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이 몰려온다 7-4
이런 사실은 정부의 관리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특히 천주교를 박해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관리들에게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그 가운데의 한 사람이 홍낙안이었다. 홍낙안은 천주교 박해파의 선 봉장이었다. 그는 신해 년에 진산사건이 일어나자 공서파의 선봉에 서서 신주를 불사른 윤지충과 권상연을 고발하는 장문의 편지를 영의정 채제공에게 올렸다. 그리고 진산 군수인 신서원에게 이들을 신문하여 엄중처벌 하라는 편지를 썼다.
『귀하께서 다스리는 경내에 권, 윤, 양가의 일이 시끄럽게 발생하고 있다합니다. 가을 들어서 누가 이 말을 전하기에 그냥 넘기려 했으나 묵과할 수가 없어서 몇 자 적습니다. 신주를 불태우고 조상 제사를 폐한 일이란 지극히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해독은 임금을 죽인 시역의 죄보다 더 흉측한즉 이를 묵과하면 이에 따를 사람들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동방의 예의의 나라인데 그 땅이 오랑캐나 짐승의 땅으로 되는 것을 앉아서 보겠습니까.』 하고 그들을 잡아 처형하는 일에 용단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편지를 받은 진산 군수 신서원은 윤지충과 권상연을 신문했다. 신서원은 처음부터 윤지충과 권상연을 벌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학문적인 총명함을 높이 사서였고 아까운 선비를 내심 살려주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신서원은 윤지충의 배교하겠다는 말 한마디를 기대했었다. 그러나 당당한 윤지충의 답변에 어쩔 수가 없었다. 「아깝다. 내가 너를 살려 줄 힘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너의 총명함이 스스로 죽음을 재촉하는 알 수 없구나.」 신서원은 속으로 탄식했다. 그리고 곰곰이 생각했다. 도대체 천주학이 무엇이길래 저런 아까운 인재를 병들게 하는가 알 수가 없었다. 신서원은 다시 한번 윤지충에게, 「마음을 돌릴 수 없는가?」 하고 물었다. 「돌릴 수 없습니다. 천주님의 편에 서겠습니다. 귀하도 현세의 행복보다는 천주님을 믿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십시오.」
신서원은 신문을 중단했다. 더 어쩔 수가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윤지충과 교리문제를 따져봐야 소득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신서원은 윤지충의 일을 홍낙안에게 편지 형식으로 보고를 했다.
『금년 6월 사이에 처음으로 시골사람들 사이에 이런 말이 들렸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수재로 인해 백성들의 고통을 구제하는 데 골몰하 느라 살피지를 못했습니다. 가을로 접어들면서 전하는 말이 자못 번성 하여 비로소 제 귀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인간윤리 바깥의 일이기 때문에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날달 중순 일이 참말이라는 것을 전하는 사람이 있어서 비로소 서울에 알렸습니다.그리고 곧 이를 성토하려 했으나 수 백 년 내려온 양반의 집안에 이런 패륜한 사람이 나왔기 때문에 경솔히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형께서 가르쳐 주시니 부끄럽고 부끄럽습니다. 이제는 법 이외에 다른 생각이 없으니 생각이 구구합니다.』 하여 법대로 처단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신서원은 홍낙안에게 다른 편지를 따로 보냈다. 천주교인들을 잡아넣으려면 천주교를 믿지 말라는 또 다른 설득력 있는 학문으로써 이를 말려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제가 예산에 있을 때 일찍이 윤지충 등이 읽었던 책을 한 조목씩 분석해가며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젊은이들이 이런 책을 읽으면 안 된다는 설득력 있는 학설을 만들고 싶었으나 문사가 쉽고 졸렬하여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형께서는 나이도 젊고 도의 이치에도 틀림없이 강한 것이 있을 것이니 한 조목씩 분석하여 그것으로 우매함을 부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이렇게 제안하고 이어서,
『우리 형께서 그 책들을 이른바 구문 밖의 총명하고 재주 있는 선비 들에게 그 잘못을 지적하고 해부하여 또 다른 책을 만든다면 이단을 벽파하고 바른 도를 심는 데 큰 도움이 될텐데 형의 뜻은 어떠십니까? 이단을 공략하는 일은 마치 강한 적을 부수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적을 파괴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적에 관한 정보와 그 허실을 다 안 후에 감당해 이기고 성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서양서적에 유혹된 사람을 벽파하려면 우리 역시 그들이 유혹되는 이유를 안 연후라야 가능할 것입니다. 형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1791년 10월 26일 진산 관아에 자수한 윤지충과 권상연은 그날 저녁부터 신서원의 신문을 받고 10월 29일에는 전라 감영이 있는 전주로 압송이 되었다. 거기서 신문을 받은 뒤 1791년 11월 13일 오후 3시 목이 잘려 순교했다. 윤지충은 33세, 권상면은 41세였다. 윤지충은 10월 26일 자수하여 전주 감영으로 옮겨 신문을 받는 동안의 일을 일기로 기록했는데 그것이「윤지충 일기」이다. 본래 한문으로 기록된 것인데 나중에 한글로 번역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한문본이나 한글본 무둔 전해지지 않고 불어로 번역된 것이 달레의「한국천주교회사」속에 전해질 뿐이다.
진산사건의 여파는 전국에 걸쳐 파급되었다. 사학을 뿌리 채 뽑는 일은 사학에 관계된 책을 없애는 것이 최선이라는 데 주안점을 둔 임금은 서울은 20일 내에, 각 도는 명령이 하달되는 대로 20일로 한정하되 집에 감추었던 것을 관에 알려 불태우게 하고 만일 숨겨 두었던 것이 탄로가 난다면 법률로써 처단한다고 알렸다. 또 이를 묵인하면 그 수령도 연금을 당할 것이라고 포고했다.
전국에서는 고발사태가 벌어졌다.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의 뒤를 캐기도 하고 집에 들러 수상한 책이 없나 염탐을 하는 등, 이 일로 처음 유항검이 고발되었다. 유항검을 고발한 사람은 한영필이었는데 그는, 「전주에 사는 유항검의 집에서 서학에 관한 책자 두 권을 빌려 왔는데 나중에 그것이 보아서는 안 될 책이란 걸 알고 가져왔습니다.」 하며 책을 관가에 바쳤다. 한영필은 유항검의 인척이었다. 전주부에 사는 유중태라는 사람도 유항검을 고발해왔다. 그는 유항 검의 오촌 조카였다. 「저의 오촌 숙부 항검 집에 놀러갔다가 서학책이 있는 것을 보고 대신 갖다 바칩니다. 마침 오촌 숙부는 출타 중이었습니다.」 하며 책을 가져왔다. 유항검은 이 고발에 따라 자수를 했다. 그러나 양반인 관계로 그는 훈계만 듣고 방면되었다. 물론 자술서를 썼지만 그것은 속마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나중 신유년(1801)에 다시 붙잡혀 돈을 갹출하여 서양 선박을 청해오게 했다는 혐의로 처형되었다. 천주교 신자를 잡기 위해 눈에 쌍불을 켜고 다니던 홍낙안은 마침내 권철신의 약점을 포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그는 권철신을 좌의정 채제공에게 장서(長書)를 써서 고발했다. 「권철신 일당은 부모의 신주를 땅에 묻고 그 아비와 조부의 제사를 폐한 불효막심한 놈들입니다.」
같은 날 진사 성영우 등 20여명이 연명으로 태학(太學)에 통문(通 文)을 보냈고 진사 최조는 이후, 성영우, 최정중 등과 연명으로 아는 벗들에게 역시 통문을 보냈다. 또 10월 1일에는 진사 목인규가 최조, 성영우, 강이원, 최정중, 강준흠 등과 함께 통문을 보내 천주교를 이단으로 배척, 이들을 성토했다. 그리고 이들의 교주로 권일신을 고발했다. 그들은 통문에서, 『교주로 자처하며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스럽게 여기는 자가 있으니 권일신이 그런 사람이다.』 라고 썼다.
진산사건을 계기로 권일신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고발을 당했다. 그 만큼 그는 학자로서의 권위가 있었던 만큼 적이 많았던 것이다. 홍낙안, 이기경, 성영우, 강이원, 강준흠, 목인규 등은 모두 남인이었다. 그들이 권일신, 윤지충, 권상연 등을 천주교인으로 고발, 배척한 것은 다른 뜻이 있었다. 물론 유학을 옹호하려는 측면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분이었다. 조그만 사감과 질투, 시기심의 발로였다. 권일신 등의 뛰어난 학문을 그들은 속으로 시기했던 것이다. 이기경은 한때 남인계의 이승훈, 정약용 등과 교유하며 서학서를 즐겨 읽었던 자이다. 그런데 1787년 이른바 정미반회사(丁未泮會事)가 일어났다. 정미반회사란 1787년 정미년 10월경에 이승훈, 정약용 등이 반촌,지금의 혜화동에서 천주교 서적을 읽고 연구하는 것을 목격하고 성토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을 처음 발설한 사람은 이기경이었다. 그는 이 승훈, 정약용 등과 친하게 지냈었다. 그들과 함께 서학책을 보는 동지 였었는데 어떤 이유로 갈라지게 되였다. 그는 반촌의 김석태란 사람의 집에 들렸다가 이승훈, 정약용 등이 천주학 책을 보고 있는 것을 목격, 서학 배척론자인 홍낙안에게 일러바쳤다.
「나라에서 금하는 서학책을 아직도 보고 있는 놈들이 있습니다. 명색이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이 ‥‥」 깜짝 놀란 홍낙안은 그게 누구냐고 했다. 「이승훈과 정약용이올시다.」 「그들과는 친구 사이가 아니오.」 「저와는 갈라선지 오래입니다.」 홍낙안은 즉시 이를 왕에게 알렸고 그들을 엄하게 벌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당장 박해가 내려지지는 않았다. 그 이후, 선비들의 상소하는 글이 조정에 시끄럽게 난무했다. 천주교는 임금도 모르고 부모도 모르는 사교라고 단정하는 데 많은 사람들이 가담했다는 사실이다.
정미년 겨울이었다. 이승훈과 정약용, 그리고 몇몇 젊은이들이 반촌의 김석태 집에 모였다. 그들은 주기적으로 교리를 공부하고 성서를 토의하는중 이였다. 그 장소에 우연히 이기경이 참석하게 되었다. 이기경은 그 전에도 가끔씩 이들 모임에 참석했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말이 임금에게까지 들어가게 된 것이다. 분명히 이기경이 한 짓이였다. 이기경과 이승훈, 그리고 정약용 등은 그 일로 인해 크게 의를 상했다. 정약용은 반회사건을 고자질한 이기경을 만나지 않고 편지로써 섭섭한 심정을 토로했다.
『요즘 나는 잠을 못 이루고 있소. 그것은 물론 나의 잘못이지만 형 (이기경)도 잘했다고는 볼 수가 없소. 사람을 믿은 것이 잘못이오. 제 제(弟)는 달리 생각을 하게 했소. 우리가 그동안 천주학을 논하고 친밀하게 지내왔는데 형은 사람이 급변하여 마치 다른 사람처럼 행동 하고 또 한때의 친구를 고발하니 섭섭하오.』
이기경 역시 정약용에게 답신을 보내왔다. 이기경은 성격이 조급하 편협한 사람이지만 머리는 좋은 사람이었다. 또 출세에 대한 강한 집념이 있었다. 그는 편지에서 천주학이 그릇됐다는 것을 나름대로 지적했다.
『제(弟)가 형들에게 말한 것을 해명하겠소. 만일 이 일로 저에게 화를 낸다면 마땅히 달게 받겠소. 나는 천주학에 대한 그릇된 것을 지적 했을 뿐이오. 이 학설은 정도(正道)가 아니라 마도(魔道)이며 요술이라고 했고 앞으로는 이런 학설을 하지 말라고 충고조로 했을 뿐이오. 이런 학문을 하는 사람을 눈감아 둘 수 없어서 알렸을 뿐이지 별다른 뜻은 없었소,』
이기경은 답신에서 자신을 변명했다. 정약용 등을 고발하지 않고 충 고만 했을 뿐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이들의 우정은 갈라졌다. 이기경은 그 후 틈틈이 정약용, 이승훈 등 과거의 동료들의 행동을 감시했고 틈만 있으면 고발했다. 또 벽위편이라는 글을 써 유교를 보호하는 데 앞장을 서기도 했다. 한편 권일신은 여러 사람으로부터 고발을 당했다. 마침내 형조에 넘겨진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았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한때 김 범우와 함께 잡히는 몸이 됐으나 사대부 집안이라해서 훈방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달랐다. 진산사건은 앞서의 추조 적발 사건과는 사건의 크기부터가 달랐다. 워낙 강경한 학자들의 주장 때문에 그는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형조에서 그는 심한 고문과 회유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하늘과 땅과 천신과 사람을 창조하신 천주를 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엇을 준다고 해도 나는 그분을 배반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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