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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최일환목사
하나님을 대접해 보셨나요?
마태복음10:40~42
2014년 2월 9일 장안중앙교회 주일 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40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설교: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던 어느 날 밤, 미국 필라델피아의 작고 허름한 모텔에 노부부가 찾아 왔습니다. 노부부는 옷이 흠뻑 젖은 채 모텔 직원에게 물었습니다. “예약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혹시 빈방이 있습니까?”
모텔에서 일하던 직원은 이미 방이 다 찼다며, 근처 숙박할만한 곳 이곳저곳에 연락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도시에 큰 회의가 있어서인지 근처에 어느 호텔에도 빈 방이 없었습니다. 노부부가 난감한 표정을 짓자 모텔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새벽1시가 되었으니 괜찮으시다면 누추하지만 제 방에서 주무시는 건 어떠신가요?”
그날 밤 그 직원의 배려 덕에 노부부는 편히 쉴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어느 날 그 호텔 직원 앞으로 뉴욕 행 비행기 티켓과 함께 편지가 한 장 배달되었습니다. 열어보니 2년 전 자신의 방에서 하룻밤 신세진 노신사가 보낸 편지였습니다.
그 편지에는 자신을 꼭 방문해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휴가를 내어 찾아가 보았더니 그 노신사는 뉴욕 ‘아스토리아’ 호텔의 경영주였습니다. 그는 그 사건 후 큰 호텔을 인수하여 호텔 경영자가 되었는데 그 호텔의 총지배인을 그 직원에게 맡아 달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 직원은 나중에 아스토리아 호텔 경영주의 딸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가 그 호텔사업을 크게 성공시킨 ‘죠지 볼트’였습니다. 죠지 볼트는 자신이 베푼 한 번의 친절로 인생의 반전을 이루어냈습니다.
그 노신사는 볼트에게서 서비스업계의 친절 이상을 발견했습니다. 한 번의 배려, 한 번의 대접이 일생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성경에도 손님을 잘 대접하였다가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들 이야기가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어느 날 자기 집 앞에 찾아온 손님을 지극정성을 다해 대접했다가 아들을 낳게 되는 복을 받습니다.
소돔성의 롯도 자기 집에 찾아온 사람들을 대접했다가 소돔 성을 엎으시는 불 심판에서 롯의 가족은 살아나게 됩니다.
또, 엘리사를 잘 대접했던 수넴 여인도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 동네를 지나가는 선지자를 위해 남편과 의논하여 게스트하우스를 만들었습니다. 선지자가 언제든지 편히 쉬고 갈 수 있도록 작은 방을 만들었습니다. 그 집에 침상과 책상과 의자와 촛대를 갖추어 대접했습니다. 그랬더니 엘리사 선지가가 그녀가 너무 기특하여 그를 위해 뭘 해줄까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그 집에 아들이 없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불러 축복기도를 해줍니다. 그랬더니 그 여인이 곧바로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여러분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어떻게 맞이하십니까?
오늘 봉독한 성경을 보면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은 대접할 때가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대접한단 말일까요?
그래서 저는 오늘 봉독한 본문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접해 보셨나요?” 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의 은혜를 나누기를 축원합니다.
1. 하나님은 어떻게 대접하나요?
오늘 본문 40절을 보세요.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 말씀은 우리 예수님이 제자들을 전도하라고 파송하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를 대접하는 것은 곧 나를 대접하는 것이다. 나를 대접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주님이 보낸 사람입니까?
구약에서는 천사들이 사람의 모습으로 사람에게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여호수아에게 군대 장관으로 찾아오시기도 하시고, 선지자를 보내어 말씀하시기도 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주님이 사역자들을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12제자를 전도하라고 파송하시면서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너희”는 바로 예수님의 12제자를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러 나가는 제자들에게 “너희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다.” “나를 영접하는 것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선포하고 계십니다.
그때 뿐 만이 아닙니다. 지금도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워진 모든 종들이 바로 주님이 보낸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오늘날 주님의 사역자들인 전도자, 목사, 선교사들이 주님이 보내신 자들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을 잘 대접하면 그것이 곧 예수님을 대접하는 것이 되고 그것은 곧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이 똑똑하고 잘나서일까요? 그들이 우리보다 더 거룩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왕이신 하나님의 명을 받은 사신이기 때문입니다.
한나라를 대표하는 대사를 “Ambassador”라고 합니다. 보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대사는 여러 가지 특권을 갖고 있습니다. 대사는 파견된 나라 법에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함부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대사는 곧 그 파송한 나라의 대통령을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사를 추방하는 일은 곧 그 나라와 국교를 단정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대사를 모독하는 것은 곧 그 나라를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보내신 종들을 함부로 대하거나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정말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못 생기고 초라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보내신 종이라면 조심하여야 합니다.
구약 왕하 2장에 곰에 찢겨 죽은 어린이 42명이 있었습니다. 왕하2:23절 이하를 보세요.
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24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엘리사가 그 어린 이이들의 조롱을 참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를 합니다. 그랬더니 수풀에서 암곰 두 마리가 나타나 42명을 찢어 죽입니다.
여러분 이 사건이 이해가 갑니까? 하나님의 종을 대머리라고 조롱했다고 어떻게 42명의 어린 어린 아이들이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게 하실까요?
그러나 그 사건은 하나님이 당신의 종들을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그를 조롱하는 것은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조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잘 대접하면 어떤 복이 임할까요?
성경은 분명하게 대가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잘 대접하는 자에게 엄청난 償이 있다고 하십니다. 41절을 보세요.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그 상이 어떤 형태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상이 현세의 상인지, 내세의 상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상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한다.”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한다.” 이 뜻이 뭡니까?
선지자라는 이름 때문에 선지자를 대접하면 그 선지자가 받는 복을 같이 누린다는 것입니다. 의인이라는 이름 때문에 의인을 대접하면 그 사람이 받는 복을 같이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를 오늘 우리에게 적용하길 바랍니다.
목사라는 이름 때문에 목사를 대접하면 목사가 받는 복을 같이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선교사라는 이름 때문에 선교사를 대접하면 선교사가 받는 복을 같이 누린다는 것입니다.
갈6:6절에는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했습니다. 모든 좋은 것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귀하게 여기고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주님이 보내신 그 사람들을 “작은 자”, 곧 소자라고 했을까요?
‘작은 자’란 세상에서는 알아주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별 볼일이 없는 연약하여 힘이 없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소자들을 귀하게 여기고 그 소자를 대접하면 결코 상을 잃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겉만 보고 판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가 갖고 있는 이름을 보셔야 합니다.
춘향전의 이도령을 아십니까?
과거에 합격하였습니다. 그리고 임금의 명을 받아 암행어사로 내려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행색을 초라하게 하고 나타나니 변사또가 무시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외모를 보고 무시했다가 암행어사 출두할 때 그 앞에서 벌벌 기는 모습을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도령이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그를 보낸 왕이 두려워서입니다. 그는 왕을 대신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를 알지 못하고 푸대접하고 온 갓 악행을 했으니 심판을 받을 수밖에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하나님을 대접하는 기회가 여러 가지로 찾아 올 것입니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잘 감당하면 엄청난 복이 임함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솔직히 저는 목사로서 성도님들이 저를 대접할 때 어떤 때는 부담이 됩니다. 그래서 미안하고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를 생각하고는 축복하고 받습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저를 대접하는 것은 제가 잘나서 대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목사기에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생각을 하고 그냥 감사로 받을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지요. 그 대접을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놀라운 방법으로 갚으신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17장에 아주 재미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땅에 가뭄이 들어 그릿 시냇가로 피신한 엘리야를 하나님이 갑자기 시돈 땅 사르밧으로 보내십니다. 그곳도 역시 가뭄으로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그 땅으로 보내 그곳 과부를 통해 공궤하게 하시겠답니다. 그 약속에 엘리야는 순종하고 그대로 갑니다. 그곳에 도착하자 마지 성 밖에서 나뭇가지 줍는 과부를 만납니다. 만나자 마자 그에게 대뜸 물을 가져오라고 명령합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 기근 속에서 물 대접하는 것이 쉽겠습니까? 그런데도 그 여인은 어디서 가져 왔는지 물을 가져옵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한 수 더 뜹니다. 물 가져온 그에게 떡을 달랍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대답하기를 ‘가루 한 움큼, 기름 조금 남은 것으로 만들어 먹고 죽으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러자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 오라” 합니다. 이런 싸가지가 어디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아닙니까?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그렇게 무리한 그 여인에게 합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곳 과부를 통해 너를 공궤하리라 약속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결과를 보세요.
왕상17:15절 이하를 보세요.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할렐루야!
순종하며 대접한 여인에게 놀라운 보상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이 주신 상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 대접은 어떤 것일까?
많은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몇가지만 살펴보려 합니다.
1) 예배를 정성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것은 예배로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예배를 형식적으로 드립니다. 예배에 정성이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배 시간에 늦는 것을 가볍게 생각합니다. 예배가 정말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라면 최소한도 예배 시간 10분 전에는 나와 앉아 마음을 정돈해야 합니다. 또 복장도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교회 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결혼식장에 갈 때는 정장을 하면서 교회에 올 때는 신경을 쓰지도 않습니다. 회사에는 정장을 하고 갑니다. 그런데 교회는 아무것이나 편하게 입고 나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몰라서 그랬다면 이제부터라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가능하면 가장 깨끗하고 가장 좋은 옷을 입어야 합니다. 적어도 결혼식에 축하하러 가는 것보다 잘 입어야 합니다. 이 예배에 정성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2) 선교헌금을 잘 드리는 것입니다.
모든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헌금은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으로 믿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헌금함을 입구에 비치해 놓고 자원하여 헌금하게 합니다. 이것은 억지로 하지 않고 자원하여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헌금을 준비하지 않고 예배에 참여합니다.
결혼식장에 갈 때 축의금을 담아 갑니다. 그 때 차기 체면과 혼주와의 관계를 고려해 담습니다. 조의금을 담을 때도 봉투를 사용하여 드립니다. 그런데 하물며 살아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을 대충 드린다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이라면 과연 그것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접대하는 것으로 받을까요? 우리 하나님은 기쁨과 감사로 드리는 흠 없는 예물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바라기는 적당히 드리는 헌금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정성이 담기고 마음이 담긴 예물을 드리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대접하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쓰다 남은 것으로 하나님께 드리려 하지 마세요. 가장 귀한 것, 우리 마음이 담긴 것으로 드려야 주님이 그것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또 하나 정말 중요한 것인데 주를 섬길 때 기쁨과 감사로 대접하시기를 바랍니다. 제발 억지로 하지 마세요. 이왕 드리실 것, 기쁜 마음과 감사로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예의를 갖추어 대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세워서 일하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 사람으로 대접하고 도와야 합니다. 그들을 돕고 그들을 섬기는 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거기에도 예의와 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왜죠? 어른은 어른답게 섬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계신 여러분!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의를 갖추고 있나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입니다. 수업하다 말고 갑자기 학교 종이 땡땡땡 울립니다. 수업시간이 남았는데 급한 종을 치는 것입니다. 그러자 선생님들이 수업을 중지하고 교무실로 불려갔습니다. 얼마 후 담임선생님들이 교실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는 ‘각자 맡은 위치에서 대청소를 하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6교시 수업이 끝나면 매일 청소를 하는데 왜 갑자기 2교시 수업을 중단하고 청소를 하라는 것인가? 그래서 담임 선생님께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도교육감이 떴다”는 것입니다. 몇 분 후에 교육감이 학교를 방문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교생이 수업하다 말고 야단법석을 떨어야 했던 것입니다. 제가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항의했습니다.
“선생님! 왜 이래야 합니까?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제 평생에 잊지 못할 말씀입니다.
“그래 일환아 네 마음을 이해한다.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어른에 대한 예의란다. 너희 집에 손님이 오신다면 어질러진 상태로 그냥 있으면 되겠니? 잘 보이기 위한 외식일수도 있지만 어른에 대한 예의를 표하는 것이란다.”
저는 그 말을 듣고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의를 갖추어야 정성으로 대접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대접하는 것도 마찬가지, 예의를 갖추어야 합니다. “평상시처럼 하면 될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참 경건은 마음과 행동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예의는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 위함도 있으나 깊이 생각하면 나를 위해 예의가 필요합니다.
베드로를 영접한 백부장을 보세요.
베드로가 집에 들어오자 땅바닥에 엎드려 절을 합니다. 그 결과 그 가족은 엄청난 은혜를 누립니다. 전하는 자에게 권위를 부여하니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가볍게 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도 가볍습니다. 그들을 귀하게 여기고 귀하게 접대하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도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냉수 한 그릇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냉수 한 그릇, 가볍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 상황입니다. 중동지방의 냉수 한 그릇은 정말 구하기 힘든 것입니다. 물 자체를 구하기도 힘들고 냉수를 구하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냉수”를 하찮은 대접이라고 해석하셔도 됩니다. 그런 것이라도 주님의 제자라는 것 만 보고도 베풀면 주님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그러나 냉수 한 그릇은 엄청난 성의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어떤 분에 제게 칼국수만 좋아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자리에서 분명하게 밝힙니다. 저도 갈비가 맛이 있고 좋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런데 그런 대접을 받으면 가슴이 아픕니다. 제 주변에는 먹을 양식이 없어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수많은 교역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Z국에서 운영하는 신학교 학생들은 10만원이면 한 달 생활비가 됩니다.
그래서 저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제 돈으로 만 원짜리 이상을 사먹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제발 제게는 칼국수나 값싼 것을 주시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선교헌금을 드리든지 어려운 사람에게 구제를 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대접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여러분은 이제까지 하나님께 어떤 대접을 하며 살아왔습니까?
그 대접에는 분명하고도 정확한 상이 약속되어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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