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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1940년대를 거치면서 계속 마피아와 신디케이트의 사업은 패밀리 간에 큰 트러블 없이 평화스럽게 잘 진행되고 있었는데, 1947년이 되면서 이 사업 구조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바로 비토 제노베제가 시실리로부터 돌아온 사건을 말한다.
비토 제노베제는 카스텔라마레세 전쟁 무렵부터 루치아노 패밀리의 일등 공신으로, 일찍이 살바토레 마란자노가 루치아노와 함께 제일 먼저 제거하려고 점찍었을 만큼 그 실력을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그는 대화보다는 주로 힘을 가지고 문제를 풀어나가는 스타일로 권력에 대한 탐욕 또한 대단하였다고 한다. 뉴욕으로 돌아오자마자 제노베제는 프랭크 코스텔로와 알버트 아나스타샤가 이끌고 있는 여러 사업에 대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애썼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비토 제노베제는 프랭크 코스텔로와 함께 루치아노 패밀리를 이끌게 되었으나 제노베제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루치아노 패밀리의 유일한 보스가 되고자 하였고, 나아가서 궁극적으로는 자신이 전 미국의 보스 중의 보스, 카포 디 카피가 되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목표는 루치아노도 없는 지금 충분히 달성 가능해 보였다. 프랭크 코스텔로는 제거하기에 그리 만만치는 않았으나 그 혼자서 전쟁을 벌일 인물이 못 되었으므로,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프랭크 코스텔로와 마이어 랜스키의 주먹 역할이 되어주고 있는 알버트 아나스타샤였다.
절치부심하던 제노베제에게 1950년대에 들어와 그의 야심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시 사건이 벌어진다. 하나는 알바트 아나스타샤가 자신도 쿠바 오퍼레이션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사를 더욱 강하게 표명하고 나서기 시작한 것이고, 또 하나는 프랭크 코스텔로가 잠시나마 감옥에 가게 된 사건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나스타샤의 오랜 후견인인 조 아도니스가 이민국으로부터 강제 출국 명령을 받아 미국을 떠나게 된 사건이 그것이다.
당시 쿠바의 호텔과 카지노, 마약 비즈니스에 직접 관련된 조직은 뉴욕 루치아노 패밀리의 마이어 랜스키와 프랭크 코스텔로, 그리고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플로리다의 트라피칸티 패밀리와 뉴올리언즈의 카를로스 마르셀로 패밀리 정도로, 전국위원회 차원에서 거국적으로 연합하여 쿠바 오퍼레이션을 벌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한 정도로 콘소시움이 발생할 수 있는 단계는 아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밖에 시카고 아우트피트와 뉴욕의 보나노 패밀리가 자본만 투자하고 그로 인한 수익 배당금을 나누어 받고 있었는데, 이에 대하여 아나스타샤가 본격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나오기 시작하였다. 아나스타샤는 자신도 직접 자기 사람을 쿠바에 보내 그곳의 비즈니스에 참가하겠다는 뜻을 밝히고 나선 것이다. 아나스타샤의 살인주식회사에 대한 영향력은 모르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쿠바 비즈니스의 원래 멤버들은 그가 히트맨들을 이끌고 쿠바로 건너오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 이러한 미묘한 분위기의 변화를 비토 제노베제도 충분히 알아채고 있었을 것이다.
다음 두 번째의 사건은 프랭크 코스텔로의 투옥 건이다. 1950년에 미 상원의원 에스테스 케파우버의 제창으로 조직범죄에 대한 조사위원회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열린 적이 있다. 케파우버 의원은 당시 범죄로 만연한 미국사회의 실상을 통탄하여 그러한 범죄 조사위원회의 결성을 주장하였던 것인데, 처음에는 그의 요청이 어떤 기관으로부터도 지원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FBI 국장인 에드거 후버도 반대 의사를 표명했고, 당시의 대통령인 해리 트루먼도 그러한 조사는 불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1960년 초까지 에드거 후버의 공식 입장은 마피아와 같은 조직범죄 단체는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해리 트루먼은 미주리 주의 캔자스시티가 그의 정치적 근거지로써 그 지방의 유력한 부호인 토마스 팬더개스트(Thomas J. Pendergast)를 후원자로 하여 성장, 상원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사람이다. 그런데 토마스 펜더개스트는 1920년대부터 캔자스시티를 비롯한 미주리 주 전역에 걸쳐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일종의 막후 보스로, 사업상 갱들과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트루먼이 그러한 조사에 대하여 쾌히 승낙해줄 마음이 없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토마스 팬더개스트
토마스 펜더개스트 계열의 사람이었던 존 라지아와 유태인 솔로몬 와이즈만은 1929년 5월에 뉴저지 아틀랜틱 시티에서 열렸던 초창기 전국 신디케이트의 모임에 캔자스시티의 대표로 참석하기도 하였다. 재즈의 선율이 멋지게 흐르며 1930년대 대공황시기의 캔자스 시티를 그렸던 영화 <캔자스시티>에서 토마스 펜더개스트, 존 라지아와 정치가들의 결탁이 잠깐 묘사되기도 한다. 캔자스시티에서 재즈 음악이 발전된 데에는 토마스 펜더개스트 소유의 밀주집들의 라이브 무대가 매우 큰 공헌을 했다고 전해진다.
영화 <캔자스 시티>
그런데 그렇게 조사위원회의 결성이 차일피일 늦어지고 있던 중, 1950년 4월에 잔인하게 살해된 2구의 갱 시신이 캔자스시티에서 발견되어 보도되면서 범죄 척결에 대한 여론이 매우 광범위하게 형성되었다. 마침내 대통령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게 되어 결국 케파우버 의원이 주장한 대로 조직범죄 조사위원회는 열리게 되었으며, 이로부터 15개월간 즉, 1950년 5월부터 1951년 9월까지 미국의 14개 도시를 번갈아 가며 근 600명에 이르는 증인이 호출되어 증언하게 되는 장대한 규모의 조사가 진행된다. 이 조사위원회는 보통 상원 케파우버 위원회라 불린다.
미국의 상원이 직접 나서서 증언을 청취하는 상원 조사위원회라는 것은 대단한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위원회의 증인으로 한번 호출되면 그 호출에 응하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증언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 나중에라도 밝혀지게 되면 그에 대한 대가를 반드시 처라야만 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증인으로 불려져 나온 사람들은 대개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는 답변은 거부할 수도 있다고 명시된 미국 헌법 수정 제5조를 인용하여 답변을 거부하곤 하였다.
케파우버 위원회에 불려나가 증언을 한 증인들 가운데는 여러 종류의 직업인들이 총망라되어 있었는데, 그 속에는 갱들의 범죄를 증언할 수 있는 사법 관리들뿐 아니라 갱들 자신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갱단의 일원으로 알고 증인을 호출하여 위원회의 증언대에 세워보면 그 사람은 실제로는 버젓한 합법적인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예를 들면 클리블랜드의 모리스 달릿츠는 동업자와 함께 라스베가스의 호텔을 경영하고 있으면서 또한 디트로이트와 클리블랜드에서 체인점 세탁업을 비롯한 수많은 합법적 사업체를 가지고 있었고, 뉴저지로부터 온 증인 론지 즈월먼은 자동차 딜러이면서 또 한편으로는 담배 자동판매기 사업을 함께 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 온 조 번스타인은 한때 유명한 디트로이트 퍼플 갱의 일원이었다가 은퇴한 뒤였는데, 현재는 캘리포니아에서 부동산업을 하고 있으면서 함께 자신의 농장에서 말을 기르고 있다고 하였다. 뉴욕의 마아어 랜스키는 주크박스를 레스토랑과 바에 납품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1951년 1월에는 시카고의 토니 아카르도가 소환되었다. 아카르도는 대부분의 질문을 헌법 수정 제5조를 사용하여 답변을 거부하였으며, 알 카포네와 폴 리카라는 사람을 알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는 그런 사람은 알고 있지 않다고 대답을 하였다. 심지어 아카르도는 시카고에 친구가 있느냐는 질문에 대하여도 답변을 거부하였다. 결국 아카르도는 증언과 관련하여 주 대배심에도 호출되게 되고 의회모욕죄로 기소될 뻔 하기도 한다.
뉴욕의 프랭크 코스텔로의 증언은 케파우버 위원회의 클라이맥스였다. 텔레비전의 보급과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1951년 2월부터는 케파우버 위원회의 심문과정이 텔레비전 중계를 통하여 전국으로 방영되고 있었다. 프랭크 코스텔로라는 이름은 많은 언론의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그의 심문은 프라임 시간대에 하이라이트로 방영될 뻔하였으나 코스텔로의 변호사가 강력히 항의하여 그의 얼굴은 방영되지 않고 목소리와 함께 그의 손만이 TV에 비추어졌다.
프랭크 코스텔로의 청문회를 시청하는 조 아도니스
프랭크 코스텔로 역시 대부분의 질문에 대하여 헌법 수정 제5조를 인용, 대답하기를 거부하였다. 때문에 코스텔로는 의원들의 심문에 대하여 불성실한 증언 태도를 보였다 하여 의회의 권위를 무시했다는 의회모욕죄로 18개월 동안의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가 수감된 것이 1952년 여름의 일이다. 텔레비전의 위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 아닐 수가 없었다. 똑같이 답변을 거부한 토니 아카르도는 의회모욕죄가 적용되지 않고, 답변의 거부가 텔레비전을 통하여 전국으로 방영된 프랭크 코스텔로의 경우에는 그 죄가 적용이 되었으니 말이다. 그 결과 비록 얼굴이 방영되지 않았지만 그 신분이 노출되었고, 또한 감옥살이까지 하게 되어 이 과정에서 코스텔로의 권위는 많이 저하되었다. 알버트 아나스타샤의 유력한 동맹자가 힘을 잃게 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비토 제노베제에게 유리하게 작용한 사건이 조 아도니스의 출국이었다. 조 아도니스는 초기부터 알버트 아나스타샤의 후원자였고 프랭크 코스텔로와 함께 조직을 위한 정치적 보호막을 만드는 데에 큰 공헌을 한 중요 멤버이다. 그의 이름인 아도니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아프로디테 여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하는 미남청년의 이름으로서, 이것은 원래의 그의 이름이 아니다. 자신의 외모를 너무나 마음에 들어 한 그가 스스로 붙인 것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옷을 아주 잘 차려입고 다니는 것으로 매우 유명하여 영화배우 험프리 보가트와 같은 이는 조 아도니스를 모델로 삼아 신사 터프가이의 역할을 연기하였다고도 한다.
조 아도니스
조 아도니스는 1902년, 남부 이탈리아의 몬테마라노 출생으로 한때 파이브 포인트 갱단의 프랭크 예일을 위하여 일하기도 하였으며, 경력을 쌓으면서 금주법 시대와 위원회가 탄생하게 되던 조직의 초기 시절에 매우 유력한 보스로 부상하게 된 사람이었다. 그는 원래 1915녀에 불법적인 절차를 통하여 미국에 입국하였는데, 결국 그것이 빌미가 되어 이민국으로부터 강제로 출국 명령을 받은 것이다. 1956년의 일이었다.
알버트 아나스타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터지고, 드디어 자신감을 가진 제노베제는 마침내 1957년, 프랭크 코스텔로를 먼저 보내기로 결심을 하였다.
1957년 5월 2일, 프랭크 코스텔로는 뉴욕 맨해튼의 자기 아파트 빌딩 앞에서 한 젊은 갱으로부터 저격을 받아 목숨까지는 잃지 않았으나 머리에 총상을 입는 사고를 당한다. 그의 총상은 한쪽 귀 뒤에서부터 머리의 반대쪽까지 머리가죽과 두개골 사이를 총알이 관통하여 지나간 것이었다. 총을 쏜 자는 생명을 노리고 쏜 것이 분명하였으나 당한 자의 운이 억세게 좋아 결과적으로는 생명과는 상관이 없는, 가벼운 상처로 끝나게 된 그러한 총상이었다. 범행에 사용된 총이 22구경의 것이 아니었다면 머리가 수박 깨지듯이 터졌을 그러한 총격이었다.
범행은 단독 범행이었으며 총을 쏜 자는 젊은 갱으로 이름은 빈센트 지간테(Vincent Gigante, 닉네임은 ‘턱주가리’)였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되었는데, 후에 대질심문에서 프랭크 코스텔로는 용의자의 얼굴에 대하여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대답으로 일관하였다. 아파트의 수위 등 다른 증인도 있기는 하였으나 그들도 현장의 상황에 대하여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하여, 결국 용의자 빈센트 지간테는 무죄로 방면된다. 어차피 죽은 사람도 없었으니 이렇게 해결되어도 별 무리는 없는 상황이었다.
빈센트 지간테의 수감 사진
그러나 프랭크 코스텔로의 저격은 당시의 지축을 온통 뒤흔들 만한 대사건이었다. 지하세계의 수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마피아 조직의 제일가는 정치 해결사인 코스텔로, 주 대법관의 지위를 좌지우지하고 FBI의 국장과 함께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산책하는 프랭크 코스텔로가 30세에 불과한 후배 갱으로부터 총을 맞아 피를 줄줄 흘리며 병원에 실려 가다니! 이것은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전 미국의 지하세계에 제노베제가 보내는 하나의 메시지였다. 이제 코스텔로의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다.
케파우버 위원회의 출석과 감옥행, 그리고 이번의 저격으로 프랭크 코스텔로의 위신은 이제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코스텔로는 제노베제의 의도와 자신의 처지를 십분 이해하고 이후로는 사업으로부터 거의 은퇴하여 롱아일랜드에 있는 그의 저택에서 칩거 생활을 하면서, 조직과 최소한의 접촉만 하며 지냈다고 한다. 히트맨 빈센트 지간테는 비록 임무를 성공시키지는 못하였으나 보스로부터 높이 평가 받았고 후일, 그러니까 1986년부터는 그 자신이 제노베제 패밀리의 보스가 된다.
당시 알버트 아나스타샤는 뉴욕 지하세계의 갈등 구조에 대하여 자신의 가문과 루케제 패밀리의 연합이 제노베제 패밀리와 다투고 있고, 제노베제 패밀리에 속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코스텔로의 영향을 받고 있는 멤버들이 자신을 돕고 있으며 보나노 패밀리와 프로파치 패밀리는 중립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고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실상은 이와는 많은 차이가 있어 아나스타샤는 거의 고립무원의 형편에서 싸우고 있었는데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은 역시 다혈질인 그의 성격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고 하겠다.
아나스타샤가 루케제 패밀리를 한편으로 인식한 것은 그 보스인 토마스 루케제가 자신의 언더보스인 카를로 갬비노와 시실리 시절부터 친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토마스 루케제는 아나스타샤를 도울 마음이 별로 없었다. 마피아의 전쟁에서 가장 어려운 점은 그 누구도 속마음을 전혀 내보이지 않기 때문에 누가 자신의 편이고 누가 자신의 적인지를 알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이다. 즉, 자신의 적이 대체 누구인지를 모르는 상태에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전쟁 구도의 실상은 아나스타샤 패밀리 혼자서 제노베제, 보나노, 프로파치 패밀리의 연합과 싸우고 있는 중이었고 아나스타샤의 생각과는 달리 루케제 패밀리는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토마스 루케제는 비록 갬비노와 친한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나스타샤를 도울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1957년 6월 17일에 아나스타샤의 믿음직한 카포레짐으로 한때 패밀리의 액팅 보스까지도 맡아본 일이 있던 프랭크 스칼리제(Frank Scalise)가 피살되고, 이어 9월 19일에 스칼리제의 동생까지 실종되자 알버트 아나스타샤는 자신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는 음모를 더욱 확실히 알 수 있었으나 뚜렷한 대책을 세우지는 못한 채 매우 초조해 하고 있었다. 프랭크 스칼리제는 브롱크스에 있는 이탈리아 시장에서 과일을 사던 중 피격되어 사망하였는데, 그는 아나스타샤의 패밀리에서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있던 인물로 그의 피살 장면은 바로 영화 <대부>의 전반부에서 말론 브랜도의 피격 장면으로 재현되기도 한다. 나중에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작전의 히트맨은 제노베제의 부하, 제임스 스퀼란테(James Squillante)였다.
프랭크 스칼리제
제임스 스퀼란테
아나스타샤는 브루클린의 자기 집을 떠나 조지 워싱턴 다리 근처에 있는 포트 리의 요새화된 맨션에 근거지를 차려놓고, 엄중한 경호를 대동하지 않고는 한걸음도 밖에 나가지 않았다. 아나스타샤 패밀리와 제노베제 패밀리, 양 가문의 전면전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뉴욕의 모든 거리에 나돌았다. 비토 제노베제와 알버트 아나스타샤의 반목은 이제 전 미국 보스들의 관심사가 되어 있었다. 전면전이 발생하면 그 불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플로리다 주 탬파의 보스인 산토스 트라피칸티 주니어가 둘 사이의 중재역으로 나서게 된다.
패밀리간의 분쟁을 중재하기 위하여 다른 가문에서 개입하고 나서는 것은 원래 흔히 있는 일이다. 특히 대도시 뉴욕에서 벌어진 전쟁이 금방 끝나지 않고 시간을 오래 끌게 되면 필연적으로 당국의 심도 있는 수사가 시작될 것이고 이것은 다른 모든 가문들에게 피해를 주는 차원으로 확대될 수 있기 때문에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은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이번에 뉴욕 패밀리의 전쟁을 중재하겠다고 나선 사람은 당시 가장 큰 규모의 사업이라 할 수 있었던 쿠바 오퍼레이션의 중심인물 중 하나인 산토스 트라피칸티 주니어였다. 트라피칸티 측에서 먼저 중재를 적극 요청한 형식이었다. 산토스 트라피칸티는 우선 알버트 아나스타샤와 만나기로 하였고, 두 사람은 1957년 10월 24일에 뉴욕의 파크 쉐라톤 호텔(Park Sheraton Hotel)에서 만나 최근의 사건들에 대하여 논의한 다음, 아나스타샤의 쿠바 진출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쿠바에 관한한 제노베제 패밀리와 이해를 같이하고 있는 트라피칸티이므로 그가 제노베제를 다시 만나 이야기를 잘 해준다면 더 이상 서로가 크게 피를 흘리지 않고도 전쟁을 종결지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회합은 아주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서 끝났으며, 트라피칸티는 회담 후 곧 호텔을 체크아웃하고 비행장으로 향했다.
트라피칸티와 헤어진 후 알버트 아나스타샤는 매우 기분이 좋았다. 오랜 기간의 전쟁에 드디어 전환점이 마련될 전망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날인 10월 25일, 아나스타샤는 오랜 단골인 파크 쉐라톤 호텔의 이발소로 갔다. 10시경의 아침이었다. 남자들에게 있어 이발이란 긴장을 풀고 쉴 수도 있는 기회로, 아나스타샤도 전쟁 종결의 찬스를 맞아 약간 긴장이 풀어진 상태에서 기분전환을 위해 이발소를 찾았을 것이다.
항상 그가 앉는 네 번째의 의자에서 이발을 끝낸 후 의자를 뒤로 젖혀 아나스타샤를 눕힌 다음 그의 얼굴에 뜨거운 타월을 덮어놓고, 그의 전담 이발사는 면도를 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던 중이었다. 38구경 권총을 빼어 든 두 사람이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와 눈짓으로 이발사인 조 보키노(Joseph Bocchino)와 다른 종업원들을 비키게 했다. 언제나 그림자같이 아나스타샤를 따라다니던 경호원들은 이날 따라 보이지 않았다. 이발소에 들어온 두 사람은 프로파치 패밀리에 소속되어 있는 갤로 형제(Larry & Joe Gallo)였다.
래리 갤로
첫 번째 총탄이 그의 가슴을 뚫기 직전에 아나스타샤는 눈을 번쩍 떴다고 전해진다. 위기 상황을 몸으로 느꼈던 것일까? 총이 수차례 발사되는 동안 야수처럼 포효하며 마치 총알을 막아낼 수 있는 방패인 양 두 팔을 휘저었다고 한다. 그가 바닥에 엎어진 다음에 조 갤로(Joe Gallo, 닉네임은 ‘미치광이 조’)가, 옛날에 아나스타샤가 마세리아에게 했던 것처럼 아나스타샤의 뒤통수에 권총을 딱 붙이고 방아쇠를 당겼다. 마지막 순서인 확인 사살이었다.
조 갤로
살해된 앨버트 아나스타샤
바로 여기까지가 1957년의 뉴욕 5대 가문의 대전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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