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편에서 계속>김우영과 나혜석의 러브스토리를 말하기에 앞서 언급해야할 이가 있습니다. 춘원 이광수(李光洙·1892~1950)입니다. 춘원은 ‘105인 사건’에 연루돼 오산학교 교감에서 물러난 뒤 1915년 와세다(早稻田)대로 유학을 갑니다. 고등예과에 편입한겁니다. 1905년에 이어 두번째로 성사된 춘원의 일본 유학은 인촌(仁村) 김성수 선생의 후원으로 이뤄진 것인데 춘원은 일본에서 만난 나혜석에게 한눈에 반해 결혼을 꿈꿉니다. 그런 그에게도 이미 애인이 있었습니다. 의학전문학교에 다니던 허영숙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양다리 걸치기’인데 춘원의 사랑을 좌절시킨 것은 이번에도 오빠 나경석이었습니다. 춘원이 고향에 백혜순이라는 본처까지 둔 유부남이었던걸 알았던 거지요. 나혜석 역시 최승구 사후 얼마되지않아 김우영과 춘원 사이를 오갔지요.
자꾸 이야기가 샛길로 갑니다만 당시 신(新)지식인의 사랑도 대단했습니다. 본처와 두 애인 사이를 방황하던 춘원이 대담하게 “인간에게는 부모의 허락 없이도 자유롭게 연애하고 결혼할 권리가 있다”는 ‘자유(自由) 연애론’을 편 것입니다. 춘원은 백혜순과 이혼한 뒤 1918년 10월 여의사 허영숙과 제물포항에서 중국 북경으로 애정의 도피행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교사라는 사람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타락, 음란, 부도덕한 짓을 했다”는 비판을 받지요.
다시 김우영-나혜석으로 방향을 돌려봅니다. 1920년 두사람은 결혼하는데 함흥 영생중학교를 거쳐 정신여학교 미술교사를 하던 나혜석은 4가지 결혼조건을 제시해 세상을 놀라게 합니다. 여자가 결혼에 조건을 단다는걸 상상도 못했던 시절이었지요. 첫째, 평생 지금처럼 사랑할 것, 둘째, 시어머니와 함께 살지 않을 것, 셋째,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것, 넷째, 전(前) 애인 최승구의 비석(碑石)을 세워줄 것. 더 놀랍게도 김우영은 신혼여행차 최승구의 묘를 찾아 비석을 세워줍니다. 두사람의 결혼은 당시 화제를 몰고왔습니다. 4가지 조건 외에 결혼청첩장을 신문광고로 대체한 것입니다. 둘의 결혼은 염상섭의 소설 ‘해바라기’의 소재가 됐습니다. 그렇다면 남편 김우영은 조건을 모두 충족시켜줬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 나혜석 거리의 상점에는 그녀가 그린 그림 한점씩이 걸려 있다.
비석세우는 것과 그림 그리는 것, 전처(前妻)와의 사이에 낳은 딸과 떨어져 지내게했지만 신혼살림은 시어머니가 있는 서울 숭이동 집에서 차린 것입니다. ‘평생 사랑한다’는 조건도 결과적으로 나혜석의 불륜 때문에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나혜석은 왜 파격적인 여성이 된 것일까요.
첫째 나혜석은 너무도 똑똑했습니다. 그는 삼일여학교-진명여고보에서 1등과 반장을 도맡았습니다. 진명여고보 졸업 때 ‘매일신보’에 최우등 수석 졸업생으로 얼굴 사진까지 실릴 정도였습니다. 둘째 나혜석이 동경여자미술학교에 유학간 것은 조선 여성으로는 최초였으며 남자까지 포함해도 당시 서양화를 전공한 이는 다섯명이 넘지않았다고 하지요. 셋째 어머니의 사랑없는 결혼생활을 보고 깨달은 바가 많았다고 합니다.
나혜석은 유학시절 ‘세이토’라는 페미니스트 잡지와 입센의 ‘인형의 집’을 읽고 감화를 받은 후 이런 글을 국내외 잡지에 씁니다.
“현모양처는 여자를 노예로 만들려고 부덕(婦德)을 장려한 것이다. 세상에 왜 양부현부(良夫賢夫)는 없는가?”
김우영과 결혼한 직후 나혜석은 화가로서 짧은 전성기를 맞습니다. 결혼 이듬해 만삭의 몸으로 개최한 개인전에 이틀간 5000여 인파가 몰렸으며 70여개의 작품 모두가 고가(高價)에 팔린 겁니다. 여기엔 변호사인 남편의 후광이 있었겠지요. 이 개인전은 서울에서 열린 최초의 유화전(油畵展)이었는데 이후 나혜석은 매년 조선미술전람회 수상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됩니다. 그런 두사람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27년 남편을 따라 나선 유럽 여행길이 파탄을 가져온거죠.
- 나혜석은 입센의 소설 '인형의 집'에서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스스로 '인형의 가(家)'라는 시를 지었다.
둘의 여행루트는 지금봐도 대단합니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평양~신의주~중국 봉천(奉天)~하얼빈~시베리아횡단열차 편으로 러시아 모스크바~프랑스 파리로 간 겁니다. 여행은 남편 김우영이 일본 외무성으로부터 특별포상을 받아 이뤄진 겁니다. 나혜석은 아이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남편과 함께 간 유럽에서도 프랑스 파리의 매력에 푹 빠집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이 독일로 법률공부를 하기 위해 떠나자 파리에 홀로 남아 야수파 화가 비시에르의 화실에서 그림공부에 열중하게 됩니다.
처음에 부부는 여행을 떠날 때 서너달 정도로 예정됐지만 여행은 1년8개월이나 이어집니다. 안타깝게도 그림만 그렸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의 앞에 천도교 교령 최린(崔麟·1878~1958)이 등장하면서 파탄의 막이 오릅니다. 최린은 3·1운동의 대표 33인에 포함된 인물로, 2년 가까운 감옥생활을 마치고 출옥한 후 천도교에서 활동합니다. 그런데 손병희 선생이 사망한 이후 최린은 점점 ‘민족개량주의’로 흘러갑니다. 이것은 앞서 말한 ‘자치론’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 나혜석의 동상이 자신의 이름을 딴 거리에 자신의 시가 새겨진 비석 옆 좌석에 놓여있다.
즉 일본의 ‘승인’을 통한 ‘자치’가 독립의 전(前) 단계라는 것이지요. 이후 그는 조선총독부와 결탁하더니 1934년 중추원 참의,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사장을 지내다가 해방후 천도교 교단에서 쫓겨나고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여하간 일본의 귀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던 최린이 1928년 파리에 나타나자 최린과 나혜석은 “서로가 첫눈에 흠뻑 반해” 가서는 안될 길을 가고 맙니다. 그해 11월10일 오페라를 함께 관람한 날 밤 두사람은 본격적인 불륜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두사람은 통역을 고용해가며 식당-극장-뱃놀이에 나서기도 했습니다. 사람들 눈에 안뜨일리 없고 말이 안나올 수 없지요. “나혜석이 최린의 ‘작은 댁(첩 혹은 소실)’이 됐다’는 소문은 독일에 있던 김우영의 귀에까지 들어갑니다.
황급히 파리로 돌아온 김우영은 나혜석의 뒤를 밟았고 마침내 최린과의 불륜장면을 목격하지요. 김우영은 독일 베를린에서 파리로 돌아와 짐을 싸고 아내와 함께 귀국길에 오릅니다만 그것은 두사람의 결혼이 끝났음을 알리는 여정(旅程)입니다. 그렇다면 최린은? 최린은 나혜석이 김우영과 1930년 이혼한 뒤 나혜석에게 흥미를 잃습니다. 그래서 이별을 통보하자 나혜석은 가만히 있지않고 최린을 ‘정조(貞操) 유린죄’라는 죄목으로 고소하면서 위자료 1만2000원까지 청구했습니다. 이런 사실이 동아일보에 보도되자 최린은 2000원을 합의금으로 나혜석에게 주고 입막음을 시도했지만 한번 퍼진 소문은 되담을 수 없는 법, 총독부의 일본인들까지 그를 비웃었습니다. 남의 아내를 유혹해 가정을 파탄낸 파렴치한 인물이 된겁니다. 나혜석의 대담함은 여러군데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혜석은 최린과 불륜을 저지를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지만 그 때문에 남편과 이혼하지는 않습니다.” 최린은 바람둥이답게 “나는 그일에 만족한다”며 등을 두들겼다는군요.
<下편에계속>
입력 : 2015.04.22 06:14 | 수정 : 2015.04.23 14:48 <中편에서 계속>1928년 11월 파리를 떠난 김우영-나혜석은 1929년 3월 귀국했지만 둘은 예전같은 관계가 아니었죠. 김우영은 외무성을 그만두고 서울의 여관에 머물며 일을 찾고있었습니다. 나혜석은 모처럼 시가(媤家)인 부산 동래로 내려갔습니다. 나혜석에게 이 시기는 고통스러웠습니다. “남편이 기생과 사귄다” “이혼을 모색한다더라”는 소문이 들리는가하면 시어머니는 세계여행을 다녀오며 선물도 안사온 며느리를 구박한겁니다. 나혜석이 사태를 악화시킨 부분도 있습니다.
1929년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불륜상대 최린을) 나도 퍽 흠모했다”고 말한 겁니다. 게다가 경제사정이 어려워지자 최린에게 도움을 청하며 다시 묘한 관계가 되자 김우영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두사람은 결국 1930년 11월 이혼합니다. 나혜석이 이혼할 때 받은 것은 ‘2년 뒤 재결합할 수 있다’는 서약서와 감정가 500원인 전답뿐이었습니다. 김우영은 이혼 넉달후 재혼하고 최린은 앞서 쓴 것처럼 나혜석과 결별을 선언하게 됩니다. 이후 나혜석에게는 세상의 냉소(冷笑)가 쏟아집니다. 1934년 쓴 ‘이혼고백서’라는 장문의 글이 화제는 됐지만 그것이 홀로선 여인의 재정자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혼고백서’라는 글 가운데 가장 유명한 부분을 인용합니다.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조선남성들 보시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에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 나혜석 거리에 있는 조형물.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처럼 나혜석도 인습과 성차별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1935년을 전후로 나혜석은 몰락합니다. 작품전 실패-맏아들의 죽음-화재로 작품이 소실(燒失)되는 등 불행이 겹쳤습니다. 이후 불교에 심취해 수덕사에 머문 것은 32세의 나이로 불교에 귀의한 김일엽 때문입니다. 이후 그는 여러 질병을 앓습니다. 나혜석의 삶은 파란만장해 그것을 짧게 정리하기는 힘듭니다. 다만 말년의 그녀는 아이들을 그리워해 자주 찾아가지만 전 남편 김우영과 시어머니는 접근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일례로 그의 차남 김진 전 서울법대 교수는 이런 회고를 했습니다.
“중 2학년 때 2교시를 마치고 쉬는 시간에 복도끝에 어머니가 나타났다. 내가 ‘아주머니는 누구세요?’하고 묻자 ‘내가 네 어미다’라고 했다. 어머니는 화장기없이 주름진 얼굴에 흘러내린 머리카락, 구겨진 회색빛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조카 나영균 전 이대 교수도 나혜석을 처음 본 순간을 “하교길에 동네 아이들이 떼지어 남루한 할머니를 따라가는 것이었다”고 회고하지요. 이렇게 방황하던 나혜석은 서울 청운양로원에서 자취를 감춘 뒤 숨진 행려병자로 발견됩니다. 화가이자 작가로 한 시대를 풍미한 나혜석의 그림에 대해서는 평이 엇갈립니다. 한국 인상주의의 개척자라는 평이 있는가하면 ‘작품의 수준이 명성에 못미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이에 대해선 아마추어인 제가 논할 바가 아닙니다. 다만 그와 관련했던 남자-남편 김우영, 불륜남 최린, 이루지못한 사랑 이광수-들은 전부 친일파의 굴레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 나혜석 거리의 초입에 세워진 구조물 밑에서 바라본 전경이다.
김우영은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고 최린과 이광수도 업적이 친일파라는 굴레에 짓눌려버렸지요. 반면 나혜석만은 창씨개명을 거부했으며 징용 독려를 위한 담화와 강연에 참여해달라는 일제의 요구에 “내가 참여해야할 이유가 없다”며 모두 거절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사람의 삶이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실 제가 나혜석에 대해 관심을 갖게된 것은 20일 아침 걸려온 전화 한통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사에 밝은 동서문화사 고정일 사장이 김건 전 한은 총재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혜석과 김 전 총재의 인연을 상세히 설명해준 것입니다.
고 사장에 따르면 언론인 출신의 미술평론가 이구열 선생이 김 전 총재 재임시절 그를 찾아 “나혜석 기념관을 만들겠다”며 지원을 요청했지만 김 전 총재는 단박에 거절했답니다. 그는 “나는 그런 어머니를 둔 적이 없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날 한 중년 여성이 이 선생을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봉투를 내놓고 “나혜석 선생 기념에 써달라”고 했지요. 그녀가 김 전 총재의 부인이었다는군요. 자신이 부인한 어머니를 놓고 밤새 죄책감에 시달렸을 김 전 총재의 후회가 연상됩니다. 지금 그 아들과 예술계의 도움으로 나혜석의 고향 경기도 수원 효원공원과 경기도 문화예술회관 사이에 조성된 것이 바로 앞서 말한 ‘나혜석 거리’입니다. 너무도 세상을 앞서 살았기에, 비참한 최후를 맞은 나혜석의 넋이 거기 살아있습니다.
Photo By 이서현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