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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거리가 먼데
본문 눅 15:11-32
요절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오늘 말씀은 성경에서 가장 유명한 비유라고 해도 과언이아닌 돌아온 탕자 말씀입니다.교회 다니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한번 쯤은 들어보았을 비유 말씀입니다. 말씀에 나오는 아버지는 상당한 부자로 요즘으로 치자면 건물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는 부족할 것 없을 것 같은데 둘째 아들은 왜 아버지를 떠났을까요? 아버지를 떠난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지 깨닫고, 하나님 아버지 품으로 돌아가는 저희들 되기를 기도합니다.
(렘브란트 – 돌아온 탕자)
이 그림에 등장한 사람들의 표정을 한번 잘 살펴봅시다. 남루한 옷을 입고 초라한 몰골로 등을 진채 아버지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는 돌아온 탕자 그리고 그 아들을 기다리느라 늙어버렸지만 안도의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그 뒤에 작은 아들의 고생에 동감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는 한 여인이 보이고 그 옆에는 쉽지 않은 것이 인생이라는 달관의 표정을 짓고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습니다. 그 옆에 양손을 모은 채 다소 노기 띤 눈빛으로 아버지와 동생을 응시하는 형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그림은 무려 350여 년 전에 그려졌지만, 동생에 대한 형의 분노가 여전히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이 그림이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서로 간의 연민과 갈등의 시작은,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신의 몫으로 돌아올 재산을 미리 달라고 청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림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I. ENFP 둘째 아들(11-24)
성경에 나오는 둘째아들의 MBTI는 ENFP가 아닐까 추측이 됩니다. 외향적이고, 상상을 통해 더 행복한 나라를 꿈꾸며,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선택을 내립니다. 자율적이지만 그에 따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1절을 보십시오.어떤 아버지가 있었는데 그는 품꾼을 많이 둔 부자였고, 또 품꾼들에게 양식을 풍족하도록 주는 사랑과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그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두 아들이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그야말로 각별하였습니다.아들들이 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자랄 수 있도록 책도 읽어주고,성경 속 이야기들도 재미있게 각색해서 들려주곤 하였습니다. 두 아들들에게 아버지는 좋은 친구요,인생의 선배이자,영적으로는 좋은 목자였습니다.그러나 둘째 아들이 대학교에 진학한 후 그 생각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과 선배들, 동아리 선배들을 보면 자유롭게 사는 것 같으면서도 성공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반면 아버지의 집에 머물러 있는다면 그의 인생은 아버지처럼, 형처럼 단조롭고 뻔한 인생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간의 모험을 하더라도 둘째아들은 조금더 화려하고 뽀대나는 삶을 살고 싶어졌습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는 친구의 충고대로 곧장 아버지에게 가서 그의 계획을 이야기하였습니다. 12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아버지가 엄연히 살아 계시는데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하는 것은 당시 유대 사회는 물론이거니와 오늘날에도 버르장머리 없고 괘씸한 행동입니다. 만약 일반적인 아버지라면 “이런 싸가지없는 놈의 자식이” 싸대기가 날라갔을 것입니다. 그러나아버지는 그렇게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아들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아들의 선택을 존중해주었습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은 둘째는 일사천리로 떠날 준비를 하였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며칠이 안되어 재물을 다 모았다는 말은 유산으로 받은 땅이며, 가축들을 헐값에 얼른 팔아치웠음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의 향력이 닿지 않는 먼 나라로 가는 배에 올랐습니다. 이곳은 하나님 없는 세계를 말합니다. 내 마음에 원하는 대로, 내 소견에 옳은 대로 살면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는 세상입니다.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간섭이나 잔소리 없이 인생을 즐기기도 하고, 또 열심히 살 때는 최선을 다해 노력하며 살다보면 자기 힘으로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말리던 아버지와 형 앞에 나타나서 자신의 결정이 얼마나 옳은 선택이었는가 증명해보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먼 나라의 삶은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많은 재산을 은행에 예금으로 묶어두고 이자를 받고자 하였으나 양에 차지 않았습니다. 둘째 아들은 인생은 한방이라며 주식과 코인에 투자하였습니다. 소액으로 시작하였지만, 물타기를 하다보니 어느덧 재산 절반이 들어가 있었습니다. 투자 리딩방에서는 지금이 바닥이니 남은 재산도 몰빵하여 빠른 원금회복을 해야한다고 부추켰습니다. 그러나 바닥 밑에 지하실이 있는줄 너무 늦게 깨달았습니다. 먼 나라 친구들은 그가 투자실패하자 하나 둘 떠나갔습니다. 그들 중 몇은 악한 계획을 세워 그의 남은 돈마저 빼앗아가고자 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의 여자친구를 종용하여 증거를 조작하여 모은뒤 성폭행 피해를 입었다며 신고해버린 것이었습니다. 그나마 남은 돈마저 합의금으로 뜯기고 나니, 오늘 당장 무얼 어떻게 먹을지 막막하였습니다. 궁핍에 내몰린 그는 누구도 하려하지 않는 돼지치기로 겨우 알바자리를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악덕 업주는 월급은 고사하고 먹을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배가 고파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로라도배를 채우고자하였으나그마저도 먹을 수 없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여기서 재산을 모두 탕진한 것은 단순히 금전적인 파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이 안에는 아버지가 그에게 주었던 생명,젊음,재능, 건강 등의 소중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이 모든 것이 그의 허랑방탕한삶으로 소진되어 버렸습니다.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무엇일까요?그의 계획대로 일이 안풀렸기 때문도 아니요, 시기를 잘못만나 코인이 폭락해서도 아닙니다.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그가 아버지 집을 떠났기 때문인 것입니다.이런 둘째 아들의 궁핍에 처한 비참한 모습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상태가 둘째 아들이 느낀 궁핍의 상태는 아닌가요? 스마트폰 하나로 못하는 것이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점점 풍요로워져야 할 인간의 내면은 이상하게도 점차 궁핍해갑니다.좋은 카페에서 여유로운 사진을 SNS에 올리지만 내면은 비교의식, 열등감으로 병들어 있습니다. 출산율은 최저치를 갱신하고자살률은여전히 OECD 1위입니다.정권이 바뀌면 좀 좋아지려나 하였지만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좋아지려나 하였는데, 곳곳에 전쟁이 장기화 되고 경기는 여전히 좋지 않습니다. 덕분에 청년들의 취업준비는 더욱 길어지고, 양질의 직장을 얻기가 하늘의 별따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재 상황이 혹시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온 결과는 아닌지 돌아보아야합니다. 예레미야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우리 시대의 근본 문제 역시 생수의 근원되시고 사막의 오아시스 같으신 하나님을 버린 것에 있습니다.인간 스스로 판 웅덩이는 생수를 줄 수 없는 터진 웅덩이일 뿐입니다.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로,아버지 집을 기억해야 합니다. 17절을 보십시오“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되돌아 보니 아버지의 집에는 정말 모든 것이 풍족하였습니다.먹을 것,입을 것이 풍성한 것은물론이거니와 웃음과 행복도 차고 넘쳤습니다.절망적인 순간에 이처럼 아버지의 집을 기억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하나님 아버지 집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전도서 12:1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
둘째로,솔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인정했습니다. 18, 19절“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그는 아버지의 사랑을 외면하고 떠난 자신이 얼마나 죄악되 자였던가 이제야 비로소 인정하고 있습니다.그는 아버지께 용서를 구할 면목도 없었고, 그저 한명의 품꾼으로 받아주시기만 한다면 더 바랄것이 없었습니다.
셋째로,그는 생각으로만끝나지 않고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20절 상반절을 보십시오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그는 수치심과 죄책감,자신의 냄새나는 옷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아버지의 긍휼만을 바라면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갔습니다.아버지를 떠난 삶에서 아버지께로 다시 돌이키는 삶.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던 삶에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삶. 회개란 바로 이러한 방향의 전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저 생각만으로의 결심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둘째 아들은 고향집에 가까워지자 어깨는 움츠러들고 고개는 점점 숙여졌습니다. 이런 그를 아버지가 먼저 알아보았습니다.20절 하반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아직도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꿈에 그리던 둘째 아들이라는 것을 한번에 알아보았습니다. 거동이 불편한데도 달려가 아들을 얼싸 안았습니다. 상거지꼴의 아들이었지만 입을 맞추고 그동안의 그리움과 사랑을 주체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이 ‘아직도 거리가 먼데’입니다. 이 말 속에는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의 깊이가 어떠한지 담겨있습니다. 얼마나 애절한 사랑인가, 얼마나 헌신적인 사랑인가, 얼마나 무조건적인 사랑인가가 이 ‘아직도 거리가 먼데’에 담겨있는 것입니다. 아들이 이제나 저제나 오려나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며, 오늘도 안오는구나, 내일은 돌아오겠지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먼저 달려와 맞이해주면 돌아온 아들은 면목없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재회할 수 있습니다. 만약 오늘 말씀의 제목이 ‘아직도 거리가 먼데’ 대신에 ‘집앞에 왔음에도 불구하고’라면 어떻겠습니까? 집앞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맞아주는 사람 하나 없고, 있는 식구들끼리 오순도순 잘 살고 있었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역시 나같은 놈은 아버지 집에 없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고 다시 떠나거나, 돌아갈 곳이 없다는 자괴감으로 심지어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회개하고 돌아오는 둘째 아들이 온전한 회개를 할 수 있도록 두팔 벌려 넓은 품으로 맞아주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처럼 회개한다면 주님은 결코 이 마음을 멸시치 않으시고, 두 팔을 벌리며 기다리고 계실 것입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이사야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는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을 잊어버리거나 멀리하고 살 때가 많지만,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이런 저희들을 긍휼이 여기시고 한시도 잊지 아니하시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에서 연장자가 먼저 달려가 입맞추는 것은 무조건적인 용서를 의미합니다. 아버지는 과거를 전혀 묻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 안에 있을 때나 집을 떠난 때나 지금 모든 것을 잃고 돌아온 때에도 변함없이 사랑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의 허다한 허물을 덮어 버렸습니다. 이 아버지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요, 변함없는 사랑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올 때 , 우리를 있는 그대로 영접해 주십니다. 이 용서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의 품에 안겨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그는 죄송한 마음 뿐이었습니다. 자신을 아들이 아닌 품꾼의 하나로 받아주신다 해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둘째 아들에게 어떤 대우를 해주었습니까? 아버지는 아들의 눈물을 씻어 주시며 하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아버지는 돌아온 썩을 놈을 위해 최상급 잔치를 벌입니다. 옷과 신발이 최상급이라는 것은 그의 신분이 종이 아니라 여전히 아들로 받아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아버지는 둘째를 사랑하였습니다. 둘째를 위해서 자기의 가장 좋은 것들을 희생하였습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생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가장 귀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로5:8) 하나님은 우리가 회개하고 돌아가면 우리의 모든 죄의 누더기 옷을 벗기시고 빛나는 의의 옷을 입혀 주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회복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집나간 탕자와 같은 죄인들이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십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금가락지를 끼어주실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희가 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이번 수양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II. ISTJ 첫째 아들(25-32)
하지만 이 기쁨의 순간을 즐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그는 바로 큰 아들이었습니다. 밭에서 일을 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다시 돌아온 밉상 동생을 위해 아버지께서 잔치를 여신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너무 화가 나서 아예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하였습니다.그렇다면 첫째 아들은 왜 이렇게 화가 난 것입니까? 29, 30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듣고 나니 첫째의 분노가 이해가 되는 것 같습니다.아버지 속을 썩인 둘째와 달리 첫째는 그동안 아버지 집에 거하며 문제 한번 일으키지 않고 착실히 살았습니다.무엇보다 그는 아버지께서 시키시는 일은 군말 없이 순종하였고방금도 열심히 밭에서 일을 하다 돌아 왔습니다.그런데 갑자기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집 나갔던 망나니 둘째를,아버지는 쫓아내시기는커녕,그를 위해 잔치를 벌이고 송아지까지 잡으셨습니다.염소새끼 하나 마음대로 먹지 못한 첫째의 마음은 아버지를 향한 원망과 뻔뻔한 동생을 향한 분노로 가득차 올랐습니다.그러나 이러한 원망과 분노는 첫째 아들이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었습니다.
큰 아들의 MBTI 유형을 따져보자면 아마도 ISTJ일 확률이 높습니다. 내향적, 현실적, 논리적이며 계획적인 사람입니다. 뜬 구름 잡는 먼나라의 삶 보다는 현재 아버지의 아들로 살며 유산을 받는 것이 남는 장사라는 것이라고 계산기를 두드립니다. 죄의 소욕이 있지만 자기 통제력을 발휘하여 절제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동생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고 대놓고 경멸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성격의 큰아들에게 아버지는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31,3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아버지는 첫째아들이 항상 자신과 함께 있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존재 자체에 가치를 두었으며 마찬가지로 아들도 아버지의 존재 자체로 기뻐하길 원합니다. 그러나 자녀를 키워보면 거짐 일방적인 사랑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존재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본문의 첫째 아들도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전혀 몰랐으며, 그동안 아버지 밑에서 해왔던 자신의 수고와 노력에 대한 보상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아버지를 섬기며 아들로서 누리는 모든 것들에 감사하기 보다는,그저 아버지가 시키신 것에 대하여 의무감으로 감당해 왔던 것입니다.그동안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기보다주인과 품꾼의 관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그의 몸은 비록 집 안에 있었지만 마음으로는 아버지를 떠난 또 다른 탕자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종이 아닌 하나님의 자녀입니다.하나님께서는 의무감에서 비롯한 종의 충성보다 자녀들의 자발적 순종을 원하십니다. 무엇보다 주님은 저희와 함께 계시길 원하고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교제하길 원하십니다. 또 우리 삶에 어떤 문제가 생기면 기도하며 상의하는 저희의 모습을 원하십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용돈 받는 날에만 부모님에게 살갑게 구는 어린아이처럼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저희의 모습 가운데 첫째, 또는 둘째 아들의 모습이 있는지 돌아보고 회개하며, 하나님 아버지와 다시 사랑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기도합니다. 저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누리고, 자녀된 자로서 은혜를 누리고, 맡겨진 일들을 힘써 감당하는 저희들 되기를 기도합니다.
(소감)
결론입니다.
ENFP 둘째아들은 반복되는 일상으로부터 도피하여 화려한 삶을 꿈꾸었지만 결국 방탕한 삶을 살게 됩니다. ISTJ 첫째아들은 책임감 있게 주어진 일상을 묵묵히 감당하였지만 감사와 기쁨이 없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과연 큰 아들더러 동생처럼 살라고 했다면 그러한 삶이 가능했을까요? 마찬가지로 작은 아들도 형 같은 인생을 절대로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아마 이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두 아들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름에 맞게 두 아들을 인격적으로 양육하는 아버지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유형의 MBTI 뿐이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는 나머지 14가지의 MBTI. 즉 모든 유형의 인간을 그 성격에 맞게 품고 섬겨주고 기다려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죄인들을 향한 사랑의 폭과 깊이는 우리가 도저히 헤아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떠한 모습의 죄인이라도, 어떠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도 하나님은 반가이 맞아주시고, 그분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시고, 앞으로도 양육시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결코 행복한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지금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돌아가는 첫발을 떼어 주님의 품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기도합니다.
요절 눅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