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 시인의 사설시조집 『대명사들』
이송희 시인
약력 :
광주 출생으로, 200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조가 당선, 『열린시학』 등에 평론을 쓰며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절기의 판화』, 『아포리아 숲』,
『이름의 고고학』, 『이태리 면사무소』,
『수많은 당신들 앞에 또 다른 당신이 되어』
가 있으며, 평론집 『아달린의 방』, 『길 위의
문장』, 『경계의 시학』, 『거울과 응시』,
『유목의 서사』, 연구서 『현대시와 인지시학』,
그 외 저서로 『눈물로 읽는 사서함』 등이 있다.
제20회 고산문학대상을 수상했으며,
전남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시인의 말
겨울을 끌어안고
보내지 못한 날
그곳에서 들려 오는 깊은 소리를 받아쓴다
여전히, 거기 남아있는
뿌리들의 뒤척임
이송희 시인
시집소개
우리는 ‘대명사’의 호명이 여는 부름에 이끌린다. 이때 주체는 파편화된 주체가 아닌 생의 추위로 인한 얼어붙음을 통해 순간일지라도 하나의 주체로 나타난다. “어떤 말도 하지 못한 눈발이 퍼부은 날”에 “얼음이 되었다가 입 안에 머금은 채 울먹울먹 삼킨 말들 가루가 된 시간들을 탈탈 털어 마”시는 주체가 되어 “당신의 계절”(「눈보라」)이 여전히 나와 같은 추위 속에 있는 시간임을 느끼면서 말이다.
이 순간의 주체들은 나타났다 사라지며 동시에 사라짐을 뒤로 하고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그 현현 속에서 당신의 지평을 주체가 함께 살아내는 계절로 불러온다. 이때에 호명되는 주체의 이름들은 그런 점에서 타자들과 교차하고 있다. 주체와 타자의 교차는 전통적 시간과 지금 여기의 시간의 언어를 틈입시키며 교차시킨다. 이송희의 이러한 이중적인 교차가 바로 이송희의 시설시조가 도달한 언어적 지평이다. _ 김학중 시인 해설
대명사들
그들과 저들 사이 내 자리는 따로 없다
부여의 사출도四出道인가, 개돼지로 불리면서
때되면 밥 먹여주니 웅크리고 입 다물라 떠도는
유언비어 속 현행범이 되었다가 천하디 천한 우
리는 말 한 마리 값도 안 되고 그녀가 읽어가는
수첩 속 문장에선 우리는 또 저것들과 이것들로
흥정되고
이름을 잃은 우리는 대명사로 불린다
비의 문장
바다는 오늘 밤도 온몸을 뒤척인다
닮아진 운동화 뒤축을 만질 때마다 쓰다만 공책
한 권을 넘겨 볼 때마다 먼지만 쌓여 있는 빈 책
상을 볼때마다 책상 옆에 홀로 놓인 책가방을 볼
때마다 흘러간 유행가처럼 잊혀질까 두려운 이름,
그 이름 부르며 뜬 눈으로 지새던 밤, 부끄러운
세상에 갇힌 그 붉은 울음을
가만히 끌어안으며
팽묵항을 적시는 비
여전히, 오월
총구는 방향을 바꿔 우리를 덮쳤지
순식간에 날아간 눈과 입을 찾느라 얼굴은
바닥을 짚고 같은 곳을 맴돌았지 다급한 군화
발소리, 구석에 내몰린 채 우리가 본 것은 천
막에 가려지고 아무도 모르는 곳에 흔적 없이
버려졌지 찢어진 거울 속에는 타다만 촛불들
불 꺼진 초를 안고 다시 모인 저녁 광장
불타는 오월의 꿈이 불티 되어 떠돌았지
눈보라
당신의 계절은 으슬으슬 추웠어
어떤 말도 하지 못한 눈발이 퍼부은 날, 빈속을
헤집고 다닌 해고 문자 알림 소리 밤새도록 휘날린
한기에 떨었지 문밖에 선 채로 눈사람이 되었다가
눈 밖으로 밀려날까 얼음이 되었다가 입 안에 머금
은 채 울먹울먹 삼킨 말들 가루가 된 시간들을 탈탈
털어 마셨어 아이는 집 안에서 홀로 울고 있었어 기
한을 훌쩍 넘긴 독촉장을 모아놓고 물끄러미 바라
보다 털어 넣는 알약들, 흘러내린 슬픔마저 얼어붙
은 밤이 가고
허공에 흩날린 꿈도 다 사라진 겨울 아침
자기소개서
본인은 실밥 터진 바람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구름처럼 중얼거리며 유년기를 보내고 책장 위
수북한 먼지로 살았습니다 어둠을 덮고 잔 이력만
수십 년째, 떠도는 허무를 모아 안개를 제조하고
졸고 있는햇살 그려 입상을 했습니다 누군가의 쥐
구멍을 들춰주는 꿈을 꾸며 뼛속으로 숨어든 한숨
들을 봅니다 삼겹살에 찍혀있는 합격도장을 씹으면
하수도 뚜껑 너머로 좁은 하늘이 열립니다 허기진
낱말들도 정식채용 되어있는 담벼락에 출근하는
담쟁이가 있습니다
호명된 어둠 속 집들이 하나 둘 불 켜는 창
이중섭의 방
그리움이 깊은 건 비어 있기 때문이다
방바닥에 눌어붙은 푸른 기억 때문에 한 평 반
당신의 방엔 간절함이 자란다 외로운 밤 다 태운
담뱃갑은 지화에 봄날의 아이들이 환하게 뛰어논
다 길 떠나는 가족을 따라 달이 가득 차오른다
우리가 가보지 못한 그 길이 출렁인다
해설 I
시적 언어의 우정,
그 미약한 촛불에 대하여
김학중 | 시인
우리의 삶에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끊임없이 틈입
한다. 우리가 정보의 시대를 살아가며 모든 것을 디지
털 데이터로 환원하는 세계에 살고 있음에도 우리의
배후에서는 우리의 언어가 가진 불가능성을 환기하
는 일들이 지속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외면하고 있
는 동안에도 우리의 바깥에 놓인 침묵과 어둠의 평원
으로, 그 평원의 말 없는 웅얼거림으로 우리의 거주지
가까이 상주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제 이 지평에
무감하다. 우리는 데이터로 전환되는 것이 아닌 정보
들에 무관심하고 무엇보다 그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긴
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삶에 확실성의 토대를 제
공하던 사물과 그 사물의 지평에 놓인 타자들을 추방
하였다. 한병철이 말한 '사물의 소멸'이 일어난 시대는
이제 공고해졌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의 입구 앞에서
여전히 서성거리며 이미 소멸한 타자를 향한 애도의
노래를 부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노래는 웅얼거림
으로 희미하게 들리지만 그것이 노래라는 것은 틀림
없다. 그 노래가 이미 사라진 타자에게 향할지는 미지
수이지만 그것은 그들에게는 고려의 영역에 있는 질
문이 아니다. 그들은 실패와 불가능성을 감내하며 우
리의 타자들에게 이 노래를 타전한다. 그들은 다름 아
닌 시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