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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 향 문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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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향기 】 스크랩 ◈은혜글◈ 새벽이슬강좌/ 아들과 아빠의 팔씨름/32 장
국화(김동선) 추천 0 조회 13 10.03.29 07: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강좌창세기 32 장

  •  본문/  창세게 32:1~32
  •  제목/  아들과 아빠의 팔씨름
  •  강좌/  신세계 목사
  • 첨부파일 창 32장.wma

아들과 아빠의 팔씨름 (창 32:1~32)

 

어릴 적 아빠와 팔씨름하던 생각이 납니다. 언제나 꼬마 아들이 이기는 겁니다. 꼬마는 늘 자기가 아빠보다 힘이 세 이긴 줄 압니다. 사실은 아빠가 져 주는 겁니다. 저도 나중에 아빠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녀에게 져 주는 것은 팔씨름뿐만이 아닙니다. 팔씨름은 하나의 상징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위하여 아빠가 져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은 홀로된 야곱과 하나님과의 씨름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이깁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집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야곱은 자신의 아버지와 씨름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져주신 겁니다. 야곱의 생애를 읽어보면 창세기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라고는 기록되어 있지만 ‘야곱의 하나님’이라고는 한 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야곱이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곳도 나오질 않고(31:5,42,53) 하나님도 야곱에게 찾아가셔서 나는 너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28:13)고만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야곱의 입으로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28:21)이라고 선언이 한 군데 나옵니다. 언제입니까? 벧엘에서 야곱의 꿈속에 찾아오신 하나님께 야곱이 말합니다.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야곱의 생애를 읽어보면 야곱이라는 사람도 잘 이해가 안가는 성경의 인물이지만 솔직히 그런 사람을 복주시고 함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은 더 이해가 안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야곱의 하나님’이 되고 싶어 하시는 다시 말해서 고아와 같은 야곱의 참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에서 야곱의 기록을 읽으면 다 이해가 됩니다. 오늘 씨름이야기는 그래서 하나님의 그런 마음을 가장 잘 드러내 보이신 절정의 순간을 묘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야곱과 씨름을 한 것이고 그래서 야곱이 이긴 것입니다. 나중에 야곱이 이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아들이 아버지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마침내 아브라함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 되신 것입니다.

 

여러분

씨름하던 날 밤 야곱은 두려움과 절망가운데서 홀로 남습니다. 늘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건만 야곱은 죄책감과 죽음의식과 절망의 그늘에서 헤어 나오질 못합니다. 아버지는 안타깝습니다. 그의 소원대로 아비 집으로 평안히 돌아가게 하시려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건만 깊은 절망가운데서 다시 한 번 자기의 습성대로 꾀를 내서 두려움과 절망을 벗어나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의 밤은 더욱 깊어만 갑니다. 여러분 이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에게 찾아오는 죽음의식과 두려움과 심판 앞에서 맞이하는 절망은 야곱에게만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홀로 남게 됩니다. 그러나 나의 재물이나 내가 이룬 성공도 이 무저갱이 에서 나를 구원해 주지 못합니다.

 

여러분

어떻게 야곱의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게 되었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소원과 자비하심과 사랑과 신실하심이 그렇게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절망가운데 홀로 남아 두려움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야곱을 먼저 찾아가신 하나님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찾아오신 하나님으로 인해 야곱의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었고 그의 두려움은 사라졌고 그의 답답함은 진정한 소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정말 두렵고 외롭고 답답한 자들이 있습니까? 우리 중에 불안한 자들이 있습니까? 호소하노니 군중 속으로, 환호 속으로, 쾌락 속으로, 물질 속으로 달려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조용히 홀로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하나님과 단 둘이 만나십시오. 홀로 남은 자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죽을 힘을 다하여 인간과 씨름하시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끝내 져주시는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여러분 얍복강가의 씨름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져주신 겟세마네의 씨름을 연상케 합니다. 여호와 예수께서 자기의 원대로 하지 아니하시고 십자가에서 져주신 것입니다. 할 수 있고 이길 수 있지만 하지 않으시고 져주신 하나님입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하나님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아버지가 되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다시 한 번 깊은 죄책감에 빠져들게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네가 어떤 놈인 줄 아느냐? 네가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할 입장이 되느냐? 이겁니다. 야곱이 솔직히 인정합니다. 나는 속이는 자 야곱입니다. 모처럼 만의 진실입니다. 여러분 결코 나의 모습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될 수 없습니다. 야곱이 되묻습니다. 그러는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홀로 남은 자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고 하십니다. 여러분 이 말은 “네가 알고 있지 않느냐? 내 이름을 알고 있지 않느냐”는 뜻입니다. “예. 나는 압니다. 당신은 언약을 지키는 신실하신 내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가 아닙니까? 저같은 죄인을 먼저 찾아오신 분 아닙니까? 이제 당신이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말씀하십시오.” 어떤 의미로 야곱의 이 물음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통하여 좌절케 만드시려 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의표를 찌르는 물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합니다.(29절) 27년 만에, 아니요 태어날 때 받은 언약이 성취되는 순간이요 이후로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라, 야곱의 하나님, 죄인의 하나님입니다.

 

존경하는 청취자 여러분

내 이름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다 좌절과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이 땅에 홀로 남게 될 야곱의 후예들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내가 홀로 산속에 버려졌다고 느껴질 때, 내가 홀로 깊은 계곡에 추락했다고 느껴질 때, 야곱처럼 내 아내도 자식도 재물도, 모든 것이 다 강을 건너가 버리고 나만 홀로 남아서 외로울 때, 하나님은 찾아오십니다.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곁에 오셔서 씨름하시자고 하시는 주님과 씨름해 보시기를 소망합니다. 비록 몸은 절름발이가 될 지언즉 절망의 밤은 지나가고 용서와 평안과 해가 솟아올라 새 아침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소원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드리겠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 신앙의 철이 들어 아버지를 이기려고 하지 말고 이제는 아버지의 뜻대로 아버지의 생각을 따라 살게 하옵소서. 오늘도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내 맘에 임하여 주옵소서. 아버지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Crossabbath Gospel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안식하세요,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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