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에 국민의식이란 없고 종교가 분리 요인이 되고 있던 때에 아크바르는 화목한 국민국가를 수립하려고 노력하였다. 서로 다른 종교를 초월하여 인도의 공통된 국민성을 생각하였다. 전쟁을 피하거나 싫어하지 않았지만, 칼이나 전쟁에 호소하는 것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더 지속적이라는 것을 알아차린 인물이었다. 따라서 그는 힌두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하였디.
지배 민족인 소수의 모슬렘은 압도적 다수의 힌두와 대립상태에 있었다. 소수의 모슬렘의 통치조직은 미약했으므로 힌두와 화해하지 않고는 무갈제국의 유지와 평화는 보장되기 어려웠다. 아크바르 대제는 인도의 지배자는 모슬렘만의 왕이어서는 안 되며 힌두와 모슬렘이 함께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전체적인 충성의 근거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아크바르는 북인도의 가장 강력한 힌두세력인 라즈푸트족의 공주와 결혼했다. 더 나아가 라즈푸트족 족장들을 지사나 군지휘관, 또는 정부의 책임있는 자리에 임명하였다. 또 그는 그가 정복하여 퇴위시킨 힌두 지배자의 가족을 노예로 만들어 버리는 정책을 폐지하기도 하였다. 비 모슬렘에게만 부과해 왔던 성지순례세와 인두세(人頭稅, Jizya)를 폐지하였다(*인두세는 아프리카에서도 모슬렘 세력 확장의 중요한 미끼가 되었다. 즉 모슬렘으로 개종하는 아프리카인에게는 세금을 면제했고 많은 현지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당시 제국의 주요한 세원이었던 이들 세금을 폐지함으로써 정부는 엄청난 재정 손실을 보았으면서도 대제는 그러한 희생 위에서만 인도에 하나의 국민국가가 수립될 수 있다고 믿었다. 대제의 관대하고 화해적인 태도가 힌두, 특히 라즈푸트족을 그에 대한 철저한 지지자로 바꾸어 놓았다. 아크바르의 무갈제국이 카불에서 벵골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라즈푸트족의 협조 때문에 가능했다. 이와 같은 비모슬렘에 대한 관용정책은 모슬렘에게는 불만이었으며 가끔 아크바르에 대한 반란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3. 무갈제국의 융성
아크바르를 계승한 왕자는 힌두 라즈푸트족의 왕비에서 태어난 쌀림(Salim)인데, 페르시아식 호칭인 자항기르(Jahangir; 세계를 장악한 자, 1605-27)란 이름으로 등극하였다.
자항기르 시대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영국 상인들이 인도에 진출한 일이었다. 영국인들이 처음으로 무갈 황실에 나타나 공손하게 교역의 허락을 요청했던 것은 1608년의 일이었고 4년 후에는 무갈 황제의 명령에 의해 영국동인도회사가 수라트(Surat)에 상관(商館)을 설치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자항기르는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포르투갈인들의 경쟁자로서 영국 상인을 지지하고 나섰다. 포르투갈인들과는 달리 홀랜드와 영국의 상인들은 인도 내륙으로 깊숙이 침투하기를 열망하였으며 아그나, 빠트라 등지에까지 무역 근거지를 세울 수 있었다.
자항기르의 장남 쿠스랍이 펀잡으로 도망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잡혀서 맹인이 되어 옥사하였다. 이때 쿠스랍을 도운 시크족의 제5대 구루(Guru, 스승)인 아르잔이 쿠스랍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 자항기르는 아르잔에게 많은 벌금을 부과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자 처형해 버리고 말았다. 시크족이 그 후 무갈제국에 적극적으로 반대의 자세를 취하면서, 새로운 인도의 지배자로 군림하는 영국 세력에게 협조의 태도를 보이게 된 원인(遠因)을 대개 이 사건에서 찾고 있다.
첫댓글 하루에
두 번씩이나 올리시느라
수고 많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