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한국 구세군 역사에서 도시 지울 수 없는 유명한 세 인물이 있다. 모두, 반세기전 고인이 되었으나,
아직도 사회적으로 그 명성은 너무나 널리 잘 아려져 있는 인사들이다.
그 분들을 여기에다 간략히 소개하련다.
* 그 먼저, <사의 찬미>로서 1920년대 중반부터 대단한 인기를 모았던 윤심덕(尹心悳/ 1897-1926)양.
그 녀의 본향은 평양이다. 일찍이 일본 도쿄음악학교에 유학하여 성악을 전공,
소프라노 가수가 되어 귀국 했다. 그 후 레코드에 취입하기도하는 한편, 국내 각지를 순회하며
여러 무대 공연과 라디오 방송에서도 맹렬히 활략했다.
그런 그녀가 우리나라에 온 구세군 선교사관들과 친숙히 인연을 맺으면서,
아동복지시설인 서울후생학원의 후원자로 나섰다. 그리하여 1924년 11월 8일 저녁 7시 당시 경성공회당에서
<자선음악회>를 여는데 적극 힘을 쏟았다. 사회담당은 구세군 사령관 Palstra, Wiebe(한국명, 배일수)참장,
시설에서에서는 아동합창대와 악대가 출연하였고, 오늘의 연세대 의료원 전신인 Severance병원 설립 선교사이며
초대원장 Avison, Oliver R.(한국명, 魚丕信)박사 부인과 한국 양악계의 대선구자 김영환(金永煥) 선생 등이
피아노 연주를 했다. 그리고 작곡가 홍난파선생은 바이올린 독주를, 윤심덕양이 소프라노 음역으로 독창을 하였다.
물론 그 <자선음악회>는 각계 기관 단체장들을 비롯하여 장내를 그득 메운 관중들의 열렬한 박수 속에서
대성황을 거두었고, 윤심덕양은 또 다시 그 해 12월 3일 경기도 인천 소재 공회당에서도
서울후생학원을 도우려 <자선음악회>를 열었었다. 그리고 다달이 시간 내어
서울 후생학원 아동들을 찾아 위문하는 선의를 잊지 않았었다.
* 다음은, 작곡가이면서 바이올리니스트 홍난파(洪蘭坡/ 1897- 1941) 선생. 경기 수원 출생이다.
일본과 미국등지를 오가면서 음악 공부를 하고 또 연구 했다.
<달마중>, <고향의 봄>, <백마강의 추억>, <봉선화>, <성불사의 밤>, <옛 동산에 올라>,
<낮에 나온 반달은> 그리고 <사공의 노래> 등 애수와 정서를 표현한 곡을 수많이 남긴 선생은
1930년대를 전후하여 서울후생학원 악대 연주 지도를 매개로해서
구세군과 아름답고도 돈독한 특별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로 말미암아 마침내는 서울 제2영인 아현영문의 병사가 되었다.
이를 기화로 하여 선생은 독특한 활동을 폈는데, 달마다 한 차례씩 그 아현영문에서
서울후생학원 악대 및 외국인 사관들과 협연, 음악회를 꼭 개최한 그 것이었다.
그로인해 그 음악회가 열릴적이면, 그 아현영문은 절로 장안의 화제 대상으로 떠올랐고,
게다가 선생이 관여하던 YMCA 음악부 소속 청소년들 까지 대거 몰려 와
장내는 입추의 여지없이 초만원을 이루었었다.
이는 아현영문에 있어서 무엇보다 가장 자랑스러운 역사의 한 획을 그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눈부신 중대사를 기억하거나 아는 이가 도통 없고 보니,
흐른 세월을 원망하랴, 또는 사람을 나무람 하랴.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없고나>. 그 고시조의 한 수를 찬찬히 음미하게 된다.
* 마지막으로서, 우리에게 <무정>, <유정>, <재생>, <마의 태자>, <꿈>, <단종애사>, <허생전>,
<이차돈의 사>, <돌 베개>, <사랑>, <나>, < 그 여자의 일생>, <나의 고백>, <이순신>, <원효대사>,
<인생의 향기> 그리고 <흙> 등등 외에도 다 헤일 수 없는 명작을 남긴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 1892- 1950)선생. 평북 정주 태생이다. 9살 때, 전염병 콜레라로
부모를 한꺼번에 여의고, 나 앳된 여동생은 친척에 맡겨야 했다.
그리하여 더욱 눈물 나는 천애의 고아 신세가 되어 이리저리 떠돌며 살았다.
그러나 독학과 거리행상 그리고 피나는 노력으로서, 우리 민족정신 배양과 인재양성 명문인
<오산학교>의 교직을 거쳐 일본 도쿄 와세다대학에 유학, 철학을 수학했다.
그 이후 31세시에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편집국장을 역임했는가 하면 그로부터 10년 지나
<조선일보사> 부사장에 임직하기도 했다.
그 춘원 이광수 선생이 서울 아현영문 병사였었다는 그 사실을 작금의
우리 구세군인들은 누구나 깡그리 모를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그 사실을 오래전 진작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그처럼 인지할 수 있었느냐 하면, 나는 1953년 무렵 그 이광수 선생의 에세이집 <돌베개>를 접하여
<인생의 향기> 편에 실린 <봉아의 추억>을 읽음으로 해서다.
그 글 내용 한 부분엔 구세군과 이광수 선생 간에 깊은 유대관계가 개재되어 있음을 내비치고 있었는데,
나는 그 확실성 여부를 캐내고자 나름대로 열중하였다. 그래, 1930년대 당시 구세군 사관으로서
서울 후생학원 금융 회계직에 근무하며 아현영문 병사였던 전북 익산 <기독영아원>의
최승유(註, 崔承裕/ 사관 사직/ 20년전 작고)원장을 직접 찾아 대담 한 결과,
그 이광수 선생이 아현영문 병사였었음을 확인 할수가 있었다.
그런 연고로서, 이광수 선생이 구세군 아현영문 병사였었음을 분명히 알게 됐었다.
다음은, 그 <돌베개> 작품에 나오는 <봉아의 추억>중, 구세군과 관련한 내용 그대로를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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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아, 봉근아! 너는 진실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있느냐.
나는 목사에게도 묻고, 중에게 묻고, 만나는 사람마다 묻는다. 사람이란 죽은 뒤에 생명이 있느냐구.
구세군 사령관 조세프 바아 소장(註, Barr, Joseph/ 참장/한국명, 박준섭)이 맵(註, Map /영국만국본영 참모총장/ 한국 구세군 총회 이도차 1934년 2월 20일 서울 왔다가 이광수 선생 댁을 동월 21일 심방함) 참모총장의 위문을 전하려 왔을 때에, 나의 슬픔을 위로 할 길은 네가 죽은 뒤에도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은 죽기 전 내 집에서 하던 고생스러운 생활보다 행복 된 생활을 한다는 믿음 하나뿐인데, 내게는 그 믿음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때 바아 소장은 힘 있게,
<사후에 생명은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이 죽기 전전날에 맵 참모총장의 축복 기도 받도록 한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의 집을 마련해 놓으신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힘 있게 대답하였다. 악아, 과연 그러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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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광수 선생은 그의 그 숨진 어린 아들을 땅에 묻고 슬픔 겨워 마음의 극심한 동요를 일으켰다.
그런 나머지 서울에서 벗어나 정처없는 유리방랑 길로 떠났다가
경기도 양주 산방 생활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잠시였지만 -.
첫댓글 귀한 자료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