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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팀프리칭 3포인트강해설교 클리닉 원고
【 4조】하나님의 스냅사진 (6)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
먹느냐 먹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민수기 14:4-10 | 6월 17일)
논지 :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문제를 먹느냐 먹히느냐가 판가름 납니다.
서론
저가 설교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을 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오늘 예배를 드리러 여기에 오기까지 많은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본 것들 중에서 어떤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아 있습니까?”
잘 생각해 보시고 마음속으로 답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심코 자나왔지만 위험천만한 일들도 있었을 것이고, 위험해 보이는 순간도 지나쳐 오는 사이에 다 사라져 갔음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독 기억에 남는 일들이 있습니까? 그 남은 기억이 좋은 기억입니까, 아니면 나쁜 기억입니까? 분명 그 기억은 눈으로 보았던 것에 대한 평가가 여러분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 뿐만 아니라 여러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에 보았던 모든 일들도 다 포함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그런 보는 것에 대한 내용을 함께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스냅사진’에 관한 내용을 연속해서 묵상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는 다섯 번째 주제인‘모세의 딜레마’에 관한 내용으로 ‘목숨을 건 중보기도’를 살펴보았습니다. 모세는 이 중보기도로 자신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권위와 체면까지 살려낸 것을 ‘기도라 쓰고 생명이라고 읽는다.’는 제목으로 함께 묵상했습니다. 그보다 앞서 우리는 첫 시간에서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을 보았고, 둘째 시간에는 야곱이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함으로 변화된 모습을, 그리고 셋째 시간에는 유다의 생명으로 하나 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네 번째 시간은 요셉의 아버지 봉양을 묵상했습니다. 참 하나님의 스냅사진에는 다양하고 감동적인 풍경들이 찍혀있네요. 그리고 오늘은 그 다음의 감동의 드라마로 이 장면입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 시간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한 보고 내용 중에서 ‘그들은 우리의 밥입니다.’는 내용을 ‘먹느냐 먹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는 제목으로 함께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이를 보다 더 쉽게 이해하기 위하여 영국 속담에 “보는 것이 얻는 것이다.(To see is to get.)”라는 말을 상기해 봅니다. 사람은 보는 것을 성취하려 하고, 성공하려 하고, 또 반드시 이루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 본 것에 대해 자신의 생명을 걸고, 목숨을 걸고, 인생을 걸기 때문입니다. 어떤 것에 대해 전부를 거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합니다.(All in) 그러므로 인생은 보는 것이 인생을 좌우하게 됩니다. 또한 ‘신은 죽었다.’고 까지 말했던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인간은 사는 한 갈등한다.’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의 삶은 문제가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문제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하루를 사는 데도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할 수 없겠다고 여기고 인생을 포기하면서 사는 사람이 있고, 문제가 있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딪쳐 극복해 나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특히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있는 사실을 알면서도 부딪쳐 극복해 나가려는 모습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있으면 문제가 없는 곳으로 도망을 가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문제로 여기면서도 피하거나 도망가지 않고 부딪쳐 극복해 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문제점 앞에서 ‘두려움’을 갖느냐, 아니면 ‘담대하게 극복하느냐’는 ‘먹히느냐 먹느냐’와도 같습니다. ‘두려움’을 갖게 되면 내가 그 문제에 ‘먹히고’ 맙니다. 그러나 담대함을 가지면 그 문제 상황을 내가 제어할 수 있기에 문제 자체를 ‘먹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번 배경에서 ‘먹느냐 먹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질문을 가지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이 말은 어디서 차용해 왔는지 얼른 떠오르시죠? 예, 여러분의 생각이 맞습니다.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Shakespeare)의 작품 가운데 <햄릿(Hamlet)>에 나오는 햄릿 왕자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라는 독백형 대사입니다. 이 대사의 흐름은 이렇습니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죽음 뒤의 세상이 두려워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는 햄릿의 우유부단한 면을 보이는 독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결단력이 없는 사람을 ‘햄릿형의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 아시지요? 반면에 생각보다는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행동이 먼저인 사람을 ‘돈키호테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이 질문은 다만 제목만 차용해 왔을 뿐이지 어떤 인간형에 대한 선입관이나 고정관념은 사양합니다. 우유부단이나 저돌적인 것만이 아닌 영적인 결단에 의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에서는 과연 어떤 형태의 사람들로 평가가 될는지 우리 함께 들어가 보기로 합니다. 우유부단으로 우리를 답답하게 할 지, 저돌적으로 밀어붙이기만 할지, 아니면 쾌도난마(快刀亂麻)처럼 시원하게 모든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내는 영적인 결단을 해 줄지 한 번 들여다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이 질문에서 묻고 있는 ‘먹느냐 먹히느냐’를 결정하는 요인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은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로 판가름이 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제를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제1대지 : 믿음이 있는 사람은 환경을 믿음으로 보기 때문에 문제에 먹히지 않고 오히려 먹어버리는 은혜를 덧입습니다.
‘먹느냐 먹히느냐.’는 그리 복잡하지 않습니다. 어려워 보이지만 어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세와 태도의 문제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 자세와 태도로 인해 본질이 흔들리는 현상이 나타나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환경을 믿음으로 보는 눈이 있기 때문에 어떤 어려움이라 해도 먹히지 않고 오히려 극복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그 문제를 먹어버리는 은혜를 덧입습니다.
본문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똑 같은 상황을 보고 왔는데도 한 무리는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고 했고, 또 한 무리는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메뚜기와 같다.’는 말은 ‘우리는 그들의 밥이라.’는 말과 같아서 ‘패배의 쓴 잔’을 이미 마시고 있습니다. 반면에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는 말은 ‘우리가 그들을 먹어버릴 수 있다’는 말과 같아서 이미 ‘승리의 찬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갈라놓았습니까? 무엇을 보았느냐에서 차이가 났습니까? 아니면 어떻게 보았느냐에서 차이가 났습니까? 두 가지가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한 가지 사례를 보겠습니다.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나온 명대사 가운데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먹느냐 먹히느냐.’를 결정짓는 일종의 ‘자기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내용입니다.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
무슨 뜻입니까?
“너희들이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요. 만약에 죽으려 하면 살 것이다.”
인간은 영적인 동물이어서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겉 사람과 속마음이 서로 드러나지 않은 중에라도 자기 대화를 하고 있음으로 인해 속으로 갖고 있는 마음이 은연중에 겉으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재미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 토크쇼에서 지석진 씨가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저는요. 유재석 씨와 카드를 하면 절대 점수를 잃지 않아요.”
“왜요?”
“왜냐하면, 유재석 씨는 좋은 패가 들어오면 손을 떨면서 표정이 심각해지거든요.”
이 짧은 대화에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속마음을 나타내지 않고 무표정하게 있는 얼굴을 이르는 ‘포커페이스(poker face)’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어도 감출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잘 말 해 줍니다. 그런데 어떤 준비도 없이 갑작스럽게 맞는 상황에서는 더욱이나 관리하기 어려운 것이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들입니다. 그러므로 평소에 자기관리가 잘 된 프로(pro)는 모든 면에서 ‘승 & 승’을 지향합니다. 그렇지 못한 이들은 ‘승 & 패’를 지향하게 되어 결국에는 패패로 이어집니다. 이렇듯 자기관리란 그 어떤 스킬(skill)보다도 중요하고 미리 훈련되어서 쌓여 있어야함을 일러줍니다.
그런데 ‘먹느냐 먹히느냐.’를 결정짓는 그 자기관리가 말처럼 쉽지만은 않습니다. 자기관리가 어려운 사람들 중에는 ‘두려움’을 호소하곤 합니다. 오늘은 이 ‘두려움’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Fear)’에는 4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로, 실수에 대한 두려움(Fear of Mistake)입니다. 업무능력에 대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이 두려움은 “나는 실수를 하면 안 돼, 나는 실수 하는 사람이 아니야, 난 완벽해야 돼, 틀린 모습을 보여서는 안 돼.”와 같은 생각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이러한 심리상태가 지속되고 팽창되면 상대를 대할 때 내가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순간적으로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첫 번째 살인자 가인에게서 사례를 살펴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많은 실수를 범하였음에도 그 연약함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인정함으로 복된 삶을 누렸습니다. ‘실수하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에 먹히지 않고 그 실수를 오히려 먹어버림으로써 복을 누린 것입니다.
두 번째로, 실패에 대한 두려움(Fear of Failure)입니다. 자기 관리상의 두려움을 말합니다. 실패는 실수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에게 질 수 없어, 이 부분에 있어서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어, 용서 못해”라는 생각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이러한 심리상태는 특정인이 그런 것이 아닌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심리 상태입니다. 이때는 마인드 셋(Mind Set)을 해야만 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지도자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와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엘리야도 이세벨에게 쫓겨 도망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모세와 엘리야는 하나님의 은총을 덧입어 그런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 했듯이 실패의 두려움을 먹어버리니 성공의 달콤한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세 번째로, 거절에 대한 두려움(Fear of Rejection)입니다. 대인 관계상의 두려움을 말합니다. “나는 거절당하는 것이 싫어, 다른 사람들이 날 미워하면 어쩌지? 나를 싫어할 까봐 걱정돼, 왕따도 무섭고, 나쁘게 평가하면 어떻게 하지?” 등의 생각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가진 두려움입니다. 반면에 삭개오는 주님을 만나고 싶은 열망으로 자신의 체면과 명예를 모두 다 내려놓고 뽕나무에 올라갔을 때 거절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용납을 받는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거절당할 두려움을 먹어버리니 오히려 환영을 받는 은혜를 덧입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고통에 대한 두려움(Fear of Pain)입니다. 유연성에 대한 두려움을 말합니다. “아이구 귀찮아, 아 이걸 이렇게 꼭 해야 되나? 힘든데, 지금 편한데, 왜?”와 같은 생각에서 오는 두려움입니다. 쉽게 말하면 변화가 싫은 것입니다. 내가 변화에 의해 겪어야 할 고통이 싫은 것입니다. 이것은 변화에 대한 수용성이 떨어지기에 결국에는 안주하게 됩니다. 결국 자신의 성장이 더뎌지고 결국에는 매너리즘이나 성장의 한계를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을 한 후 광야를 지나면서 가졌던 두려움입니다. 반면에 초대교회 성도들은 자신의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놀랍기에 안주할 수 있었던 현실을 과감히 뿌리치고 고난의 디아스포라를 자청한 결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귀하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고통을 먹어버리니 그 고통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풍성한 삶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혹시 ‘두려움’이 있다면 어떤 형태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되십니까? 그런데 하님께서는 인간을 만나 주실 때 첫 마디 말씀이 “두려워 말라, 놀라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움’은 성도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렇다고 ‘두려움’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두려움’은 가장 원초적인 단계에서는 우리를 지켜주는 경고 체계의 역할을 합니다. 밤늦게 시내의 위험 지역을 걸을 때, ‘두려움’은 위험 가능성으로부터 몸을 보호하라고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위험이 잠재된 상황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건강하다는 신호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보호자입니다. 그런 ‘두려움’이 없다면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위험이 없는 곳에서도 ‘두려움’을 갖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두려움’은 만들어진 것이며 사실이 아닙니다. 진짜처럼 느껴지지만 현실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 ‘두려움’은 수시로 찾아와 우리의 삶을 방해합니다. 그 ‘두려움’은 목적도 자비심도 없어 보입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고 정신을 병들게 합니다. ‘두려움(fear)’이란 실제처럼 보이는 가짜증거(False Evidence Appearing Real)의 약자입니다. 이런 종류의 두려움은 과거의 경험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미래의 두려움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럴 때 쓰이는 말로 ‘마스터 마인드(Master Mind)’란 말이 있습니다. 이는 영적으로 풀이하면 ‘영적인 생각’즉 ‘스피릿 마인드(spirit mind)’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둘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하나의 조화된 목적을 향해 친근한 연합을 이루는 것을 말합니다. 이 조화로운 어울림 속에서 마음의 화학작용이 진행되고 그럼으로써 제 3의 마음, 곧 ‘영적인 생각’이 창출됩니다. 참가자들 사이에 친근하고 조화로운 연합이 지속되는 한, ‘영적인 생각’은 제 기능을 다합니다. 그러나 친근한 연합이 깨어지는 그 순간, ‘영적인 생각’은 와해되어 버립니다.
‘영적인 생각’의 위력은 성경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열두 제자에 관한 이야기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영적인 생각’원리를 가장 처음 사용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사역을 찬찬히 생각해 보세요. 예수님의 능력은 하나님과의 교제로 나왔고, 제자들은 예수님과 연합을 통해 그토록 놀라운 일들을 해낼 수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절대자와 교통할 수 있는 ‘영적인 생각’ 원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예수님과 하나로 묶여 있던 끈이 끊어지자 그의 삶도 즉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사업 혹은 가정에서 ‘영적인 생각’ 연합이 깨지면 남는 건 파멸뿐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이처럼 ‘영적인 생각’ 연합은 협력이 필요한 모든 인간관계에서 매우 유익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 중에 열 명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부가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메뚜기 신드롬(Grasshopper Syndrome)’에 걸려 스스로를 너무 작게 여기며 간이 콩알만 해져버려 벌벌 떠는 모습을 봅니다. 바로 이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처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본 가나안 족속은 실제로 장대했고 이스라엘은 메뚜기 같아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철저하게 확신한 것은 자기들은 하나님 사랑 안에 있고 저들은 그 밖에 있다는 사실 그 믿음 하나뿐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자기들이 죽더라도 하나님 품 안에서 죽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단순한 만용이 아니라 믿음의 진정한 실체입니다. 또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이 ‘메뚜기 신드롬’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의지로 믿음을 키워서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모든 것을 주께 바쳐서 언제든 주를 위해 죽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만이 비로소 ‘두려움’에서 비롯된 ‘메뚜기 신드롬’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 믿음이 눈에 보이는 우리 몸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합니다. 어떤 문제에 먹히기도 하지만, 또는 먹어버리기도 합니다. ‘믿음으로 본다.’는 것은 주체가 ‘내’가 아니라 ‘주’가 된다는 말입니다. 지식으로, 경험으로, 학위로, 지위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는 믿음으로 본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볼 때 우리는 문제를 먹어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문제를 먹어버릴 수 있을 때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제2대지 :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하여 먹어버린 사람은 그 문제가 많아 보이던 환경을 오히려 누리고 삽니다.
시카고 대학의 루카스(Robert E. Lucas) 교수는 ‘기대’가 경제행동과 경제정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로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대를 형성하는 데 현재 정보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할 점은 기대를 형성하는 데 현재의 정보도 중요하지만, 그 정보를 ‘해석(解釋, 評價)’하는 ‘마음의 성향’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성경의 예에서 여실히 증명해 주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하고 있는 본문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탐지하기 위해 각각의 부족에서 뽑은 12명의 지도자들을 정탐꾼으로 보냈습니다. 40일간의 정찰을 끝내고 돌아온 지도자들은 함께 본(see) 가나안에 대해서 서로 다른 ‘해석(read)’을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백성들이 강하지만 가나안을 점령할 수 있다는 ‘해석’을 하고, 나머지 10명의 지도자는 그 반대의 ‘해석’을 합니다(민 13:25∼33). 이런 ‘해석’의 차이는 ‘마음의 성향’과 ‘믿음’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해 드린 각종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심리상태를 말합니다.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속으로는 이미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있어 ‘울고 싶은 때 누가 때려만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사로잡고 있었습니다.
본문은 모세가 열 두 정탐꾼을 보내어 그 땅을 탐지케 한 결과를 ‘보고’ 받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본문과 그 후의 결과를 대부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열 명의 정탐꾼은 ‘보고’를 잘못하여 하나님의 벌을 받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제대로 ‘보고’하여 그 땅을 차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해석입니다. 열 명의 ‘보고’는 엉터리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바탕을 두었고 정확했습니다. 가나안의 거민은 네피림 자손 같이 강했고 성읍은 견고했고 산지와 해변과 들판에 물 샐 틈 없이 포진하고 있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들 성읍이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약하고 거민은 작고 방어 상태가 형편없는 것을 부풀려 과장하지 않았고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허위로 ‘보고’하지도 않았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도 이들의 ‘보고’에 단 한 번도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열 명의 정탐꾼이 “그 탐지한 땅을 악평(惡評)하여 가로되”라고 기록된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말 그대로 그것은 ‘보고’가 아니라 ‘평가(評價)’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고’는 적군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고, ‘평가’는 적군과 아군의 현황을 비교 분석하는 것입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악평하여 가로되”라고 시작하여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고 그 평가를 마치고 있습니다. 가나안 족속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비교 분석했더니 자기들은 완전히 고양이 앞에 쥐 꼴이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본문 어디에도 그들이 ‘메뚜기’라는 단어를 쓴 흔적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 마음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으니 엄두가 나지를 않아 도저히 게임이 안 되고 아예 해보나 마나 하는 싸움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평가’를 들은 백성들이 두려워하기 시작하자 위로하면서 “아니다. 저들은 약하고 숫자도 적다. 우리가 강하고 많다”라고 보고 자체를 수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래도 우리는 이길 수 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있기 때문이다”(민 14:8-9)라고 ‘평가’만 다르게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평가로 인한 결과는 천양지차로 달라졌습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함께 반성하면서 깨우쳐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 한국 교회가 본문을 두고 잘못 가르쳐 왔고, 또 잘못 묵상해 왔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보고’와 ‘평가’를 구분해서 가르치거나 깨닫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보고’와 ‘평가’를 합쳐 열 명은 ‘보고’ 자체를 아예 잘못한 자들로 취급을 받아 왔습니다. 마치 없던 일이 있거나 있는 일도 없는 양 허위로 조작했거나, 또 있는 일을 과대 내지 과소 포장해 사실상 거짓 보고를 한 것처럼 간주했습니다.
또 그렇게 된 근본 이유는 그들이 여호수아나 갈렙처럼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기에 어떤 일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알아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여호수아와 갈렙을 본받아 어떤 대적과 환난이 닥치더라도 겁을 먹지 말고 담대하게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진군하라”고 권면합니다. 매사를 완전히 ‘믿음 만능주의’로 몰고 갑니다. 신자가 세상적인 현상을 세상의 지식과 정보로 분석하고 또 세상 전문가로부터 자문을 받거나 그 자문대로 계획을 세우는 것은 아주 잘못하는 양 몰아붙입니다. 말하자면 무엇이든 세상적인 수단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기도만 하면 그분이 반드시 다 이루어준다고 믿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환난이 닥쳐 조금이라도 두려워하면 믿음이 부족한 것처럼 취급합니다. 성도는 어떤 일에도 흔들림 없이 당당해야 하며 항상 자신감과 미소를 잃지 않아야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을 보여주는 대표가 바로 이 사건의 여호수아와 갈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두 사람이 가졌던 믿음이 두려움이 없는 믿음은 아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정말로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다면 열 명이 악평할 때에 “그 놈들이 뭣이 장대하더냐? 허우대만 멀쑥하게 컸지 완전히 허풍선이던데. 내가 볼 때는 그들이 메뚜기 같던데”라고 말을 한 마디라도 보탰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동료 열 명이 ‘보고’한 객관적 상황에 대해서는 한 번도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그 객관적 상황을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시 한 번 더 거르는 작업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으로 밀어 넣으시는가? 상식적인 상황으로는 도무지 승리할 수가 없지 않은가? 그런데 골몰히 생각해보니 얼마 전에 겪었던 출애굽도 사실은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상황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기억해 내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을 두고 떠오르는 말이 있습니다. <긍정의 힘>의 저자 조엘 오스틴(Joel Scott Hayley Osteen)이 갈파한 말입니다.
‘마음의 성향이 긍정적인 사람은 긍정적인 기대를 하고, 이런 기대가 긍정적인 행동과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이런 원리는 현재의 우리 생활 속에서 활발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데 있어 ‘긍정의 힘’이 만능일 수는 없지만, 비판적인 시각에서 참고로 할 필요는 있습니다.
어찌 보면 엄밀히 말해 인간이 이 땅에서 사는 한 하나님만 완전히 바라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에 가서 세상만사를 다 끊고 평생을 정진해도 안 됩니다. 아마 죽기 직전에야 다른 것을 더 이상 바라볼 수 없으니 가능할지 모릅니다. 완전히 하나님만 바라본다는 것은 천국에 가서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렇다 해도 믿음으로 염려를 이기고 하나님만 바라보며 범사에 기뻐해야 하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도달해야 할 신앙 목표입니다. 그럼에도 잘 되지 않는 이유는 성도들이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또 설사 파악을 했다 하더라도 사실은 엉터리로 파악한 것을 모르고 오직 현재의 자기 믿음 수준으로만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정말로 노력해야 할 일은 의지적으로 자기 믿음을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현실을 도외시하고 손을 놓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땅에서 살고 있는 한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을 일부러 무시한다고 무시 되는 법은 절대 없습니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판단하여 나름대로 분석하되 그 분석된 것을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필터를 통해 재 여과 시키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 재 여과 작업을 범사에 특별히 현실이 커 보이고 자기는 메뚜기 같아 보일 때에 정말 모든 의지를 동원해서 해야 합니다.
모세는 정탐꾼들에게 그 땅에 들어가서 돌아오는 길에 그 땅의 과일(Fruits of the Land)을 가져오도록 했습니다. 마침 포도 수확기였기 때문에, 그들이 포도송이를 날라도 의혹을 받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 지역의 과일은 너무 거대해서 포도송이 한 개를 나르기 위해서도 8명의 남자가 막대기를 꿰어 양쪽 끝에 메고 와야 할 만큼 컸고, 석류 및 무화과를 나르기 위해서도 각각 남자 1명씩이 필요할 정도였습니다.(민 13:23)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과일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정탐꾼이 이 과일을 가져가면 “과일이 이만하니 먹는 사람들은 얼마나 클까?”하고 사람들을 두렵게 만드는 데 이용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1972년 작품인 감동적인 영화 ‘포세이돈 어드벤쳐’의 내용은 뉴욕에서 아테네로 향하던 초호화 유람선인 포세이돈호가 거대한 해저 지진을 만나 전복됩니다. 즐겁게 성탄절 파티를 즐기던 승객들은 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데, 이때 프랭크 스콧 목사가 나서 선체 상단으로 올라가야 살 수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 중에서 20여 명의 사람들만이 스콧 목사를 따라 전복된 배 위로 위로 향하여 올라갑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승객들은 위로 올라가야 배 밑바닥이라며 희망을 보지 못하고 절망을 바라보고 스콧 목사를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스콧 목사 일행은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기고 어렵사리 배 꼭대기 출구에 다다르지만 증기 밸브가 열리고 주변은 온통 열기로 가득한데 스콧 목사는 그 밸브를 잠그고 죽습니다. 나머지는 구조를 받고 살아납니다. 그러나 따라오지 않았던 승객들은 결국 그 자리에서 몰살당하고 말았습니다. 희망을 바라보는 자만이 불가능 속에서도 가능을 이루어낸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누린다’는 말은 ‘즐긴다’는 말과 뜻이 통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누리며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문제 앞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를 잘 압니다. 그래야 ‘누리며 즐기는 삶’을 보장 받습니다. ‘누리며 즐기자’면 때로는 이 현실을 탈피해 나가야 할 때도 있고, 이 현실 속에서 답을 찾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외형적인 위험이 닥쳤을 때는 그 위험을 피해야 ‘누리며 즐길’ 수 있고, 내면적인 어려움일 때는 그 어려움을 피하지 말고 극복해 내야 비로소 ‘누리며 즐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듯이 믿음으로 환경을 극복한 사람은 그 믿음의 힘으로 인하여 환경을 누리고 즐기며 사는 은혜를 덧입습니다. 그렇게 환경을 누리고 즐기며 사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더 특별한 은혜가 있습니다.
제3대지 : 환경을 믿음으로 보고 이를 극복하여 먹어버리고 누리며 사는 사람은 환경으로부터 오는 문제가 바로 하나님의 섭리하심이라고 깨닫게 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와 평가, 그리고 거기에서 들어난 문제점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여러분, 그러면 누리며 사는 것이 먼저입니까? 아니면 문제에 먹히지 않고 먹어버리는 것이 먼저입니까? 어느 것이 선행되어야 합니까? 먼저 문제를 먹어버려야 누리며 살 수 있지 않으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일의 순서가 그리 되어야 먼저일 것 같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 해답은 다음에서 이어집니다.
그러면 이 시점에서 우리가 다시금 돌이켜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그것은 모세가 정탐꾼에게 지시한 내용입니다.
모세는 정탐에 대한 결과로 우리가 공격할지 말지에 차이가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지시는 그들이 강하든 약하든 상관없이 어쨌든 정복할 것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스파이 임무의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땅에 들어가기 전에 땅의 목격한 것을 ‘보고’하는 것이었고,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인이 사는 그런 강력한 국가를 정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어떤 기적을 일으켰는지를 모든 후세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런 정탐의 본질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습니다. 그 정탐에 대한 ‘보고’를 듣고 ‘평가’와 ‘판단’은 모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평가’와 ‘판단’을 정탐꾼들이 이미 해버리고 백성들 앞에 먼저 발표를 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임무의 본질을 거스르는 행위였습니다. 모세의 지도력에 대한 월권 행위였고, 하나님이 주신 권위에 대한 반역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무모한 일을 저지르게 되었습니까?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가 약화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열 명의 정탐꾼의 잘못은 ‘보고’를 잘못한 것이 아니라 ‘평가’를 잘못한 것이라고 앞서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불신자처럼 자기 지식과 경험만으로 ‘분석’하고 ‘평가’하고 ‘판단’한 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그들은 애급에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모를 때의 습성으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현실과 함께 그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한 번 더 그것을 ‘평가’하는 작업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얼마나 큰지에 관한 인식이 부족했거나 알았더라도 당장 눈앞의 현실에 눈이 어두워 잊어버렸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현실은 현실대로 정확하게 보고 객관적으로 분석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자기가 분석한 내용이 과연 하나님 안에서 바른 것일까 점검을 다시 해본 것입니다. 현실을 도외시하고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에 충만해 있거나 그렇게 되려고 의지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믿음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여전히 현실은 아주 크게 보이고 나는 메뚜기처럼 보일지라도 언제, 어디, 어떤 상황에서도 그 상황의 배후에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줄 아는 능력이 바로 믿음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나중에 여리고 성을 치려 할 때에야 안 사실이지만, 가나안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을 듣고 떨고 있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2장 8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을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급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편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와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의 연고로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상천하지에 하나님이시니라.”(수 2:8-11)
그렇다면 40년 전이던 지금의 가데스 바네아에 있던 때도 그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듣고 떨고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그 때는 가데스 바네아가 홍해에 가장 가깝고 홍해 사건이 일어난 직후라 훨씬 더 떨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여리고성을 치려하던 그 때까지 그 일로 그들이 떨고 있다면 무슨 뜻이 됩니까? 그들은 40년간 줄곧 떨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은 아무리 성읍이 견고하고 거민이 장대했어도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도대체 언제, 어디로, 어떤 모습으로 쳐들어올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왜 떨 수밖에 없었습니까? 가나안 족속은 자기 눈에 보이는 대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는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을 통해 그 군대가 전부 수장되는 것을 목도 했는데 어떻게 안 떨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그저 점술사를 찾거나, 우상에다 대고 자나 깨나 눈에 보이는 것만을 위해 ‘비나이다 비나이다’만 하는 족속들입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참 하나님이 함께 하기는 커녕 알지도 못하니까 아무리 성읍이 견고하고 군대가 강해도 항상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신에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나안의 한 천한 기생 라합도 인정했듯이 그들 앞서 행하며 모든 장애를 제거하고 대적들을 무력화(無力化) 시키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계셨습니다. 그 분 앞에는 그 어떤 것들도 자기 백성들을 위한 선하신 뜻을 이루는데 결코 방해가 될 수 없었습니다. 40년 전의 가데스 바네아나 40년 후의 여리고나 그분에게는 식은 죽 먹기(a peace of cake)이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 백성들로선 가데스 바네아 때가 훨씬 여건이 더 좋았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이후 40년간을 무엇을 하며 지냈습니까? 아무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광야에서 유리하던 신세가 되었지만, 스스로 여전히 ‘메뚜기 신드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저 자고 깨면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불평만 하나님께 쏟아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완악한 백성들을 그래도 불쌍히 여겨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고 반석의 생수를 마시게 해 주셨습니다. 이런 은혜를 이들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고 누리며 살았는데, 이 소식을 들은 주변의 나라와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과연 누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실증적인 사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지금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보고 두려워하고 있다면 무언가 잘 못 되도 단단히 잘 못된 것 아닙니까?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누구를 두려워해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문제에 먹히고 살아야 합니까, 아니면 그 문제를 은혜로 먹어버리고 살아야 합니까?” 지금 우리가 결정할 때입니다.
정작 떨어야 할 사람은 따로 있었는데 떨지 말아야 할 사람이 오히려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겁을 먹고 떨고 있었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에 있습니까? 똑같은 상황을 두고 어떤 사람은 ‘메뚜기 신드롬’에 사로잡혀 먹혀버리고, 어떤 사람은 ‘밥’이라 여겨 먹어버리는 파워를 가졌습니다. 이처럼 마음은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마음에서 풍성을 끌어오는 상상력이 나옵니다. 풍성의 세계는 믿음의 세계입니다. 믿음의 세계는 상상의 세계입니다. 모든 창조는 마음에서 창조됩니다.
경영 컨설턴트인 스티븐 코비(Stephen R. Covey)는 ‘모든 것은 두 번 창조된다.’고 했습니다. 한 번은 마음에서 창조되고, 한 번은 현실로 창조된다고 했습니다. 창조의 비밀은 상상력에 있고 그 상상력의 원천이 바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입니다.(히 11:1) 바라는 것은 바로 상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언제든지 현실이 될 수 있습니다. 과거에 상상했던 모든 것들이 지금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상상력이 곧 창의력입니다. 창의력은 아이디어를 의미합니다. 상상할 수 있을 때 무한한 아이디어가 탄생합니다. 창의력은 곧 창조력입니다. 우리는 상상하는 것을 창조합니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을 결코 창조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내 생각이 내 인생을 결정한다(Thinking for a Change)’고 <생각의 법칙 10+1>에서 설파한 존 맥스웰(John C. Maxwell)이 책에서 소개한 여 교사 카렌 포드(Karen Ford)는 “사람들은 스스로 상상하지 못한 일을 결코 이루지 못할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나이가 들고 처한 환경이 좋지 않더라도 생각을 바꿀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라고 합니다. “사람이 인생에서 원하는 것과 그 사람 사이에 존재는 유일한 것은 그것을 시도하려는 의지와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뿐이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스스로 상상할 수 있는 일은 기필코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상상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상상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상상하는 그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상상합니다. 또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상상한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를 보게 됩니다. 믿으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믿으면 얻게 되고 믿으면 풍성하게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풍성을 끌어오는 영적인 생각인 스피릿 마인드(spirit mind), 세상에서 말하는 마스터 마인드의 비밀을 깨우치십시오. 풍성의 법칙을 공부하면서 반복해서 배우는 것은 ‘영적인 생각’입니다. 풍성을 끌어오는 가장 강력한 마인드는 ‘영적인 생각’입니다. ‘영적인 생각’은 두 사람 이상의 마음이 완벽한 조화의 정신으로 함께 섞이는 과정을 통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각’의 비밀은 조화를 이룬 두 마음이나 세 마음이 함께 연합될 때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솟구쳐 나온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생각’은 놀라운 일을 이루는 강력한 힘인 것입니다. ‘영적인 생각’은 뜻을 같이 하는 마음들이 함께 만남으로써 서로의 마음을 자극하고 풍요롭게 한다는 뜻입니다. ‘영적인 생각’의 비밀을 가르쳐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영적인 생각’의 비밀 중에 하나는 ‘영적인 생각’을 좋은 일에 사용할수록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나쁜 일에도 사람들이 연합할 수 있습니다. 나쁜 일에도 뜻을 같이 하면 일정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법칙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사용하는 일에 그 결과가 나타납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 가운데 열 명의 정탐꾼도 ‘영적인 생각’ 그룹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마음을 원망하는데 사용했고, 그 결과 비참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 그리고 모세는 또 하나의 ‘영적인 생각’의 그룹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좋은 목적을 위해 사용했습니다. 그 결과 창조적 소수에 불과했던 그들을 통해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놀라운 일이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좋은 목적을 위해 모인 ‘영적인 생각’을 가진 그룹을 축복하십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도 한결같은 ‘영적인 생각’을 가진 그룹이었습니다. 다윗과 함께 했던 400명의 무리들도 또한 ‘영적인 생각’을 가진 그룹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다윗 왕국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자, 그러면 누리는 것이 먼저냐, 먹어버리는 것이 먼저냐에 대한 해답을 여러분 스스로 찾았을 줄 압니다. 만약 아직도 가물가물하다면 지금 확실히 자리매김을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후 아담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영장’의 특권을 주셨습니다. 이미 만들어주신 환경을 누리며 사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그 환경을 지배하며 사는 동안에 발생하는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그 문제를 영장으로서의 권세를 가지고 ‘다스리는 영장’으로서 먹어버리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파에 찌들려 환경의 지배를 받아버린 인간이 영장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약화된 때문에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문제가 커 보이기에 먼저 문제를 먹어야 그 다음에 누리며 살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제 의문이 풀렸습니까? 환경을 믿음으로 보고 이를 극복하여 먹어버리고 누리거나 즐기며 사는 사람은 환경으로부터 오는 문제 그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섭리하심이라고 깨닫게 된다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그들에게서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광야, 밥, 고기, 더위, 추위가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그 문제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광야가 바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향래 가기 위한 통과의례로 하나님이 동행하심을 깨닫는 아주 귀한 영적 훈련 장소였고, 밥의 문제는 관여 한 복판에서 농사를 짓거나 수고를 하지 않아도 만나로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고기의 문제가 메추라기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이었습니다. 어디 그 뿐이었습니까? 낮의 더위를 구름기둥으로 시원하게 그늘을 만들어 주시고, 밤의 추위를 불기둥으로 따뜻하게 해 주신 능력을 깨닫게 해 주시려는 것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됩니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을 앞에 두고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나 또는 극복하며 누리며 즐기는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닫게 됨을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문제 앞에서‘먹느냐 먹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갈등하며 아직도 문제로 남아 괴롭히고 있습니까? 지금 당장 “그 문제는 바로 우리의 밥이다! 먹어버리자!”라고 하나님을 믿는 확실한 믿음으로 선포하십시오. 그 믿음의 선포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옆 사람과 서로 이렇게 선포해 보겠습니다. 서로 마주보고 선포해 보십시오.
(선창) “문제는 이제 우리의 밥이다! 먹어버리자!”
(합창) “문제는 이제 우리의 밥이다! 먹어버리자!”
이번에는 다른 쪽 사람과 다시 한 번 더, 크게!
(선창) “문제는 이제 우리의 밥이다! 먹어버리자!”
(합창) “문제는 이제 우리의 밥이다! 먹어버리자!”
그렇습니다. 환경을 믿음으로 극복하여 먹어버리고 누리거나 즐기며 사는 사람은 환경으로부터 오는 문제가 바로 하나님의 섭리하심이라는 깨달음을 얻는 은혜와 복을 얻습니다.
결론
하나님은 성도들이 죄악과 사단과 죽음 앞에 당당하게 서기를 원하십니다. 아니 이미 그렇게 할 수 있는 자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성도란 자신이 그렇게 바뀐 것을 확신하고 그대로 사는 자를 말합니다. 비록 성도의 현실적인 모습은 여전히 별 볼 일이 없고 세상은 엄청 크게 보이고 자기가 가진 것은 너무 형편없을지라도 그렇습니다. 성도가 커진 것이 아니라 신자의 속에는 이미 자기와 일 대 일로 생명을 맞바꾼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보배로 임재 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품 안에 안겨 보호를 받고 있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그리스도인을 대면하면 그리스도인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그 빛을 볼 수 있게 됩니다. 말하자면 불신자가 그리스도인을 보면 저들이 먼저 사시나무 떨듯이 떨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재벌 회장이든 대통령이든 그들 속에 예수가 없기에 참 그리스도인을 보면 자기들이 오히려 메뚜기처럼 여겨지고 먼저 고개를 숙이며 ‘저도 당신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속에 보물을 담아 두셨습니다. 마음을 바르게 탐구하고, 마음을 올바로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마음의 정원을 잘 가꾸십시오. ‘영적인 생각’의 그룹을 형성하십시오. 가정이 하나가 되게 하십시오. 부부가 하나가 되고, 자녀들과 하나가 되도록 기도하십시오. 교회 안에서 우리는 같은 말, 같은 뜻, 같은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위대한 뜻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누구보다 하나님과 연합하십시오. 성삼위 하나님과 연합할 때 상상할 수 없는 인생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일 때마다 성삼위 하나님을 초청하십시오. ‘영적인 생각’ 곧 풍성을 위한 마인드입니다. 풍성함을 끌어오는 마음의 법칙을 통해 풍성한 미래를 창조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생각’은 최근에 정립된 경영이론이지만, 벌써 3500년 전에 이미 모세나 여호수아와 갈렙에 의해 실천되고 있었음을 봅니다.
인간은 선의든 악의든 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나쁜 것을 과장하기보다는 좋은 것을 과장하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성공하는 사람과 실패하는 사람에게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성공하는 사람은 꿈을 과장하고, 비전을 과장하며, 하나님의 약속을 과장합니다.
그러나 실패하는 사람은 실패를 과장하고, 적을 과장하며, 고통을 과장합니다. 본문에서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 10명의 정탐꾼이나 여호수아와 갈렙, 모두 과장된 표현을 사용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먼저 10명의 정탐꾼은 스스로를 ‘메뚜기’라고 평가 했습니다. 이 얼마나 엄청난 과장입니까? 인간이 아무리 작아도 메뚜기 같겠습니까? 한편 적들은 ‘거인’이라고 과장합니다. 이렇게 적을 과장하고 실패를 과장한 이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적들을 향해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큰소리를 칩니다(민 14:9). 이것도 엄청난 과장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작고 약하다 한들, 어찌 밥이 되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과장은 ‘거룩한 과장’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승리에 대한 과장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적들을 향해 ‘우리의 밥’이라고 외쳤던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땅에 당당하게 입성하는 주인공이 됐습니다. 다윗은 어떻습니까? 골리앗을 향해 ‘너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담대히 선포했을 때 승리하는 인생이 될 수 있었습니다. 홍해 바다쯤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과장 했던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구원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과장을 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제 ‘거룩한 과장’을 선포하기 바랍니다. 그때 여러분의 삶의 현장은 더 이상 꿈이 아닌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의 비전이 거룩한 과장을 선포하는 여러분의 삶을 통해 이뤄질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밥이다.”
‘먹느냐 먹히느냐.’ 그것은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이미‘먹어버리는 것’으로 판가름이 나 있던 것입니다. 처음 시작할 즈음에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대사를 소개하면서 우유부단할지, 쾌도난마처럼 시원시원하게 결단을 내릴지 한 번 들여다보자고 했습니다. 우유부단이나 저돌적인 것만이 아닌 영적인 결단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어떻습니까? 정말 시원시원하지 않습니까? 그들에게는 망설임이 없이 “먹어버린다!”는 단호한 믿음으로 담대하게 선포하는 ‘영적인 결단’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에게 가나안 복지는 회복된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아울러 우리에게도 이미 회복된 에덴동산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광야와도 같은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에덴동산은 오직 믿음으로서만 볼 수 있고, 누리며 살아야 하는 권리를 마땅히 행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문제가 문제일 수 없고 그 문제를 믿음으로 먹어버리는 은혜를 덧입는 것입니다. 우리 다시 한 번 더 선포해 보겠습니다. 옆 사람과 서로 마주보고 선포하십시오.
(선창) “문제는 이제 우리의 밥이다! 먹어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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