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36) 주교들의 봉사 직무와 사명, 「교회헌장」 제24항
‘주교들의 봉사 직무와 사명’에 대해서 설명하는 「교회헌장」 제24항은 이어지는 25항(주교의 가르치는 임무), 26항(주교의 거룩하게 하는 임무), 27항(주교의 다스리는 임무)의 ‘도입부’ 역할을 합니다. 주교들은 사도들의 후계자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으신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만민을 가르치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이어받습니다. 그럼으로써 “모든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아 또 계명을 지켜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공의회가 언급한 마태 28,18-20과 마르 16,15-16 그리고 사도 26,17-18은 사도들이 받은 주님의 명령을 확증합니다.
이렇게 공의회는 이미 20항과 21항에서 언급한 사도들의 후계자인 주교들의 직무가 그리스도로부터 나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 교회 역사에서 이 봉사 직무가 그리스도의 명령으로 하느님 백성을 위한 것임을 잊고 직무 자체에 중점을 둠으로써, 그것이 통치 직무(권력)로만 인식되는 유혹을 지속적으로 받아온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의회는 주교들이 신앙과 구원의 증인으로서가 아니라, 세상에서처럼 교회라는 회사의 대표로 비치는 것을 경계합니다.
또한 공의회는 주교들이 주님에게서 받은 봉사 직무를 완수하기 위한 증인으로서 “성령”을 언급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으며, 오순절에 ‘성령을 파견’하셨고, 이 ‘성령의 힘으로’ 사도들이 민족과 백성들과 왕들 앞에서 당신의 증인이 되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주교들이 받은 사명은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성령의 권능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당신 백성의 목자인 주교들에게 맡기신 이러한 임무는 “참섬김”이며, 성경에 나오는 “디아코니아” 곧 봉사입니다.
공의회는 이어서 “주교들의 교회법적 임명”, 곧 주교들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조건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예컨대 아직 구체적인 교회법적 규정이 마련되지 않았던 교부 시대에는 주교 후보자를 선택할 때 공동체의 모든 신부와 투표권이 있는 백성이 참여했고, 다른 주교들이 그 교회를 위해 선택된 후보자를 축성하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당시에는 주교에게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 주교 축성 안에 포함되었습니다. 공의회는 교회 최고의 보편 권력에 의해서 폐지되지 않은 “합법적인 관례”를 통하여 주교 임명이 이루어질 수 있고, 또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사이에 차이가 있는 교회법 규정과 관련하여 “동일한 권위로 제정되거나 승인된 법률”에 따라 주교 임명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로마 주교가 직접 교회법적 임명’을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주교들이 임명되고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도적 친교’가 필수 조건임을 의미합니다.
[교회의 언어] Hodie mihi, cras tibi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라는 뜻의 “Hodie mihi, cras tibi.”라는 문구는 유럽의 공동묘지에 가면 그 입구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문장입니다. 죽음이 오늘은 나에게 찾아왔지만, 내일은 너에게 찾아갈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라는 죽은 이들의 조언과도 같은 말입니다. 갑작스럽게 위중한 병에 걸렸거나, 최근에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한 경우가 아니라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 같습니다. 오히려 누구나 맞이하게 되는 죽음임에도 나에게는 먼 훗날의 일처럼 여기고 저 멀리 죽음을 떨어뜨려 놓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죽음을 올바로 인식하며 살아가는 것은 우리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습니다. 죽음을 단순히 공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삶의 과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지금의 삶에 더욱 충실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위령 성월을 지내면서 죽음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 변화된 삶이 우리 죽음의 모습을 바꾸어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기를 희망합니다.
[가톨릭 신학] ‘말이 많은 것에 대한 경계’ - 히브리인들의 지혜
‘말을 잘하는 것’은 언제나 매력적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말을 잘하기 위한 수사학 훈련이 있었던 것을 보면, 그 중요성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 같습니다. 말을 잘하는 것은 분명 중요합니다. 하지만 ‘말을 많이 하는 것’과 ‘말을 잘하는 것’은 분명히 다른데, 많은 경우 사람들은 ‘말을 많이 하는 것’을 ‘말을 잘하는 것’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아무래도 말을 많이 하게 되면 모임이나 대화에서 존재감이 커지고, 말을 잘하는 사람처럼 비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말이 많은 것’은 종종 긍정적인 효과보다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말이 많음을 경계하는 속담들이 여럿 있습니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다.’, ‘말은 아끼면 금이요, 늘리면 독이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현인들은 많은 말을 하는 것보다 필요하고 바른 말을 잘하는 데 더 신경 쓸 것을 강조했습니다. 성경에서도 이러한 가르침을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말이 많은 데에는 허물이 있기 마련, 입술을 조심하는 이는 사려 깊은 사람이다.”,(잠언 10,19) “모든 사람이 듣기는 빨리 하되, 말하기는 더디 하고 분노하기도 더디 해야 합니다.”(야고 1,19)
구약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공부하다 보면, ‘말 많은 것을 경계하는 히브리인들의 지혜’를 느낄 수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동사에 ‘-로 부터’라는 의미를 더하는 접두어 מ을 붙여 명사를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쓰다.’라는 동사 כתב에다 מ을 더한 מכתב는 ‘편지, 기록된 글’이라는 뜻이 되고, ‘재판하다.’라는 동사 שפט에서 ‘재판, 판결’이라는 명사 משפט가, ‘거주하다.’라는 동사 שכן에서 ‘거처, 성막’이라는 명사 משכן가 파생되는 식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말하다.’라는 동사 דבר에 접두어 מ을 붙인 מדבר는 ‘광야, 황량한 곳’이라는 전혀 다른 의미가 됩니다. ‘말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으니 ‘단어, 말’ 등의 뜻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신학적으로는 ‘광야’라는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마르 1,4)한 것처럼, 광야는 하느님의 ‘말씀’이 내리고 선포되는 곳이기 때문에 מדבר가 ‘광야’의 뜻을 갖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에 더해, 이 단어에는 ‘말’에 대한 히브리인들의 지혜로움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이 단어를 통해 ‘말’을 많이 하는 것에서 늘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려주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쓸데없이 불필요한 말만 많이 늘어놓는 것은 결과적으로 황폐한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위령 성월은 무엇인가요?
우리의 인생은 때로 길 위의 여정으로 비유되곤 합니다. 가톨릭교회도 전통적으로 인생을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의 여정이라 표현하는데, 그 여정에서 누구나 예외 없이 마주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지상 순례의 끝이며, 지상 생활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실현하고 자신의 궁극적 운명을 결정하라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자비의 시간의 끝이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13항) 그러나 죽음은 믿는 이들에게는 새로운 삶으로 옮아감이며, 세상에서 깃들이던 집이 허물어지면 하늘에 영원한 거처가 마련됩니다. 또한 “사람은 단 한 번 죽게 마련”(히브 9,27)이기에 죽음 이후 ‘환생’이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영원히 사시는 것처럼 우리 모두도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가톨릭교회 교리서》 1016항)을 고백하는 교회는 특별히 11월을 위령 성월로 지내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면서 내가 아는 가족이나 친지, 지인들의 영혼만이 아니라 연옥에서 단련받는 영혼들을 위해서도 기도하기를 권고합니다.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며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생명의 주인이시며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느님 앞에서 ‘영원한 삶’과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음으로 고백하기에 가능한 친교입니다.
한편 위령 성월은 전례력으로 마지막 시기에 자리합니다. 한 해가 12월로 끝나는 것과 달리 교회는 대림 시기로 새로운 해를 시작하기에 전례력으로 11월은 한 해를 마무리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위령 성월은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한편, 우리 각자의 죽음에 대해서도 깊이 묵상하고 지난 시간을 돌아볼 수 있는 은총의 시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속에서 다양한 갈등과 어려움을 겪고 불안해하는 우리에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라고 말씀하십니다. 부활에 대한 확신은 단순한 낙관이 아니라, 살아계신 그리스도 안에 깊이 뿌리내린 ‘희망과 용기’를 의미합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몸소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이 끝이 아님을 보여주셨고, 온갖 유혹과 두려움, 그리고 진리가 아닌 거짓들이 다가오더라도 현혹되지 않도록 이끌어주십니다. 실패로 보이는 듯한 그 너머에 희망이 있으니, 용기를 내어 당신과 함께 나아가자고 초대하십니다. 그러니 주님과 함께하는 가운데 ‘희망의 순례자들’로서 기쁨과 사랑을 나누며 실천하는 은총 가득한 위령 성월 보내시길 바랍니다.
[저는 믿나이다] (50) 예수 그리스도는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시다
한 위격 안에 신성·인성이 온전히 결합된 그리스도
가톨릭교회는 432년 열린 세 번째 보편 공의회인 에페소 공의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가 참하느님이시며 참인간이시다는 정통 교리를 확립하고 성모 마리아를 ‘하느님의 어머니’라고 선포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교 신학을 선도하던 두 주류인 시리아 안티오키아 학파와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 따라서는 성부와 같은 본질이시고, 인성에 따라서는 인간인 우리와 같은 본질이시다. 두 본성의 결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라며 ‘우리는 한 분 그리스도, 한 분이신 성자, 한 분이신 주님을 고백한다’는 신앙 정식(신경)을 공동으로 내놓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교회의 이같은 신앙 고백에 정면으로 반대해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오직 신성(神性)만 있다며 ‘그리스도 단성설(單性說)’을 주장한 이가 등장했습니다. 바로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수도원장 에우티케스(?∼454)였습니다. 그는 마치 강물이 바다에 흡수되듯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과 결합된 후 흡수돼 오직 신성만 남는다고 했지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만을 강조한 네스토리우스 이단과 정반대되는 주장으로 성 치릴로 후임으로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가 된 디오스코루스가 에우티케스를 지지함으로써 또 한 번 교회 분열의 위기가 닥칩니다.성 레오 1세 교황(440∼461)과 동로마 제국의 마르키아누스 황제는 교회 분열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451년 10월 8일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마주하고 있는 칼케돈의 성 에우페미아 성당에서 에페소 공의회 이후 20년 만에 네 번째 보편 교회 공의회를 개최합니다. 이를 ‘칼케돈 공의회’라 부릅니다.
칼케돈 공의회는 600여 명의 주교가 참석해 11월 1일까지 한 달여 진행됐습니다. 주교들은 니케아 신경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 치릴로가 네스토리우스에게 보낸 편지, 그리스도의 단일한 인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결합돼 있다는 레오 1세 교황의 ‘교리 서한’을 차례로 낭독하고 “이것이 사도들의 신앙”이라며 승인합니다. 그리고 에우티케스의 그리스도 단성설을 지지한 디오스코루스 총대주교를 단죄했지요.
다음은 ‘칼케돈 신경’의 핵심 내용입니다. “우리는 모두 거룩한 교부들을 따라 일치된 마음으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한 분이시고 같은 성자이심을 고백하도록 가르친다. 바로 그분께서는 신성에서 완전하시고 같은 분이 인성에서 완전하시며, 같은 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고 이성적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참으로 인간이시다. 같은 분이 신성에 따라서는 성부와 본질이 같으시고 인성에 따라서는 우리와 본질이 같으시며, 죄 말고는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으시다.(히브 4,15 참조) 같은 분이 한편으로는 신성에 따라 시대 전에 아버지에게서 나시고, 다른 편으로는 인성에 따라 마지막 날에 우리를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동정녀이시고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셨다.
한 분이시고 같은 분께서 그리스도, 외아들, 주님이시며, 두 본성 안에서 혼합되지 않으시고 변화되지 않으시며 분리되지 않으시고 나뉘지 않으시는 분으로 인식되며, 이 외에도 결합으로 인해 본성들의 구별이 없어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두 본성의 각 속성이 보존되며, 하나의 프로소폰(προσωπον)과 하나의 히포스타시스(υποστασιξ)로 결합되신다. 외아들이시며, 하느님이시고, 말씀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두 위격으로 나뉘거나 분리되지 않으시며, 이전에 예언자들이 그분에 관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친히 우리에게 가르치신 바와 같이, 그리고 교부들의 신앙 고백이 우리에게 전해 주었듯이 한 분이시고 같은 분이시다.”(덴칭거, 「신경, 신앙과 도덕에 관한 규정·선언 편람」 111쪽,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이 칼케돈 신경에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프로소폰을 우리말 ‘위격’으로 옮겼고, 히포스타시스는 본문 그대로 두었습니다. 이 신학적 의미를 우리말로 명확하게 옮겨줄 단어가 아마 없는 모양입니다. 현재 한국 교회 성서학과 신학 분야에서 저명한 학자들이 공동으로 옮긴 「교부들의 그리스도론」에서도 ‘프로소폰’과 ‘히포스타시스’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다만 칼케돈 신경의 의미를 요약하면서 두 단어를 이렇게 조심스레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 등 두 본성은 유일한 분 안에 결합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고유한 차이를 보존한다. 이 유일한 분은 그분의 ‘외적인 드러남’(프로소폰)에서뿐만이 아니라 그분의 ‘심오한 존재’(히포스타시스)에서도 한 분이고 같은 분이시다.”(40쪽) 참고로 우리말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는 히포스타시스를 ‘위격’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칼케돈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는 참하느님이시고 참인간이시며, 신성으로는 아버지 하느님과 동일 본질이며 인성으로는 죄를 제외하고 우리와 동일 본질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한 위격 안에 신성과 인성이 결합돼 그대로 유지된다’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핵심 교리를 선포했습니다. 이 칼케돈 신경으로 마침내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믿을 교리를 규정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태 16,15)라는 예수님 물음에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고 답한 베드로의 고백 이래 초대 교회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에 대한 신앙 고백을 해왔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다음 호부터는 일곱 차례에 걸쳐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내용에 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생활교리]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습니다”(로마 5,20)
예나 지금이나 원죄 교리만큼 자주 오해되거나 잘못 해석된 교리도 드물다. 베네딕토 16세 교황 역시 이렇게 지적한다. “현대신학과 사목이 처한 가장 심각한 문제점의 하나는 ‘원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과 원죄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그래도 로마가 중요하다』 91). 그렇다면, 우리는 원죄 교리, 특히 ‘첫 인간의 죄가 후손에게 전해진다’는 교회의 전통적인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겠는가?
1. 죄의 연대성? 원죄는 아담과 하와가 창조주 하느님께 불순종하여 그분의 뜻을 거스른 죄로, 그 결과 인간은 하느님과의 친교를 상실하게 되었으며, 그 영향은 모든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다. 물론 “원죄의 전달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이다”(『교리서』 404). 다만 원죄의 전달은 일부에서 오해하듯, 조상의 죄가 후손에게 ‘대물림’되어 악영향을 준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 이후 이미 ‘구원의 약속’(창세 3,15 참조)을 주셨으며, 유일한 중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친교를 회복해 주셨다.
따라서 원죄는 세례를 통해 이미 용서된다. 또한 각자의 죄는 각자에게 책임이 지워지지만, 원죄는 우리가 “짊어진”(『교리서』 404) 죄로서, 개인의 자유의지로 지은 죄가 아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개인적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는다”(1코린 12,26)라는 말씀처럼, 한 사람의 죄는 그 개인에게만 머무르지 않고, 그가 속한 공동체에 어떤 방식으로든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인류가 하느님 앞에서 서로 책임을 지는 하나의 형제적 공동체라는 점을 고려하면, 원죄의 전달은 ‘죄의 연대성’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곧 원죄가 후손들에게 전해진다는 것은, 인간이 하느님 안에서 형제자매로서 서로 연대하며 그 결과를 함께 짊어진다는 의미이지, 죄 그 자체나 그에 대한 개인적 책임이 후손에게 전가된다는 뜻은 아니다(『죽은 이를 위한 올바른 기도』 24 참조).
2. 은총의 연대성? 원죄를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구원’과 연결하여 바라보아야 한다(『교리서』 407).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5장 12-21절에서 아담으로부터 비롯된 죄와 죽음을 말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크게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은총과 생명을 강조한다. 이는 원죄 교리의 핵심이 단지 인간의 타락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총임을 명확히 드러낸다. 곧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그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에게”(『교리서』 389) 주어진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은총의 연대성’은 아담으로 시작된 ‘죄의 연대성’보다 더 크고 앞선다.
이런 의미에서 파스카 찬송이 노래하는 “오, 복된 탓이어라”라는 역설적인 찬미는 원죄 교리의 참된 의미를 드러낸다. 곧 원죄 교리의 중심에는 “하느님 없이, 하느님보다 앞서서, 하느님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처럼 되[려는]”(『교리서』 398) 인간의 죄가 자리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진리는 하느님의 은총이 결코 지워지거나, 취소되거나, 철회될 수 없는 사랑의 선물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매주 읽는 단편 교리]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
오늘 11월 9일은 라테라노 대성전 봉헌 축일입니다. 어쩌면 사람이 아닌 성당을 기념하는 일이 흔치 않은 데에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 베드로 대성당이 아닌 라테라노 대성당의 봉헌 축일을 지내는 것이 낯설 수 있습니다. 오늘은 라테라노 대성당의 역사와 그 봉헌 축일을 지내는 이유를 알아봅니다.
라테라노 대성당 중앙 입구에는 “전 세계와 로마의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머리”라는 라틴어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라테라노 대성당은 로마 교구의 주교좌 성당으로서 로마에 있는 최초의 바실리카 양식 대성당이고, 전 세계 교회의 어머니(母) 교회입니다. 새로 선출된 교황은 교황 취임식 이후, 규정된 예식에 따라 라테라노 대성당에서 로마 교구장에 착좌합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272~337년)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에 종교 자유를 승인하면서 성 밀티아데스 교황(311~314년 재위)에게 라테라노 궁전을 선사하였습니다. 그리고 후임자 성 실베스테르 1세 교황(314~335년 재위)은 궁전 옆에 라테라노 대성당을 건축하여 324년에 봉헌하였습니다. 이후, 898년 지진이 발생하여 성당이 붕괴되었는데, 교황 세르지오 3세(904~911년 재위)는 성당을 재건하여 905년 성 요한 세례자에게 봉헌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황 루치오 2세(1144~1145년 재위)는 1144년 다시 성 요한 사도에게 봉헌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성당의 공식 명칭은 “라테라노의 지극히 거룩하신 구세주와 성 요한 세례자와 성 요한 복음사가 대성당”(Archibasilica Sanctissimi Salvatoris et Sancti Iohannes Baptista et Evangelista in Laterano)입니다.
라테라노 대성당은 1309년 교황청이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겨 가기 전까지 약 1000년간 사도좌가 자리했던 성당입니다. 1377년 교황이 다시 로마로 돌아오는데, 이때 화재로 황폐해진 라테라노 대성당 대신 바티칸으로 거처를 옮기게 됩니다. 라테라노 대성당 봉헌 축일은 12세기에 도입되어 처음에는 로마에서만 기념되었으나, 훗날 교황 베네딕토 13세(1724~1730년 재위)가 이를 보편 교회의 축일로 지내게 하였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께서 거처하시는 성전(聖殿)입니다. 우리는 영적 집을 짓는 데 쓰이는 “살아 있는 돌”(1베드 2,5)이고,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도 위에 세워진 건물”(에페 2,20)입니다. 우리 각자가 주님의 성전이기에, 모든 교회의 어머니 교회인 라테라노 대성당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23년 11월 8일 수요일 일반알현 훈화에서 “라테라노 대성당 봉헌 축일은 바로 주님을 섬기는 살아있는 돌이 되고자 하는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축일은 전 세계 가톨릭교회가 하나로 일치되어 있음을 드러내며, 우리 안에 일치의 성령께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점을 깨우쳐 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