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네 프랑크의 집’
관광버스의 여자 안내원에게 물으니 지금 ‘안네 프링크의 집’을 찾아가도 시간이 지나서 안에 들어갈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안네의 일기’가 쓰여진 그녀의 집을 향해 지도를 들고 운하를 따라 북으로 걸어갔다.
내일 아침 6시 57분 발 열차를 타고 프랑크푸르트로 떠나야 할 내 처지로는 지금이 아니고서는 기회가 없다. 프린센 운하를 따라 운하의 정취를 만끽하면서 걸었다. 그리고 걸으면서 또 느꼈다. ‘이런 고장도 있었구나’라고
드디어 저 멀리 베스테르케르크 교회의 그 시계탑이 나타났다. 이 시계탑의 종소리가 친구처럼 생각된다고 안네가 그의 일기에 적은 그 교회가 점점 가까워지다가 이윽고 몇 집 너머에 암스텔담의 시기(市旗)가 걸려있는 안네의 집이 보인다.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은 조용한 이 운하의 거리 어디에선가 독일 군인들이 그 독특한 철모에 총을 들고 나타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안네 프랑크가 사라진지 40년이 되는 이 프린센 운하 거리에는 고요함만이 깃들어 있었다.
다리를 건느지 않고 운하를 사이에 두고 안네의 집과 마주쳤다. 전면이 좁은 4층 건물이 좁은 길을 하나 사이에 두고 운하에 면해 있었다. 1944년 8월 4일 독일군에게 끌려나갈 때까지 2년 1개월 동안 숨죽여 살았던 그 집이 운하 건너에 조용히 서 있었다. 매년 40만 명이 찾아온다는 안네의 집에는 이 늦은 시간에도 손에 지도를 든 나그네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무엇을 생각하며 찾아오는 것일까. 아무 죄도 없이 다만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왜 인생이 무엇인지를 알기도 전에 불쌍하게 죽어간 안네의 명복을 빌고자 찾아오는 것이리라! 그리고 전쟁이라는 것과 평화라는 것을 생각하며 발길을 돌리리라.
이 때 큰 시계탑의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느닷없이 들려오는 종소리에 일순간 놀라기도 했으나 안네의 생각을 하며 애절한 감상에 젖어보았다.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 태어나서 다섯 살 때 나치의 유대인 박해를 피해 가족과 함께 이 암스텔담으로 이사 온 안네 프랑크(1929-1945), 2차 대전이 일어나고 네델란드를 점령한 독일군이 여기서도 유대인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1942년 7월 5일 이 프린센 운하로 263번지 뒤 채에 숨어 살게 된 안네 프랑크. 신선한 공기를 마셔 보고 싶다. 배가 아프도록 웃어보고 싶다거 일기에 썼던 안네의 가족이 잡혀 갈 때까지 2년 넘게 살았던 집,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이듬 해 열 다섯에 장티푸스로 죽은 안네 프랑크. 독일군에 끌려 가고 난 빈방에 떨어져 있었던 안네의 일기 --- 회상은 끝이 없었다.
다리를 건너 가까이 가서 잠겨 있는 창문에 이마를 대고 들여다 보았으나 보이는 것은 사무실의 테이블 뿐이다. 그래서 교회의 뒤뜰에 있다는 안네의 동상을 찾아갔다. 왼팔을 허리 뒤로 돌려서 늘어뜨린 오른 팔을 잡고 쓸쓸히 서 있는 안네외 마주 섰다. 이 때 또다시 울려퍼지는 종소리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낮으막한 돌기둥 위에 카메라를 겨우 올려놓고 자동 셔트로, 살아 있으면 지금 56세가 되었을 안네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차차 어두워져 오는 고회 옆 좁은 빈터에 안네 홀로 남겨두고 운하의 도시의 밤 구경을 위해 다시 번화가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