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이종보
심해물고기 외
못 이긴 척 따라갈걸. 심해다이버도 핵잠수함도 오지 않는 해저 만 미터, 어둠 속에 누워 생각합니다. 정규직이 어딘데. 늙은 얼간이문어가 칭칭 내 몸을 휘감는 것쯤, 눈 한 번 질끈 감았다 뜨면 그만일 텐데. 그렇게 힘껏 뿌리칠 것까지야. 아쉬움의 해저용암이 부글부글합니다. 모텔로 가자고, 돌아가서 말해 볼까요?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전화를 받고 든 생각. 이제는 올바르게 살지 않아도 되는 건가? 쇼핑카트에 실려 이사하던 할머니가 열일곱의 겨울에게 한 말도, 블롭피쉬가 된 할머니가 마지막 면회 때 한 말도, 올바르게 살아라. 할머니도 없고 이제 날 보는 사람 아무도 없으면 올바르게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정규직이 어딘데. 갑시다, 모텔로 가요 돌아가서 말하면 구름은 친절해지고 모두들 예의를 갖춘 말미잘로 변신할 텐데.
내일은 발광박테리아처럼 희미하고 상승해류는 어디에도 없고, 어둠의 바다는 넓고 넓은데 온 몸이 송곳니인 물고기, 유혹의 마귀상어만 어슬렁대는, 할머니 생각만 자꾸 나는 해저 만 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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팥빙수
내 가슴처럼 봉긋하고 설레는 설산 봉우리. 우린 여기까지. 난데없이 너는 폭탄을 던지고 설산이 휘청한다. 최선은 다 했다고? 딱딱해서 먹을 수 없는 열매 같았지. 속은 없고 껍질뿐인. 나는 팥빙수, 웃음이 많은. 상처가 많거나 상처를 주는 이들이 쉽게 나를 떠먹었고 쉽게 나는 녹고 흥건해졌다. 한번만 누가 나를 진심으로 떠먹었어도. 나는 한번이 필요했는데. 언제나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웃는 일. 지금도 나는 외딴 구름에게 웃으며 안녕. 그런데 사방팔방 파편들은 어떻게 수습하나. 집을 나서던 들뜬 땡볕에게는 뭐라 말하나. 영수증 숫자가 팔만인지 팔십만인지 어룽어룽할 뿐. 무너진 설산 속에 팥알이 몇 갠지, 젤리는 떡은 몇 갠지, 어두워진 것도 모르고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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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보 2018년 《울산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