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열망을 시작으로
2024. 10.19
18세 이은현
오늘 내가 나누고 싶은 주제는 ‘정의와 좋은 삶’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정의는 무엇이며 좋은 삶은 어떻게 만들어 나가는 것일까? 그 물음의 답은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접근법을 탐구했다. 첫 번째 방식은 정의란 공리나 복지의 극대화, 즉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두 번째 방식은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앞내용 생략) 세 번째 방식은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앞내용 생략) 나는 세 번째 방식을 선호한다' (10장: 정의와 좋은 삶 P 379)
샌델은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을 선호한다고 했고 나또한 그의 생각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앞에서 했던 질문인 좋은 삶은 또 어떻게 만들어 나가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도 정의란 무엇인가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P 380
좋은 삶은 우리 함께 고민하여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샌델은 말한다. 이 방법은 사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준비물 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 다음으로 샌델은 그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는 인간의 목적이라고 했다. 반면 롤스와 칸트는 정의를 행하는 행위자인 인간 자체가 목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도덕적 중요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일까?
어떤 공동체는 이 방법이 맞다고 주장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공동체는 저 방법이 맞다고 주장할 수 있다. 한마디로 다양한 이견들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서로의 방법이 맞다고 우기거나 하면 자칫하면 분쟁으로 번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기지 않으려면 먼저 그 이견들을 기꺼이 수용하라고 샌델은 말한다.
아무리 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그 이견을 수용하고 천천히 천천히 서로의 이견을 하나의 의견으로 만들어 간다면 샌델의 주장처럼 이 모습이 나중에는 문화가 될지도 모른다고 나도 생각한다. 나 또한 이런 모습의 사회를 꿈꾸어 왔었고 지금도 그 모습을 간절히 소망한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나가리란 쉽지 않다는 것을 매번 언론에서 말하는 사회 모습을 통해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IMF 위기를 극복해 냈던 것처럼 이런 힘들 것 같은 정의로운 사회 만들기는 국민들이 공동선, 좋은 삶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시작으로 언젠가는 이루어질 것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