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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 인민해방군(폭도) 사령관 계보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 이광후 사무처장
이글은 제주4‧3정립연구‧유족회에서 발간한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2014. 6. 30 발행)
2집에 수록된 것이다.
1. 1대 사령관 김달삼
2. 2대 사령관 이덕구
3. 3대 사령관 김의봉
4. 4대 사령관 고승옥
5. 5대 사령관 허영삼
6. 6대 사령관 김성규
‣1대 사령관 김달삼(金達三, 1924~1950, 본명 이승진․李承晉, 대정 면 영락리)
“바로 저 앞집이 김달삼의 생가요 부친과는 면식이 좀 있어서 1944년 가을 달삼이가 결혼할 때 여기 내려와서 식을 올렸소. 내가 그 피로연에 참석했던 것이 1944년 가을이 분명하니까. ‘잠들지 않는 남도’ 등의 글에서 김달삼이 일본 학도병이라는 애기는 사실 무근이지. 일본학도병으로 있었다면 대동아전쟁 말기에 결혼한다고 고향에 보내줄 리가 있겠는가? 내가 17~18년 전에 일본에서 글로 이 점을 밝힌 적도 있지만, 그는 아마 1925년이나 1926년생일 거요.
김달삼과 같은 학교를 다닌 사람(이종우)의 말을 빌면 김달삼과는 후꾸지야마에 있는 경도 성동중학교 동기동창생으로 달삼이는 머리좋고 항상 품에다 단도를 품고 다니며 일본놈들의 오야붕 역할을 했다고 해. 이종우가 1944년 3월에 광주사범학교로 진학하던 해 4월에 달삼이는 일본 중앙대학 예과로 진학했다고 말을 했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결혼 후 대구로 가서 10월인민항쟁 후인 46년 말 11월 경에 모슬포로 돌아왔을 거야. 그때 그의 부친이 부탁하여 대정중학교 교사로 내가 다리를 놔줬는 데, 그 학교에는 불과 3~4개월 있으나마나 했을 거로구만. 달삼이가 대구 10월 인민항쟁 과정에서 일어난 대구대학교 시체사건(주; 대구대학교 의과학생들이 시체를 끌고 가두데모를 전개했다 함)의 주모자로 일하는 것을 봤다는 사람이 있다고도 하니까. 1946년 12월에 남로당이 결성되면서, 나는 대정면책으로 있었고, 달삼이는 대정면 조직부에 있었지. ”
- '이제사 말햄수다’ 189~190쪽-
“• 본명 이승진. 일본중앙대학 전문부 중퇴. 학병 출신. 장인이 강문석임. 머리가 좋고 항상 품에 단도를 차고 다니는 습관이 있으며 보스 기질이 있었다. 식구들은 대구에서 포목장사를 하여 재산을 모음. 46년 10월 대구인민항쟁 때 대구에서 활동하다 제주로 들어옴. 이때 잠시 고향 대 정중학교에서 교편을 잡음
• 대정면당 조직부장(47년 초), 제주도당 선전부장(47년 말), 제주도당 군 사부 책임(48년)
• 1948년 8월 조선인민대표자대회(해주)에 참석차 월북, 부인은 일본을 거쳐 월북하고 그후 부모와 형도 월북
• 6‧25 때 자신의 유격대(766)와 함께 삼척지구로 남하한 후, 자신의 부 대가 섬멸 당할 때 전사했다고 알려짐
- ‘이제사 말햄수다’ 237쪽 -
“분단시대의 정치가. 제주 4․3사건 때 군사부(軍事部) 책임자. 인공(人共) 빨치산 사령관. 가명으로 김달삼, 혹은 이상길(李相吉)이라고 썼으며 본명은 이승진(李承晉). 본관은 고부(古阜)이며 대정읍 영락(永樂)리 978번지에서 이평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달삼이란 이름은 그의 장인 강문석(姜文錫)이 일제 강점기에 중국 상해(上海)에서 항일운동을 할 때 쓰던 가명이다. 이 가명을 사위에게 쓰도록 하면서 제주에 가서 공산 혁명을 일으키도록 지시했다.
강문석은 박헌영(朴憲泳) 직계 항일운동가로서 끝까지 변절하지 않은 공산주의자이며 박헌영은 김성삼(金成三)이라는 가명을 썼다.
김달삼은 유년시절 부모를 따라 대구(大邱)로 이주, 이는 작은 아버지 이용근이 대구에서 상업을 하며 비교적 잘 살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구심상소학교를 거쳐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얼마 없어 아버지를 따라 도일(渡日), 오사카(대판) 이쿠노구(生野區)에 살면서 교토(경도, 京都)의 성봉(성봉, 聖峰)중학교를 거쳐 토오쿄에 있는 중앙(中央)대학 1학년을 수료하였다. 1945년 1월 일본에서 강문석의 큰 딸 강영애(姜英愛)와 결혼, 강영애는 대정읍 인성(仁城)리 1661번지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 나와 오사카시 이쿠노쿠 저사야(猪飼野)란 곳에 살고 있을 때였다. 조국이 광복되자 강영애를 두고 귀국, 대구로 돌아와 화물 운송 사업을 하던 부친 집에 살았다. 서울에서 활동하던 남로당 당수 박헌영 등과 같이 당(黨) 중앙위 선전부장인 장인 강문석과 비밀리에 연계되고 있었다.
이 때 남로당에 입당하여 철저한 공산주의자로 변신된 상태였다. 1946년 강문석의 소개로 공산당 경북 대표 장적우(張赤宇: 경북 칠곡), 경북인민위원회 위원장 이상훈(李相薰: 경북 대구), 동위원회 보안부장 이재복(李在福: 경북 영일), 농민동맹 경북위원장 장하명 등을 알게 되고 특히 남로당 군사부장 이재복과 교분이 두터웠다.
이재복은 1948년 제주 4․3사건 때 군사부원 이중업(李重業)을 대동하고 강문석과 같이 제주에 잠입, 김달삼을 집중 지도한 인물로 알려졌다. 1946년 이재복의 휘하에서 지도를 받으면서 대구 10․1 폭동에 적극 가담하여 이재복의 신임을 받았다. 이때 그는 고용준(高龍俊), 박일환(朴馹煥) 등과 함께 대정읍 하모(下摹)리에 내려와 부두 하역업을 하던 숙부 이창근의 집에 거처를 잡아 아버지는 화물차 1대를 구입, 운영하고 김달삼은 새로 개설된 대정(大靜)중학교 사회과 교사로 재임하면서 막스․레닌주의와 유물사관을 가르쳤다. 교사로 재직 중에 남로당 대정면 조직부장으로 1947년 3․1 사건을 배후에서 조종, 남로당 제주도당책이 되어 한라산에 지휘부를 설치하고 군사부 책임자가 되었다.
1948년 4월 3일을 기하여 제주도를 남로당이 완전 장악한다는 계획 하에 무장 투쟁을 주도하였다. 동년 4월 28일(* 김익렬 기고에서는 4월 30일) 국방경비대 제9연대 제2대대장 오일균(吳一均)의 주선으로 대정면의 오지 구억(九億)국민학교에서 연대장 김익렬(金益烈)과 평화회담을 벌였으나 결렬되었고 후일 월북했다.
동년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개최된 인민대표자대회에 참가, 이때 제주에서 참가한 자 중에서 강규찬(姜圭贊)과 고진희(高眞姬)부부, 이정숙(李貞淑), 안세훈(安世勳) 등과 함께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국회의원)에 선출되었다. 김달삼은 ‘제주4․3투쟁에 관한 보고’를 하여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국기훈장 2급을 수여 받았다. 제1기 대의원들은 동년 9월 2일 평양에 모여 인공(人共) 창건을 위한 이른바 ‘조선최고인민위원회의 제1차 회의’를 개최, 김달삼은 이때 김일성(金日成), 허헌(許憲) 등과 함께 49명으로 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헌법위원회 헌법위원으로 선정되었다.. 이로써 9월 9일 인공 수립을 선포한 것이다.
월북한 그 뒤 김달삼의 행적은 여러 갈래의 설(說)이 전해진다. 강동(江東)정치학원에서 빨치산 간부 교육을 받은 뒤 인민유격대 태백산지구 총수(總帥)가 되어 남하, 유격투쟁을 벌이다가 사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1990년 러시아에서 한국에 온 강동정치학원 원장이었던 박병율(朴秉律 )도 “강동정치학원에서 지리산 빨치산 지도자 이현상(李鉉相), 제주도 빨치산 지도자 김달삼 등을 포함해서 빨치산 간부들을 교육시켰다.”고 말했다.
김달삼이 남하한 것은 1949년 8월 초로 알려졌다. 직책은 인민유격대 제3병단(태백산지구)사령관, 그는 3백명의 유격대와 함께 경북 영덕(盈德), 안동(安東)지경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였다.
김달삼의 죽음에 대해서도 여러 설이 있다. 군경 자료로는 1950년 3,4월에 태백산지구에서 사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경찰 자료로는 “ 1950년 4월 28일 경찰부대에 의해 강원도에서 사살”된 것으로, 군(軍) 자료는 “ 1950년 3월초 국군 22연대에 의해 경북 영덕 북방지역에서 사살”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효수(梟首)된 김달삼의 사진을 보고 그 얼굴이 김달삼이 아니라는 증언도 나왔다. “사령관 김달삼과 부사령관 남도부(南道富) 등 10명만이 1950년 4월3일 월북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 제7유격대 사령관으로 남하한 뒤 태백산지구 제1군단 부사령관으로 유격대를 지휘, 1950년 3월1일 울진(蔚珍)군 평해면의 백암산(白岩山)전투에서 월북을 시도하던 중 3월 21일 오후 2시경 정선(旌善)군 군북면 고창곡 북쪽 1km 지점에서 국군 제336부대에 의해 20시간 교전 끝에 사살되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 직접 협상을 벌였던 김익렬 장군은 그의 유고에서 “태백산의 공비(共匪)들이 김달삼을 살해하여 투항하였다는 경우도 있었고 김달삼부대를 포위, 섬멸시키고 김달삼의 사체를 찾아냈다는 경우 등등 10여회에 걸쳐 ‘사체 소동’이 있었다”고 회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7~8회에 걸쳐 사체 확인을 했지만 “결과는 공명심을 노린 부대장이나 정보관이 꾸며낸 조작극이었으며 끝내 김달삼의 사체는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혀 더욱 의문을 증폭시켰다.”
- ‘20세기 제주 인명사전’ 102~103쪽 -
김달삼(金達三); 본명은 이승진, 대정읍 영락리 출신, 일본 복지산(福知山) 예비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종군하다 해방 후 귀국했다. 대정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남로당 대정면당 조직부장을 맡았다. 남로당의 거물이자 그의 장인인 강문석(姜文錫, 대정읍 보성 출신)의 영향을 많이 입었다. 그 뒤 남로당 제주지부당 총책으로 있으면서 48년 4월 봉기 이후 군사부장을 맡았다. 48년 8월 해주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제주 4‧3투쟁에 관한 보고를 했다. 그 뒤 강동정치학원을 졸업하고 제7유격대 사령으로 월남하여 태백산 지구에서 1군단 부사령으로 유격대를 지휘했다. 50년 3월 1일 울진군 평해면 백암산에서 월북하려고 북상했다 3월 21일 오후 2시경 강원도 정선군 군북면 고창곡 북쪽 1km 지점 반론산 부근을 거쳐 올라가다 국방군 336부대와 20시간의 교전을 벌였다. 그때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라리연구원의 ‘제주민중항쟁 1’ 466쪽
※제주자유수호협의회의 ‘제주도의 4월3일은 2집 26~30쪽, 57~78쪽 참조
‣2대 사령관 이덕구(李德九, 1920~1949, 조천면 신촌리)
제주의 최대 참사 4‧3 폭동은 1948년 4월 3일부터 1952년 4월 2일까지 9년간 인민해방군의 살육과 방화, 강탈 등 온갖 만행이 빚어졌다. 4‧3의 비극은 인민해방군 사령관의 소영웅심으로 배가(倍加)됐다. 그들은 역사의 죄인(罪人)이다.
1대 사령관은 김달삼(金達三), 2대 사령관은 이덕구(李德九), 3대는 김의봉(金義奉), 4대는 고승옥, 5대는 허영삼, 6대는 김성규이다. 정권수 또한 사령관급 폭도 대장이다.
2대 사령관이 김대진(金大珍)이라는 주장도 있다. 나종삼은 ‘제주4‧3사건의 진상’ 212~213쪽에서
“무장대 사령관 김달삼이 제주도를 떠나자 후임은 김대진이 맡았다. 김달삼 후임에 대하여 김민주(金民柱, 본명은 김용남)는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무장부대 최고 지휘자는 김달삼-남진-이덕구 순으로 이어진다. 즉 남진은 김달삼과 이덕구 사이에 있던 군사책으로 제주사람이다. 남진은 가명인데 본명은 모른다. 그는 48년 가을 경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 그 전에 관음사전투를 지휘했는데 패배의 책임으로 강등 당했었다.’
위의 증언을 요약하면 김달삼의 후임은 남진이라는 가명을 쓰는 사람이며 본명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 증언자와 김봉현의 공저인 ‘제주도 인민들의 공저인 ’제주도 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89쪽에는 군책이 김달삼-김대진-이덕구로 이어졌다고 명시하므로서 남진의 본명이 김대진임을 말하고 있고, 4‧3연구소에서 펴 낸 증언자료집에도 김달삼 후임이 김대진으로 나와 있으며, 대정면당 위원장을 역임했던 이운방은 “양자회담이 있은 직후 김달삼이 모슬포로 내려와 회의를 소집했는데, 나는 연락을 받고 갔으며, 여러 동지들과 같이 부대장(김대진)을 동반한 김달삼을 만났다. 연대장(김대진)은 그해 가을 토벌대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자 일본으로 갔는데, 대판에서 나에게 안부편지를 전해왔다”고 하였다. 김대진은 김달삼의 후임 사령관으로써 전투를 하다가 토벌대에 체포되자 이덕구가 유격대 사령관을 맡았으며, 김대진은 전사한 것이 아니라 석방되자 일본으로 도피한 것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이덕구는 3대 사령관이다.”
그러나 제주4․3연구소가 펴낸 ‘이제사 말햄수다 1’권 237쪽에
김대진에 대해서는 “•1948년 4월 15일 조직부 개편될 때 군사부 부대장 •1948년 가을 체포되었을 때 대정면 김성만과 일본으로 갔다함”으로 됐다.
반면 이덕구에 대해서는 250쪽에 “•1948년 8월 해주 대표자대회 참가를 기점으로 지도부가 교체될 때 제2대 유격대장 •군사부 총책이 된 후, 그가 지휘한 인민유격대는 위미리 전투에서 단 한 번 실패했을 정도로 지도력이 뛰어남”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 ④’ 417쪽에
“신촌리는 김달삼에 이어 무장대 총책을 지낸 이덕구(李德九)의 고향이다. 또 무장대 간부였던 김대진(金大珍)도 이 마을 출신이었다”며 이덕구가 2대 사령관임을 분명히 했다.
특히 김대진이 체포될 즈음인 1948년 10월 24일 이덕구는 대한민국 정부에 선전포고를 했다. 때문에 2대 사령관은 이덕구이다.
"신촌리는 김달삼(金達三)에 이어 무장대 총책을 지낸 이덕구(李德九)의 고향이다. 또 무장대 간부였던 김대진(金大珍)도 이 마을 출신이었다. 몇몇 젊은이들은 이들을 따라 산에 오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신촌리는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다."
"군사부는 모두 4개 지대로 나뉘었는데 제1지대(조천면 관할)는 이덕구(신촌리 출신), 제2지대(구좌면)는 김대진(신촌리 출신), 제3지대(남원면)는 김의봉(金義奉, 와흘리 출신), 제4지대(대정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오아무개(대정면 출신)가 각각 맡았습니다."
-‘4․3은 말한다’ 4권 417쪽, 424쪽 -
“남로당전남도당부 제주도위원회 군사부와 노동부책”
- ‘4․3은 말한다’ 1권 535쪽
• 큰 형(이호구)의 도움으로 작은 형(이좌구)과 함께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임명관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입대하여 관동군 소좌로 복무하다 대좌로 제대함
• 8‧15이후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제주에서 일하던 작은 형(이좌구)이 블러서 귀향
• 1946년 3월에 개강한 조천중학원에서 1947년 3월 총파업 이전까지 역사 와 체육 담당교사로 재직
• 1947년 3월1일 , 3‧1사건 이후 검거로 한때 은신했다 하나 그 시기에 옥 살이 경험이 있었음. 그때 고막이 파열되어 청각장애로 고생함
• 1948년 8월 해주 대표자대회 참가를 기점으로 지도부가 교체될 때 2대 유격대장으로 군사부 총책이 됨
• 군사부 총책이 된 후, 그가 지휘한 인민유격대는 위미리 전투에서 단 한 번 실패했을 정도로 지도력이 뛰어남
• 항쟁이 악화되어가던 시기(1949.6.7.)에 화북지서에서 출동한 토벌대에 포 위되어 격전 끝에 자살한 것으로 추정됨
• 부모, 아들, 딸, 부인 등 일가 50명이 몰살당함
• 형 이좌구는 당시 입산 후 도일하여 88년 사망 ”
- ‘이제사 말햄수다’ 250쪽 -
“분단시대 남로당 제주도지부 군사부장. 4․3 당시 인민유격대장. 산북 조천읍 신촌리의 넉넉한 집안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대판, 大阪)의 일신(日新)상업학교를 거쳐 입명관(立命館)대학에 진학, 학병(學兵)으로 입대, 일본군 소위로 임관되어 복무 중 일본이 패전하자 아오모리(청삼, 靑森)에서 귀향했다.
해방된 조국은 사상적 대립과 갈등이 심한 가운데, 조천면 민청(民靑) 책임자로서 새로 설립된 조천중학원의 역사․체육 담당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얼굴은 살짝 곰보이면서 미남형이었다. 늘 목소리가 컸으니 이는 귀국 후 미군정에 의해 구인(拘引)되어 고문을 받을 때 고막이 파열되어 귀가 멀어졌기 때문이라 한다.
1948년 4월 3일 남로당 제주도당부에서 5․10 선거를 거부하는 봉기를 일으키자 동년 5월 말경 입산, 무장대의 지휘관으로 활동하였다. 처음 인민유격대 3개 지대(支隊)의 병력 약 1천5백 명을 김달삼(金達三)이 지휘할 때 그는 3․1지대 책임자로 무장대를 지휘하고, 동년 8월 군사 총책 김달삼이 월북, 해주(海州 )대회에 참가함으로써 이를 이어받아 무장대를 이끌었다.
국군 제2연대가 들어와 군경 합동작전으로 이를 최강공책으로 소탕하자 부대가 궤멸 직전에 이르러 지리산(智異山) 방면으로 탈출을 기도하던 중이었다. 해안 가까이 하산한 것을 주민의 신고로 화북에서 출동한 경찰토벌대에 의해 1949년 6월 9일(*7일 오기) 16시 화북지구 623고지(高地)에서 사살되었다. 이 소탕전에서 이덕구의 연락병 2명을 생포하고, 2명이 귀순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이후 유격대의 지휘부는 상실되었다. 주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기 위하여 관덕정 앞 제주경찰서 정문 입구 서쪽에 이덕구의 시신을 걸쳐 세워 전시하였다.
한편 북한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는 그에게 국기훈장 3급을 서훈(敍勳)하였다. 한편, 북한은 1990년에 와서 ‘조국통일상’을 제정, 이를 이덕구에게 수여하고 소위 애국열사능(愛國烈士陵)에 이덕구 묘비를 건립하였다. 이 자리에는 북송한 이좌구(李佐九)의 아들(이덕구의 조카) 등 9명이 참석하였다. 더구나 이러한 내용을 조국통일신보(1990.12.15.)에 대서특필로 부각시켰다. ”
- ‘20세기 제주인명 사전’ 321쪽 -
“이덕구의 10월 공세는 48년 9월 21일부터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을 정식으로 승인받는 일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다. 장면, 조병욱, 정일형, 모윤숙, 김활란 등의 대표단의 노력했으나 승인에 불리한 사건이 터져 나왔다.
그 하나가 4‧3 폭동이 10월 초에 다시 터지는가 하면 10월 19일 여수 14연대에 의해 여수‧ 순천 반란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문에 ‘뉴욕타임스’지는 “서울의 미국 관리들이 한국은 완전히 붕괴 직전에 놓여 있다”고 본다고 보도할 정도였다.”
이덕구(李德九); 학병출신(일군 소위출신?). 남로당 제주당부 군사부장, 제주 인민유격대 1연대장, 제주 인민해방군 사령관. 49년 6월 7일 화북 삼양지역에서 최후까지 계속 싸움. 전사하여 그의 시체가 관덕정 마당에 걸림.
-아라리연구원의 ‘제주민중항쟁 1’ 479쪽
※제주자유수호협의회의 ‘제주도의 4월3일은?’ 2집 34~36쪽
‣3대 사령관 김의봉(金義奉, 1924~1953, 조천면 와흘리)
“무장은 군사부만 갖고 있었습니다. 군사부는 모두 4개 지대로 나뉘었는데 제1지대(조천면 관할)는 이덕구(신촌리 출신), 제2지대(구좌면)는 김대진(신촌리 출신), 제3지대(남원면)는 김의봉(金義奉. 와흘리 출신), 제4지대(대정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오아무개(대정면 출신)가 각각 맡았습니다. 이중 1지대만 1백 명 안팎이고, 나머지는 50 명 가량의 병력이 있었습니다.”
- ‘4‧3은 말한다 ④’ 424쪽
“김의봉 북제주군 와흘 출신. 인민유격대. 이덕구가 사살된 뒤 유격대원을 통솔하였고 각종 투쟁으로 인민군 진격에 호응하자는 정치사업 진행(인민유격대는 56년까지 활약).”
- 아라리연구원의 ‘제주무장투쟁 Ⅰ’ 인명목록 471쪽
‘이제사 말햄수다’ 1, 243쪽
“• 삼양 간이학교 졸업(4년제)
• 일제 때 와흘리 청년회 단장으로 마을에서 신임을 쌓고 8․15 이후 와흘 리장, 인민위원장을 겸함
• 입산 후 1949년 6.7. 이덕구가 체포되고 나서 이어 사령관이 됨.”
“조천초등교를 습격한 후 산간을 따라 공비들이 이곳(속칭 ‘산란이’)까지 도피할 수 있었다는 것은 이 지방지리에 익숙한 자가 인솔하고 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잔비 두목 김의봉(金義奉)의 정체가 포착된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조천면 와흘리 출신 김의봉은 50m 정도의 새끼줄을 머리에 매달아도 끝이 땅에 닿지 않을 정도로 몸이 날쌔어 구상나무밭을 날고 다니다는 소문이 나고 있던 자였다.”
-강용삼‧ 이경수 ‘실록 제주백년’ 670~671쪽
“동태운 총경 휘하 박원협 경위가 직접 지휘하는 사찰유격중대가 15일 하오 11시 30분경 조천면 와흘리 부근 산록에서 적의 군사총책 김의봉(金義奉)이가 지휘하는 약 20명의 무장공비를 포착, 약 40분간에 걸쳐 치열한 교전 끝에 적의 수괴 김의봉(조천면 와흘리 출신, 당 32년)과 중요 간부 강봉오(姜奉吾, 별명 강□수, 조천면 와흘리 출신, 28)외 여비 1명을 사살하고…”
-제주신보 1953년 4월 17일, ‘제주4‧3사건자료집 3’ 235쪽 -
※김의봉;1951. 1. 15 현재 군사책, 강재훈의 ‘제주4․3의 실상’ 273쪽, 재산잔비 명부 번호 33, 1948. 6월 입산
※제주자유수호협의회의 ‘제주도의 4월3일은?’ 3집 20쪽
% 김의봉은 현재 제주4.3평화공원에 희생자로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4대 사령관 고승옥(高升鈺, ?~1950, 대정면 보성리)
"대정고을의 특징은 경비대 9연대와의 관계이다. 9연대 주둔지인 모슬포 대촌병사(大村兵舍)와 인접한 마을이기 때문인지 비교적 입대자가 많았다. 경찰의 주목을 받자 도피처로서 입대한 사람도 있었다. 이들 중 탈영해 무장대에 합류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고승옥(高升玉, 보성리, 1925년생)은 대표적인 예이다.
고승옥에 대한 모든 증언자들의 기억은 우선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다는 것이었다.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대판상업학교를 다니던 고승옥은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자 아예 지원병으로 나서 요카렌(豫科鍊) 교육을 받은 후 전투기 조종사가 됐다. 해방후 인민위 활동을 하던 그는 경찰과 서청에게 쫓기자 경비대 1기생으로 입대했다. 그의 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고승옥은 검도와 유도 유단자인데다 인물이 좋아 행사 때마다 앞장세워졌고, 송요찬(宋堯讚)은 모병을 할 때 그를 꼭 대동했다 한다.
또한 한꺼번에 3계급 특진하는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경비대 4기생 출신의 양성팔(梁成八, 71. 제주시 용담2동)씨는 '그는 뜀박질도 아주 잘했는데 입대 전 경찰에 쫓길 때 총을 겨누자 성담을 훌쩍 넘어 도망쳤다고 한다. 훈련 때 나도 2~3등 안에 들었는데 그에게는 당해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고승옥은 예상과 달리 평균 이하의 다소 왜소한 체격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그간 알려진 것처럼 고승옥은 1948년 5월20일 사병 41명이 모슬포부대를 탈영할 때 합류한 것이 아니고, 제주농업학교 주둔지에서 근무하던 중 6월 18일 벌어진 박진경(朴珍景) 11연대장 암살사건 이후 이에 연루될 기미를 보이자 2~3명과 함께 탈영 입산했다는 것이다. 고승옥 외에도 대정고을 출신 9연대 병사 중에는 탈영 입산한 사람이 여럿 있었다."
- ‘4‧3은 말한다 ⑤’ 305~306 쪽
“한라산의 무장대 60여 명은 전쟁발발(6‧25) 소식을 듣고 7월 어느 날에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토론을 하였다고 한다. 이때 고승옥, 백창원, 송원병 등 지도부에 있던 3명은 ‘인민군이 목포까지 왔으니 제주도에 상륙한 이후에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젊은이들은 ‘4‧3을 일으킨 영웅적 전통을 소극적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결국 그날 밤에 허영삼, 김성규 등이 주동이 되어 고승옥 등 세 사람을 포박했고, 이튿날에는 인민재판에 부쳐 살해하였다. 그런 연후에 김성규가 무장세력을 몰고 중문에 들어왔다는 게 경찰출신자의 증언이다. 허영삼이 그날로 무장대 사령관이 되었다고 한다”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342쪽,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1집’ 109쪽
* 9연대 탈영병 출신 폭도사령관으로 폭도들에게 처형당한 폭도사령관이기도 하다
‣5대 사령관 허영삼(許永三, 일명 許丁根, 1926~1952 안덕면 상창리)
"1948년 11월말께 결국 상창리에도 소개령이 떨어졌다. 그러나 일부 주민들은 소개령에 응하지 않고 산으로 올랐다. 이는 상창리 출신 무장대 허정근의 영향과 토벌대의 무분별한 작전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주민 이태홍(李泰洪.81) 옹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마을 일부 젊은이들이 입산한 데는 허정근(20대 초반, 입산후 가명은 허영삼)의 영향이 크다고 봅니다. 서울에 유학했던 똑똑한 사람으로 마을 분위기를 주도했지요. 그는 후에 산에서 우두머리 역할을 하게 됩니다. 허정근 때문에 우리 마을도 소개됐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의 존재로 인해 산으로부터 습격을 받지 않는 등 덕을 본 것도 있습니다. 또 앞서 말한 11월 16일의 사건 때도 우린 허정근 때문에 난처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날 산사람들이 내려와 '출역 나가지 말라'고 막는 바람에 이도저도 못하고 있을 때 허정근이 나타나 '지금 토벌대의 명령을 거부하면 큰 희생을 치를지 모르니 일단 명령대로 하라'고 해서 안심하고 나섰지요. 그날 일부 주민들이 토벌대에게 총살되긴 했지만 만일 출역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면 이를 빌미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겁니다. 또 산사람들의 명령을 정면으로 어겼다면 또다른 희생이 발생했을 겁니다."
- “4‧3은 말한다 ④‘ 267쪽
“…금년 봄에 발생된 내부 분열이 좋은 실례인 즉, 허영삼(許永三) K책(K책은 총사령관이라는 뜻)이 아직 살아있을 때 4‧3사건 당시부터 폭도 노릇하고 있는 권팔(權八), 이0행(李0行) 지급되는 탄약 등이 부족하여 청하지 못하고 남몰래 감추어 왔다. 이 사실은 허영삼이가 경찰부대에 사살되고 김성규(金成奎)가 K책으로 된 후 발견되었다. 김성규는 자기와 막역지간인 권팔이를 용서없이 고문하였으며 고문을 견디지 못해 권팔이는 어느 날 밤 원대(原隊)에서 탈출하였다. 그 후부터 김성규의 부하에 대한 단속과 폭행은 더욱 심하여져 과거의 충실한 동무는 하나 둘씩 원대에서 이탈, 끝끝내는 권팔에게 가담한 자가 11명이나 되어 지속되는 냉전으로 분파활동을 하다가 어느 날 양대(兩隊)가 치열한 내부00이 내려진 끝에 과세(寡勢)의 일파가 전멸되었으나 김성규파에도 사상자가 많이 발생하여 폭도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던 것이다.”
-1952년 12월 6일자 ‘제주신보’,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350~351쪽,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1집’ 108~109쪽
허영삼; 총사령
-아라리연구원의 ‘제주민중항쟁 1’ 483쪽
일부에서 2대 사령관으로 주장하는 김대진과, 6대 사령관 김성규가 한라산 남쪽이라면 한라산 북쪽에서 갖은 만행을 저지른 정권수의 면모를 본다.
김대진(金大珍, 조천면 신촌리)
• 고향은 논흘로 일제 때 학병으로 복무
• 1948년 4월 15일 조직부 개편될 때 군사부 부대장
• ① 1948년 가을 체포되었을 때 대정면 김성만과 일본으로 갔다 함
• ② 1949년 봄 신촌 보리밭에서 특공대에게 사살됨
• ①, ②의 두 가지 설이 있음 ”
- ‘이제사 말햄수다’ 237쪽 -
"신촌리는 김달삼(金達三)에 이어 무장대 총책을 지낸 이덕구(李德九)의 고향이다. 또 무장대 간부였던 김대진(金大珍)도 이 마을 출신이었다. 몇몇 젊은이들은 이들을 따라 산에 오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신촌리는 토벌대의 주목을 받았다."
"군사부는 모두 4개 지대로 나뉘었는데 제1지대(조천면 관할)는 이덕구(신촌리 출신), 제2지대(구좌면)는 김대진(신촌리 출신), 제3지대(남원면)는 김의봉(金義奉, 와흘리 출신), 제4지대(대정면)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오아무개(대정면 출신)가 각각 맡았습니다."
- ‘4․3은 말한다’ 4권 417쪽, 424쪽 -
김대진; 남로당 제주도당부. 군사부 정보책.
-아라리연구원의 ‘제주민중항쟁 1’ 469쪽
※제주자유수호협의회 ‘제주도의 4월 3일은? 2집’ 47~48쪽
정권수 (鄭權洙 ~1956, 구좌면 상도리)
“상도리 입산자로는 구좌면 당책을 지낸 것으로 알려진 정권수(鄭權洙)외에 몇몇 청년들이 자진해서, 혹은 토벌을 피해 도피성 입산을 했다.”
-‘4‧3은 말한다 ⑤’ 54쪽
* “정권수는 장인의 동생으로 남로당 제주도 거물급인 문도배의 영향으로 좌익활동을 하게 되었고, 서부지역의 무장책이었다.
다랑쉬굴 사건 등에도 그의 지시에 의해 폭도들이 움직였다.”
“정권수는 문도배(文道培) 구좌면 인민위원장, 과도정부 입법의원의 조카 사위로 구좌면 일대 폭도 사령관이었다.
“(2008. 5. 31, 2011. 9. 28. 제주시 구좌읍 상도리 정시봉 증언)
-제주자유수호협의회 ‘제주도의 4월 3일은? 4집’ 236쪽
정권수; 무장대 전투원. 35명의 무장대 전투원들과 함께 비자림(구좌면 송당리)에서 토벌군과 격전, 대원들은 후퇴시키고 본인은 최후까지 대항하다가 56년 4월 피격당함.
-아라리연구원 ‘제주민중항쟁 1’ 481쪽
“1956년 4월 공비교육책으로 갖은 만행을 저지른 정권수(鄭權洙)가 경찰토벌대에 의해 사살됐다.
정권수가 저지른 죄상은 1948년 3월 18일 입산한 이래 군인 10명, 경찰관 47명, 양민 51명 등 1백8명을 살해하고 양민 31명을 납치한 외에 총기 탈환 40정, 마을 방화 4회, 군‧경 차량 습격 18회라고 발표되었다.
-강용삼‧ 이경수 ‘실록 제주백년’ 686쪽
‣제6대 사령관 김성규(金星‧成奎, 1924~1957, 중문면 색달리)
“한라산의 공비는 4‧3사건 당시 입산한 소위 원공비(原共匪)는 사령관 K책 중문면 색달리 출신 김성규(金成奎, 일명 일민) 이하 21명(그 중 여자 4명) 뿐이고 여타 42명은 원공비들이 총을 가지고 도내 각지에서 납치하여간 선량한 청년 남녀입니다.…”
-1952년 8월 1일자 ‘제주신보’, ‘4‧3의 진정한 희생자는! 1집’ 108쪽
“…현상을 걸고 잔비의 두목 김성규(金成奎)를 살해하고 시체 인도하였을 시는 구화(舊貨)로 환산 1,000만원, 정권수(鄭權洙)는 500만원, 그 외 잔비의 살해와 총기 탈취 시는 각각 100만원씩을 수여할 것이라고 확약하고 있다.
그런데 이경진(李慶進) 국장은 토벌작전 개시 이래 1년 3개월 동안 51명에 달하는 하산 귀순공비들에 대하여 일절 과거를 불문에 부치고 전원에 자유를 주고 있으며 그 중 4명이 무장 경찰전투대원으로서 현재 활약하고 있다.”
-제주신보 1954년 3월 3일, ‘제주4‧3사건자료집 3’ 264쪽 -
김성규; 유격대장. 52년(*57년 오기) 11월 30일 유격대원 80명과 함께 살 해당함.
-아라리연구원의 ‘제주민중항쟁 1’ 470쪽
“김의봉(*허영삼의 오기)의 뒤를 이은 잔비두목 김성규(金成奎)에 대한 토벌작전은 처음에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으나 이보다 훨씬 전인 그해 정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 경찰은 김성규가 그의 연고지인 성천포(星川浦)에서 외지로 도주하기 위해 돛배 교섭을 하고 있다는 정보에 따라 그를 생포하려고 시도했다.
성천포는 중문 천제연(天帝淵) 아래에 있는 폭포수와 바다가 맞닿은 곳에 있는 조그만 포구이다.
외길로 내려간 그 성천포에 당시 김성진(金聖振)이라는 70대 노인이 외딴 집에서 외롭게 살고 있었다.
중문면 색달리가 고향인 김성규는 일제 때인 어린 시절 폐병에 걸려 공기가 맑은 이 일대를 돌아다니면서 약효가 있다는 뱀을 잡아먹으며 투병생활을 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백약이 무효로 병세가 더욱 악화된 그는 더 견딜 기력을 잃은 나머지 바다에 투신하여 자살하려 했다.
거기에 김성진이 나타났다.
인정이 많은 그는 “젊은 놈이 무슨 짓이냐”고 꾸짖고 자기 집으로 데려다가 김성규를 극진히 간호하면서 한 가지 비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때 마침 김성진의 집에는 눈같이 하얀 흰 강아지가 태어나 어미젖을 빨며 꿈틀대고 있었다. 태어난 지 사흘밖에 안된 흰 강아지는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채 있었다.
김성진은 폐병에는 이것이 제일이라고 일러주며 예의 강아지를 김성규를 넘겨 주었다. 이것이 효험이 있었던지 그는 다시 재생의 길을 얻었던 것이다. 따지고 보면 김 노인은 김성규에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10여년만에 나타난 김성규가 잔비의 두목인줄을 김 노인이 알 까닭이 없었다.
마을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던 무렵 김성규는 애월면 한남리에서 돛 만드는 무지천을 훔쳐간 일이 있었다. 잔비의 세력이 쇠잔해지고 그 자신도 지친 나머지 김성규는 자리배라도 얻어 타서 제주도를 탈출할 목적으로 옛날의 은인을 찾아 무지천을 주며 접선을 기도했다는 것이 경찰에서 입수한 정보였다.
서귀포경찰서는 6명의 대원을 선발하여 특수훈련까지 실시했다. 특수대원들은 김성규가 온다는 섣달 그믐날에 작전지역에 투입되었다. 미리 길에 설치해 두었던 암호표시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했고 한 달에 두 번 내려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 노인은 김성규가 올 때마다 작은 방에서 만나며 나갈 때는 뒷쪽에 달린 창문을 통해 “삼촌”이라 부르며 사라진다는 사실을 대원들에게 일러준 것이다. 김 노인은 경찰이 사살만 하지 않으면 우리편에 서도록 김성규를 회유하여 새 사람을 만들겠다고 졸라대기까지 했다.
특수대원들은 듬북덤과 멍석 등을 은신처로 삼아 대기하고 있다가 김성규가 나타나면 일시에 덮쳐 생포하려는 작전을 세웠다. 경찰 지휘부는 작전의 내용에 변동사항이 있을 때는 즉시 본서에 알리도록 지시하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그믐날이 밝아 초하루가 되고 그날이 다시 저물도록 현지로부터는 아무런 보고가 오지 않았다.
시간이 자꾸만 흘러간 1월 2일 미명, 이른 아침 서귀포경찰서에는 때 아닌 비상이 걸렸다. 성천포에서 공비와의 교전이 벌어져 아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놀라운 보고 때문이었다. 경찰지휘부가 현장에 달려와 보니 이것이 웬일인가.
중문지서 이(李) 주임을 비롯한 4명의 경찰관이 적탄에 맞아 순직하고 있는 것이다. 공비는 겨우 1명이 사살됐을 뿐이었다. 작전은 어이없게 실패한 후였다.
진상은 이러했다.
이 지서주임은 정월 초하루 그날, 중대한 작전이 자기 관할에서 전개되는 줄도 모르고 마침 근처에 주둔하고 있던 제2훈련소의 숙영(宿營)대장으로부터 ‘한잔하자’는 연락을 받아 부하까지 동석시킨 가운데 하루 종일 진탕 마셨다. 중문지서의 병력은 의용경찰이 대부분이었다. 만취한 이 주임은 돌아오는 길에 성천포에 이상한 움직임이 있다는 부하의 말을 듣고 “무슨 공비가 있겠느냐”고 일축하면서도 직책상 발길을 그쪽으로 돌렸다.
이때 마침 김 노인의 집에 도착한 김성규는 이쪽에서 접선시킨 이(李) 모와 예의 작은 방에서 애기를 나누다가 자갈 밟는 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말았다. 사격은 즉시 시작되었고 역습당한 경찰대는 제대로 전투도 못해본 채 4명의 희생자만 내고 말았다. 두목의 신변보호를 위해 따라다녔던 공비 1명이 사살됐을 뿐 김성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후였다. 공교롭게도 죽은 공비는 앞서 군부대에서 탈출, 입산한 유(柳)모였다.
김성규 일당을 소탕하기 위한 춘계작전이 착수된 것은 그로부터 1년이 훨씬 지난 1953년 3월이었다. 적정(敵情)조사결과 고정 아지트에 은신중인 것을 안 한재길(韓在吉) 경감 휘하의 전투경찰은 대대병력을 포함한 많은 병력이 고산지대를 포위, 집중적인 공격을 폈으나 워낙 지형이 험한 곳이어서 그들의 끈질긴 저항을 단번에 꺾지는 못했다. 난공불락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은 김성규 일당의 최후를 알리는 조종(弔鐘)이 되었다.
악착같이 버티던 김성규가 사살된 것은 어승생악 서쪽에 있는 평안오름이었고 사살되거나 생포된 자가 80여명을 헤아렸다. 평안오름일대는 공비 본거지의 하나인 이른바 50지구 아지트가 있는 곳이었다. 폭동진압을 장식한 최대의 전과였다...
김성규 일당이 거의 괴멸되고 잔비의 수가 겨우 20여명으로 감소된데에는 그들 내부의 암투와 알력도 적지 않은 작용을 했다. 원대에서 이탈한 권팔(權八)은 10여명의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 김성규와 맞서다가 자멸의 길을 걸었으며 이에 따라 김성규 일당에게도 사상자가 많이 생겨 스스로 묘혈을 파는 결과를 자초했던 것이다.
김성규 토벌작전이 시작된 후 그에게는 1천만원의 현상금이 걸려있었다. 나머지 공비들도 1백만원의 현상금이 붙어있었다. 재산공비들에게 김성규는 ‘민산(民山)동무’라는 가명으로 통했던 자였다.”
-강용삼‧ 이경수 편저 ‘제주백년’ 680~682쪽
“치안국 발표에 의하면 제주도 한라산을 근거지로 하고 준동하던 공비 4명 중 2명을 사살, 1명을 생포하였다고 한다. 즉 지난 21일 식량을 구하려고 제주시 월평동 모처에 잠복 중이던 소위 한라산 인민군 사령관의 처 한순애(韓順愛, 23)를 생포한 현지 경찰에서는 한의 진술에 의하여 (1957년 3월) 27일 오후 5시 50분 경 전기사령관 김성규(金成圭, 39)와 전투대 책임자 변창희(邊昌熙, 22) 양 명을 한라산 산록에서 교전 끝에 사살하고 나머지 한 명에 대한 포착작전을 방금 진행 중에 있다고 한다. 그런데 소위 사령관 김성규에 대해서는 제주도 도민들이 100만환 현상을 걸었던 것이나 전 김(金)치안국장은 한라산에는 한 명도 공비가 남아 있지 않다고 국회에서 증언했던 것이다.”
-1957년 3월 29일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