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채호의 을지문덕, 돈영찬의 을지문덕글쓴이 노관범 / 등록일 2018-10-12 03:02:42 |
---|
조선 초기 명사 양성지(梁誠之)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신이 평소 『삼국사(三國史)』를 읽어 보니 우리나라 사람이 한인(漢人)과 싸우면 10번 싸워 7번 이기고 왜인(倭人)과 싸우면 10번 싸워 3번 이기고 야인(野人)과 싸우면 10번 싸워 5번 이겼습니다.” 그는 한인과의 대결에서 7할의 승률을 올렸다는 구체적 논거를 제시하지 않았지만 아마도 이러한 판단의 배경에는 고구려와 수·당의 대결이라는 역사 테마가 놓여 있는 것 같다.
특히 고려의 귀주대첩, 조선의 한산도대첩과 더불어 한국사 3대 대첩으로 손꼽히는 고구려의 살수대첩은 삼국시대 전쟁사의 하이라이트이다. 중국사에서 남북조의 오랜 분열을 끝낸 수나라가 거대한 제국의 수많은 병력과 물자를 동원해 대규모로 동방의 고구려를 원정했는데,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운 이 위기를 맞이하여 고구려의 을지문덕이 슬기롭게 대처하여 수나라 대군을 살수에서 격멸시킨 사건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영화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나라의 존망이 위태한 때 무강의 전통으로 상기돼
을지문덕의 영웅적인 승리는 20세기 들어와 신채호, 김동인, 안수길 같은 문필가에 의해 전기 또는 소설로 재현되면서 문학적 감동이 배가되었다. 특히 신채호는 1908년 ‘우리나라 4천 년의 제일 큰 위인[大東四千載第一大偉人]’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을지문덕』을 지었는데, 이 책은 역대 최강의 수나라에 맞서 고구려가 외롭게 독립을 유지하는 상황, 그것을 마치 유럽 전체를 제패한 나폴레옹에게 영국이 굴복하지 않는 상황으로 보고 고구려를 ‘18세기 영길리(英吉利)’라고 비유하였다. 이 책의 관심사는 고구려와 수나라의 대결을 통한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라는 정신의 전달이었고, 이를 위해 ‘을지문덕주의’를 제창했는데, 여기서 ‘을지문덕주의’란 아무리 적이 강대해도 ‘나는 반드시 진격한다[我必進]’는 정신으로 적과 투쟁하는 상무적 독립정신을 가리켰다. 대한제국이 외세에 의해 철거되는 시기에 외세에 대한 비타협적인 저항의식을 고취한 것이다.
그런데 신채호가 을지문덕을 한국의 저항적 민족주의를 체현하는 영웅으로 채색하기에 앞서 을지문덕은 오래전부터 신화적 존재로 존중받아 왔다. 조선 초기 편찬된 『동국통감(東國通鑑)』은 을지문덕 이후 우리나라에 침입했던 많은 이민족이 섬멸되었거나 그다지 성공하지 못했던 것은 을지문덕이 강대한 수나라를 꺾고 수립된 강국의 전통이 이어져 왔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조선 후기 편찬된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은 우리나라 역사에 을지문덕과 김유신 같은 명장이 삼한을 덮을만한 무공을 세웠고 고려 시대에도 무공의 전통이 이어져 강국의 칭호를 얻었는데, 조선 시대에 이르러 문치만 중시하고 무공을 경시하여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다고 책을 지은 동기를 밝혔다.
조선 초기의 『동국통감』이든 조선 후기의 『해동명장전』이든 강국으로서 우리나라의 무공의 전통을 떠올리게 하는 중요한 소재로 을지문덕을 중시했음이 분명하다. 더욱이 17세기 병자호란 이후 조선 사회에서 타오른 북벌론의 정서에서 을지문덕은 북벌을 실행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역량을 보증하는 역사적 사례로 곧잘 기억되었다.
조선 후기 평안도에서 지역 전통으로 성장해
흥미로운 것은 조선 후기 평안도에서 을지문덕이 지역 전통으로 성장하면서 을지문덕에 대한 사회적 기억의 증폭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다. 평안도는 고구려의 수도 평양이 있던 지방으로 고구려를 계승하는 지방의식이 굳건하였다. 고구려를 대표하는 인물 을지문덕을 제사하는 원우가 조선후기에 들어와 고구려의 수도가 있던 평양과 살수대첩의 본고장 안주에 건립되어 있었다. 1847년에는 을지문덕의 사적을 적은 을지문덕비가 청천강 남안에 세워져 지역의 역사 전통을 현창하는 데 기여하였다. 신채호의 『을지문덕』이 출간된 이듬해 1909년에는 을지문덕의 후손을 주장하는 인물이 언론 기사에 출현하여 을지문덕에 대한 역사적 관심을 더욱 북돋웠다.
이 해 연초, 순종은 경의선 철도를 이용해 개성, 평양, 의주 등지를 돌아보는 민정 시찰을 행하였는데, 이른바 서순행(西巡幸)이라 부르는 사건이었다. 이 과정에서 을지문덕의 묘소에 제사를 지내라는 황명이 내려왔는데, 이때 돈영찬(頓永燦)이라는 인물이 가승을 갖추어 을지문덕의 묘소를 보수하고자 하였다. 이 가승에 따르면 을지문덕의 17세손 을지수(乙支遂)가 고려 중기 묘청의 난을 토벌할 때 공로를 세워 돈이라는 성씨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신채호의 전기와 돈영찬의 가승은 20세기 벽두 을지문덕을 둘러싼 민족적 기억과 지역적 전승의 동시적 분출이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을지문덕의 승리에서 무엇을 읽을 것인가? 을지문덕의 고구려는 『동국통감』의 표현대로 전진의 백만 대군을 패주시킨 사현(謝玄)의 동진 같은 나라, 또는 신채호의 상상대로 나폴레옹의 호령에 외롭게 맞선 영국 같은 나라로 시대마다 다르게 비유되어 왔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지속하는 메시지가 있었으니 무강(武强)의 전통이다. 조선초기 『동국통감』도 조선후기 『해동명장전』도 대한제국기 『을지문덕』도 모두 우리나라 역사에서 무강의 전통을 읽어 왔던 것이다. 그럼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지역 전통으로서의 을지문덕이다.
안창호가 신채호의 『을지문덕』에 붙인 서문에서 말한 석다산(石多山)과 대동강, 정병선이 돈영찬의 가승을 소개하며 말한 을지산(乙支山)과 을지정(乙支井), 이로부터 문득 영화 을지문덕, 다큐 을지문덕의 장면들을 미리 상상해 본다.
- 글쓴이 : 노 관 범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부교수) |
첫댓글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