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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8장 51~59절/믿음과 순종의 사람
이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대인들과 벌인 논쟁의 마지막에 왔습니다. 문제는 예수가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25, 53). 예수님께서는 51절에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은 다시 유대인들을 경악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위대한 조상인 아브라함과 어떤 선지자들도 이렇게 말한 사람은 없었을 뿐 아니라 그들 모두가 죽었기 때문입니다(52~53).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영적 죽음, 하나님과 완전히 단절되는 것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죽음의 문제는 11장에서 깊이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여하튼 예수님의 이 말씀이 유대인들로 하여금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3절) 묻게 만들었습니다. 이 말은 너는 누구냐는 직설적 질문이라기보다는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53절)” 라고 비아냥거리는 말입니다. 그들은 또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 보다 크냐?(53절)” 하고 도전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위대한 사람은 아브라함과 모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브라함과 모세의 권위를 가지고 나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신앙에 대해서 매우 인상적인 해석을 하심으로써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를 나타내십니다.1. 아브라함과 그의 행사 그리고 믿음(39~40)앞에서 예수님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게 39~40절에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한 일을 할 것이거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행한 일을 하라고 하신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아브라함이 무슨 일을 하였다는 것입니까?1) 아브라함은 “그리스도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였습니다.(56)예수님께서는 56절에서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무슨 뜻으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셨던 예수님께서는 지금 아브라함 자신에 대해서, 그의 신앙에 대해서 가장 권위 있는 판단을 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그것은 가장 정확무오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어떤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일까요? 많은 학자들이 이 구절에 대해서 연구를 했습니다. 혹자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자손을 약속하셨을 때, 아브라함이 그 약속의 의미가 메시야였음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이는 아브라함이 비록 죽었지만, 지금 낙원에서 메시야를 보고 기뻐하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적잖은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99세 때에 나타나셔서 아들을 약속하셨을 때 웃었던 것은(창 17:17) 불신의 웃음이 아니라 믿었기 때문에 기뻐서 웃은 것이며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이 믿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저도 역시 예수님께서 주신 이 말씀의 의미가 과연 무슨 의미인가? 다른 가능성은 무엇인가를 묵상하고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훨씬 더 타당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바치려고 했던 바로 그 사건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아브라함의 생애에 있어서 이 사건이야말로 그의 믿음의 절정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히브리서 11장 17~19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성령께서 히브리서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바로 같은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제물이 어디 있느냐는 이삭의 질문에 대해서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시리라”라고 대답했습니다(창 22:8). 이것이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그가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지만,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위에 올려놓았지만 그가 믿고 그가 기대한 대로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번제할 어린 양은 없었습니다. 그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믿음과 기대가 깨어질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시험을 받을 때’였습니다. 그는 칼을 들었고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향해서 칼을 내리치려고 했습니다. 그때 여호와의 사자가 급하게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창세기 22장 11~12절에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 것은 바로 그 때였습니다. 그는 한 숫양이 뿔이 수풀이 걸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가 믿은 대로였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 이상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삭을 자신이 번제로 드린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실 수 있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었다는 것입니다.(히11;19) 실로 아브라함은 자기의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죽은데서 다시 돌려받은 셈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56절)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성장하고 깊어지면서 점점 오실 그리스도께 초점을 맞추어가고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씨는 궁극적으로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75세에 부름을 받아서 100세에 아들을 낳기까지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단련해 가시는 가운데 점점 그의 믿음의 초점은 분명해져갔습니다. 그 초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아브라함의 고백이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준비하시리라.”(창22;8)입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믿음이 나온 것입니까? 성경 전체에 나오는 어떤 고백과도 비교할 수 없는 깨끗하고 투명하며 메시야 신앙, 그리스도 신앙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고백입니다. 그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구약의 모든 진정한 성도들은, 특별히 모세의 율법 아래에서 드러난 제사제도 가운데 살아간 모든 참 성도들은 그들이 드리는 짐승 제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습니다. 짐승의 피를 흘린다고 해서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라고 어리석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완전하게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더 값비싼 피가 흘려져야만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어린 양을 준비하실 것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믿음의 내용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그의 믿음이었고, 소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것이 꼭 자기의 시간표와 자기의 방식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드린 후에라도 하나님이 다시 살리실 것이고, 그리고 어린 양, 하나님이 공급하신 완전한 제물인 어린 양을 드리게 될 것을 간절히 바라보았습니다. 그 간절함이 어떠했겠습니까? 과연 누가 그 아버지의 간절함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할 일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었기 때문에, 어린 양을 주실 것을 알고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아브라함이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아들 이삭을 결박하고 그 아들을 단 위에 올려놓고 이제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고 하는 숨 막히는 순간이 더해갈수록 하나님이 제공해주실 제물인 어린 양에 대한 간절함은 더해갔고 믿음도 더해갔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그의 절대적 믿음의 결과가 아브라함이 실제로 아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명하신 일을 순종했다는 사실에서 나타납니다. 그리고는 최절정의 위기의 순간에 아브라함은 하늘에서 여호와의 사자의 음성을 듣게 될 뿐 아니라, 눈을 들어 살펴보니 뿔이 수풀에 걸려있는 숫양을 목격한 것입니다. 이 순간의 아브라함의 기쁨을 누가 감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믿음의 순종을 드려보지 않은 자가 어찌 아브라함을 이해한다고 하겠습니까? 그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어린 양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아브라함이 그때 본 것은 단순히 숫양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 제공해주신 영원한 속죄 제물이신 그리스도 자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의 절정에서 하나님은 그로 하여금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 자신을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순종을 놀랍게 보여준 아브라함에게 다시 약속의 씨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창세기 22장 17~18절에 “네 씨가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물론 이 약속은 메시야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완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의 믿음이야말로 신약의 사도들이 전했던 믿음이었고, 종교 개혁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 Solus Christus 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은 바울 사도가 성령의 영감으로 로마서를 기록할 때, 언급한 믿음인데,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롬 4:18)라는 말씀과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의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롬 4:19~25).”믿음은 바로 이런 것이라고 바울 사도는 설명합니다. 모든 상황이 자기 생각이나 계획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때에도 그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믿음이 견고해졌습니다. 그리고 영광의 날에 그것을 이루실 것을 또한 압니다. 이것이 창세기 22장이 보여주는 아브라함의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창세기 22장의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는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하나님은 어린 양으로 대표되는 메시야 보기를 열망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의 이 기쁨과 즐거움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그는 보기를 소망하면서 즐거워한 것만이 아니라, 보고서 기뻐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말씀은 창세기 22장에서 아들을 바쳐야하는 그러면서도 믿음과 소망을 놓치지 않은 믿음의 영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이 그리스도? 메시야?를 간절히 대망했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그의 신앙이었습니다.2. 영원하신 하나님이신 그리스도이런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은 당혹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57절) 하고 물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담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1)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58; 출 3:14; 사 41:4; 43:10)예수님의 이 선언에 대해서 탁월한 요한복음 주석을 쓴 Raymond Brown 은 “복음서의 전통에서 신성에 대한 이보다 더 분명한 함축은 찾아볼 수 없다”고 그 의미를 설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선언을 통해서 “나는 여호와 하나님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용법은 ‘I AM’ 이라는 말로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가서 누가 나를 보냈다고 설명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냈다”고 대답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영어로 “‘I AM’이 나를 너에게 보냈다(I AM has sent me to you)”는 말입니다. 여기 ‘스스로 있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은 여호와의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 라고 과거시제를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하나님도, 현재의 하나님도, 미래의 하나님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현재이시며, 언제나 동일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I AM THAT I AM’이라고 표현한 것이고, 예수님은 자신을 가리켜 ‘I AM’이라고 하심으로써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얼마나 놀라운 선언입니까? 유대인들이 ‘네가 누구냐’고 도전하는 예수님은 바로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이십니다.예수님은 자신이 스스로를 영화롭게 해야 할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형상을 입고 비천하게 낮아지시기를 자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낮아지셔야 했습니다. 그러면 성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54절에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거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방식인 자화자찬하는 방식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을 알고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고 말씀하십니다(55). 철저하게 낮아지신 그리스도. 그는 하나님의 본체이시지만, 스스로 비워 낮아지셨고 성부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구하고 순종하여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하는 방식을 너무나 잘 보여주시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셨지만, 철저하게 낮아지셨습니다.3. 유대인들의 반응1) 돌을 들어 치라(59절)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은 돌을 들어 예수님을 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59). 왜 그랬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의미를 너무나 잘 알아들었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자신을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은 신성모독이었습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사실 수동태로 되어 있는 말인데, “예수께서 숨기어져 성전에서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숨기셨습니다. 돌을 든 유대인들의 눈에서 예수님이 보이지 않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초막절이 끝나면서 성전에서 나가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숨기셨다는 것은 너무나 슬픈 일입니다. 이것은 비극입니다. 예수님이 숨겨지고 성전에서 나가셨습니다. 초막절 절기를 지키면서 자신들은 하나님께 감사 절기를 지킨다고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에서 나가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눈에 예수님이 밝히 드러나는 것보다 더 귀한 축복과 은혜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과 함께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2)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아브라함처럼 행하라 말씀합니다.(39절, 56절)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을 갖고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처럼 행하라”(39절) 그런데 너희는 아브라함처럼 행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예수님이 성육신하기 2000년 전의 사람입니다. 그는 멀리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고 그리스도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했습니다.(56절)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양으로 이삭을 대신하는 것은 너무나 큰 기쁨이었을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죽을 수밖에 없는 모든 죄인들의 간절히 고대하는 바요, 절박한 소망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리스도를 멀리서 보고 사랑했고 기다렸습니다.
56절에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너희와 같이 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말씀합니다. 여러분이 믿는 사람이라면, 거듭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자녀라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믿음을 따라 아브라함처럼 행하십시오. 아브라함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지상의 모든 존귀보다 위에 두고 사십니까? 어떤 환경에도 불구하고, 내 조건을 달지 않고, 아니 내 모든 조건의 최저선이 다 붕괴될지라도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아브라함은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았었고 결국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숫양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보았습니다. 그의 상황,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죽음에 내모는 상황에서조차도 그의 믿음은 약하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견고해졌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십니까?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러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에 소망을 두고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십니까? 그것이 여러분의 최고의 기쁨이며 소망이라고 고백하십니까? 이것이 바로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보여주어야 할 아브라함의 행사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복된 은혜를 더하여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사 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