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밥상 / 배공순
집안에 티브이 소리만 울린다. 혼자 누리는 이 공간이 자유롭다. 비 온 뒤라서 아파트 앞뒤 성하의 숲에서는 매미 소리가 한창이다. 티브이를 끄자 매미 소리가 더욱 커지며 돌림노래처럼 시간차를 두고 울어댄다. 커피 물을 끓인다. 물이 오래 끓어야 커피의 풍미가 깊어진다. 커피메이커 대신 주전자에 다글다글 물을 끓이니 그 소리가 듣기에 좋다.
아침을 드시자마자 시어머니는 친구들을 만난다며 서두르신다. 여기저기 아픈 곳이 많으신데도 이럴 땐 잠시 잊은 듯 곱게 단장하고 나서신다. 80이 훌쩍 지났지만 설렘이 묻은 표정은 아직도 여자임이 분명하시다.
회사일로 바쁜 아들이 주말인데도 출근하고 나자 약속이나 한 듯 남편까지 주섬주섬 옷을 입는다. “오늘도 나가?” “응.” 늘 말이 없는 남편은 역시나 단답형 대답을 남기고 나선다. “일찍 와요.” 큰 눈을 껌뻑일 뿐 말이 없다. ‘에이그, 재미없는 남자’ 속으로 앙알대며 죄 없는 뒤꼭지에 대고 눈을 흘겨준다. 친구들은 안방에서 서재로 출퇴근하는 은퇴한 남편 때문에 답답해하는데, 별로 바쁠 것 같지 않은데도 오늘 나가면 내일 들어오기 일쑤이니 다행이라 해야 하나. 구두를 신는 밉상남편 뒷머리를 쓰윽 매만져 준다. 어쨌든 남편의 맵시는 아내 책임이 아니던가 싶어.
오래 끓인 물을 커피 잔에 가득 따른다. 커피 향과 함께 조용한 집안을 음악으로 채운다. , 에 이어지는 이승철, 임재범의 노래들이 마음을 향해 스며든다. 고갯짓으로 까딱까닥 리듬을 탄다. 노래 사이사이 매미들도 코러스를 넣어 준다. 9층에서 내려다보는 단지 안의 숲도 음악에 맞추듯 일렁일렁, 올려보던 느낌과는 달리 커다란 초록 뭉치들이 굼실굼실 군무를 추는 것 같다.
늦은 점심을 혼자 먹는다. 달랑 수저 한 벌, 밥 한 그릇, 물잔 하나, 간소한 반찬 그릇들. 마주 보며 얘기할 사람도 없다. 그래서인지 밥맛도 그냥 그렇다. 오늘따라 딩동 거리던 전화기까지 조용하다. 늘 사람들 속에 있었던 탓인가. 혼자 노는 시간이 나름 좋은데도 약간 쓸쓸한 이 느낌은 뭐지? 어느덧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나무 그림자도 길게 눕는다. 가족들은 언제 오는 거지? 급기야 문자를 날리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복닥복닥 소란하면 조용한 게 그립고 이리 조용한 날은 약간의 소란함이 그리우니, 참 모를 일이다.
일어서 주방으로 간다. 적당히 살이 오른 호박잎을 찌고 양념장을 만든다. 가지도 쪄서 양념장을 얹어 그릇에 담는다. 아삭거리는 배추김치도 꺼내 썰고, 초여름에 담가 둔 오이지를 송송 썰어 새콤한 오이냉채를 만든다. 고소한 참깨를 뿌리고 얼음도 동동 띄운다. 뚝배기에 된장을 풀어 넣고 미리 준비해 둔 육수를 붓는다. 여린 호박을 어슷어슷 썰고 호박순과 조갯살을 넣어 애호박찌개를 보글보글 끓인다.
문자 덕분인지 저녁 먹기 좋은 시간에 다들 귀가했다. 가족들이 둘러앉아 저녁을 먹는다. 이런저런 이야기보따리를 풀며 같이 먹으니 맛있고도 즐겁다. 고기도 굽고 시원한 맥주도 곁들였다. “니 덕분에 저녁은 잘 먹는다만, 며느리 술 따라주는 시어미가 어디 있더냐?” 핀잔을 주시면서도 시어머니는 맥주를 따라 주신다. “어머니, 기왕이면 가득 채워 주세요!” 결혼 초에는 어렵기만 했던 시어머니다. 남편이 첫 숙직을 서던 날, 낯선 집에서 새댁이 무서울 거라며 어머니 방으로 끌려가다시피 불려 가 옆에 누웠다. 혼자 자는 것보다 시어머니 옆자리가 더 무서워 숨도 못 쉬고 잠을 설쳤던 기억이 생생한데 이제는 절반쯤은 친구 같은 느낌으로 산다.
여러 나라를 여행한 이들의 여행기에 보면 살아온 환경과 민족이 달라도 현지인들이 꼽는 행복이란 ‘가족과 한상에 둘러앉아 밥 먹는 것’이었다는 얘기들이 종종 나온다. 행복은 저 언덕 너머 파랑새와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평범한 일상 속에, 단란한 밥상 위에 있음을 느낀다.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보편의 가치인 것.
음식쓰레기를 들고 현관에 나서니 오늘따라 옹기종기 놓인 신발 네 켤레가 클로즈업되어 내 눈에 들어온다. 이 신발을 신고 하루를 열심히 살았고 ‘우리들’의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구나. 정말 감사한 일이구나! 익숙한 것에서 느끼는 새로운 울림, 늘상 보던 땀내 나는 신발의 존재가 나를 뭉클하게 한다. 별의별 험한 일도 많은 세상살이의 소용돌이 속에 만약에, 만에 하나라도 길을 잃어버린 신발이 있다면…. 생각이 스치는 것조차 싫어 고개를 젓고 또 젓는다.
“산은 숲을 품고, 숲은 나무를 품고, 나무는 새를 품고
새는 새는 새는, 온 산을 품고.”
어느 시인의 시처럼 산과 숲과 새들이 서로를 품고 살아가듯이, 우리 또한 숲과 같은 둥지 안에서 서로를 보듬고 살아가는 것이려니 생각하며 가족들이 벗어놓은 양말을 조물조물 손으로 빨아 널었다.
첫댓글 저녁 밥상 잘 읽었습니다.
저도 시끌벅적한 저녁이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