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번 국도상에 위치한 신동 초등 학교에서 왜관 방향으로 약 3.3km 정도 가면 영남지방 선교의 요람인 신나무골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유서 깊은 교우촌인 이곳은 좁게는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 중화리(中和里)를 중심으로 한 '신나무골'을 의미하지만 넓게는 도암, 완정, 왜관의 가실, 동명의 어골 등 인근의 신자촌을 모두 포함하기도 한다.
대구에서 서북 방향으로 약 2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신나무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으로서 필수적인 조건인 외지고 깊숙한 산골이라는 점 외에도 대구 읍내에서 하루 거리라는 점에서 교통의 편리성 또한 교우촌으로서 매우 장점이었다.
신자들이 처음으로 신나무골에 살기 시작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당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청송의 노래산, 진보의 머루산, 일월산중의 우련밭과 곧은정에 살던 신자들이 박해를 만나 200여 명이 체포된다. 그러나 그들 중 많은 신자들이 배교, 석방되거나 옥사해 겨우 33명만이 대구 감영으로 이송된다. 이 때 체포된 신자들의 가족이나 다른 신자들이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이기도 했던 신나무골로 숨어들었던 것으로 학자들은 추측하고 있다.
대구를 지척에 둠으로써 많은 선교사들이 대구 진출의 전초 기지로 삼았던 신나무골은 최양업, 다블뤼, 리델 신부 등이 사목 활동을 했던 곳이다.
1831년 조선 교구 창설 후 1837년부터는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샤스탕 신부가 신나무골과 언양 등지에 머물면서 한반도 남쪽 지역을 맡아서 순회 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1839년 기해박해로 샤스탕 신부가 순교한 후에는 다블뤼 신부가, 1849년부터 1861년 6월까지 12년간은 최양업 신부가 신나무골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곤 했다.
최 신부가 과로로 쓰러진 후에는 다시 다블뤼 신부와 리델 신부가 이 지역을 맡아 오다가 1866년 병인박해로 신나무골의 신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하지만 박해가 잦아들면서 신자들은 다시 신나무골로 모여들었고 1882년부터는 삼남 지방 선교에 지대한 역할을 한 로베르(Robert, 김보록) 신부가 순회 전교를 하기 시작했다.
1896년 한불 조약으로 신앙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이 되면서 로베르 신부는 이곳 신나무골을 거점으로 삼아 활발한 전교 활동을 펼쳤다. 그 후 30여 년에 걸친 로베르 신부의 사목 활동은 이 지역에 복음이 확고히 자리 잡는 데 거의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남지방의 복음화에 헌신했던 로베르 신부는 또한 교육 사업에도 큰 관심을 기울여 속칭 '연화 서당'이라 불리는 신나무골 학당을 설립했다. 1833년 세워진 이 학당은 1920년 신동에 초등 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신학문과 구학문 그리고 천주교 교리도 함께 가르쳤다. 신나무골 학당은 1855년에 설립된 배론 신학교를 제외하고 1884년 서울에서 설립된 한한 학교와 함께 천주교 내에서는 가장 일찍 신학문을 가르쳤던 신식학교였다.
신나무골은 1894년 왜관 가실 본당 소속의 공소였다가 1926년 왜관 본당에 소속되었고 1968년 신동 본당이 설립된 후에는 다시 신동 본당에 속하게 되어 지금에 이른다.
1973년 성지 개발 기금을 모금하면서 시작된 신나무골 성역화는 1977년 제1차 사업을 완수하고 이곳에 영남 교회 선교 요람 기념비를 세웠다. 1984년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왜관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주선으로 순교자 이선이(엘리사벳)의 묘소를 이장하고 대구 본당의 첫 본당 터를 복원하여 로베르 신부의 사제관과 신나무골 학당, 전시관을 복원했으며 로베르 신부의 흉상을 건립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한티와 신나무골에 남은 신앙
을해박해와 정해박해로 흩어지게 된 경상도 북부의 교우촌 신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은신처를 찾아나서야만 했다. 북부의 상주와 문경은 물론 남부의 양산, 울산, 밀양 등에 있는 산간 지대가 바로 그들이 찾은 새로운 은거지였다. 칠곡의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도 이 무렵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혜의 은거지로 손꼽히는 '한티'(칠곡군 동명면 득명동)는 대구에서 5번 국도를 따라 군위로 향하다가 시군 경계를 벗어나자마자 우회전하여 동명 저수지를 안고 돈 다음 11km 정도를 올라가면 나온다. 북서쪽으로는 가산(해발 901m)을, 남동쪽으로는 팔공산(해발 1193m) 자락을 안고 있는 이 곳은 그야말로 내지의 요새로, 박해자와 밀고자들의 추적을 따돌리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척박한 땅에서 겨우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교우들은 1850년대 이후 한국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순방을 받게 되면서 다시 신앙의 활기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한티의 교우들은 1860년에 불어 닥친 경신박해로 다시 한 번 혼쭐이 난 뒤에야 제자리를 찾게 되었다. 최양업 신부가 선종한 뒤 경상도 지역의 사목을 맡게 된 성 다블뤼 주교는 1862년 교구장인 성 베르뇌 주교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칠곡 고을의 굉장히 큰 산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 있는데, 이 곳에서는 40명 가량이 성사를 받습니다."("한국 천주 교회사" 하, 340면)라고 적고 있다. 바로 한티 교우촌을 지칭한 것이다.
같은 칠곡군에 있으면서도 '신나무골'(지천면 연화동)은 한티에 비해 찾기 쉬운 곳에 있다. 왜관에서 4번 국도를 따라 5km 남짓 대구 쪽으로 가다 보면 나오기 때문이다. 이 곳에 새 터전을 잡은 교우들은 박해가 있을 때마다 한티 쪽으로 피신을 갔는데, 경신박해 때는 칠곡에 거주하던 이선이(엘리사벳) 가족이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로 피신하던 중에 체포되어 아들 배도령(스테파노)과 함께 포졸들이 가져온 농가의 작두날에 목숨을 잃게 되었다. 이 때 배교하고 살아남은 엘리사벳의 남편은 뼈저리는 아픔 속에서도 모자의 시신을 이 곳에 묻었다가 훗날 부인의 시체만을 찾아내 선산이 있는 칠곡 안양동으로 이장하였다.
한티와 신나무골 교우촌에 은거해 살던 신자들은 병인박해로 다시 한 번 수난을 겪게 되었다. 그 후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면서 이 곳은 대구 본당 설립의 전초 기지가 되었으며, 경상도의 첫 담임 신부로 임명된 로베르 신부에게 첫 본당 중심지로 설정되었다. 이러한 의미를 기리기 위해 왜관 지역에서는 1973년부터 이 곳을 사적지로 개발하기 시작하여 1977년에 선교 기념비를 건립하였고, 1984년에는 왜관 성 베네딕토 수도회의 주선으로 칠곡에 있던 이선이(엘리사벳)의 무덤을 옮겨 와 안장하였다. 한편 한티에는 그 후 유명·무명 순교자들의 묘역이 조성되고, 1983년에는 피정의 집이 세워지면서 새로운 신앙의 안식처가 되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52호(2000년 1월호), pp.90-91]
영남 지방 복음화에 헌신한 로베르 신부
Robert, Achille Paul(1863~1922). 파리 외방전교회원. 대구교구 선교사. 한국명 김보록(金保祿). 그는 프랑스의 시골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나 소신학교를 거쳐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는데 그는 그곳에서 두세(Doucet) 신부와 뮈텔(Mutel, 閔) 신부를 만나 함께 공부하고 함께 한국으로 건너와 오랫동안 함께 일하게 되었다.
즉 1876년 12월 23일 사제품을 받은 그는 1877년 1월 25일 두세 신부와 함께 한국을 향해 파리를 떠났다. 만주에서 리델(Ridel, 李) 주교와 만나 셋이서 함께 배를 타고 서울 근해에 도착하여, 리델 주교는 서울로 갔고, 두세 신부와 그는 함께 황해도로 상륙하여 산중에 숨어서 전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리델 주교로부터 강원도 이천(伊川)의 고메골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1878년 음력 정월 초에 리델 주교의 투옥사실을 전해 듣고 곡산(谷山) 산중으로 피신하였다.
1881년부터 1885년까지 그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낭천(狼川), 지평, 부흥골 등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전교활동을 했는데, 점차 선교사의 수도 늘어나, 1886년부터는 경상도 지방을 전담하게 되었고, 신나무골을 거쳐 1890년 대구 부근 새방골로 갔다. 그러나 불량배들이 선교사와 교우들을 모욕하고 신부댁을 습격하는 사건이 자주 일어났고 심지어는 대구에서 추방되었다. 그러나 정부당국이 로베르 신부를 대구로 호송함으로써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91년 대구(大邱) 시외에 정착할 수 있었다.
그 후 30년간 이곳에 천주교의 뿌리를 내리게 하는데 온갖 정력을 쏟아, 삼남지방은 1911년 조선교구로부터 분리되어 독립된 교구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갖은 고난을 겪어가면서 대구교구의 기반을 다지느라 몸이 쇠약해져, 급기야는 병석에 눕게 되자, 요양을 위해 고국인 프랑스로 돌아갔다. 1913년에 건강이 회복되어 다시 한국으로 나와, 전교사업에 종사하였으나 1919년에 다시 발병함에 따라 도저히 더 이상 전교할 수가 없게 되자 주교관으로 은퇴하여 회고록을 집필하면서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정리하던 중 1922년 1월 2일 주교관에서 사망, 교구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사진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