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으로 온 소나무들을 보며
작년 가을부터 수성못가 공터에 건물이 하나둘 지어지더니 지금은 새 건물로 꽉 찼다. 더욱이 수성호텔 앞 공터에도 건물이 들어 서 어제는 장송長松 여남은 그루를 싣고 와 공사판에 부려놓더니 오늘은 파 놓은 구덩이마다 심을 모양이다. 걸음을 멈추고 식수하는 장면을 보다 울컥 눈물을 삼켰다.
저 소나무들을 어느 지역에서 온 나무인지는 모르지만 7,80년생 소나무들은 그늘진 응달에서 조경용으로 자리 잡겠지만 가지들은 잘리고 잎들은 망가진 체 크레인에 묶여 이리 끌리고 저리 매달려 시달리고 있다. 이왕이면 편한 자리에서 잘 자리기를 바라면서 인부들의 작업과정을 건물주가 된 양 한참을 눈여겨봤다.
터를 잡자면 상당한 시일이 소요할 것이고 소생하기까지는 생병을 치를 것이라 생각하니 순간 나무들이 가엾고 애틋하였다. 아무튼 빨리 소생하여 수성못의 명물로 자리매김을 하기를 바라며 멍한 가슴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어느 시기는 노송의 범접을 금기시하였다. 어느 조경업자는 소나무는 있었던 좌향 그대로 옮겨야 산다고 했다. 그런 잣대로 반월당 네거리의 長松을 봐오던 중 몇 해를 못 버티고 비실비실하자 다시 장대 같은 소나무로 대체해 놓았다. 지난번에 심었던 장송은 울진에서 가지고 온 적송이라 토질에 맞지 않아 이번에는 그루당 천만 원을 호가하는 경주산 소나무로 보식했다. 나무도 환경이 다르면 적응력을 찾는데 힘이 드는 모양이다. 그런 소나무들을 조경용으로 열 그루나 심는데 혹 죽지나 않을는지 하는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애틋함을 떨칠 수 없었다.
흡사 고향을 두고 온 실향민의 처지처럼 말이다. 이곳에 정착한 이웃들은 언제쯤, 무슨 연고로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사는지. 내 윗대는 경주에서 밀양으로, 밀양에서 합천으로, 합천에서 의령으로, 의령에서 거창으로, 아버지 때 거창에서 대구로 옮겨 살았다. 그 덕택으로 난 내 여생을 누리고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그러니 선친은 1세대, 나는 2세대, 아들은 3세대, 손자는 4세대인 셈이다. 요즘도 일자리가 없다고 야단들이지만 그전처럼 하겠느냐. 지난 세대들의 고생이나 고충들은 불문가지다.
오늘 한 신문에 도산서원 마당의 금송을 이전할 것이라 한다. 이 나무는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에 있던 금송을 도산서원으로 옮겨 심었는데 그 금송이 죽자 같은 수종을 다시 심은 나무라 한다. 사람들은 박 대통령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박정희 금송'으로 부르지만 어느 한 단체에서 ‘금송’은 ‘일본산’이란 이유로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자 해당 기관은 지례 겁을 먹고 2.500만원 거금을 들어 옮긴다는 것이다. 세상 참 야박해졌다. 그런 이유라면 아예 잘라 버리지 그래야 뒤탈이 없다. 그럼 금송도 ‘일본산’이라 잘라 베어야 한다면 내 이웃들의 귀화 성씨들은 어디로 가야하고 보내야 하나. 참으로 옹졸하고 궁색하고 치졸하고 치사하다.
이런 일에 앞장서는 자들에게 묻고 싶다. 자기 조상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았는지 밝혔으면 한다. 삼국 땐 어느 편에 섰고, 임란 때는 어디서 무엇을 했으며 왜정시대엔 무엇으로 연명 했는지 그리고 6,25때는 뭘 했는지 말이다.
무슨 놈의 심성이 저리들 악하고 독한지. 태극기를 트집 잡고 애국가를 탓함을 보면서 한 건물의 조형물로, 내 곁으로 온 소나무를 보며 천년의 솔바람 소리에 부끄럽고 무섭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