어 보았지만 판소리는 몰랐었다. 이날 판소리에 취해 얼이 나갔었다. 이것이 가슴에 남아 영화인생의 뿌리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판소리는 잊혔고 1962년 ~ 1972년 사이 약 10년간 미국영화 허리우드 아류 50편의 저급 영화를 만들었다. 참 부끄러운 과거이며 지워버리고 싶은 시간이었다. 최근에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 옛날 액션 영화가 방영되기에 그냥 보면서 참 한심하다 했는데 감독이 ‘ 임권택’ 이었다,
1970년 초반을 지나며 미국영화의 수준이 높아 우리 영화 환경이나 본인의 능력으로는 미국식 영화를 따라 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영화감독으로 지나온 시간이 어리석었고 부끄러웠다. 영화감독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조금 미흡 하더라도 우리 것을 찍자, 우리문화, 우리 삶을 찍으면 세계영화 속에서 개성만은 우리 것이 돋보일 것이다, 하고 영화 방향을 바꾸기로 했다. 하지만 실천으로 바꾸기는 힘들었다. 영화의 속도감과 감정 표현이 달라, 미국영화 허리우드 아류의 저급한 때를 벗겨내는데 10년 세월이 걸렸다.
이런 갈등 속에서 1978년 이청준 작가 단편 소설 ‘ 서편제 ’를 처음 읽었다. 이시기에는 TV에서도 판소리는 사라지고 없었고 또한 판소리 연기자도, 흥행사도, 자본도, 없어 판소리 영화는 만들 수 없었다.
1980년을 시작 하면서 인본주의 영화를 찍기 시작 했다. 만다라(1981년), 길소뜸(1986년), 씨받이(1987년), 아제아제바라아제(1989년)로 세계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했다, 이들 영화 속에서도 판소리는 김소희님 판소리를 영화 2 ~3편 대목, 대목에 잠간씩 이용했고 ‘씨받이’에서 안숙선님 구음을 베낀 것이 전부였다.
1980년 후반 태흥 영화사에서 ‘ 장군의 아들(1990년) ’ 촬영 제의가 계속적으로 들어왔다. 이 무렵 이미 세계적으로 영화감독 ‘ 임권택 ’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이런 관계로 영화제 품위를 위하여 깐느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부터 한국 색깔 영화 출품 로비를 받았다. 하지만 영화제와는 거리가 먼 단순한 액션 영화 ‘ 장군의 아들 ’ 때문에 부끄러워 답을 주지 못했다.
일중독에 빠져 오래 전부터 ‘ 태백산맥(1994년) ’을 준비 하고 있었는데 “ 이념문제는 객관적으로 시기가 아니다. ” 문화공보부에서 직원을 보내 반대 했다. 1990년 초 민주화 바람이 불고 있을 때라 1년 정도 지나면 정권이(1993년 김영삼 대통령 취임) 바뀔 것 같아 휴식에 들어갔다.
어느 날 TV에 ‘ 오정해 ’가 보였다. 1992년 남원 춘향 선발대회 결선 모습이었다. 그동안 세계 영화제에서 동양미를 갖춘 한국적 배우가 없다는 질책을 받아 오던 터라, 동양미의 감동이 왔다, 충격이었다.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 태백산맥 ’에서 무당 딸 송화로 발탁하기로 마음 먹었다.
귀신 씌운 것 같았다. 쉬면서 우연히 이청준 작가 단편 소설 ‘ 서편제 ’를 다시 읽게 되었고 쉬는 동안에 영화로 만들자,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판소리를 외국에 알리자. 이 때 까지도 판소리 완판을 들은 적이 없었고 깊은 이해, 감동도 없었다. 촬영장소 물색에 들어갔다. 처음으로 조상현 명창 37살 때 녹음한 ‘춘향전’ 완판을 듣고 판소리를 영화로 찍는다는 것이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운지를 알았다, 그만 두고 싶었었다. 김명곤이 박초희 명창에게 오정해가 김소희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운 소리꾼이어서 도움이 되었다.
서편제(1993년) 청산도 보리 고갯길 진도 아리랑 장면에서 회오리바람이 불어 영화 장면을 훨씬 돋보이게 한다. 평소에는 보기도 힘든 회오리바람이 이 장면 2번 촬영에 2번 다 회오리바람이 일어났다. ‘ 서편제 ’ 촬영 내내 알 수 없는 이런 현상이 자주 일어났다. 본인도 ‘ 서편제 ’를 만들게 될지 몰랐다. ‘ 서편제 ’가 대 흥행에 성공 하자, 김소희 명창은 돌아가신 명창들이 힘이 되어주셨다, 하셨고 시간이 지날수록 정말 ‘ 서편제 ’를 귀신이 도왔고 생각 했다.
‘ 서편제 ’로 잊혀져가던 판소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성과를 가져왔고 우리 것에 대하여 돌아보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본인도 관심을 같게 되었다. 소리를 삭혀내고 소리의 깊이에 몰입 이런 바탕에서 판소리 ‘ 춘향전 영화 ’를 10년 후 아니면 못 하지 않을까? 생각 했다. 1993년 서편제 개봉 이후 7년 동안 14편을 열심히 촬영 했지만 겉멋을 찍었다.
1999년 판소리 감흥을 확 잡아 춘향전 소리 내용에 맞추어 영상을 표현하는 ‘ 춘향뎐 ’을 만들었지만 국내 흥행에 실패 했다. 하지만 깐느 영화제 본선에 올라 전 세계로 배급 했고 예술영화로 틈새시장과 미국에서 돈을 벌었다. ‘춘향뎐’은 찬사를 들었고 판소리는 좋은 음악으로 세계적으로 공유하게 되었다.
그냥 귀신에 씌워 판소리 영화를 찍게 되었고 어찌하다 우리문화 판소리 감독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기에 영화감독 생활을 오랫동안 할 수 있었다는 대한민국 최고의 영화감독 임권택은 호적나이 77살, 실 나이 79살 이다. 어눌한 말 솜씨에 좋지 않은 시력과 떨리는 오른손의 노(盧)감독은 극히 겸손 했다.
임권택 영화감독이 직접 글로 남긴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 영락 > 임권택 소리를 보다 긴 이야기를 마무리 한다.
미국 콜로라도 주 세계적 리조트 휴양도시 텔룰라이드에서 세계적 명성을 가진 영화감독이나 배우 등 그야말로 영화에 대한 애정과 안목을 가진 “고급관객” 소수정예의 게스트들을 초청하여 작지만 다른 영화제와 차별화된 특별한 텔룰라이드 영화제가 열린다. 한 편의 영화가 텔룰라이드 영화제에 초청되면 그 영화는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이 영화제에서 『 함께 콜로라도 주립 대학 교수인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험영화 작가 스탠브래키지와 <영화의 역사>로 유명한 영화학자 브루스 카인, 두 사람이 <춘향뎐>을 잘 봤다고 하면서 “ 세계에는 세익스피어를 비롯한 많은 고전 명작이 있는데, 춘향전도 그런 명작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판소리와 같은 생경하기 짝이 없는 한국 문화조차 영화가 쉽게 풀어내서 서구인들에게 그러한 문화의 보편적 가치를 깨닫게 해주었다. <춘향뎐>으로 한국민족끼리 보고 즐겼던 고전문학과 판소리를 세계인들이 공유하게 해주어 감사한다 ”는 요지의 말을 했다. <춘향뎐>에 판소리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이 서구인들에게 전달될까 많은 의구심을 가졌던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감회에 젖었다 』
첫댓글 우리나라엔 우리가 좀더 자랑스러워해야 마땅할 선조들의 유산이 많습니다.
그래서 그걸 소중하게 이어나가고 지켜나가는 일이 중요한 것이겠지요~ ^^
임권택 감독님 존경합니다~
존경합니다.무상초님.임권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