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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문화 스크랩 노력 신화, 못 생긴 명창 석개(石介) / 조선시대 여성 예인의 삶?
인당 추천 0 조회 137 16.03.29 15:1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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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여성 예인의 삶 Life of female artists in Joseon Dynasty



노력 신화,

못 생긴 명창 석개

A legend of hardworking, Seokgae, a ugly master singer

글。이지양。부산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1605년선조 38 겨울, 허균(許筠, 1569~1618)은 명나라 황제의 장손 탄생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가는 유근柳根을 따라 함께 갔다. 그리고「병오기행丙午紀行」을 남겼는데, 정월 초 7일에 성천에 도착했을 때의 일화를 이렇게 적어두었다.


"성천 부사 이거용李巨容이 술자리를 성대하게 차려놓고 노래시키기를 청하여 허락하였더니 기생 넷이 들어와 인사를하는데, 그 중 한명은 생김새가 매우 곱지 않았다. 내가 ,“ 저 아이는 분명 노래를 잘 할 것이다.”

하니, 여인이 “어떻게 아는가?” 하기에, 내가, “ 재주가 없으면 어떻게 이 자리에 낄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방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다. 그 기녀는 과연 노래를 잘하였다. 발성이 맑고도 웅장하여 평안도에서 제일이겠는데 곡조에 맞지 않는 것이 흠이었다."


”미인 소박은 있어도 박색 소박은 없다” 는 옛말처럼, 못생긴 사람은 그만큼 내면에 다른 재주나 덕성을 품고
있어서 훨씬 매력이 깊다는 것을 지적한 일화이다. 어느 수준이 되는 자리에 참석한 사람은 모두 무엇인가 나름대로 그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음을 잊지 않고 예우하는 허균의 처세 모습도 은근히 재미있다.

허균도 어려서 석개의 이름을 들었으므로「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 “노래로는 기생 영주선瀛洲仙과 송여성宋礪城의 여종 석개石介를 모두 제일이라 하였다.”는 기록을 남겨두었다.

아마 허균이 실제 석개를 만나봤으면 훨씬 더 흥미진진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을까 싶다.


석개는 우리나라 역대 여자 명창 중에 가장 못생긴 명창으로는 상당히 상위권에 들지 않을까 싶게 기록되어 있다. 유몽인은『어우야담』에, 석개를 늙은 원숭이 얼굴에다 좀 대추나무로 만든 화살같이 째진 눈을 한 여자 종이라고 묘사했으니 말이다.

그녀는 아이 때 지방에서 올라와 시종으로 충당되었는데, 그는 중종의 딸인 정순옹주와 혼인한 여성위 송인宋寅, 1516~1584의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 집은 세력 있는 부호가여서 곱게 화장하고 화려하게 꾸민 무수한 미인들이 좌우에서 응대하고 있었으므로, 석개는 나무통을 이고 물 길어 오는 일을 하였다.


그런데 석개는 물을 길러 우물에 가면 물통을 우물 난간에 걸어놓고는 나무꾼이나 나물 캐는 아녀자들이 부르는 노래 같은 것을 종일 부르다가 저녁에는 빈 통을 가지고 돌아왔다. 매를 맞아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다음날도 또 그렇게 했다. 나물을 캐 오라고 광주리를 들려 교외로 내보내면 광주리를 들판에 놓아두고 또 노래를 불렀다. 작은 돌멩이를 많이 주워 모아 놓고 노래 한곡을 부르면 돌멩이 하나를 광주리에 집어넣어 그 광주리를 가득 채웠고, 그러면 다시 노래를 불러 한곡이 끝나면 광주리의 돌을 하나씩 들에 던지기를 반복하다가 날이 저물면 빈 광주리를 들고 돌아왔다. 매일 맞아도 역시 그렇게 하여, 여성위까지도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성위는 기이하게 여기고 석개에게 노래를 배우게 했다.


그리하여 석개는 결국 근래 백여 년에 처음 본다는 평을 들을 만큼 장안 최고의 명창이 되었고 춤도 잘 추어서 당시에 견줄 만한 이가 없는 존재가 되었다. 까닭에 영의정 홍섬, 좌의정 정유길鄭惟吉, 영의정 노수신盧守愼, 좌의정 김귀영金貴榮, 영의정 이산해李山海, 좌의정 정철鄭澈, 우의정 이양원李陽元과 심수경(沈守慶, 1516~1599)이 연이어 화답하여 큰 시첩을 이루어주기도 했다.

심수경은 “천한 여자의 몸으로 여러 명상名相들의 시를 얻었으니, 빼어난 예술이야 어찌 귀하지 않으리오?”라고 하며, 석개의 예술적 재능을 크게 평가했다.

정유길의시,「 석개의 시첩에 쓴다. 2수[題石介詩帖二首]」에는 송인과 이웃하여 살며 함께 음악을 듣던 시절이 그려져 있다.


夢賚元爲水月隣, 몽뢰정은 원래 수월정의 이웃이라
兩翁分占一江春. 두 늙은이 온 강의 봄을 나누어 차지했지.
君家奏樂吾家聽, 그대 집에서 음악을 연주하면 우리집에서 들으며
絶勝屠門大嚼人. 그 빼어난 풍치 부러워 입맛을 다셨다네.


花無根帶月無痕, 꽃은 뿌리며 꼭지 없고, 달도 흔적 없는데
白髮追思舊酒樽. 백발이 되어 옛 술자리를 추억하네
莫漫行雲空自?, 지나가는 구름 공연히 스스로 멈추지 말라
爲予低唱感君恩. 나를 위해 나즉히 감군은 불러주노니.



몽뢰夢賚는 정유길(鄭惟吉, 1515~1588)의 정자 이름이다. 정자를 사고 보니 전에 꿈에 보았던 경치와 꼭 같았으므로 정자 이름을‘몽뢰’라고 지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석개가 부르는 ‘감군은’ 을 듣고 벗과 함께 술을 마셨던 일을 추억하고 있다. 여성위 송인의 별장인 수월정은 경치가 아주 좋았던 모양이다.





상촌 신흠(申欽, 1566~1628)은 7월 16일에 이수준李壽俊등 여러 벗들과 함께 소동파의 뱃놀이 기분을 내며 수월정에 가서 놀았다. 그의 시「동호의 수월정에서 노닐다[游東湖水月亭]」소서小序를보면,“ 여성위는 문장과 인망으로 당시에 우뚝 드러났고, 서법書法에 더욱 뛰어나 왕희지王羲之의 경지를 얻었으므로, 한 시대 금석문金石文의 글씨가 모두 그의 손에 맡기어졌다. 나도 여성위를 직접 보았는데, 아름다운 풍채가 단아하고 묵중하며 미목이 그림같이 생기어 참으로 귀공자의 풍격이었다. 그의 집에는 석개라는 가기歌妓가 있었으니, 대체로 옛날 진청(秦靑,옛날에 노래를 잘하던 사람의 이름)같은 유였다. 여성위는 이미 이 정자의 좋은 경치를 소유한 데다 또 성기聲妓에 대한 오락까지 소유하여, 태평 시대에 청복淸福을 누리고 끝내 부귀로 생을 마쳤던 것이다.”라고 써 두었다. 수월정의 경치와 그 주인의 고상한 풍류가 무척 부럽게 생각된 듯하다.


박지화(朴枝華, 1513 ~ 1592) 또한 “여성위 송인은 부귀한 가운데서도 아조雅操를 잊지 않았고, 스승과 벗을 존경하며 공손히 대접하였다.”라고 추억하며, 송공이 돌아가신 후, 여러 벗들과 함께 석개의 노래를 들었다. 그리고「노래를 듣고[聽歌]」라는 시를 남겼다.



主家亭子漢濱秋, 수월정 한강 물가 가을이 드니
卿月依然逝水流. 달빛 의연히 물 따라 흐르네.
唯有鳳凰天外曲, 오직 하늘가에 봉황곡 있으니
人問?得錦纏頭. 사람들 금전두 얼마인가 묻는구나.


搖落非徒宋玉秋, 흔들려 떨어짐은 송옥의 가을만이 아니요
一時人物盡東流. 한 시대 인물들 모두 동쪽으로 흘러갔네.
何須更聽?金縷, 어찌 다시 금루곡을 들을까
絃絶當時已白頭. 절현 당시 이미 백발이었으니.



봉황곡은 봉새가 황새에게 사랑을 구하는 노래이고, 금전두錦纏頭는 노래하고 춤을 추는 기생에게 주는 재물을 말한다. 옛날에 손님이 기생에게 비단 등을 선사할 때 머리 위에 얹어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고 한다. 석개 또한 수 놓인 안장에 비단 옷을 차려 입고 날마다 권세 있고 귀한 사람들의 연회에 불려가서, 전두纏頭로 받은 금과 비단이 집에 쌓일 정도였다.

송옥의 가을은 가을에 으레 따라 나오는 시어이다. 전국 시대 초楚나라의 문학가인 굴원屈原의 제자인데, 그가 지은『초사楚辭』「구변九辯」이“슬프도다, 가을의 절기여. 음산하고 거센 바람에 초목은 낙엽이 져 쇠퇴하였네.”라고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금루곡은 당나라 두추랑杜秋娘이 잘 불렀다는「금루의곡金縷衣曲」이아닌가한다.

“그대여, 금루의를 아끼지 말고 젊은 시절 아끼라. 꽃이 피어 꺾을 만하거든 곧 꺾을 것이요, 꽃이 없어진 뒤에 빈 가지만 꺾지를 마소.”라는 내용의 노래이다. 이런 사실들을 감안하여 위의 시를 읽어보면 수월정에서 듣는 그의 노래는 어쩐지 가을의 쇠락한 정취와 어울려 있음을 느끼게 된다. 여성위는 이미 작고했고, 노래하는 석개도 이미 백발이라 더욱 그러하다.


석개는 옥생玉生이라는 딸이 있었는데, 그녀 또한 제일 가는 명창이 되었다고 전한다.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은 그 옥아의 노래를 듣고「옥아가 작고한 인성 정대감의 사미인곡을 노래하는 것을 듣고[聞玉娥歌故寅城鄭相公思美人曲]」라는시를지어, “석개石介는 이미 죽었고, 지금은 대를 이어 아옥阿玉이라 불리는 아이가 노래를 잘한다. 고당高堂에서 사미인곡을 불러보게 했는데, 듣고 있으니 인간 세상 곡조가 아닌 듯하다.”라고 했을 정도이다.


그런데 석개의 삶은 최후가 좋질 못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후, 해주 행재소에 갔을 때 세력 있는 집안의 종놈이 그녀의 말을 따르지 않자 그 놈을 관가에 아뢰어 죄를 다스리려 하다가 살해당했다고 한다. 노래에 대한 열정과 집념, 그리고 신화적인 노력으로 이룬 그 모든 성취를 바르게 갈무리하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이다.


석개는 노래를 불러 부를 쌓고, 사회적 인정을 받는 데까지는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타인의 권세를 빌어 누군가를 해치려다가 결국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의 삶은 그 수많은 노래를 부르면서도 승화되지 못했다. 자기를 승화시키지 못한 노래, 그런 노래를 한평생 불렀다는 점에서 석개의 삶은 비극적이다. 외모를 가꾸는 것도 어렵지만, 재능을 가꾸기는 더 어렵고, 인격을 가꾸기는 더더욱 어렵다고 한다. 그리고 아무리 대단한 사회적 성취라도, 대개는 한때의 수단이나 기능적 필요에 지나지 않으면 쉽게 잊혀져버린다.

따뜻한 마음, 사랑의 마음이 삶에 두텁게 깔려 있어 감동을 준 경우에만 세월의 단층을 넘어 길이 기억되는 것이 아닐까. 순하고 아름다운 노래로 타인의 마음을 녹이면서 어쩌자고 자신의 마음은 그렇게 독하게 지녔던 것인지, 석개의 재능과 성취가 부질없게 느껴진다. 그 부질없음이 어찌 꼭 석개의 삶에만 해당되는 것일까.



<참고문헌>
박지화(朴枝華)『수암유고(守庵遺稿)』(한국문집총간34), 민족문화추진회, 1990.
송인(宋寅)『이암유고(遺稿)』(한국문집총간36), 민족문화추진회, 1990.
신흠(申欽)『상촌고(象村稿)』1,2(한국문집총간71,72), 민족문화추진회, 1990.
심수경 지음, 민족문화추진회 옮김『견한잡록(遣閑雜錄)』『( 대동야승』13권), 민족문화추진회, 1966.
유몽인지음, 신익철 옮김『나 홀로 가는 길』, 태학사, 2002. pp.152~153.
이안눌(李安訥)『 동악집(東岳集)』(한국문집총간78), 민족문화추진회, 1990.
정유길(鄭惟吉)『임당유고(林塘遺稿)』(한국문집총간35), 민족문화추진회, 1990.
허균 저, 민족문화추진회 옮김『성소부부고 3』, 민족문화추진회, 1985.



국악누리

The National Center for
Korean Traditional Performing 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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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이 온전한 예술가로 탄생하기까지 걸어야 할 길은 험난하다. 피나는 노력은 필수인데 나태해지려는 유혹은 끊임없다. 그런 길이 평탄할 리 없으며, 그 노정은 지루하다. 그러나 예술을 향한 열정을 품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해도 묵묵히 찾아 나선다. 위대한 예술가의 자리는 쉽사리 얻어지지 않는다. 아무에게나 찾아오지 않는다. 높은 예술적 성취란 앞뒤 돌아보지 않고 자신의 길을 올곧게 걸어간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법이다.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나오는 조선시대 한 여성 음악가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송인(宋寅, 1517-1584)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중종의 딸 정순옹주와 혼인한 인물이다. 어느 날 그의 집에 석개(石介)라는 이름의 작은 계집종 하나가 들어왔다. 외모는 초라하기 그지없고 보잘 것이 없었다.

외모 가지고 뭐라 하는 것이 미안한 일이지만 유몽인은 석개의 얼굴에 대해 ‘늙은 원숭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표현해 놓았다. 게다가 눈이 어찌나 작은지 ‘비틀린 화살’과 같다고 했다.

이 같은 적나라한 표현에서 이 여자아이의 외모가 충분히 그려질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해서는 안 되는 일. 이처럼 조그맣고 못생긴 꼬마 아이의 한 길로 향한 집념을 따라가 보자.


음악에 대한 열정


나이 어린 석개에게 맡겨진 일은 주로 물 긷는 일이나 약초 캐는 일과 같은 허드렛일이었다. 그러나 석개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물을 길어 오라고 시키면 나무통을 지고 우물가로 달려가 물통을 난간에 걸어 놓고 하루 종일 노래만 불렀다. 물 긷는 일은 안중에 없었다. 물통을 난간에 걸어 두고는 이러 저런 노래를 되는대로 열심히 불렀다. 그녀의 노래는 종일토록 우물가에서 울려 퍼졌다. 그렇게 종일 노래를 부르다 날이 저물면 빈 물통을 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면 매와 꾸지람이 어김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이면 또다시 물통을 지고 가서 종일 노래하다 돌아오는 나날을 매일같이 보냈다. 남의 집 귀염둥이 딸도 아닌 것이, 시키는 일도 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만 하였다.


결국 송인의 집에서는 석개에게 다른 일을 시키기로 했다. 이번에는 약초를 캐 오도록 했다. 그녀는 매일같이 광주리를 들고 들판으로 나갔다. 그런데 약초 캐는 일에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역시 노래 부르는 일에만 열중했다. 어느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주변에 작은 돌멩이를 수북하게 모아 놓는다. 노래 한 곡을 부르고 나면 돌멩이를 하나 집어 광주리에 넣고, 다시 한 곡을 부르고 나면 또다시 돌멩이를 광주리에 넣었다.

광주리가 꽉 차고 나면 노래 한 곡을 부를 때마다 다시 돌멩이를 덜어 내는 방식이었다. 이런 행동은 하루 종일 반복되었다. 그녀의 모든 삶은 노래에서 시작하고 노래로 마무리되었다. 종일 노래만 부르다 저녁 무렵이 되면 약초 하나 캐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갔다. 나이는 어리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만큼은 어른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녀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자신이 놓여진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한 곳을 향한 전진


석개의 삶은 이처럼 한 곳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자신의 신분과 자신의 현실, 그리고 노래를 부르는 이상적 삶의 간극은 결코 좁혀지지 않지만 석개는 그러한 현실에 개의치 않고 노래만 불렀다.

사실 물 긷기나 약초 캐기는 자신이 아니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노래’란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잘 하기 어렵다. 석개는 그러한 현실을 잘 알고 있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기보다는 자신이 잘 하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석개의 행동은 범상치 않다. 그녀가 살았던 시대는 조선이고, 그녀의 신분은 ‘종’이 아니던가. 꼬마 아이가 노느라 꾀부리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노래라는 한 길로만 고집스럽게 걷고자 했으니 호기심이 생길 법도 하다. 결국 그 이야기가 송인의 귀에까지 들 어갔다. 주변의 꾸지람에도 불구하고 그 뜻이 전혀 꺾이지 않고 자신의 길만 걷는 아이가 있다하니 한번쯤은 궁금할 터이다.

송인은 그 자그맣고 고집스런 아이가 그토록 몰두하고 있는 세계가 무언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노래를 배울 수 있도록 허락하기에 이르렀다. 그토록 좋아하는 노래를 정식으로 배우기 시작하자 석개의 노래 실력은 나날이 좋아져 최고의 경지에 다다랐다. 『어우야담』의 작가 유몽인의 표현에 의하면 “근 100여 년 동안 그녀만한 명창이 없었다.”라는 찬사를 할 정도였으니 당대 최고의 실력이 아니었을까.


음악가의 탄생


끊임없이 노래를 연마한 결과 석개는 장안에서 노래를 잘 하는 음악인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녀의 열정이 전문가의 길을 내어준 것이다. 당시 최고의 노래 실력을 지닌 석개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 그 누구라 하더라도 심취하지 않는 이 없었다.

그녀가 잔치 자리에 출연하여 노래 부르면 금과 비단이 수없이 쌓였다. 결국 예상치 못했던 부도 축적하게 되었다. 최고 실력에 대한 정당한 댓가였다. 그저 노래가 좋아서 열심히 불렀을 뿐인데, 실력은 물론이고 부와 명성이 부수적으로 따라왔다. 온갖 비난을 참으며 험난한 음악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결과였다.


석개의 노래는 당시 여러 재상들을 감동시켰다. 석개의 노래를 듣고 그녀를 위해 지은 시가 많다. 영의정 홍섬과 노수신, 이산해, 좌의정 정유길, 김귀영, 정철, 우의정 이양원, 심수경 등이 화답하여 큰 시첩을 이룬 것도 있다. 이는 당시 겨룰 만한 이가 없을 정도로 빼어난 석개의 실력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석개는 송인의 사후에도 여전히 여러 문인들이 칭송하는 대상이 되었다. 송인이 지어 놓은 동호의 수월정(水月亭)은 풍광 좋기로 유명한 곳이었다. 그곳에 오르면 묘적산의 아침 구름, 청계산의 저녁 비, 한강의 가을 달, 아차산의 개인눈, 용문산의 푸른 산빛, 전교의 너른 들판, 저자도의 돌아가는 배, 사평의 나그네 등 아름다운 팔경(八景)이 보였다. 수월정에 오른 여러 문인들은 그를 생각하면서 석개의 이야기를 시로 썼다. 여러 벗들과 달밤에 한강에서 뱃놀이를 한 후 수월정에 올라 풍류를 즐길라치면 훌륭한 음악가로 거듭난 석개의 이야기는 늘 그들의 시심을 자극했고 화제의 한가운데를 차지하였다.


“연습이 대가를 만든다.”라는 말이 있다. 석개는 어린 시절부터 프로였다. 연습이 대가를 만드는 원리를 연습을 통해 몸소 체득했고, 그 결과가 그녀를 대가로 만든 것이다. 중종 대에 살았던 여성 음악가 석개. 그녀의 성취는 큰 노력을 하지도 않고 큰 성과만을 바라는 요즘 사람들을 꾸짖는다. 어린 시절부터 여기저기 기웃거리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온 전문인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녀는 지니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은 성실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같은 것이다.




- 글˚송지원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 -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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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介


石介者礪城尉宋寅之婢也

顔如老獲?眼如燈明箭

兒時自外方入充於鈴下役

宋家豪貴戚里粉鉛朱翠之娥 備左右應待不可勝記


使石介戴不桶汲水 石介之井 掛桶井欄終日歌

其歌不成腔調 如樵童採女之謳

日暮空桶而 受答猶不悛 明日復如是

又使之採藥 □筐出郊野田中 多拾小石唱一曲投一石于筐中

筐旣盈遂曲出一石于田 盈而復□者再三 日暮空筐 而回 受笞猶不悛 明日復如是


礪城聞而奇之 使之學歌 爲長安第一名唱 近來百年間所未有

雕鞍錦衣日赴權貴之邀 纏頭金帛日積于家 終爲富家


?天下之事勤而後成 豈獨石介之歌也歟

懦而不立何事能就

其女玉生亦名唱


석개(石介)란 자는 여성위(礪城尉) 송인(宋寅)의 하녀이다.

얼굴이 늙고 원숭이 같고 눈은 등명(燈明) 같았다.

어렸을 때 외방으로부터 들어와 영하(鈴下)의 노역자로 충당되었다.

송인의 집이 호족 집안이요 귀한 외척이어서 분바르고 붉고 푸른 단장을 한 미인들이 좌우를 갖추어 응대하기를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였다.


석개를 시켜 나무통을 이고 물을 길어 오라 하니, 석개가 우물로 가서는 통을 우물 난간에 매달고 종일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곡조를 이루지 못해서 마치 나무하는 아이오 나물 캐는 여자의 노래 같았다.

날이 저물어 빈 통으로 돌아왔다. 맞았는데도 오히려 고치지 않고 이튿날도 다시 그처럼 했다.

또 그를 시켜 약을 캐라 하니, 광주리를 끼고 교외에 있는 밭으로 나가 작은 돌을 많이 주어서 한 곡을 부르곤 돌 하나씩을 광주리에 던져 넣었다.

광주리가 이미 차고 나면 한 곡조마다 드디어 노래하며 돌 하나씩을 밭으로 내놓았다. 차면 다시 버리기를 두세 차례하고 날이 저물자 빈 광주리로 돌아왔다.

매를 맞고도 오히려 고치지 않고 이튿날도 다시 이와 같이 했다.


여성위가 듣고 그를 기이하게 여겨 노래를 배우게 하니, 장안의 제일 명창이 되었는데 근래 100년간 그런 명창이 없었다.

조각한 안장에 비단 옷을 입고 날마다 권세 있고 귀한 집 잔치에 가니 전두(纏頭)로 받은 금과 비단이 날마다 집에 쌓여 마침내 부자가 되었다.


아! 천하의 일이 근면하게 해야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니, 어찌 유독 석개의 노래 뿐이랴!

나약하여 서지 못하면 어찌 일을 능히 이루겠느냐?

그 딸 옥생(玉生) 역시 명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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