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0일 목요일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
오스모 벤스케에 이어 서울시향의 수장으로 임명되어 2024년부터 이끌 얍 판 츠베덴이 6개월 정도 먼저 베토벤의 교향곡 7번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4번이라는 굉장히 대중적인 레퍼토리를 들고 국내 관객들은 만났다. 서곡 없이, 협연 없이 단독으로 교향곡 2개를 어깨에 메고 무대에 오른 것이다. 그만큼 자신만만했다. 열정과 에너지가 넘친다. 앞으로 서울시향과의 동행에 기대를 한껏 모으게 만들었다.
베토벤 교향곡 7번 1악장의 서주는 장엄하고 장대하지 않았다. 아다지오나 라르고가 아닌 ‘Poco Sostenuto’라고 적혀있는 베토벤 교향곡 7번 1악장의 서주는 장엄하고 장대하지 않고 악상기호에 거기에 부합되는 속도였다. 그런데 왜 다른 지휘자의 베토벤 교향곡 7번 1악장 서주에 비해 빠르다고 느꼈을까? 지금까지 서울시향 공연에서 보지 못했던 금발의 외국인 남성 플루티스트의 E음에 의해 선명하게 부각된 리듬으로 제시부로 들어가더니 곧바로 마그마가 요동치게 하였다. 제시부 반복에 이어 재현부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전체 튜티 이후 목관악기 그룹의 가볍지만 섬세한 개파에 팀파니의 부점리듬이 부드럽게 이어졌고 코다에서는 콘트라베이스의 대지 깊숙이 용암이 흐르는 듯한 그라운드 베이스에 이어 입체적으로 악기를 쌓아 올렸다. 그리고 필자가 속으로 예상한 호른의 솟아올림으로 1악장을 마무리하였다. 점쟁이 아니어도 얍 판 츠베덴이 1악장을 전개한 걸 찬찬히 따라오면 그만의 구축법을 짐작하는 거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2악장도 가볍다. 호른을 위시한 목관과 현이 2중 대위법을 영글게 하더니 작은 쉼표와 휴지부 없이 곧바로 다음 프레이즈들이 이어졌다. 3악장에서의 두 번의 트리오는 악기의 대비와 음색의 차리를 강조하는 음악적 균형미로 이루더니 4악장도 제시부를 반복하고 악기군간의 고저차를 강조하였다. 절묘했던 재현부에서의 물 흐르는 듯한 전조까지 열광의 피날레를 장식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지금까지 세월의 영겁에 따라 덕지덕지 붙은 오독과 추앙, 베토벤에 관한 선입견에 너무 물들고 그게 옳은 거라 여기는 맹신을 한건 아니었을까? 누가 베토벤 교향곡 7번 2악장은 꼭 비장해야 하고, 꼭 비통해야 한다고 했던가? 누가 그 악장을 장송곡같이 느리게 해야 되고 2차 세계대전의 나치 영국 공습과 연결하고 4악장은 ‘춤의 신격화’니 그게 옳은 답이라고 강요하는가! 2악장은 알레그레토요 4악장은 알레그리오 콘 브리오일 뿐인데… 얍 판 츠베덴의 해석이 새롭고 신선하게 아니라 도리어 자연 그대로의 베토벤에 다가간 거 아니겠는가!
그와 같은 작곡가 본연에 다가가려는 시도와 접근은 차이콥스키에서도 확연히 드러났다. 서주의 팡파르부터 한 호흡으로 1악장 2주제 나오기 전까지 몰아가더니 카라멜 마키아토와 같은 클라리넷의 달콤한 2주제에 와서야 한 번의 호흡이 생겼다. 거기에 하트 문양의 거품과 같았던 팀파니의 파장은 뒤 재현부에서의 호빗과 같던 바순과 플루트의 결합과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1악장이 끝나자 얼마 전에 로테르담 필하모닉과 함께 내한하여 차이콥스키 6번 ‘비창’을 들려줬던 라하브 샤니가 생각났다. 라하브 샤니가 힘이 잔뜩 들어간 상남자로 서유럽풍의 거대하면서 마초적인 차이콥스키 상을 만들었다면 얍 판 츠베덴은 1부의 베토벤에서와 같이 차이콥스키 그 자체에 충실하다 못해 감추고 싶은 치부까지 드러낼 정도로 초근접하여 차이콥스키 음악 특유의 신파 넘치는 B급 정서를 유감없이 과시하였다. 그건 ‘호두까기 인형’과 버르토크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합해놓은 듯한 3악장에 이어 취주악, 서커스의 끝판왕이었던 민망할 정도의 날것 그대로의 차이콥스키를 들려준 4악장에서 절정에 다다랐다. 특히 4악장 막바지의 1악장 서주 팡파르 주제가 맞물리는 부분에서 한 대도 아닌 3대의 심벌즈로 동시에 울리게 한 점은 시종일관 호른과 트럼펫에 서브를 두면서까지 돌다리도 두드리면서 건너려는 안전하면서 철저한 면을 보여줬다.
결론적으로 베토벤과 차이콥스키가 살아서 얍 판 츠베덴의 연주를 들었다면 분명 흡족했으리! 분명 만족했으리! 19세기 초반의 빈에서 들었을법한 베토벤과 1880년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아마 이렇게 연주했을법한 원전에 가까운 해석이었다. 그게 새롭게 들리고 너무 적나라하게 민낯으로 보인다니 아이러니할 뿐이다.
評 성용원(작곡가, 상임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