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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전의 아르헴 대교, 프로스트 대대원들
[ 영화, 머나먼 다리 ]
영화 <머나먼 다리(A Bridge Too Far)>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실패로 돌아간 ‘마켓 가든’ 작전을 소재로 한 전쟁 액션물입니다. 전쟁의 광기와 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장대한 서사극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작전이 성공했다면 전쟁이 일찍 끝났겠지만, 결국 예상치 못한 독일군의 출현으로 작전은 실패했고 엄청난 손실을 입었습니다. 기존의 여느 서방 2차 세계대전 배경 영화와는 달리, 연합군도 갖은 오만과 실수 끝에 패배할 수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큰 반향을 얻어내었습니다.
이 영화는 코넬리어스 라이언의 동명 넌픽션을 기반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전후 30년 만에 연합군의 치부를 제대로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큰 화제가 된 작품이었습니다. 그만큼 마켓 가든 작전은 노르망디 교두보 돌파 이후 승리에 도취되었던 연합군과 영국의 몽고메리 원수가 자존심을 완전히 구긴 전투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1977년에 개봉됐는데 당시 개봉명은 <멀고 먼 다리>였습니다. 엄청난 호화 캐스팅을 자랑하는 이 영화는 숀 코너리, 안소니 홉킨스, 진 해크먼, 마이클 케인, 에드워드 폭스, 라이언 오닐, 로버트 레드포드, 로렌스 올리비에 등 기라성같은 출연진들이 놀랍기만 합니다.
이 제목은 영화 마지막 대사에 등장합니다. 너무 큰 희생을 치르고 돌아와 화가 잔뜩 나서 유감을 표하는 숀 코넬리(영국 제1공수사단장 어카트 소장 역)에게 이번 작전을 지휘한 브라우닝 장군이 이렇게 말합니다. “알다시피 우린 너무 먼 다리까지 가려 했소”
한편 참여한 스태프 진용 또한 대단했습니다. <오리엔탈 특급 살인사건>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제프리 언스워드가 촬영을 맡았고, <롤러볼>,<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안소니 깁스가 편집, <올리버>,<닥터 지바고>로 아카데미 2회 수상에 빛나는 테렌스 마쉬가 미술에 참여했습니다. 또한 <채플린>,<섀도우랜드>,<간디>를 만들어 유명해진 리처드 아덴보로가 감독을 맡아 화려한 경력을 보탰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이 불가능했던 시기, 모든 것이 실사로 촬영된 영화인만큼 규모도 엄청났습니다. 위험천만한 봐알강의 도하장면이나, 사상 최대 규모의 공수부대 강하작전 등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1978년 영국 아카데미 3개 부문을 수상 (촬영상, 남우조연상, 사운드트랙상)했습니다.
* 감독 리처드 아텐보로
이 영화를 만든 리처드 아텐보로는 영국의 가장 존경받는 배우이자 감독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캠브리지 대학 학장의 아들로 태어난 아텐보로는 취미삼아 12살부터 영화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의 배우로써 출연한 작품으로는 <마술상자>,<치욕으로 죽은 배>,<이등병의 전진>,<대탈주>,<비오는 날의 음모>,<산 파블로> 등이 있습니다. 또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쥬라기 공원>에서는 끔찍한 재앙 속으로 스스로 발을 들여놓은 백만장자 존 해몬드 역을 연기했으며, 속편에도 출연한 바 있습니다. 그 외에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TV에서 단골처럼 방영하는 <34번가의 기적>과 <엘리자베스>(1998) 등의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풍자적인 반전 코미디 <오, 멋진 전쟁이여!>로 감독 데뷔한 아텐보로는 이후 <젊은 날의 처칠>,<머나먼 다리> 등 서사적이고 스케일이 큰 작품들을 주로 연출해왔습니다.
1982년 아텐보로 감독은 20여년을 가슴 속에 품어왔던 꿈을 실현시키게 되는데, 바로 초대작 전기 영화 <간디>가 그것입니다. 간디의 장례식 한 장면을 위해 30만 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되었을 만큼 엄청난 물량과 인력을 쏟아 부은 이 작품은 아카데미에서 감독상을 비롯해 8개 부문을 휩쓸게 되었습니다.
간디의 일생에 매료된 아텐보로는 <간디를 찾아서>라는 책을 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 간략한 줄거리 ]
1944년 9월 17일, 연합군 제1공수군 예하 영국 제1공수사단, 미군 제82,101공수사단의 3만 5000여 병력이 네덜란드 아인트호벤에서 아른헴에 이르는 지역에 강하하면서 작전이 시작됐습니다. 하지만 초반부터 예기치 않은 여러 난관에 부딪히게 됩니다.
또한 작전 초기 연합군에서 파악한 네덜란드 주둔 독일군 전력이 예상을 깨고 막강했습니다. 당초 2선급 부대로 예상했으나 독일군 최정예 제2친위대 기갑군단 예하의 제9기갑사단과 국방군 소속 제10장갑사단이 네덜란드에 주둔 중이었습니다.
미군 제101공수사단 지역에서는 독일군이 교량 하나를 폭파시켜 지상군의 진격을 지원시켰고, 제82공수사단은 강한 저항에 부딪쳐 네이메겐의 교량을 점령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깊숙히 아른헴에 투입된 영국 1공수사단(3개 여단과 폴란드 제1공수여단)은 사단 주력이 독일군의 전차대에 차단된 채 프로스트 중령이 이끄는 1개 대대만이 아른헴 교량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군의 제82,101 공수부대원들과 힘들게 합류한 영국 제30 군단이 독일군의 공격으로 더 이상 아른헴으로 진격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르면서 영국의 제1공수사단은 적진에 포위당하고 맙니다. 아르헴 대교에 고립된 프로스트의 대대는 탄약과 식량이 떨어져서도 81시간이나 버텼습니다. 그러나 영국 제30군단의 전차들이 아른헴을 10km 남겨둔 작전개시 5일째인 9월 21일 새벽 5시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고전 중인 영국 제1공수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추가로 폴란드 제1공수여단이 적진 한가운데에 용감히 투하됩니다. 그러나 하루 만에 전부대원의 대부분을 잃고 영국 제1공수사단과 합류합니다. 영화에서는 폴란드 제1공수여단을 이끄는 진 핵크만이 낙하산으로 투하되면서 이렇게 외칩니다.
“몽고메리 장군을 용서하소서.” 결국 영국 제1공수사단은, 영국 제30군단과 합류하지 못하고 9월 24일 전달된 작전중단, 전원철수 명령에 따라 9월 25일 밤 야음을 틈타 강을 건너 후퇴합니다.
지나치게 승리를 확신한 영국군 주도의 이 작전은 결국 참혹한 패배로 끝납니다. 몽고메리 장군의 지나친 공명심과 패튼에 대한 경쟁심이 전승분위기의 낙관론과 맞물려 진행된 이 작전은 80km의 진격과 병력 손실뿐 전황에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작전이 종료된 9월 25일까지 투하됐던 영, 미 공수부대의 병력손실은 1만 7000여 명에 달했고 특유의 용맹성으로 붉은 악마라 불리던 영국 제1공수사단은 총병력 1만 5천명 가운데 2천 163명만이 살아 돌아왔습니다.
머나먼 다리라고 불린 아른헴의 교량 하나를 장악하지 못해 마켓 가든 작전은 끝내 실패로 돌아갔으며 결국 제2차 세계대전은 1945년까지 이어지며 많은 희생자를 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 마켓 가든 작전, 제2차 대전 최악의 공수실패 작전 ]
* 마켓가든 작전도
보통 사상최대의 작전 혹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불리는 유럽 대 진공 작전으로 연합군은 유럽 본토인 북프랑스에 드디어 발판을 마련하는 데 성공하게 됩니다. 연합군은 그 기세를 몰아 혼란에 빠진 독일군을 보급이 따라가지 못할 만큼 정신없이 밀어붙여 결국 프랑스를 탈환합니다.
그러나 역전의 독일군은 큰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고 질서정연하게 후퇴해 한창 방어태세가 강화되고 있는 독일의 서부장벽인 지그프리트 라인까지 후퇴, 제대로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하였습니다. 게다가 연합군은 깊숙히 진격하여 독일군을 밀어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만큼 보급선이 길게 늘어지다 보니 일선 부대에 충분한 물자를 제때 공급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 몽고메리 영국군 총사령관
결국 '레드 볼 익스프레스'라는 특급 수송부대를 편성해 엄청난 수의 트럭들로 밤이고 낮이고 보급품을 수송했으나, 결국 연합군의 진격은 더디어지다 네덜란드를 코 앞에 둔 벨기에 땅에서 딱 멈추어 서고 말았습니다. 1944년 9월 초의 상황이었습니다.
북프랑스의 9월 중순이면 날씨가 이미 가을로 접어듭니다. 아침 저녁에는 짙은 안개가 끼고 이따끔 가랑비가 부슬부슬거리는 날씨는 곧 머지않은 겨울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려스러운 것은 독일군이 그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같았던 무질서한 패주를 끝내고 전열을 재정비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안트워프의 함락에 충격을 받은 히틀러가 "더 이상 후퇴를 계속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즉시 목을 매달아 버리겠다"고 공언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는 쿠르트 시투덴트 장군을 벨기에-네델란드 국경으로 파견하여 이 지방을 종횡으로 가로지르고 있는 수많은 운하를 따라 방어거점을 형성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이미 현역에서 물러나 있던 룬트슈테트 원수를 다시 복귀시켜 서부전선 총사령관에 임명했습니다. 연합군 병사들은 멀리 독일군 진영에서 날아오는 포탄의 수가 부쩍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습니다.
* 아이젠하워 연합군 총사령관
하지만 “겨울이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장밋빛 환상은 좀처럼 포기하기 힘든 유혹이었습니다. 9월 10일, 브륏셀에서 아이젠하워와 마주앉은 몽고메리가 난데없이 끄집어 내놓은 게획도 크게 본다면 이런 성급한 조기종전의 욕심에서 빚어낸 산물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즉 현재 2개의 루트를 통해 따로 진격하고 있는 연합군의 전략(남쪽은 패튼이 이끄는 미군, 북쪽은 몽고메리가 이끄는 영연방군)은 안그래도 부족한 보급물자의 효율적인 배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낭비일 뿐 아니라, 지금 독일군은 벨기에를 포기하고 네델란드에 집결하고 있으므로 모든 연합군 부대는 힘을 모아 한 방향으로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이 그의 논리였습니다.
이러한 논리에서 몽고메리가 내놓은 아이디어는 단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면, ‘당시 벨기에 영내 가장 깊숙이 진격중인 영국 제30군단이 위치해 있는 최일선으로부터 약 100km 떨어진 독일-네델란드 구경의 소도시인 <아르헴> 부근에다 3개 사단의 공수부대를 투하시킨다.
* 전술 약도
3개 공수사단이 아르헴까지 교량과 도로를 확보하고 영국 30군단이 고속도로를 뚫어주면
그 뒤를 미국 1군과 나머지 영국군이 독일로 쏟아져 들어간다? 뭐 이런 낙관적인 생각
으로...아직 독일군은 시퍼렇게 살아있을 때였는데...
이 공수부대가 네델란드를 가로지르는 크고 작은 운하에 걸린 총 일곱 개의 다리와 도로를 확보하고, 그 길을 따라 대규모 기갑부대를 진격시킨다면 독일군이 프랑스 국경에 건설해 놓은 견고한 요새 지그프리드 라인을 통과하지 않아도 곧바로 독일 본토의 루르 공업지대로 밀고 들어갈 수 있으며, 해가 다 가기 전에 베를린을 점령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몽고메리가 이런 계획을 털어놓았을 때 연합군 총사령부의 참모들은 거의 기절할 만큼 놀랐습니다.
“네델란드를 거쳐 독일로 들어가자면 오솔길이나 진배없이 좁아터진 외줄기의 국도 한가닥이 있을 뿐이다. 대규모의 기갑부대가 이 허술한 도로를 통해서 베를린까지 마치 ‘결혼식날 신부가 교회당으로 걸어 들어가듯 사뿐사뿐’ 걸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가? 이따위 미친 짓이 성공하리라고 믿는 건 아마도 몽고메리 그 영감뿐일 게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몽고메리 이외에도 이 작전의 환상적인 일면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들이 꽤 만만치 않았던 것입니다. 이미 다 이겨놓은 이 싸움에서 자신이 패튼보다 한발 앞서 승리의 깃발을 움켜쥐겠다는 속셈이 훤히 들여다보였습니다. 그는 끈질기게 아이젠하워에게 속닥거렸고 마침내 아이크도 손을 들어 버렸습니다. 몽고메리의 꼬드김도 있었지만 아이크도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다는 이 방안을 거부하기에는 너무나 달콤했었을 겁니다.
먼저 노르망디 상륙이후 충분한 휴식을 통해 통통하게 살찌워 온 3개 공수사단을 효과적으로 사용해볼 기회라는 유혹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무렵 총사령부 내부를 휩쓸던 들뜬 전승 분위기의 지나친 낙관론이 총사령부전체를 전염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몽고메리는 기상이 악화되거나 독일군이 방비를 강화하기 전에 가급적 빨리 작전을 개시하기를 강력히 주장하여, 9월 17일 일요일 새벽을 그 개시일로 잡았습니다. 작전의 명칭은 <마켓가든>으로 정해졌습니다.
여기서 마켓이란 주요 교량과 도로를 확보하기 위해 먼저 투입되는 공수부대를 뜻합니다. 그리고 가든은 이 길을 따라 네더라인(네델란드를 흐르는 라인강 지류, 이걸 건너면 바로 독일 본토입니다)을 건너게 될 주력 기갑부대를 뜻하는 암호명이었습니다.
맥스웰 테일러 소장의 미국 제101공수사단(별칭:울부짖는 독수리)이 아인트호벤을 점령하고, 제임스 가빈 준장의 미국 82 공수사단(올 아메리칸)이 네이메겐을 점령하여 도로와 교량을 확보합니다. 그러면 역전의 노장 로버트 어카트 소장이 이끄는 영국 제1 공수사단(붉은 악마)이 아르헴에 강하하여 네더라인에 걸린 아르헴 대교를 확보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영국 제30군단의 전차들이 연합군 주력이 독일 영내로 쏟아져 들어 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3개 사단의 공수 병력을 500km나 떨어진 적후방까지 실어나르기 위해 약 4,000대의 글라이더와 수송기, 그리고 1,500대 이상의 호위 전투기가 동원되어야 했습니다.
이것은 노르망디에서의 연합군이 동원했던 것보다 두배가 넘는 거창한 규모인 것입니다. 이런 작전내용이 발표되었을 때, 영국 제1공수군단장인 프레데릭 브라우닝 중장이 몽고메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다리 하나는 너무 멀리 있군요” 그의 손가락이 작전 지역 최북단에 있는 아르헴 대교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머나 먼 다리’라는 이 한마디는 이 작전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위험을 가장 핵심적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장차 다가올 불길한 미래를 암시해 주고 있었지만, 몽고메리는 그 말에 대꾸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군사령관보다 한결 더 신중했던 어느 장교는 이 작전의 개요를 이렇게 함축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한 가닥의 실로 일곱 개의 바늘귀를 단숨에 궤는 것과 같다. 한 개만 실패해도 그것은 곧 전체의 실패를 뜻한다”
최남단의 아인트호벤으로부터 최북단의 아르헴에 이르는 3개 공수사단의 작전지역은 길이가 거의 100km에 달하고 그 노정의 중간 중간에 걸려있는 일곱 개의 다리를 전혀 손상없이 일시에 점령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독일군이 이런 다리 하나를 날려 보내는 데는 한뭉치의 다이나마이트와 수십분의 시간이면 충분했습니다. 이처럼 단 하나만 문제가 생겨도 전차부대의 진격은 바로 거기서 딱 멈추어 버릴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곧바로 작전의 실패를 뜻하는 것입니다.
* 묵살당한 정보
연합군 합동참모 본부가 작전계획을 다듬는데 눈코 뜰새 없이 분주하던 무렵, 좀 심상치 않은 정보가 날아들었습니다. 네델란드 현지의 레지스탕스 대원이 ‘아르헴에서 독일군 전차를 보았다’라는 정보를 보내온 것입니다. 이에 따라 영국 제1공수사단의 정보참모 브라이언 어카트 소령(제1 공수사단장 어카트와는 동명 이인입니다)이 직접 정찰기를 몰고 현지를 다녀왔습니다.
어카트 소령은 독일의 전차가 분명이 나타나 있는 사진을 제시하면서 작전의 중지를 열심히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대번에 묵살 당했습니다. 그의 상관인 브라우닝 중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걱정말아. 고장나서 버려진 전차 한 두 대 쯤은 서부유럽 어디에나 널려있어! 그리고 입 좀 다물게, 몬티(몽고메리)가 가까스로 미군을 설득해서 필요한 장비와 병력을 다 얻어냈는데 자꾸 초치는 소리하지 말아!” 어카트 소령은 참모본부에서 왕따를 당합니다.
* 왼쪽 실제 부라우닝 중장, 오른쪽 영화에서 부라우닝
그리고 그 이튿날 어카트 소령은 휴가명령을 받았습니다. 멀리 쫓아버린 겁니다. 불행히도 어카트 소령의 주장은 사실이었습니다. 이 무렵 러시아 전선에서 용맹을 떨친 바 있는 독일 제2 SS장갑군단 예하의 제9 SS기갑사단과 육군 제10 기갑사단이 전력을 재정비하기 위해 네델란드에 도착한 것입니다. 바로 이들이 주둔한 지역이 바로 아인트호벤과 아르헴을 잇는 마켓가든작전의 주무대였습니다.
* 사상 최대의 공수작전 개시
1944년 9월 17일. 일제히 시동을 건 중폭격기와 전투기, 수송기들의 요란한 엔진폭음이 옥스퍼드 영국 공군기지의 새벽공기를 뒤흔들었습니다. 인류사상 최대의 거대한 항공기의 대군이 도버해협을 완전히 뒤덮고 있었습니다. 3만 5천의 병력, 340문의 포, 그리고 500대가 넘는 차량과 600여 톤에 이르는 군수물자가 하늘을 날기 시작했습니다.
* 영화에서...
아인트호벤 상공에 도달한 미군 제101 공수사단이 가장 먼저 강하를 시작햇습니다. 네이메겐 근교에 강하한 미군 제82공수사단은 강하지점 근처에 있던 독일군 부대의 머리위로 곧장 떨어지는 바람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지만 그들을 격퇴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처럼 미군 부대들은 비교적 성공적인 출발을 기록하고 있었지만, 그 시각 최북단의 적진 깊숙이 비행하고 있던 영국 제1공수사단은 별로 운이 좋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앞에는 좀 더 무서운 운명이 아가리를 벌린 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영국 제1공수사단은 아르헴 철교 주변이 독일군의 대공화기가 밀집되어 있어 최종적으로 결정된 착륙지점은 목표물에서 좌측으로 13km나 떨어진 숲속이었습니다. 이들이 무사히 안착하고 병력을 집결시킨 다음에 그곳으로부터 다리까지 도보로 행군하려면 다섯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습니다. 시간이 생명인 그들에게 다섯시간은 치명적인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 아르헴 지역, DZ LZ는 강하지역, 오스테르베크는 사단 지휘소
아르헴 대교의 점령 임무를 맡은 공수부대 제2대대의 존 프로스트 중령은 낙하하자마자 대열을 급히 정비하여 다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독일 제2 SS 장갑군 사령관 비트리히 장군은 적 공수부대가 아르헴 부근에 낙하한 사실을 접하고 황급히 휘하의 제9 SS기갑사단과 제10기갑사단을 다리 쪽으로 출동시켰습니다.
* 제30군단 기갑부대의 출동
낮 12시 15분. 영국 제30군단장 브라이넌 호록스 중장은 지휘 장갑차의 포탑에서 상반신을 내밀고 명령을 부하 셔먼 전차대에 하달했습니다. “렛츠 고!!” 지축을 울리며 기갑부대는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초기에는 씩씩하게 기갑부대가 진격했지만 그들은 곧 난관에 직면하게 됩니다.
* 영화에서...기갑부대장 호록스 중장(왼쪽,마이클 케인)
네델란드의 도로망이라는 것이 대부분 운하를 따라 형성된 좁은 둑길로서, 이처럼 높다란 제방을 따라 전진하는 전차는 운하 건너편에 도사리고 있는 독일군 대전차포의 좋은 먹이감이 될 뿐이었습니다. 게다가 폭도 좁아서 선두의 전차 한 대가 피격당하면 대열은 일제히 그 자리에서 정지할 수 밖에 없습니다.
호록스 중장의 전차대는 진격을 개시한지 불과 10분도 안되어 9대의 전차가 대전차포에 두들겨 맞으면서 꾸물거리면서 진격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험난한 과정은 앞으로 계속 이어집니다.
* 30군단 기갑부대, 난관을 뚫고...
* 아르헴 대교
오후 4시경, 아르헴 철교로 달려가는 영국 공수부대 앞에 독일 전차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세상에...! 아르헴에 독일전차가 있다는 얘기 들어봤어?” 애초부터 독일군 전차가 있다는 정보를 깡그리 무시한 영국군 총사령부의 실책이 이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르헴 대교까지는 구보로 달려가면 두시간 채 안 걸리는 10km 정도를 남겨두고 공수사단의 제1대대와 제3대대는 독일군 전차대의 출현에 따라 도리없이 시골마을 길옆에 참호를 파고 방어태세로 전환했습니다. 이제 아르헴 대교를 확보하는 임무는 더 남쪽의 우회 도로를 이용하여 꾸준히 진격을 계속하고 있는 존 프로스트 중령의 제2대대에게 짊어 지워졌습니다.
* 프로스트 중령, 오른쪽은 중령 역을 맡은 안소니 홉킨스
프로스트는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종전후 풀려납니다
프로스트 중령의 제2대대는 아르헴 대교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쌍안경으로 다리 위의 적정을 살펴보았습니다. 그의 눈에 다리 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높고 커다란 석조건물 20여채가 들어왔습니다. “아주 전망이 좋은 곳이군! 저기에 대대지휘소를 설치하고 아군전차대를 기다려야겠다.” 약간의 교전 끝에 프로스트 제2대대는 아르헴 북단을 장악하게 됩니다. 어둠이 깃들기 시작한 저녁 무렵이었습니다.
다리 건너편에는 이미 독일 제9 SS기갑사단의 보병들이 황급히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중령을 이렇게 혼자말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48시간만 더 버티면 우리 30군단의 전차들이 도착하겠지.” 이때 아르헴 외곽에서 적의 전차대에 막혀있던 제1대대와 제3대대원들은 흩어져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아르헴 시내를 거쳐 대교로 가고 있었습니다.
* 독일군들
* 당황한 독일군
독일군도 처음에는 당황해서 허둥지둥되면서 혼란에 빠져있었습니다. 멀건 대낮에 낙하산 부대를 수도 없이 떨어뜨리는 모습을 보긴 했지만 연합군이 이렇게 무모한 작전을 벌일 거라곤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태의 본질을 가장 먼저 꿰뚫은 사람은 서부전선 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였습니다. “독일 본토를 공략하기 위한 연합군의 주공이 네델란드에 집중되고 있다.”
독일, 네델란드 국경지대의 모든 독일 기갑부대에 네델란드로 즉각 가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연합군의 시련이 이제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독일군 사령부의 초점이 아르헴 대교로 모아졌습니다. 오직 용감한 1개 대대가 다리 북단에 버티고 있는 영국 제1 공수사단의 작전개시 첫날밤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 독일군 전차부대의 내습
다음날 아침 9시. 프로스트 대대의 한 신참병사가 다리 위를 관찰하다가 이렇게 외쳤습니다. “전차다! 30군단의 전차들이 오고 있다!” 그러자 다른 고참병사가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야! 이 바보야! 저건 독일군 장갑차야! 비상! 비상!” 5대의 독일군 장갑차가 다리 위를 겁도 없이 굴러오고 있었습니다.
* 독일군 전차
공수부대의 로켓포가 날아들었고 장갑차들이 불타오르자 독일군들은 뒷걸음을 치기 시작하면서 다리 위는 순식간에 불타는 장갑차와 시체로 가득 찼습니다. 서전은 프로스트 대대의 승리였습니다. 이 시각 아르헴에서는 시가전이 치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 전차들이 종횡무진 굴러다니면서 대교로 가려고 필사적인 영국 강하병들을 난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아르헴 시가는 온통 난장판이 되어버렸고 일부 병사들 외에는 프로스트 대대가 지키는 아르헴 대교에 도착한 이는 없었습니다. 아르헴 대교를 지키는 프로스트 대대를 구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점점 더 멀어져 갔습니다.
이 시간, 그들이 애타게 기다리는 제30군단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그들은 예정 시간보다 정확히 24시간 초과한 18일 오후에야 아인트호벤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네델란드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북쪽의 쏘온 강변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이 간발의 차이로 다리를 폭파시킨 후였습니다.
미 공수 101사단의 테일러 사단장은 어떻게든 다리를 복구시켜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실패하였고 결국은 중장비를 갖춘 30군단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래저래 북새통을 떠는 동안 또 하룻밤을 속절없이 까먹어 버렸습니다.
* 테일러 사단장
9월 19일 아침.
이틀 밤을 뜬눈으로 새면서 전투를 계속해 온 프로스트 대대의 병사들은 탄약과 식량이 모두 떨어진 상태였지만 그래도 다리 북쪽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습니다. 밝아오는 새벽의 여명 속에 그들이 발견한 것은 다리 건너편 남쪽 강둑에 주욱 늘어선 최신형 독일 전차들이었습니다.
그 때 한명의 독일군이 백기를 들고 다리를 건너왔습니다. 그리고 영어로 소리쳤습니다. "당신들은 완전히 고립되었소! 모두 항복하시오!" 그러자 프로스트 중령이 창가에 나타나 "방금 그 말, 자네 지휘관에게 그대로 전해주게!" 이를 전해들은 독일 하르멜 소장은 다리 북단의 민가를 한 채도 남기지 말고 박살내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 영화에서...독일군 수뇌진, 오른쪽 독일 명배우 맥시밀리안 셀
포격은 무자비하고 냉정했습니다. 판터 전차의 75mm 전차포는 직격탄을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건물들이 문자 그대로 아이스크림처럼 서서히 녹아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프로스트 대대의 종말이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독일군은 다리 북쪽으로 전차를 돌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전날 공격에서 파괴된 독일 장갑차와 시체더미, 각종 쓰레기들이 통행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교 북단은 피투성이가 된 프로스트 대대 장병들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항복만은 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50시간 이싱 한숨도 자지 못하고 전투를 계속해온 대원들은 이제 거의 탈진상태에 이르렀습니다.
20일 새벽, 아르헴 시내에서 전투를 지휘하던 제1공수사단의 어카트 소장은 상부로부터 아르헴 대교를 포기하라는 명령을 전달받았습니다. 30군단이 도저히 시간 내에 대교로 갈 수 없음을 시인한 것입니다. 어카트 소장은 프로스트 중령에게 이렇게 교신을 끝냈습니다. "우리가 그리로 갈 수 없으니 자네들이 이리로 올 수는 없겠나?" 그리고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한 모든 대원들에게 나의 치하를 전해주게. 모두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 어카트 소장, 오른쪽은 어카트 역의 숀 코넬리
* 지옥행 고속도로
밤새도록 작업 끝에 가까스로 쏘온 강에 가교를 설치하고 이것을 건넌 전차들이 네이메겐을 향해 출발한 것은 19일 아침 무렵이었습니다. 30군단은 이미 예정보다 36시간이나 뒤처지고 있었습니다. 네이메겐을 담당하고 있는 82공수사단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었습니다.
* 가빈 사단장
가장 중요한 봐알강의 다리가 아직 독일군의 수중에 있었는데 독일군의 발터 모델 원수가 나중을 생각해서 이 다리의 폭파를 중지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전차부대가 다리를 향해 돌진하는 것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생각이었습니다. 다리 뒤편으로는 대전차포가 빼곡하게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82 공수사단장 제임스 가빈 준장은 강을 건너 협공을 가해 다리를 점령하는 방법밖에는 달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빈 사단장으로부터 260명의 부하를 이끌고 도하작전을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은 줄리언 쿠크 소령은 경사진 북쪽 강둑에 기관총좌로 무장한 빼곡히 들어선 독일군 참호들을 바라보며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봐알강은 강폭이 360m나 되는데 물살이 빨라 도하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양쪽 언덕이 모두 탁 트인 개활지였기 때문에 이쪽의 움직임은 강 건너편에서 낱낱이 관측되고 따라서 기습이 전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습니다.
9월 20일 오후 3시
아군 전투기들이 강 건너 독일군 진지에다 기총소사를 실시하기 시작했지만 기다리고 있던 보트를 실은 트럭은 아직도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보트를 실은 트럭들이 도착했습니다. 대원들은 트럭에서 내린 보트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길이가 약 6m 정도에다 바닥은 얇은 합판, 옆면은 캔버스 천으로 만들어지진 보트란 물건들은 그야말로 소총 한방이면 가라앉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나마 배 한척에 8개씩 달려있던 노마저 사라지고 없어 병사들은 소총의 개머리판으로 노를 저어야 할 판이었습니다.
* 쿠크 소령, 오른쪽은 쿠크 소령역의 로버트 레드포드
그러나 시간이 없었습니다. 낙하산병들은 이런 보트를 들고 강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고 셔먼 전차와 야포들이 강 건너 편을 향해 지원사격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보트들이 물가에 닿는 순간부터 고난이 시작되었습니다. 독일군은 강 건너편 언덕에서 마치 사격연습이나 하듯이 중기관총과 박격포탄을 신나게 쏟아 붓기 시작했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물오리 사냥이었습니다. 지옥과도 같은 시간이 지나고 선두 보트 3~4척이 강의 대안에 닿는 순간 이 죽음의 보트 경주는 끝났습니다. 28척의 보트는 모두 11척으로 줄어들었지만 영국군 공병들은 몇 번을 더 왕복하며 미군들을 봐알강 건너로 실어 날랐습니다.
* 빗발같은 총탄을 뚫고...영화에서...
쿠크 소령은 재빨리 상황을 파악했습니다. 지금이라도 독일군이 다리를 폭파해 버린다면 모든 것이 끝장날 것이라고... 그는 아직도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는 부하들을 이끌고 다리가 있는 상류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와 동시에 다리 남쪽에서 대기하고 있던 30군단 전차들이 치열한 탄막을 펼치며 다리로 진입하기 시작했습니다.
* 탄막을 뚫고...영화에서
악이 받칠 대로 받친 쿠크 소령의 부하들은 악귀들처럼 다리의 독일군에 달려들었습니다. 총 260명의 독일군을 사살하고 봐알강의 다리가 연합군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이제 18km 정도를 남겨두고 있는 아름헴까지의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시간은 오후 7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 프로스트 대대의 최후
아르헴의 전투는 사실상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다리 북단에 남겨진 프로스트 대대의 극소수 생존자들만이 폐허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식량과 탄약이 떨어진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포탄을 쏘아대던 독일군 전차는 사라졌습니다. 네에메겐 다리가 연합군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점한 독일군 전차들이 모두 그리로 달려간 것입니다.
프로스트 중령이 지쳐 쓰러져 있다가 깨어난 것은 그날 저녁 7시. 독일군들이 부상병들을 넘겨주면 치료해 주겠다는 전갈이 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웬일인지 전에 없이 신사적인 신호를 보내온 독일군이었습니다. 모르핀도 모두 떨어진 지금 상태에선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양측이 휴전을 한 다음 백기를 들고 다리를 건너 온 독일군 위생병들은 영국군들의 피투성이 몰골의 처참한 모습에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 영화에서 프로스트 중령
* 저 멀리 다리 위에 항복을 촉구하는 독일 병사가 보입니다
한 독일군 장교가 프로스트 중령에게 담배를 권하며 "당신들 참으로 대단하오. 나는 스탈린그라드에서도 싸워봤지만 당신들의 용기는 대단히 존경스럽소" 영국군 부상병들을 모두 실어 나른 독일군들은 살아있는 영국군들을 그대로 놔두고 멀찌기 철수해버렸습니다.
어차피 탄약도 떨어진 그들을 마지막까지 청소할 생각은 없었던 겁니다. 그들은 영국군의 마지막 송신 내용을 감청하고 있었습니다. "탄약이 떨어졌다....신이여, 국왕을 보호하소서"라는... 유일하게 목표지점에 도달했던 프로스트 대대는 나머지는 죽거나 포로가 되면서 아르헴 대교의 전투는 끝나버렸습니다. 프로스트 대대원중 1명만이 본대로 귀대했습니다.
* 통한의 눈물
1944년 9월 21일 오전 11시
제30군단 선두의 전차들은 아르헴을 10km 정도 남겨둔 지점까지 접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갈수록 태산이었습니다. 아르헴에 가까워질수록 도로사정은 점점 더 나빠져서 전차 한 대가 간신히 통과할만한 높다란 제방길이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독일군들은 대전차포를 끌어다 놓고 한 대 한 대 물오리 사냥하듯 맞추기 시작했습니다. 순식간에 전차 4대가 불타올랐고 대열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습니다.
갖은 수단을 다 써보았지만 뚝길을 가로막은 전차의 잔해를 치워낼 도리가 없었습니다. 지난 사흘간 온갖 역경을 뚫고 달려왔지만 종점을 10km 남짓 앞두고 진격을 멈출 수 밖에 없었습니다.
* 영화에서...
* 포위당한 영국 공수사단의 지휘소
아르헴 전투의 무대는 이제 제1 공수사단의 지휘소가 설치된 아르헴 시내의 하르덴슈타인 호텔로 옮겨와 있었습니다. 호텔은 부상자가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두 번에 걸쳐 아르헴에 공수된 1만 5천여 명의 병력 중에서 살아있는 병력은 3,000 명이 되지 않았습니다. 물자도 거의 바닥이 나 있었습니다.
* 영화에서...
반면에 독일군은 모든 것이 넉넉했습니다. 영국군의 방어구역이 손바닥만하게 줄어들었기 때문에 연합군 수송기가 낙하산으로 투하하는 모든 보급물자가 모두 그들의 차지가 되었던 것입니다. 독일군의 발트 중령은 이렇게 회상합니다. "모든 것이 공짜였다. 우리는 미국제 담배를 피워가며 영국제 기관총으로 그들을 사정없이 밀어붙였다."
* 으~음 맛 좋다!! 연합군으로부터 보급받은 담배와 포도주를 즐기고 있는 독일군들
* 폴란드 소사보호스키 소장
그는 작전에 관하여 투덜거리다가 전투가 끝난후
미운털이 박혀 좌천됩니다.
* 소사보호스키 역의 진 해크먼
이날 오후 소사보호스키 소장이 이끄는 1,000명의 폴란드 제1공수여단이 추가로 공수되어 왔습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그들은 지난 19일에 투입되어 아르헴 시내의 수비를 지원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게 뒤틀려 버린 상황으로 인해 출격은 자꾸만 연기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의 임무는 붉은 악마(영국 제11 공수사단)의 잔존병력을 구출하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최전선 100km 밖에 고립되어 적 전차들의 강철 캐터필러에 짓뭉개진 우군을 구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소사보흐스키 장군이 중얼거렸습니다.
“우리더러 그곳에 가서 함께 죽으라는 얘기로군. 하지만 지금까지 먹여주고 입혀준 신세를 갚자면 하라는대로 해야지 어쩌겠나...” 그는 이 작전이 끝난 후 몽고메리한테 미운털이 박히면서 하급부대로 좌천되고 말았습니다.
* 필사의 탈출
1944년 9월 25일 새벽 7시. 어카트 소장은 전원 퇴각이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전날밤 영국군 총사령부가 총 퇴각 결정을 내렸던 겁니다. 이틀이면 충분하다는 몽고메리의 약속으로부터 6일이 지났고, 3개 공수사단이 최대한으로 버틸 수 있다고 계산했던 4일의 딱 두 배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탈출로는 단 하나뿐, 즉 네더라인 강을 건너 드릴에 집결 한 후 미국 82공수사단이 확보하고 있는 네이메겐으로 철수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자동차를 이용하여 8일전에 30군단이 출발하였던 벨기에-네델란드 국경까지 이동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방 9시 정각
드릴 외곽에 집결한 30군단의 중포들이 내뿜는 섬광이 밤을 밝힌 가운데 철수작전이 개시되었습니다. 병사들은 부상당한 전우들이 누워 있는 지하실로 내려가 흐느낌 속에 작별을 고하였습니다. 네더라인 강가에 대기하고 있던 캐나다군 공병대가 허술한 보트 몇 척으로 병사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하지만 철수작전을 눈치 챈 독일군의 포탄이 사정없이 날아들었습니다.
많은 병사들이 철모와 총을 내던지고 강으로 뛰어들어 헤엄쳐 건너기도 했습니다. 철수작전은 쏟아지는 비바람 속에 밤새도록 계속되었습니다.
* 영화에서...아까운 부하들을 떼죽음을 시키고 돌아온 영국 제1공수사단장 어카드 소장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그는 이따위 엉터리 작전을 입안한 참모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겠다고...
* 처참한 실패
몽고메리는 이 작전을 90% 이상 목적을 달성한 성공작이라고 터무니없는 억지를 부렸습니다. 이 작전에서 영,미 연합공수부대의 손실은 17,000명에 달했고, 그 중에서도 아르헴에 투입된 영국 제1공수사단 15,000 명중 살아 돌아온 사람은 단지 2,163명 뿐이었습니다.
이틀이면 충분하다고 했던 아르헴의 교두보를 그들은 8일 동안이나 지켜내었지만, 그 결과 영국 제1공수사단은 문자 그대로 녹아 없어져 버렸습니다. 몽고메리는 "주요 목표물은 대부분 점령되었다"고 강변하였지만 아르헴이 빠진 다른 목표들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 엄청난 희생의 댓가로 얻어진 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80km의 제방길 뿐이었습니다. 전쟁은 그 다음 해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마켓가든>이라는 이름은 제2차대전 기간을 통해 연합군이 기록한 가장 비참한 실패작전으로써 역사에 그 이름이 남게 되었습니다.
마켓가든 작전의 실패는 연합군 최고 사령부의 서두름과 자만심이 거둔 비참한 결과였습니다. 전시적 성과주의에 집착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위험 요소들을 너무나 가볍게 무시한 대가가 너무나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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