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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은 한 핏줄을 타고난 단일 민족 입니다. 나는 누구이며 오늘 이땅에 어떻게 해서 생존하게 되었고, 오늘의 나는 고립된 혼자만의 내가 아닌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으면서 살고 있는 나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한 민족의 역사와 문화속에서 태어났고 그 속에서 생활하고 있기 때문에 나라와 나의 관계는 동일체 의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강한 민족적 일체감을 함께 느끼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들 의식 구조속에는 나의 부모 나의 친구 나의 민족이 아닌 우리 부모 우리 친구 우리 친척 우리 민족이라는 공동운명체로서의 따뜻한 이불속에 다 함께 발을 묻고서 살아온 민족이라 하겠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국난극복을 위한 호국 의지는 수나라 당나라를 물리친 고구려의 국토 수호 정신, 고려의 대 학문 정신, 임진왜란의 충무공 정신, 일제 식민 통치시에 의병 활동과 삼일운동, 우리 조상들은 이와 같은 강인한 호국의지를 승화시켜 민족사의 정통성을 지켜왔습니다.
1975년 월남이 패망해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졌을때 힌 깃발을 들고 통곡했던 월남 싸이공의 어느 한 대학생이 눈물로 쓴 한장의 수기가 세상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한적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하늘 높이 달고 싶어도 달 국기가 없습니다. 이제는 애국하고 싶어도 애국할 나라가 없읍니다. 희멀건 깃발에 나는 무슨 글씨를 써야한단 말 입니까? 난 오로지 이 세글자만을 쓰고 싶을 뿐입니다.
첫째는 자유라는 글자요 !
둘째는 사랑이라는 글자요 !
셋째는 후회라는 글자를 말 입니다.
우리는 이 사연을 듣는 순간 처절한 통곡의 절규를 생각했고, 나라 없는 망국의 비애감을 함께 느껴야만 했습니다. 그 동안 자유를 찾아 공산 월남을 탈출하는 수 많은 월남 難民들이 세계 坊坊曲曲에서 통곡하며 울부짓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다함께 기억해야 할것입니다.
한민족이 생명력을 잃지 않고 민족 정신을 계승할수 있는것은 국가라는 민족에 삶의 터전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우리 민족 정신에 기본 바탕은 우리의 생활 터전인 국가를 지키려는 강인한 호국의지에서 비롯 된 것입니다. 진정 자랑스러운 핏줄 이어가는 주인이 분명하기에 분단의 아픔 망향의 슬픔 거두고 살기좋고 힘을 가진 나라 후손에게 물려줄 조국을 위해 의로운 피 힘찬 맥박이 멎는 그날까지 조국을 지키고 조국에 살리라 !
목매에도 가시지 않는 민족분단의 아픔~ 이 아픔은 온계례의 뼈에 사무쳐 단장의 슬픔을 몰고 옵니다. 인간은 슬픔이 극에 달하거나 참기 어려울때는 할말을 잊는법 ~ 모순과 갈등과 불안과 긴장이 도사리고 있는 오늘의 북녁땅을. 피와 눈물과 절망과 원성만이 질퍽한 북녁땅을 ~ 그 언제이려나 우리의 발길로 손길로 쓰다듬어 주려는가 ? 사랑과 자유와 평화를~ 혈관을 타고 오르는 이 생명력을 조국과 함께 영원히 불사르리라~
우리의 소원은 통일 ~ 이 나라 살리는 통일 ~ 이 계례 살리는 통일~ 꿈에도 소원은 통일~ 통일은 이리도 애타는 민족의 소망이자 이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당위성이 있다 하겠습니다.
겨례(nation)의 통일은 남북 분단의 이질화 현상을 하루 속히 극복해 단일 민족 국가로 재 결합하기 위한 민족사적 요청이며, 천만 이산 가족에게 혈육의 정을 이어주고, 전쟁의 공포와 불안에서 벗어나게 하는 인도적 요청인 것입니다. 또한 통일은 흩혀진 민족의 힘을 한곳으로 모으는 것이 조국에 발전과 번영을 기약할수 있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통일이 간절한 민족적 염원이라 할찌라도 우리가 원하는 조국 통일의 진정한 의미는 단순히 남북을 가로막고 있는 분계선의 철조망을 없애 버리는 식의 외형적인 통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통일 방안은 자유 민주 복지에 이상을 추구하는데 그 목표를 두고 민족 자결에 원칙과 민주적 그리고 평화적 원칙에 바탕을 둔 민족사에 정통성 위에 민족 구성은 모두가 통일에 주체가 되어 민주적 절차와 방법에 의한 단일 민족 국가가 이루러지는 통일인 것 입니다. 이제 우리는 통일에 길이 아무리 험난하고 멀다할지라도 이 길을 체험하거나 포기 할수는 없습니다. 온 겨례가 한 마음이 되어 강인한 실천 의지로서 통일 추진 역량을 배양해 통일의 길을 꾸준히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첫 노래
대대로 물려받은 조국강산을
언제나 잊지말고 노래부르자
높은산 맑은물이 우리복지다
어느곳 가서든지 노래부르자
倍達(배달)의 겨례가 살고있는 우리강토는 아득한 옛날 우리들의 祖上으로부터 물려 내려오는 거룩한 유산이다. 이땅을 우리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우리들의 조상이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모른다. 값으로 따질수 없는 우리국토, 이길래 우리는 밤이나 낮이나 감사한 생각을 풍야 한다. 더구나 아름다운 산과 물에 우리겨례의 歷史(역사)와 傳說(전설)이실렸고, 또 그대로 여기는 우리들이 살고있는 生活(생활)의 根據地(근거지)라, 南北江山(남북강산) 어디서든지 祝福받은 이땅을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해야 한다.
白頭山(백두산)
하늘에 닿은저기 우리백두산
天地야 아름답다 신비도하다
天坪은 거룩한땅 오랜옛터전
첫나라 세우신곳 여기라시네
백두산은 우리나라의 북쪽 끝 咸鏡北道(함경북도) 茂山(무산) 고을 서북에 있는 가장 높은 산으로 높이는 2,744미터이다. 산 꼭대기에 周圍(주위)가 80리나 되는 天地(천지)란 못이 있어 神秘(신비)스럽기가 이 위에 더할수가 없으며, 산 허리에는 天坪(천평)이라 부르는 넓은 벌판이 있으니, 우리 민족의 가장 오랜 옛날에 朝鮮(조선)이란 國土(국토)로써 나라가 첫번 세워진 곳이라 전한다. 그러므로 백두산은 우리나라 모든 산의 祖宗(조종)일뿐 아니라, 우리 歷史(역사)에 있어서 政治(정치), 經濟(경제),文化(문화), 온갖 것의 發祥地(발상지)가 된곳이다.
白頭山頌
白頭山(백두산)! 내 거룩한 산! 안개 구름 자욱한 저기 一萬(일만) 산악의 祖宗(조종)이시여!
한배검 내려오사 弘益人間(홍익인간)의 큰 뜻으로 나라를 세우고 敎化(교화)를 펴신 天帝의 寶座(보좌)시여!내가 부르는 모든 이름 중에 가장 尊貴(존귀)한 임이니이다. 石乙水(석을수), 紅土水(홍토수), 豆滿江(두만강) 건너뛰면 千里天坪(천리천평) 배달 겨레의 에루살렘!저 神市(신시)의 거룩한 역사의 첫 장에 적힌 말씀과 은혜! 이 나라 자손들의 이마위에 햇빛같이 드리우고 바람처럼 가슴속에 스미나이다.오! 끊인 적 없는 자비한 햇빛이여! 따스한 바람이여!꿈속에도 그리워 虛頂嶺(허정영), 兵使峰(병사봉)으로 노루 사슴처럼 치닫고 내리닫고 密林(밀림)의 靜寂(정적), 天池(천지)의 神秘(신비)를 마시며 후리새 처럼 휘돌고 날아돌고! 눈 돌려 바라보면 南北千里(남북천리), 東西六百里(동서육백리) 저 우람찬, 덜퍽진 산 덩어리를 한 품에 덥석 안고서 가슴 입술 맞비비는 황홀한 기쁨이여!메와 벌판 구석구석 강과 개울 굽이굽이 단군부여,숙신,읍루,옥저,말갈, 겨레의 한배,곁한배들의 숨소리!千년이 萬년이 번개 치듯 가 버렸어도 오늘 이 시간, 바로 이 순간 내 혈관 속에 배어들어 뛰고, 용솟고, 치밀고, 후끈거려 새 피를 끓여 부은 듯 새 힘을 얻나이다.白頭山(백두산)! 내 無量壽(무량수) 聖母(성모)님 얼과 생명의 근원이여! 임은 나의 눈 나의 귀, 나의 심장, 나의 호흡이니이다.오늘 아침 임께 바치는 겨레의 詩(시)와 찬송을 받으옵소서!統一(통일)을 위한 겨레의 피눈물 어린 기도를 들으시고 이 고달픈 자손들로 하여금 몸소 달려가 꿇어 엎디어 예배할 수 있게 해 주옵소서 !1971년 1월 1일. 노산 이 은 상
국민 교육헌장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 공익과 질서를 앞세우며 능률과 실질을 숭상하고,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아, 명랑하고 따뜻한 협동 정신을 북돋운다. 우리의 창의와 협력을 바탕으로 나라가 발전하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깨달아,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다하며, 스스로 국가 건설에 참여하고 봉사하는 국민 정신을 드높인다.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 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국민교육헌장은
국민교육헌장은 박종홍(朴鐘鴻, 1903년 7월 1일 ~ 1976년 3월 17일)이 박정희 대통령 교육문화담당 특별보좌관 재직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국민 정신문화의 계도와 연구, 진흥을 위한 목적의 국민 정신연구원 설립계획서를 작성하여 김 정렴에게 협조를 구하고 박 정희에게 건의하였고, 1968년 박 종홍, 안 호상외 73명등과 함께 국민 교육헌장을 수립하여 박 정희 전 대통령이 1968년 12월 5일에 발표한 헌장이다. 그러나 1994년 이후 사실상 폐기되었으나 역사적으로 암울했던 한 시대를 이끈 주체로 남아있는 유일한 민족 계몽을 위한 역사적 사실을 3.1독립운동 33인의 한 사람인 이 갑성옹의 부인이신 최 마리(마리아) 여사님께서는 생전에 늘 민족 독립운동의 정신을 후손들이 이어 받아야 한다는 감회어린 이야기를 하시면서 1982년 3월 1일 사단법인 3.1동지회에서 발행한 자료라며 필자에게 건넸다. 돌이켜 보면 참으로 귀중한 사료라 아니할수가 없다. 이글을 남기는 것은 여사님께서 천상에서 더욱 기뻐 하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생전의 모습은 필자가 용산 이태원성당에서 천주교 한국외방선교회 해외 파견 경축 기념일에 촬영한 사진이다.
변 수녀님과 崔瑪利(마리아)회장님과 梁芳秀(바오로) - 촬영: 아내 黃貞禮(요안나)
3.1절 노래
https://www.youtube.com/watch?v=BWVrdnqeZJs
[3.1절]기미독립선언문 원문+번역문-조선민족대표 33인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 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 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 자존)의 政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半萬年(반만년) 歷史(역사)의 權威(권위)를 仗(장)하야 此(차)를 宣言(선언)함이며, 二千萬(이천만) 民衆(민중)의 誠忠(성충)을 合(합)하야 此(차)를 佈明(포명)함이며, 民族(민족)의 恒久如一(항구여일)한 自由發展(자유발전)을 爲(위)하야 此(차)를 主張(주장)함이며, 人類的(인류적) 良心(양심)의 發露(발로)에 基因(기인)한 世界改造(세계개조)의 大機運(대기운)에 順應幷進(순응병진)하기 爲(위)하야 此(차)를 提起(제기)함이니, 是(시)ㅣ 天(천)의 明命(명명)이며, 時代(시대)의 大勢(대세)ㅣ며, 全人類(전 인류) 共存 同生權(공존 동생권)의 正當(정당)한 發動(발동)이라, 天下何物(천하 하물)이던지 此(차)를 沮止抑制(저지 억제)치 못할지니라.
舊時代(구시대)의 遺物(유물)인 侵略主義(침략주의), 强權主義(강권주의)의 犧牲(희생)을 作(작)하야 有史以來(유사이래) 累千年(누천 년)에 처음으로 異民族(이민족) 箝制(겸제)의 痛苦(통고)를 嘗(상)한 지 今(금)에 十年(십 년)을 過(과)한지라. 我(아) 生存權(생존권)의 剝喪(박상)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心靈上(심령상) 發展(발전)의 障애(장애)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民族的(민족적) 尊榮(존영)의 毁損(훼손)됨이 무릇 幾何(기하)ㅣ며, 新銳(신예)와 獨創(독창)으로써 世界文化(세계문화)의 大潮流(대조류)에 寄與補裨(기여보비)할 奇緣(기연)을 遺失(유실)함이 무릇 幾何(기하)ㅣ뇨.
손병희 선생님의 유묵해설~일을 당하여 거침없이 하면 도통한것을 알수있고, 글 읽는데 취미를 붙이면 입지한 것을 알수 있다. 이글은 선생께서 항시 격언으로 사용하신 글이다.
噫(희)라, 舊來(구래)의 抑鬱(억울)을 宣暢(선창)하려 하면, 時下(시하)의 苦痛(고통)을 파탈하려하면 장래의 협위를 삼제하려 하면, 民族的(민족적) 良心(양심)과 國家的(국가적) 廉義(염의)의 壓縮銷殘(압축소잔)을 興奮伸張(흥분신장)하려 하면, 各個(각개) 人格(인격)의 正當(정당)한 發達(발달)을 遂(수)하려 하면, 可憐(가련)한 子弟(자제)에게 苦恥的(고치적) 財産(재산)을 遺與(유여)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자자손손)의 永久完全(영구완전)한 慶福(경복)을 導迎(도영)하려 하면, 最大急務(최대급무)가 民族的(민족적) 獨立(독립)을 確實(확실)케 함이니, 二千萬(이천만) 各個(각개)가 人(인)마다 方寸(방촌)의 刃(인)을 懷(회)하고, 人類通性(인류통성)과 時代良心(시대양심)이 正義(정의)의 軍(군)과 人道(인도)의 干戈(간과)로써 護援(호원)하는 今日(금일), 吾人(오인)은 進(진)하야 取(취)하매 何强(하강)을 挫(좌)치 못하랴. 退(퇴)하야 作(작)하매 何志(하지)를 展(전)치 못하랴.
丙子修好條規(병자 수호 조규) 以來(이래) 時時種種(시시종종)의 金石盟約(금석맹약)을 食(식)하얏다 하야 日本(일본)의 無信(무신)을 罪(죄)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학자)는 講壇(강단)에서, 政治家(정치가)는 實際(실제)에서, 我(아) 祖宗世業(조종세업)을 植民地視(식민지시)하고, 我(아) 文化民族(문화민족)을 土昧人遇(토매인우)하야, 한갓 征服者(정복자)의 快(쾌)를 貪(탐)할 뿐이오,
我(아)의 久遠(구원)한 社會基礎(사회기초)와 卓락(탁락)한 民族心理(민족심리)를 無視(무시)한다 하야 日本(일본)의 少義(소의)함을 責(책)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자기)를 策勵(책려)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他(타)의 怨尤(원우)를 暇(가)치 못하노라. 現在(현재)를 綢繆(주무)하기에 急(급)한 吾人(오인)은 宿昔(숙석)의 懲辯(징변)을 暇(가)치 못하노라.
이 휘호는 이 갑성 선생께서 병석에 누우신채 1981년에 쓰신 글로서 삼일 동지회 오태석 회원이 보존하고 있다.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所任(소임)은 다만 自己(자기)의 建設(건설)이 有(유)할 뿐이오, 決(결)코 他(타)의 破壞(파괴)에 在(재)치 안이하도다. 嚴肅(엄숙)한 良心(양심)의 命令(명령)으로써 自家(자가)의 新運命(신운명)을 開拓(개척)함이오, 決(결)코 舊怨(구원)과 一時的(일시적) 感情(감정)으로써 他(타)를 嫉逐排斥(질축배척)함이 안이로다. 舊思想(구사상), 舊勢力(구세력)에 기미(기미)된 日本(일본) 爲政家(위정가)의 功名的(공명적) 犧牲(희생)이 된 不自然(부자연), 又(우) 不合理(불합리)한 錯誤狀態(착오상태)를 改善匡正(개선광정)하야, 自然(자연),又(우) 合理(합리)한 政經大原(정경대원)으로 歸還(귀환)케 함이로다.
當初(당초)에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로서 出(출)치 안이한 兩國倂合(양국병합)의 結果(결과)가,畢竟(필경) 姑息的(고식적) 威壓(위압)과 差別的(차별적) 不平(불평)과 統計數字上(통계숫자상) 虛飾(허식)의 下(하)에서 利害相反(이해상반)한 兩(양) 民族間(민족간)에 永遠(영원)히 和同(화동)할 수 없는 怨溝(원구)를 去益深造(거익심조)하는 今來實積(금래실적)을 觀(관)하라. 勇明果敢(용명과감)으로써 舊誤(구오)를 廓正(확정)하고,眞正(진정)한 理解(이해)와 同情(동정)에 基本(기본)한 友好的(우호적) 新局面(신국면)을 打開(타개)함이 彼此間(피차간) 遠禍召福(원화소복)하는 捷徑(첩경)임을 明知(명지)할 것 안인가.
또 二千萬(이천만) 含憤蓄怨(함분축원)의 民(민)을 威力(위력)으로써 拘束(구속)함은 다만 東洋(동양)의 永久(영구)한 平和(평화)를 保障(보장)하는 所以(소이)가 안일 뿐 안이라, 此(차)로 因(인)하야 東洋安危(동양안위)의 主軸(주축)인 四億萬(사억만) 支那人(지나인)의 日本(일본)에 對(대)한 危懼(위구)와 猜疑(시의)를 갈스록 濃厚(농후)케 하야, 그 結果(결과)로 東洋(동양) 全局(전국)이 共倒同亡(공도동망)의 悲運(비운)을 招致(초치)할 것이 明(명)하니,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朝鮮獨立(조선독립)은 朝鮮人(조선인)으로 하여금 邪路(사로)로서 出(출)하야 東洋(동양) 支持者(지지자)인 重責(중책)을 全(전)케 하는 것이며, 支那(지나)로 하여금 夢寐(몽매)에도 免(면)하지 못하는 不安(불안),恐怖(공포)로서 脫出(탈출)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동양평화)로 重要(중요)한 一部(일부)를 삼는 世界平和(세계평화), 人類幸福(인류행복)에 必要(필요)한 階段(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구구)한 感情上(감정상) 問題(문제)ㅣ리오.
오세창 선생님유묵해설
대해와 같이 무한이 용납할 도량을 가져야 하고 명월과 같이 언제든지 가득차 있지 아니함을 알아야 한다.
아아, 新天地(신천지)가 眼前(안전)에 展開(전개)되도다. 威力(위력)의 時代(시대)가 去(거)하고 道義(도의)의 時代(시대)가 來(내) 하도다. 過去(과거) 全世紀(전세기)에 鍊磨長養(연마장양)된 人道的(인도적) 精神(정신)이 바야흐로 新文明(신문명)의 曙光(서광)을 人類(인류)의 歷史(역사)에 投射(투사)하기 始(시)하도다. 新春(신춘)이 世界(세계)에 來(내)하야 萬物(만물)의 回蘇(회소)를 催促(최촉)하는도다. 凍氷寒雪(동빙한설)에 呼吸(호흡)을 閉蟄(폐칩)한 것이 彼一時(피일시)의 勢(세)ㅣ라 하면 和風暖陽(화풍난양)에 氣脈(기맥)을 振舒(진서)함은 此一時(차일시)의 勢(세)ㅣ니, 天地(천지)의 復運(복운)에 際(제)하고 世界(세계)의 變潮(변조)를 乘(승)한 吾人(오인) 아모 주躇(주저)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기탄)할 것 업도다. 我(아)의 固有(고유)한 自由權(자유권)을 護全(호전)하야 生旺(생왕)의 樂(낙)을 飽享(포향)할 것이며, 我(아)의 自足(자족)한 獨創力(독창력)을 發揮(발휘)하야 春滿(춘만)한 大界(대계)에 民族的(민족적) 精華(정화)를 結紐(결뉴)할지로다.
吾等(오등)이 滋(자)에 奪起(분기)하도다. 良心(양심)이 我(아)와 同存(동존)하며 眞理(진리)가 我(아)와 幷進(병진)하는도다. 男女老少(남녀노소) 업시 陰鬱(음울)한 古巢(고소)로서 活潑(활발)히 起來(기래)하야 萬彙군象(만휘군상)으로 더부러 欣快(흔쾌)한 復活(복활)을 成遂(성수)하게 되도다. 千百世(천 백세) 祖靈(조령)이 吾等(오등)을 陰佑(음우)하며 全世界(전세계) 氣運(기운)이 吾等(오등)을 外護(외호)하나니, 着手(착수)가 곳 成功(성공)이라. 다만, 前頭(전두)의 光明(광명)으로 驀進(맥진)할 따름인뎌.
公約三章(공약 삼 장)
-.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정의), 人道(인도),生存(생존),尊榮(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ㅣ니, 오즉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발휘)할 것이오, 決(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최후)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히 發表(발표)하라.
-.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여금 어대까지던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조선 민족 33人(인) 대표
孫秉熙(손병희) 吉善宙(길선주) 李弼柱(이필주) 白龍城(백용성) 金完圭(김완규) 金秉祚(김병조) 金昌俊(김창준) 權東鎭(권동진) 權秉悳(권병덕) 羅龍煥(나용환) 羅仁協(나인협) 梁甸伯(양전백) 梁漢黙(양한묵) 劉如大(유여대) 李甲成(이갑성) 李明龍(이명룡) 李昇薰(이승훈) 李鍾勳(이종훈) 李鍾一(이종일) 林禮煥(임예환) 朴準承(박준승) 朴熙道(박희도) 朴東完(박동완) 申洪植(신홍식) 申錫九(신석구) 吳世昌(오세창) 吳華英(오화영) 鄭春洙(정춘수) 崔聖模(최성모) 崔 麟(최 린) 韓龍雲(한용운) 洪秉箕(홍병기) 洪基兆(홍기조) 33人(인)
기미 독립 선언문의 전문 풀이
우리 조선은 이에 우리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이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가 평등하다는 큰 뜻을 똑똑히 밝히며, 이로써 자손 만대에 일러, 민족의 독자적 생존의 정당한 권리를 영원히 누려 가지게 하는 바이다.
5천년 역사의 권위를 의지하여 이를 선언함이며, 2천 만 민중의 충성을 모아 이를 두루 펴 밝히며, 겨레의 한결같은 자유 발전을 위하여 이를 주장함이며, 인류가 가진 양심의 발로에 뿌리 박은 세계 개조의 큰 움직임에 순응해 나가기 위하여 이를 내세움이니, 이는 하늘의 분명한 명령이며 시대의 큰 추세이며, 온 인류가 더불어 같이 살아갈 권리의 정당한 발동이기에, 하늘 아래 그 무엇도 이를 막고 억누르지 못할 것이다.
낡은 시대의 유물인 침략주의, 강권주의에 희생되어, 역사 있은 지 몇 천 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민족에게 억눌려 고통을 겪은 지 이제 십 년이 지났는지라, 우리 생존권을 빼앗겨 잃은 것이 무릇 얼마이며, 겨레의 존엄과 영예가 손상된 일이 무릇 얼마이며, 새롭고 날카로운 기백과 독창력으로써 세계 문화의 큰 물결에 이바지할 기회를 잃은 것이 그 얼마나 될 것이냐?
슬프다 ! 오래전부터의 억울함을 떨쳐 펴려면, 지금의 괴로움을 벗어나려면, 앞으로의 위협을 없이 하려면, 겨레의 양심과 나라의 체모가 도리어 짓눌려 시든 것을 키우려면, 사람마다 제 인격을 올바르게 가꾸어 나가려면, 가엾은 아들딸들에게 괴롭고 부끄러운 유산을 물려주지 아니하려면, 자자손손이 완전한 경사와 행복을 길이 누리도록 이끌어 주려면, 가장 크고 급한 일이 겨레의 독립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니, 2천만 각자가 사람마다 마음의 칼날을 품고, 인류의 공통된 성품과 시대의 양심이 정의의 군대와 인도의 무기로써 지켜 도와주는 오늘날, 우리는 나아가 얻고자 하매 어떤 힘인들 꺾지 못하랴? 물러가서 일을 꾀함에 무슨 뜻인들 펴지 못하랴?
병자 수호 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맺은 갖가지 약속을 저버렸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죄주려 하지 아니 하노라.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물려 온 터전을 식민지로 보고, 우리 문화 민족을 마치 미개한 사람들처럼 대우하여, 한갓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겨레의 마음가짐을 무시한다 하여,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우리 스스로를 채찍질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을 갖지 못하노라. 현재를 준비하기에 바쁜 우리는 묵은 옛일을 응징하고 가릴 겨를이 없다.
오늘 우리의 할 일은 다만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그것은 결코 남을 파괴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일 뿐이요. 그것은 결코 묵은 원한과 한 때의 감정으로써 남을 시기하고 배척하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낡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심에 희생된, 부자연스럽고 불합리한, 그릇된 상태를 고쳐서 바로잡아,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바른 길, 큰 으뜸으로 돌아오게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의 요구로서 나온 것이 아닌 두 나라의 병합의 결과가 마침내 한때의 위압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으로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지금까지의 실적을 보라! 용감하고 밝고 과감한 결단으로 지난날의 잘못을 바로잡고, 참된 이해와 한 뜻에 바탕한 우호적인 새 판국을 열어 나가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멀리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가까운 길임을 밝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또 울분과 원한이 쌓인 2천만 국민을 위력으로써 구속하는 것은 다만 동양의 영구한 평화를 보장하는 길이 아닐 뿐 아니라, 이로 말미암아 동양의 안전과 위태를 좌우하는 굴대인 4억 중국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두려움과 새암을 갈수록 짙게 하여, 그 결과로 동양의 온 판국이 함께 쓰러져 망하는 비참한 운명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니, 오늘날 우리 조선 독립은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정당한 삶의 번영을 이루게 하는 동시에, 일본으로 하여금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 동양을 지지하는 자의 무거운 책임을 다하게 하는 것이며, 중국으로 하여금 꿈에도 면하지 못하는 불안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며, 또 동양 평화로 그 중요한 일부를 삼는 세계 평화와 인류 행복에 필요한 계단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어찌 구구한 감정상의 문제리요?
아아! 새 천지가 눈앞에 펼쳐지도다. 힘의 시대가 가고 도의의 시대가 오도다. 지난 온 세기에 갈고 닦아 키우고 기른 인도의 정신이 바야흐로 새 문명의 밝아오는 빛을 인류의 역사에 쏘아 비추기 시작하도다. 새 봄이 온누리에 찾아들어 만물의 소생을 재촉하는도다. 얼어붙은 얼음과 찬 눈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이 저 한때의 형세라 하면, 화창한 봄바람과 따뜻한 햇볕에 원기와 혈맥을 떨쳐 펴는 것은 이 한때의 형세이니, 하늘과 땅에 새 기운이 되돌아오는 때를 맞고, 세계 변화의 물결을 탄 우리는 아무 머뭇거릴 것 없으며, 아무 거리낄 것 없도다. 우리의 본디부터 지녀온 자유권을 지켜 풍성한 삶의 즐거움을 실컷 누릴 것이며, 우리의 풍부한 독창력을 발휘하여 봄기운 가득한 온누리에 민족의 정화를 맺게할 것이로다.
우리가 이에 떨쳐 일어나도다. 양심이 우리와 함께 있으며, 진리가 우리와 더불어 나아가는도다. 남녀노소 없이 얻부고 답답한 옛 보급자리로 부터 활발히 일어나 삼라만상과 함께기쁘고 유쾌한 부활을 이루어내게 되도다. 먼 조상들의 넋이 은밀히 우리를 지키며, 전 세계의 움직임이 우리를 밖에서 보호하고 있으니, 시작이 곧 성공이다. 다만 저 앞의 빛으로 힘차게 나아갈 뿐이다.
공약 3장
1. 오늘 우리들의 이 거사는 정의 인도 생존 번영을 위하는 겨레의 요구이니, 오직 자유의 정신을 발휘할 것이요,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
2. 마지막 한 사람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한 순간에 다다를 때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시원스럽게 발표하라.
3. 모든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들의 주장과 태도를 어디까지나 떳떳하고 정당하게 하라.
조선 나라를 세운 지 사천이백오십이년 되는 해 삼월 초하루
민족대표 33인 당시의 나이(괄호안)와 옥사리 통계표와 출생지와 생졸
孫秉熙(손병희60세) 징역 3년-충북 청주-1861-1922
吉善宙(길선주52세) 무죄 -평남 안주-1868-1935
李弼柱(이필주51세) 징역 2년-경기 고양-1869-1932
白龍城(백용성57세) 징역 1년-전북 남원-1864-1940
金完圭(김완규44세) 징역 3년-서울 -1879-1947
金秉祚(김병조43세) 징역 3년-평북 정주-1878-1947
金昌俊(김창준31세) 징역 2년-평양 -1889-
權東鎭(권동진60세) 징역 3년-경기 포천-1861-1947
權秉悳(권병덕53세) 징역 3년-충북 청주-1868-1942
羅龍煥(나용환57세) 징역 3년-평남 중화-1863-1936
羅仁協(나인협49세) 징역 3년-평남 성천-1871-1951
梁甸伯(양전백51세) 징역 2년-평북 의주-1869-1933
梁漢黙(양한묵56세) 징역 2년-전남 화순-1864-1919
劉如大(유여대43세) 징역 2년-평북 의주-1878-1937
李甲成(이갑성34세) 징역 2년-대구 -1889-1981
李明龍(이명룡48세) 징역 2년-평북 철산-1873-1956
李昇薰(이승훈56세) 징역 3년-평북 정주-1864-1930
李鍾勳(이종훈65세) 징역 3년-경기 광주-1856-1931
李鍾一(이종일62세) 징역 3년-경기 포천-1857-1925
林禮煥(임예환56세) 징역 2년-평남 중화-1865-1947
朴準承(박준승55세) 징역 2년-전북 임실-1866-1921
朴熙道(박희도31세) 징역 2년-황해도해주-1889-1951
朴東完(박동완35세) 징역 2년-경기 포천-1887-1941
申洪植(신홍식49세) 징역 2년-축북 청주-1872-1937
申錫九(신석구40세) 징역 2년-충북 청주-1875-1950
吳世昌(오세창57세) 징역 3년-황해도평산-1864-1953
吳華英(오화영41세) 징역 2년-황해도평산-1880-
鄭春洙(정춘수45세) 징역 1년-충북 청주 -1875-1951
崔聖模(최성모47세) 징역 2년-서울 -1873-1936
崔 麟(최 린42세) 징역 3년-함남 함흥 -1878-
韓龍雲(한용운42세) 징역 3년-충남 홍성 -1879-1944
洪秉箕(홍병기52세) 징역 2년-경기 여주 -1868-1949
洪基兆(홍기조56세) 징역 3년-평남 용강 -1865-1983 이상-33人(인)
민족대표 33인(民族代表三十三人)은 1919년 3월 1일, 운동 때 발표된 기미 독립 선언서에 서명한33명을 가리킨다. 종교별로 나누어 대표를 선정하여 천도교, 기독교, 불교에서 각 15명, 16명,2명씩 참가했다. 이 가운데 1919년 3월 1일에 약속 장속인 태화관에 나오지 않은 사람은 길선주, 유여대, 김병조, 정춘수이다.
상하이로 망명해 체포를 피한 김병조와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은 길선주, 그리고 체포 직후 구금 중에 사망한 양한묵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사건으로 징역 1년 6개월에서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 가운데는 손병희처럼 복역 중 병을 얻어 곧 사망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이후 친일 행위로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오르는 등 친일파로 꼽히는 사람들도 포함되어 있다. 최린, 박희도, 정춘수가 대표적이다.
종교 | 이름 | 출신 지역 | 신분 | 재판 결과 |
충북 청원 | 천도교 전 교주 | 징역 3년형 | ||
충북 괴산 | 천도교 도사 | |||
서울 | ||||
평양 | 징역 2년형 | |||
평남 성천 | ||||
평남 남포 | ||||
전북 임실 | ||||
전남 해남 | 재판 중 사망 | |||
충북 청원 | 징역 2년형 | |||
서울 | 천도교 신자 | |||
평남 성천 | 천도교 도사 | |||
경기 광주 | 천도교 장로 | |||
경기 여주 | ||||
충남 태안 | 천도교 월보부장 | 징역 3년형 | ||
함남 함흥 | 보성고보 교장 | |||
평북 정주 | 장로교 장로 | |||
황해 해주 | 중앙기독교청년회 간사 (북감리교) | 징역 2년형 | ||
경북 대구 | 세브란스의전부설병원 사무원 (장로교) | 징역 2년 6개월형 | ||
황해 평산 | 남감리교 목사 | |||
황해 해주 | 북감리교 목사 | 징역 2년형 | ||
서울 | ||||
평남 강서 | 북감리교 전도사 | 징역 2년 6개월형 | ||
충북 청원 | 남감리교 목사 | 징역 2년형 | ||
경기 포천 | 기독교보사 서기 (북감리교) | |||
충북 청주 | 북감리교 목사 | |||
평북 선천 | 장로교 목사 | |||
평북 철산 | 장로교 장로 | |||
평남 안주 | 장로교 목사 | 무죄 | ||
평북 의주 | 징역 2년형 | |||
평북 정주 | 체포되지 않음 | |||
충북 청원 | 남감리교 목사 | 징역 1년 6개월형 | ||
충남 홍성 | 승려 | 징역 3년형 | ||
전북 장수 | 징역 1년 6개월형 |
3.1운동
1919년 3월 1일을 기하여 일어난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 일명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한다.
원인
한일 합방 후 일본의 침락에 항거하는 의병,열사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독립운동에 나서자 일본의 조선 총독부는 무단청치를 시도하여 민족적 지도 세력과 한국 방방곡곡의 유지들을 말살했다. 봉건제도하에서 파경의 경지를 해매던 한국의 경제는 한 걸음 앞선 일본의 자본주의적인 침략세력 앞에는 어쩔수가 없었다. 선각자들은 민족적인 경제발전을 기할수 없음을 알고 개별적으로나마 경제 이론과 기술을 도입하여 경제 전설에 착안 하였지만 일본의 정치를 배경으로 한 경제 탄압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 의하여 싹트기 시작한 민족전인 자각 (그것은 주로 사상면과 문화면이 었지만)은 때마침 제 1차 세계대전의 대세가 결정될 무렵인 1918년 1월 미국 대통령 월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로 한국 백성들의 민족적인 독립의식이 높이 앙양되었다.
이리하여 조직적인 정치운동이 시작되었는데 중국 상해에서는 呂運亨(여운형). 金澈(김철).金奎植(김규식)등이 협의하여 김 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어 우리나라의 독립을 호소하게 하고 미국에서는 安昌浩(안창호), 李承晩(이승만), 鄭翰景(정한경),등이 독립운동을 전개 하였으며, 李東輝(이동휘)등은 연해주 지방에서 활약하였다.
1919년 1월 고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것은 일본이 독살한 것이라는 풍문이 돌아 민심을 극도로 자극하였다. 일면 일본 도오쿄오(東京(동경)에 유학중인 한국 학생들은 정치단체를 조직하고 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1919년 초 부터 이들은 崔八鏞(최팔용), 金度演(김도연), 徐椿(서춘),李琮根(이종근), 白寬洙(백관수), 尹昌錫(윤창석), 金尙德(김상덕), 崔謹愚(최근우), 金喆壽(김철수),를 대책위원으로 선출하고, 宋繼白(송계백), 을 국내에 파견 운동자금과 활자를 준비해 오게하고 崔元淳(최원순), 鄭光好(정광호), 등은 李光洙(이광수)가 기초한 독립선언서르 인쇄하여 2월 8일 간다구(神田區) 조선기독교청년회관(YMCA)에 모여 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이 날 이사건 관계된 사람들은 모두 일본 경고나에게 모두 체포되었다. 이에 동경 유학생들은 전원이 귀국할것을 결의 3월 1일에 일어난 독립만세 대열에 참가 하게되었다. 한편 국내에서는 제 1차 대전이 일어나던 초기부터 일부 지도자들이 정치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결과
東京(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사건은 국내 인사들에게 결정적인 자극을 주었다. 1919년 2월 상순 權東鎭(권동진), 吳世昌(오세창), 崔麟(최인)등은 孫秉熙(손병희)와 독립선언서에 관한 일을 의논, 다시 宋鎭禹(송진우), 玄相允(현상윤), 崔麟(최인), 崔南善(최남선),등이 독립선언 진행 방법등을 검토하였다. 천도교 기독교 유지들을 조선 민족 대표로 정하고, 그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함과 동시에 그 취지를 각국에 보내기로 결정하고, 서명할 인사들의 물색에 나섰다. 宋鎭禹(송진우), 崔南善(최남선)은 舊韓末(구한말) 유지들과 상의하였으나 성과를 얻지 못하여 민족대표에서 그들을 제외 하기로 하였다. 한편 기독교 측은 李昇薰(이승훈), 천교도측은 崔麟(최인)이 각각나서서 많은 동지를 얻었고, 이를 안 불교측에서도 韓龍雲(한용운), 白龍城(백용성)이가 가담하니, 결국 기독교측 16명, 천도교측 15명, 불교측 2명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키로 하고, 총 대표에 孫秉熙(손병희)를 추대하였다.
마침 고종의 因山(인산) 國葬(국장)이 3월 3일로 결정되자 많은 사람이 서울로 모일것을 에측하고, 이 기회를 이용하고자 3월 1일 정오를 기하여 대표들이 탑동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인쇄물을 뿌리고, 일제히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또 각 지방에서도 미리부터 조직을 짜고, 운동의 방법, 날짜등을 전달해 두었다. 독립선언서와 일본정부에 대한 통고문, 미국 대통령,파리강화 회의대표들에 보내는 의견서는 崔南善(최남선)이 기초하고, 내용과 인쇄는 천도교측이 담당하여 金弘奎(김홍규)의 감독하에 2월 26일 보성관에서 2만여매를 인쇄하였다. 인쇄물의 배부는 학생들이 맡기로 되어 金元璧(김원벽), 康基德(강기덕), 韓偉健(한위건), 金法麟(김법린), 白性郁(백성욱), 吳택彦(오택언),등이 책임을 맡되 종로 이북은 불교, 계통의 학생, 10명, 종로 이남은 기독교 계통의 학생 10명, 남대문 밖은 천도교 계통의 학생 10명이 각각 담당하였다.
한편 일본정부와 의회에 대한 통고문의 제출은 천도교, 미국 대통령과 강화회의에 보내는 의견서는 가독교에서 담당 하도록 하였다. 2월 28일 손병희 이하 33명의 민족 대표는 재동 손병희 집에 모여 마지막 의논을 했다. 탑동공원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일것이므로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독립선언 장소를 인사동 명월관 지점으로 결정하였다. 이날 金元璧(김원벽)을 비롯한 학생들은 승동교회에 모여서 李甲成(이갑성)으로 부터 받은 독립 선언서 1,500매를 康基德(강기덕)이 학생에게 나누어 주었다. 학생들은 3월 1일 정오에 탑동공원에 모여 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에 앞장 설것을 결의하였다. 3월 1일 독립을 외치는 함성은 터져 나왔다. 아침부터 탑동공원에는 4~5,000명의 학생들이 모여 들었는데 오포 소리가 울리자 鄭在鎔(정재용)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니 학생들은 모자를 공중에 던지고 태극기를 흔들며 일제히 만세를 외쳤다. 이들이 선언을 끝내고 공원을 나설 즈음에는 수 많은 군중이 호응하여 시위 행진에 합류했고, 그 대열이 대한문 앞에 이를 무렵에는 서울 장안은 흥분의 도가니가 되고 말았다.
행렬은 대한문에 이르러 고종의 빈전을 향하여 상례를하고 대열을 나누어 일대는 정동의 미국 영사관으로, 일대는 총독부로 향하던 도중에 일본 군경과 충돌하였다. 한편 민족 대표 33명(그중 吉善宙(길선주), 劉如大(유여대), 金秉祚(김병조), 鄭春洙(정춘수),는 불참)은 명월관에 모여 하오 2시 韓龍雲(한용운)이 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를 부른 다음 전화로 경찰에 통고 자진 체포되었다. 시위 운동은 하오 6시에 일단 끝났으나 하오 8시에는 마포에서 1,000여명이 다시 일어났고, 밤 11시경에 예수교 부속 전문학교 부근에서 500여명이 만세를 불렀다. 이 운동은 전국 坊坊曲曲(방방곡곡)으로 퍼져, 같은 3월 1일 개성. 평양, 진남포, 선천, 안주, 의주, 원산, 함흥, 대구, 황주, 수안, 곡산등지에서 일어났고, 다음날에는 방방곡곡에서 독립만세와 시위운동이 벌어졌다. 서울에서는 3일의 국장일만 제외하고, 매일 같이 가두 시위가 벌어졌으며, 학생은 휴교, 시장은 철시, 공장은 파업, 관리는 퇴직 하였다. 또 3월 28일에는 구 한국의 정치가 金允植(김윤식)이 총독부에 독립 승인 최촉장을 제출, 유림에서도 郭鍾錫(곽종석), 張錫英(장석영), 金昌淑(김창숙)등이 독립을 외치고 나셨다.
4월 23일에는 서울에서 <조선민국 임시정부 조직포고문>이 발표되고, 5월 20일에는 金嘉鎭(김가진)이 중심이 되어 의친왕등 구황족을 망라하여 조선민족 대동단을 조직하였다. 이에 대하여 총독부는 무력탄압을 단행하여 전국 도처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학살, 부상, 투옥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수원 제암리의 학살인 바, 일본군은 제암리 사람들을 제암리 교회에 몰아 넣은 후, 입구를 막고 老幼(노유)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 총격을 가하고, 나중에는 불을 질러 태워 1.000여명의 사상자를 내어 동리 전원이 몰살 되다싶이 했다. 이 밖에도 화수리, 정주, 맹산, 강서, 대구, 밀양, 합천등지의 집단 학살과 柳寬順(유관순)의 참살 사건은 참혹한 일이었다. 대표중 韓龍雲(한용운)은 옥중에서도 <조선독립의 서>라는 논문을 써서 비밀히 외부에 유포시켜 큰 충격을 주었다. 이 거족적인 운동은 3월과 4월에 걸쳐 최고조에 달했는데 비단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 하와이, 가라후또(樺太(화태:사할린)등지에서도 호응 하였다.
결과 및 의의
일본의 무력 앞에 진압되고, 독립은 이룩하지 못하였지만 드높은 한민족의 자주의식과 독립의식을 세계만방에 드러내게되고, 대내적으로는 민족적 결속을 강화 할수가 있었다. 훨씬후의 일이지만, 일본은 이러한 민족정신을 무력으로는 제압할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한걸음 더 나아가 지능적인 방책을 취해 무단 정치 내지 헌병 정치를 문화정치로 粉飾(분식)했다.
참고:> 독립선언서 > 민족 독립운동 >
문헌:>崔南善(최남선):朝鮮獨立運動史(독립운동사)><朴殷植(박은식):韓國獨立運動之血史(한국독립운동지형사) 독립운동 조사 통계표
도 별 | 발 생 회수 | 참 가 인 원 | 희 생 자 | 부 상 자 | 투 옥 인 |
경 기 도 | 297 | 665,900 | 1,472 | 3,124 | 4,680 |
황 해 도 | 115 | 92,670 | 238 | 414 | 4,218 |
강 원 도 | 57 | 99,510 | 144 | 645 | 1,360 |
평 안 남 북 도 | 315 | 493,070 | 2,042 | 3,665 | 11,600 |
함 경 남 북 도 | 101 | 59,850 | 135 | 667 | 6,215 |
충 청 남 북 도 | 156 | 120,850 | 590 | 1,116 | 6,233 |
전 라 남 북 도 | 222 | 294,800 | 384 | 767 | 2,900 |
경 상 남 북 도 | 228 | 154,498 | 2,470 | 5,295 | 10,085 |
서북 간도 및 화해도 | 51 | 48,700 | 34 | 157 | 15 |
집 계 | 1542 | 2,029,848 | 7,509 | 15,850 | 47,306 |
이번의 독립운동은 저들의 엄밀한 규제로 인하여 자세하고 확실한 조사를 할수 없었다. 하물며 해외에서 신문 통신 및 개인의 구전에만 의존함에 있어서랴. 지명 집회 사상자 피검자 및 불타고 부서진 교회 학교 민가등의 숫자가 많이 빠져있을 것이다. 독자의 양해를 바랍니다.
3.1운동의 배경
데라우치 마사타게에서 육군대장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총독으로 계승된 무단 통치는 “3.1 독립운동”이라는 뜻하지 않은 결과를 발생케 했다. 삼일운동은 1919년 1월 22일 고종황제의 독살설로 인하여 일본의 부당한 朝鮮점령과 폭력에 의한 통치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반감을 갖 게되어 큰 호응을 얻을수 있었다.
3.1운동의 과정
1919년 곧 기미년 3월 1일에 한국이 일본의 강제적인 식민지 정책으로 부터 자주독립할 목적으로 일으킨 민족 독립 운동으로, 제1차 세계대전 후 민족 자결주의에 입각하여 손 병희 등 33인이 주동이 되어 “독립선언 서”를 낭독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였다.
3.1운동의 피해 규모
박 은식이 쓴 ▶한국독립 운동지혈사◀에 따르면 200여만 명이 참가하여 7,509명이 사망, 15,850명이 부상, 45,306명이 체포되었으며, 헐리고 불 탄 民家(민가)가 715戶(호), 교회가 47개소, 학교가 2개소이다. 조선 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6만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 12,000명이 체포되었다.
3.1운동의 결과
3.1운동에 의해 일본 정부나 총독부측에서는 기존의 통치 방식을 심각하 게 고려하지 않을수 없었고, 왜적들은 친일파 양성을 통해 조선민족의 분 열을 시도하였으며, 이는 가혹한 식민통치를 철처히 은폐하기 위한 간악 하고, 교활한 통치 방식이 날로 성행하였다.
3.1운동의 의의
국내에 있어서는
① 일제의 강점을 거부하고, 자주독립을 찾으려는 거족적인 민족 운동이 였다.
② 3.1운동은 근대 한국민족 운동을 한 차원 끌여 올리는 새로운 전기를 만들었다.
③ 3.1운동은 하나의 거대한 용광로 속에 용해된 민족적 에너지를 민족 독립운동으로 역할을 감당하였다.
그리고 세계사적으로는 3.1운동은 世界 제1차 대전후 강대국에 의해 재편된 세계질서에 대해 도전한 최초의 저항이라는 점에서 世界史的인 意義는 뚜렷하다.
三一 獨立宣言書(삼일독립선언서) 發行處(발행처) : 社團法人 三一同志會(삼일동지회)!
끝으로 하늘에서 본 한반도-마라도에서 금강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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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60년.역사가 움직인 순간들 1부.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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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60년.역사가 움직인 순간들 2부.절대자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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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를 정리 하면서 故 최 마리(마리아)여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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