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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왠만한 집에서는 강아지, 고양이 그 외 여러 애완동물을 키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냥 키우며 살아가는 정도가 아니라 왠만한 자녀들에게 들어가는 돈 이상으로 각종 먹을 거리, 즐길 거리, 애완동물 호텔, 애완동물 학교, 애완동물 카페 등등 애완동물이 대접받는 시대입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애완동물에 투자할 정도로 이 시대는 애완동물 천국인 사회가 되었습니다. 애완동물이 사람보다 더 대접받는 시대라는 생각까지 듭니다. 어떤 집은 사람이 강아지나 고양이를 좋아해서 방안 침실에서 같이 자고 껴안고 지내는 경우도 심심찮게 봅니다. 20년전, 30년전의 강아지, 고양이 등에 비하면 지금 강아지나 고양이 등 반려동물은 진짜 천국에서 사는 것 같을 것입니다. 20년전, 30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아파트에서는 키울 수 없었고 단독주택에서도 집안에서 키우면 그것은 몰상식한 사람이었는데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는 세상입니다. 애완동물을 사랑하는 수준을 넘어 가족보다 더 애완동물에 몰입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렇게 애완동물을 애지중지 하는 분들에게 제가 “그 정도로 강아지 혹은 고양이를 사랑하니 당신이 그 강아지, 그 고양이가 되어서 살아라”고 말한다면 그 분들중 나는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요? 강아지를 이해하고 고양이의 입장이 되어보려고 강아지가 되어 강아지 집에서 같이 사는 것, 고양이를 이해하기 위해 고양이가 되어 고양이집에서 같이 사는 것이 과연 용납이 될까요? 강아지, 고양이를 인간처럼 살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는 그 사람이 이제 당신이 강아지와 고양이처럼 살아봐라고 말한다면 그 자리에 기꺼이 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우리는 절대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읽는 성경의 말씀은 그 이상의 헌신, 그 이상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살아간다는 사실은 바로 사람이 강아지를 좋아해서 개집에 들어가서 살고 사람이 고양이를 좋아해서 고양이의 집으로 만든 곳에 들어가 같이 살아가는 것 이상으로 우리를 더 없이 우리를 사랑해주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너무나 힘겨운 낮아지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해서 그들처럼 되려는 극한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창조하신 피조물로 죄가운데 살다가 흙으로 돌아갈 인간, 하나님앞에 큰 죄를 지어 이 땅에서 살다가 지옥불에 떨어질 인간, 바로 우리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탄생하셨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에게 임하신 것이기에 그 분의 삶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분의 탄생, 그 분의 생애, 그 분의 언행, 그 분의 죽으심, 그 분의 부활, 그 분의 승천, 그리고 이 땅의 마지막 날에 일어날 일들까지 모든 것은 예언된 말씀 그대로 이뤄졌습니다. 또한 그 분이 오시기 전 이 땅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 창조와 심판, 선지자를 통해 예언되어진 구약과 신약의 이 땅의 역사들 그것이 모두 예언대로 이뤄졌고 말씀대로 성취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심령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은 근본적으로 말씀으로 이 땅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말씀으로 계셨고 말씀으로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고 하나님의 시간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 말씀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시게 될 때 어떻게 말씀이 성취되었는 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직후 일어난 일들이 구약 말씀의 성취인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의 탄생 직후의 사건들을 보면서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뤄지는 것을 깨달으시고 우리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뜻이 그대로 이뤄지는 것을 체험하며 은혜의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에 예언된 예수님 유년기 첫째는 예수님께서 태어난 후 이집트로 피신후 돌아오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장 15절입니다.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동방박사들은 꿈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헤롯을 거치지 않고 고향으로 갈 수 있는 길을 통해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동방박사가 자기 나라로 돌아가자마자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꿈으로 임하셔서 헤롯이 아이를 죽일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 주셨습니다. 사실 동방박사가 떠난 직후 얼마 동안의 기간 사이에 헤롯이 아이들을 찾아 죽이려는 정황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특히 요셉은 시골동네 사람이고 지금 베들레헴에 와 있어도 마굿간에서 지낼 정도로 가난했고 형편이 좋은 상태의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헤롯같은 중앙정부 통치자와 교류하며 왕궁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요셉주변에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요셉은 헤롯이 앞으로 자행하게될 악한 일을 알 수 있었을까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시고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시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섭리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헤롯의 분노가 시작되기 전, 하나님은 주의 사자를 통해 다시 요셉의 꿈에 나타나셔서 애굽으로 피신시키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요셉은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신합니다. 요셉이 피신한 이후에 헤롯은 베들레헴과 그 지경에 있는 만 2세가 안 된 남자 아이들을 모두 죽이는 학살을 자행합니다. 오늘 본문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을 그대로 이루어주셨습니다. 오늘 말씀 중 마태복음 2장 15절의 말씀은 구약성경 호세아 11장 예언의 성취임을 기록되어 있습니다.
호세아 11장 1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예수님이 애굽으로 도망가셨다가 나온 것이 왜 중요하길래 이렇게 호세아서에서 미리 예언하였을까요? 그리고 호세아서에서 말하는 출애굽은 이스라엘민족을 잔악한 애굽의 손아귀에서 건져내신 것을 말하는 듯하고 마태복음에서 애굽은 포악한 헤롯왕의 손에서 예수님을 구원하는 피난처로서의 의미를 뜻하는 것 같은데 어떻게 이것이 같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어떤 신학자는 마태복음이 호세아서를 원래 호세아서의 문맥과 다르게 인용한 것으로 성경 오류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호세아서도 성령의 감동으로 쓰여진 것이고 마태복음도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쓰게 하셨기에 절대 오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두 부분의 의미의 차이는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두 책이 서로 다른 의미로 쓰였다면 마태복음이 호세아서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 즉 “성취되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퓨리턴리폼드신학교 구약학 교수인 마이클 배럿은 “마태복음 2장 15절의 ‘애굽’은 나라로서의 애굽이 아니라 영적인 애굽입니다. 그러니까 헤롯왕을 애굽이라고 불렀고, 나라인 애굽으로 피해 들어가는 것은 영적인 애굽인 헤롯왕의 손에서 어린 예수님을 건지신 것입니다. 그러니 마태복음 2장 15절 말씀은 호세아 11장 1절 말씀의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구약에서의 말씀이 신약에 성취되는 경우는 첫 째 말씀 그대로 이뤄지는 것, 그리고 둘째 모형을 보여줬던 것이 이런 의미라고 실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져볼 때 마태복음 2장 15절은 모형으로서의 언약 성취입니다. 구약에서 제사법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 신약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신약시대가 되어 구약의 성전과 제사법을 보면서 의미를 발견하게 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마태복음 2장 15절의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이 예수님이라는 존재를 이루기 위한 암시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애굽’은 핍박, 살해, 죽음, 멸망을 뜻하는 것이고 그 곳에서 구원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시면서 출애굽의 진정한 의미,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진정한 천국, 영원한 생명, 완전한 행복을 나타내주셨다는 것입니다. 즉 구약 출애굽의 진정한 뜻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는 영원한 생명, 천국을 허락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며 우리가 진정 애굽에서 건져내심을 받은 하나님 아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이 사건을 통해 다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출애굽기 18장 10절입니다.
“이드로가 이르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너희를 애굽 사람의 손에서와 바로의 손에서 건져내시고 백성을 애굽 사람의 손 아래에서 건지셨도다”
사무엘상 10장 18절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고 너희를 애굽인의 손과 너희를 압제하는 모든 나라의 손에서 건져내었느니라 하셨거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애굽에서 우리를 건지신 역사를 다시 확실히 보여주시기 위해 자신 또한 애굽으로 피하셨다가 건지심을 보여주시는 일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것을 확증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죽음과 멸망, 심판과 지옥에서 건져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애굽에서 우리를 건지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시기 위해 애굽에서 돌아오는 역사를 보여주신 예수님을 깨닫고 예언된대로 행하시는 예수님으로 언약의 성취이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에 예언된 예수님 유년기 둘째는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헤롯이 어린 아이들을 죽일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장 17,18절입니다.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탄생하신 예수님을 데리고 요셉과 마리아가 애굽으로 피신하자 베들레헴에는 너무나 가슴 아픈 일이 발생합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롯 왕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베들레헴에서 곧바로 자기 나라로 돌아갔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헤롯은 자신의 군대에게 명령하여 베들레헴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이하의 남자 아이를 죽이는 잔혹한 학살을 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의 구원을 위해 베들레헴에 오셨는데 그 베들레헴의 아이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왜 이런 일이 일어나야 할까요?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이 계신 그 곳에 죽음의 역사가 임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죽음의 역사, 암울한 사건, 엄청난 슬픔의 상황 또한 “말씀의 성취”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정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분명 베들레헴 엄마들의 슬픔이 예레미야 31장 15절 말씀의 성취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 이해는 되지 않지만 헤롯이 자행한 베들레헴 유아학살사건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이 땅에 일어날 일을 예언하신 일이 그대로 이뤄진 것을 우리는 깨달야 합니다.
예레미야 31장 15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여기서 말하는 ‘라마’는 베들레헴 북쪽 8킬로미터 지점인데 거기는 라헬의 무덤이 있는 곳입니다. 라헬은 야곱의 부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허락한 이름이 ‘이스라엘’이죠. 즉 이스라엘의 12지파는 야곱의 아들이며 또한 라헬의 아들들입니다. 야곱은 네 명의 아내를 통해 열 두 지파의 조상이 되는 열 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들은 비록 배다른 형제이며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는 다른 형제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의 어머니가 라헬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라헬은 이스라엘인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이고 어쩌면 유일한 정실부인일 것입니다. 라헬은 야곱의 아내입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엄마입니다. 그 라헬의 무던이 베들레헴이 있습니다. 라헬이 자식 때문에 애곡한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의 어머니가 애곡한다. 베들레헴의 어머니가 애곡한다는 뜻입니다. 베들레헴의 어머니들 역시 무자비하게 살해된 어린 아이들을 위해 슬퍼하고 애곡했을 것입니다. 살해당한 아이들의 엄마가 가지게 된 슬픔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슬픔을 허락하셨을까요? 왜 하나님은 헤롯의 이런 잔악무도한 일을 막지 않으셨을까요? 마태는 왜 이 잔혹한 사건이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것이 이뤄진 것이라고 했을까요?
만일 그때 아기 예수님이 헤롯에게 죽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온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예수님은 아기 때 애굽으로 피신하여 살아남지만 나중에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아기 때에 죽었다면 그것은 대속의 죽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헤롯의 학살로 죽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실 시기, 장소, 방법은 다 정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실 오늘 마태복음 2장 18절의 말씀은 아기들의 죽어서 부모가 슬프고 고통받을 때 하나님도 슬퍼하고 계신다는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기를 잃고 어떤 위로도 위로가 될 수 없었떤 엄마들에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잃으실 것, 메시야이신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공의를 세우고 온 인류에게 참 생명을 허락하신다는 것은 이 땅의 모든 죽음을 통해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받을 위로가 될 것입니다. 아이들의 죽음은 권력집착의 광기를 가진 헤롯의 공권력에 의해 일어난 일이고 이로 인해 슬픔만이 이 땅에 임했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은 똑같은 공권력에 의한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온 인류를 구하는 슬픔과 함께 영원한 기쁨이 공존하는 죽으심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이 너무나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시고 통치하신다고 하는 이 땅이 왜 이렇게 악한 일이 일어나고 왜 이렇게 앞이 막막한 환경이 되고 암울한 사회분위기가 되는 것인지 우리들은 이 상황이 정말 의아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악한 세상을 그대로 놔두시고 오히려 더 악한 일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탄생 때 일어난 이 베들레헴 유아학살 사건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이 있었음을 깨닫고 정말 이 일이 말씀의 성취라는 사실속에서 인간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주권이심을 인정하며 하나님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구약에 예언된 예수님 유년기 셋째는 공생애 전까지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생활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2장 23절입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며 이 땅에서 때를 이루시고 십자가의 희생으로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시기까지 모든 위협으로부터 지키십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을 보니 그 탄생 때부터 생명의 위협을 당하셨던 것을 보호하시는 역사를 보여주십니다.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신실한 계획과 섭리 아래 헤롯의 공격을 막으셨습니다. 헤롯이 예수님을 찾는 동안 숨어지내던 요셉과 마리아는 이제 헤롯이 죽자 유대 땅으로 돌아옵니다. 하지만 헤롯이 죽은 후 왕권을 이어받은 헤롯 아켈라오는 더 위협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롯 아켈라오를 피해 갈릴리 지방 나사렛으로 가게 됩니다. 원래 살았던 나사렛으로 다시 돌아가서 그 곳에서 정착하게 되면서 선지자를 통해 예언을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한 번 성취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장 22,23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그런데 우리가 나사렛으로 들어간 요셉이 자신의 의지나 감정에 의해 나사렛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오늘 본문을 통해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처음에는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마음이 너무 무거워집니다. 이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었습니다.
저도 벌써 13년이 되어버린 오래 전에 부산에서 꽤 큰 교회중 하나이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중 하나였던 초량교회에서 부목사로 사역하다가 만 5년이 되어 이제 다음 사역지를 준비하던 때에 이력서를 내고 다른 교회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력서를 내었는데 이력서를 내자마자 약 3천 명 성도가 모이는 울산의 큰 교회에서 사역자로 오라고 결정이 났고 우리 가족은 이제 짐만 빼고 이사만 가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음이 무겁고 두렵고 왠지 그 곳에는 가면 안된다는 마음이 들더라구요. 그 때까지 교회를 다섯 교회정도 사역자로 옮겨다니며 섬겼는데 교회를 옮기기 전에 그런 마음이 드는 곳은 없었는데 그 교회만 그 때 그랬습니다. 갑자기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마치 요셉이 친척이 살던 곳 역사적으로 자기 민족이 오랫동안 그 지역을 차지하고 살았던 곳으로 가려고 하는데도 가기가 두려워졌습니다. 물론 두려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잔악하기로 유명한 통치자 헤롯 아켈라오가 왕위를 이어받는 것이 더 근본적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갑자기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는 것도 모두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이럴 때 요셉이 했던 일이 무엇입니까?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실 계획을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응답에 순종하는 것이었습니다.
방금 읽은 마태복음 2장 22절 하반부, 23절 상반부 말씀을 보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이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자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지는 장소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들어가서 살게 됩니다.
저희도 13년 전에 이 고주리에 들어오기 전 하나님께서 먼저 대형교회의 청빙과 대형교회에 부임할 준비하는 과정에 갑자기 두려운 마음을 주셨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왜 그러지?라는 생각을 하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신기한 환상을 보여주시며 생전 모르던 땅,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곳 이 곳 고주리 시골마을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게 세밀하게 우리가 가야할 곳을 가르쳐주시는 경험을 한 적이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정도로 너무나 확실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교회 개척하고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 성경속에서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장소 나사렛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마태복음 2장 23절을 보실까요?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메시아를 말살하려는 무수한 계책이 요셉 가족을 위협했지만, 하나님은 그때마다 그들이 움직여야 할 때와 갈 곳을 정확하게 지시하며 인도하셨습니다. 요셉은 갈릴리 지역으로 가서 살라는 하나님의 뜻을 꿈에서 발견하고 나사렛이라는 동네로 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구약성경에 ‘나사렛’이라는 단어가 직접 나오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방금 읽은 마태복음 2장 23절에서 나사렛이라는 단어에 달린 각주를 보면 이사야 11장 1절에서도 나사렛을 설명한 말씀은 아닙니다.
이사야 11장 1절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이 구절이 오실 메시아에 대한 예언의 말씀은 맞는데 나사렛이라는 장소를 의미하는 구절은 아닙니다.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이새의 줄기’라는 단어에 우리가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 듯이 ‘이새’는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가지’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네체르’입니다. 이 ‘내체르’는 나실인을 뜻하는 나지르와 자음을 같이 합니다. 어근, 어원이 같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이 ‘나지르’라는 단어와 이스라엘의 도시 ‘나사렛’이 어원이 똑같은 것을 보게 됩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이라는 동네에서 생활하시던 나사렛 예수가 되셨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2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왜 나사렛에서 살게 되셨는 지를 하나님 섭리의 관점에서, 하나님 언약 성취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나사렛은 구약 성경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에게서 주목받지 못한 일종의 듣도보지못한 시골마을이었습니다. 요즘도 어디서 온 지 알 수 없는 무지랭이를 ‘듣보잡’이라는 말로 낮춰 부릅니다. 사실 예수님을 ‘나사렛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유대 사람들이 천박하게 부르며 무시하며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보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무시하고 경시하며 ‘나사렛 사람’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 교인들과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 하나님의 백성들은 나사렛 출신을 신앙의 정체성으로 느끼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비천한 자, 어쩌면 나약한 자, 어쩌면 보잘것없는 존재로서 ‘나사렛 출신’이라는 용어를 사람들이 쓰고 있지만 결코 이 이름을 부끄러운 이름이 아니라 자랑스러운 이름이었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 우리게 가르쳐주시는 교훈이 있지 않습니가? 저는 ‘우리가 낮춰보는 그 지역이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에 더 가까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도시 사람이냐, 시골사람이냐’ 라는 것은 구원의 조건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학식이 있는 사람이냐, 배움의 끈이 짧은 사람이냐’라는 것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심지어 ‘대형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냐, 시골교회나 미자립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냐’라는 것도 신앙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조건입니다.
최근 교인들의 경향을 따져보면 미자립교회나 시골교회, 규모가 작은 교회등을 꺼려하고 규모가 있는 대형교회에 파묻혀 조용히 신앙생활하면서 마치 자기 신앙 수준이 대형교회 신앙인 듯 말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자기가 출석하는 교회 크기가 자기 신앙 크기인 줄 자랑합니다. 교회 이름이 자기 신앙정체성인 줄 으스댑니다. 하지만 어쩌면 하나님 보시기에는 오히려 그렇게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신앙이 없고 나약한 신앙상태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 1장 45,4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나사렛이라는 이 마을을 통해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것이 바로 그것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보기에는 정말 작고, 사람이 보기에는 정말 미천하고 사람이 보기에는 좋은 것이 하나도 없는 마을이지만 이곳에서 구원자 예수가 나셨다는 것입니다. 지난 2천년의 역사 동안 인류 역사에 있어 전 세계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며 전 세계 사람들의 가치관과 문화를 변화시킨 단 한 사람 꼽으라고 한다면 분명 우리 주 예수님께서 꼽을 것입니다. 대부분이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역사기원이 생겼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전 세계의 사상과 가치관이 변화되었고 지금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예배하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 수없이 많기에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인류역사의 변화는 대단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 곳 나사렛 출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자라나신 것,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시게 된 것도 하나님의 예언이 이뤄진 것임을 깨닫고 정말 하나님의 섭리가 대단하다는 사실 속에서 우리가 ‘나사렛 예수’ 그 이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정말 보잘것없은 시골마을이지만 이 ‘나사렛’에서 전 세계를 변화시킬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났던 것처럼 저와 여러분의 삶에도 아무 능력없지만 예수님만으로 큰 일, 위대한 역사를 체험하시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이후 어린 시절 일어났던 이 사건들을 보면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심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하나님의 섭리대로 하나님 말씀의 약속대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오늘 말씀속에 기록된 애굽으로 잠시 피난하신 일도, 베들레헴 땅에 일어난 헤롯의 유아학살로 인한 큰 슬픔도, 나사렛 동네에 들어가서 생활하면서 나사렛 예수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도 모두 하나님의 철저한 계획과 섭리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뜻가운데 일어난다는 믿음으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속에서 우리는 항상 눈에 보이는 것에 집중하며 살아가지면 정말 참 믿음은 눈에 보이는 권세 너머에 참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계시고, 눈에 보이는 시간 이면에 하나님의 때와 섭리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세상의 어떤 권력도 세상의 어떤 억압적인 힘도 절대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꺾을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 주 창조주 하나님께서 세상의 모든 상황, 일어나는 모든 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을 절대 막을 수 없습니다. 결국 우리는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위대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모든 것을 다스리며 하나님의 역사를 보여주시는 것을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런 확신을 더 굳건히 하며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에 우리를 맡기며 항상 섭리가운데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경험하며 하나님 품안에서 살아갈 때 보호하시는 하나님,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