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function findObj(n, d) { //v4.0
var p,i,x; if(!d) d=document; if((p=n.indexOf("?"))>0&&parent.frames.length) {
d=parent.frames[n.substring(p+1)].document; n=n.substring(0,p);}
if(!(x=d[n])&&d.all) x=d.all[n]; for (i=0;!x&&i
 |
2 |
|
View Articles |
|
 |
 Name |
|
 |
Subject |
 강준만 교수님께 해명합니다 |
 |
 |
강준만 교수님께 해명합니다
저는 [인물과 사상] 11권(2,000년)을 통해, 손숙, 장명수 등 저와 함께 그 책의 도마(?)에 오른 다른 인물들에 비해, 교수님으로부터 너무나 과분한 대접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후 교수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수님을 한번도 뵌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게 주신 그 선물로 인해 주위의 많은 분들로부터 항의를 받으시는 군요.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우연한 기회에 2002년10월18일에 발간됐다는 [인물과 사상] 제24권에 “우익 스타 지만원이 던져준 딜레마”라는 교수님의 또 다른 글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소제목으로는 “지만원은 과연 언제나 변함없는 극우였나?”, “한나라당 의원 김문수는 변절했나”, “지만원의 엽기적인 모습”, “월간 말과 한겨레도 환영했던 지만원”, “이문열식 음모에 대항해야”, “지만원의 해명을 요구한다” 등이 들어 있었습니다.
많은 노력을 들여 20쪽을 써 내려가신 글을 읽으면서 “지만원은 적당히 명성을 얻기 위해 한 다리 걸친 그런 사람이 아니라 진짜 이타주의자이다”, "그에게는 정열이 있다" 등 아직도 저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의 말씀이 담겨져 있을 뿐만 아니라 전체적 맥락으로 보아 저를 폄하하려는 글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습니다. "옛날에 지만원이 우익매체와 좌익매체 모두로부터 환영받을 수 있었던 것은 논리적인 시스템 이론 때문"이라고까지 추어주셨는데 이제는 엽기적인 말을 쏟아내고 있다는 말씀도 들어 있었습니다.
엽기적인 글의 표본으로는 “지만원씨의 노근리 학살 정당화; 미군의 목숨은 중요하지 않은가”(2002, 한겨레21), “베트남 학살은 꾸며낸 소설 주장”(2000, 경향신문), “경제는 어려운데 DJ 마음은 북한에, 지만원씨 홈페이지에 김대통령 퇴진 글 파문(2000, 국민일보), ”미국에 들켜버린 김정일.DJ의 음모(2001, 한국논단) 등의 글을 들면서 “이런 제목의 글들은 극히 일부나마 옮기기에도 너무 끔찍하다. 이건 의심할 나위 없는 명백한 명예훼손이다. 나는 지만원과 이도형이 제소 당하기를 원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한다. . . 내가 이 글을 다시 옮기면 그들을 도와주는 일이 되기 때문에 여기에 옮기지 않겠다”는 요지의 글도 있군요.
이어서 1997년 대선 유세에서 각 후보가 발표한 통일 정책 중에서 김대중의 통일정책이 비교적 균형감을 가졌다고 평가하던 지만원이 이제는 김대중을 비판하고 있으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도 있었고, 주위 사람들이 지만원을 극우라 비난하는 것을 강 교수님이 나서서 지만원은 극우가 아니라고 말씀해주셨는데 어째서 지금은 엽기적인 극우로 변신했느냐, [좌익세력의 최후 발악을 경계한다]는 광고비는 어디에서 나왔느냐, 등에 대해 해명해 달라는 부탁의 말슴도 있었습니다. 해 명
(광고비는 어디에서 났는가에 대해)
우선 해명하기 쉬운 광고비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광고비는 2,000만원 미만입니다. 이 광고비는 시스템클럽 홈페이지 통장에, 네티즌들께서 십시일반으로 넣어주신 코묻은 돈입니다. 당시 MBC의 손석희씨 역시 이 돈을 한나라당에서 받은 게 아니냐는 식의 질문을 했었습니다. 그 때 저는 생방송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이회창을 가장 싫어한다. 싫어하는 이유는 김대중씨가 공적자금을 만들어 풀어헤치는 것을 추적하지 않았고, 김대중이 김정일과 야합하여 안보체제를 통째로 허무는 것을 제지하려 하지도 않았고, 대통령 가족이 조폭들과 어울려 비리를 저질러도 이를 견제하지 않았기 대문이다. 그는 식물총재다". 저는 지금도 한나라당이 제1당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관계상 한나라당을 식물당이라고 비판합니다. 아마도 저의 이런 글들은 지금도 한나라당 홈페이지에 게재돼 있을 것입니다. 저는 광고비가 어디서 났느냐에 대해 해명하라는 강교수님의 요구가 주위 사람들의 의문을 대신하는 것이지, 교수님 스스로는 그런 의심을 하실 분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저는 한나라당의 앞잡이가 되기엔 너무 버거운 사람일 것입니다.
(김대중과의 관계에 대해)
강 교수님은 “지만원의 해명을 요구한다”라는 소제목에서 이렇게 주문하셨습니다. “김정권은 햇볕정책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지만원의 주장에 귀l를 기울여야 했고 그를 활용했어야 했다. 그러나 김정권은 지만원을 철저히 외면했다. 나는 지만원이 김정권과의 관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나는 지만원의 최근 활동에서 김정권에 대한 사적 보복과 그에 다른 노선변화의 냄새를 맡고 잇다. 물론 이런 주장은 지만원에게 대단히 모욕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책임은 지만원이 져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지만원은 지식인으로서 180도 달라진 언행을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지만원이 자신의 최근 언행이 사적 보복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180도 달라진 자신의 언행에 대해 성실하게 해명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해명을 주문하셨습니다. 해명할 기회를 주신 데 대해 감사하면서 성실하게 해명하겠습니다.
김대중과의 인연
저는 1991년 70만 경영체한국군 어디로 가야하나라는 처녀작을 발표하면서부터 언론에 뜨기 시작했습니다. 1991-1999년까지만 해도 저는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많은 칼럼을 쓰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더러는 저를 [혜성과 같이 나타난 사나이]라고 표현했고, 더러는 [장안의 지가를 높인 사나이]라는 평을 해주었습니다.
1994년 어느날 아침 흥사단(도산 안창호 기념사업회)이 힐튼 호텔에서 열리는 아침 조찬강연에 저를 강연자로 초청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김대중 당시 민주당 총재를 초청하였습니다. 그 때에 저도 나가보았습니다. 김대중의 강연은 그리 인상에 남지 않았습니다. 강연이 끝나고 김대중 총재가 나가는데 그와 악수를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그가 나가는 길에 늘어섰습니다. 저는 한 구석에서 그가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김대중의 몸종 비서처럼 보여지는 젊고 빨라보이는 사람이 김대중 총재를 저에게 모셔와 인사를 시켰습니다. 이강래였습니다. "바로 이 분이 지만원 박사입니다". 김대중씨는 저를 유심히 보면서 악수를 청했습니다.
어느 날, 아태재단에서 제게 강연을 하나 부탁했습니다. 3개월 코스인 아태재단 정치 지망생들에 대한 강의였습니다. 저는 나가서 저의 통일 방안인 영구분단 통일론과 군사적 분석을 곁들여 90분간 강연을 했습니다. 박수를 많이 받았습니다.
얼마 후 제가 강연을 해준 클라스가 졸업을 한다며 졸업 파티에 저를 초대했습니다. 마포 쪽에 있는 서교호텔, 김대중 총재가 긴 테이블의 가운데에 앉고 제 위치는 맨 가장자리였습니다. 파티에는 아태재단 간부들과 강사로 나갔던 교수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학기의 학생들이 뽑은 최고의 강사였습니다. 전에는 임동원씨기 1등이었는데 제가 가면서부터 제가 1등이었다 합니다.
파티에서 맨 가장자리에 앉아 있으니까 누군가가 갑자기 저를 김대중씨와 마주 앉도록 자리를 재배치했습니다. 저는 각 분야의 부정과 비리 사례를 주저없이 말해주었습니다.시스템 이야기도 했습니다. 제 이야기를 듣던 모든 사람들이 제 이야기에 깔깔거리고 웃으면서 무척 재미있어 했습니다. 김대중씨가 제 얼굴을 보면서 "모든 분야에 다 나사가 풀렸군요"하고 말했습니다. 제 옆에는 서울대 총장을 했던 분, 중앙대 총장을 지낸 분이 앉아있었지만 웬 일인지 굳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무서운 게 없는 아이처럼 마냥 이야기를 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제게 궁금한 것을 묻고 저는 그야말로 아무 거리낌 없이 자유롭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야말로 거칠 게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날의 제 인기는 아주 대단했습니다. 드디어 어느 분이 박정희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그의 국가경영에 대한 시스템적 안목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를 존경한다고 말했습니다. 제 말은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김대중씨는 분배 문제에만 더 신경을 썼더라도 박대통령의 경제정책은 훌륭했을 거라는 말을 했습니다.
헤어져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마침 제가 탔던 엘리베이터에 김대중씨가 타더군요. 그는 제게 명함을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아, 죄송합니다. 명함이 떨어졌습니다"하면서 작은 전화번호부 수첩을 뒤졌습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딱 한 장의 명함이 있었습니다. 그걸 드렸더니 아주 요긴하게 간수하더군요.
1995년 5월, 스위스그랜드 호텔에서 한.중 국제세미나가 크게 열렸습니다. 아태제단 젊은 학자로부터 기조연설을 해달라는 부탁이 왔습니다. 그의 말은 이랬습니다. "사실, 기조연설은 무게가 있는 게 아닙니까. 저는 역대 총리급, 부총리급, 서울대-연고대 총장들의 이름을 16개 정도 올렸습니다. 김대중 총재님이 모두의 이름을 그으시더니 지만원 교수로 해라, 그 사람은 젊지만 시각이 새롭다. 이렇게 말씀하셔서 지박사님이 선정된 것이니 잘 해 주십시오".
사실 기조연설은 일생에 한 번만이라도 해보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는 것이 미국 인사들의 정서입니다. 저는 그야말로 내용과 표현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리고 17분간 원고 없이 외워서 연설을 했습니다.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습니다.
점심 식사 때에 저는 가장자리 테이블에 이종찬 의원과 함께 앉았습니다. 그런데 김대중씨가 저를 자기 옆으로 불러 앉혔습니다. 부인인 이휘호 여사가 제 손을 잡아주면서 너무 잘했다며 좋아했습니다. 그 후 김대중씨는 사람을 시켜 제게 꿀 항아리를 하나 보내주었습니다. 당시 저는 안양시 비산동 12평 연립주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꿀 심부름을 한 사람이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어안이 벙벙해 하는 눈치였습니다.
그 후 얼마 만에 다시 젊은 학자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1995년 10월 24-31일간 중국에 가서 세미나를 하니 김대중 총재가 저더러 똑 같은 강연을 또 해달라고 부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기꺼이 가겠다 했습니다. 1등 칸에서 저는 맨 뒷 자석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김대중씨가 저를 그의 옆에 오라고 했습니다. 부인과 자리를 바꾼 것입니다. 저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총재님, 저는 장관도 싫고 국회의원도 싫습니다. 저는 자유를 가장 사랑합니다. 지금처럼 프리랜서로 사는 게 가장 좋습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진지하게 듣더군요.
중국에 간 학자는 저와 김태동 박사였습니다. 저는 정치-통일 분야를 발표했고, 김태동 박사는 경제를 발표했습니다. 저는 그야말로 엄청난 박수를 받았습니다. 저는 중국 1주일간 늘 김대중씨와 같은 헤드 테이블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아는 게 많았습니다. 그의 말을 들으면 그는 참으로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저는 전두환을 김대중보다 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후 돌아와 김대중씨는 중요한 파티에 저를 불렀습니다. 이슈가 있을 때마다 그는 "지교수,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며 묻곤 했습니다. 제 대답은 언제나 직설적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김대중씨는 가는 곳마다 저를 칭찬했다 합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기 직전 어느 날 이종찬 의원이 저와 함께 총재에게 가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와 동시에 여러 곳에서 "저를 견제하는 두 사람이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가 당선됐습니다. 김상현 의원과 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는 친화력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가 저를 두 번에 걸쳐 아침 조찬에 불렀습니다. 단 둘이 하는 조찬이었습니다. 장소는 여의도 만하탄 일식집, 그는 당시 위치가 아주 좋았습니다. "이보게 동생, 자네가 가고 싶은 곳을 말해주게. 동생이 원하면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네". 저는 프리랜서로 살겠다고 예의 바르게 거절하면서 신정부의 100대 과제의 전시성과 경제적 몰락에 대해 우려부터 표했습니다. 1997년7월 저는 "추락에서 도약으로, 시스템 요법"이라는 책을 내서 한국경제의 몰락을 예고했을 만큼 한국경제를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이보게 동생, 아직 출범조차 하지 않았는데?". "바둑 10단과 1급이 바둑을 둡니다. 꼭 끝까지 두어봐야 알겠습니까? 신정부 100대 과제에는 시스템 개념이 전혀 없습니다. 성공할 수 없습니다. 곧 경제가 망가지고 대량실업이 닥칠 것입니다". 그 후 저는 김상현씨에게 코리아나 호텔에서 경제의 시시템적 메커니즘에 대해 2시간 동안이나 강의를 해드렸습니다. "동생의 강론은 너무나 새롭네!".
저는 김대중 정부가 160조의 공적자금을 그렇게 쏟아 부으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습니다. 경제적 붕괴는 공적자금의 효력이 있는 동안만큼 연기되겠지만 그 대신 일단 시작되면 그 폭풍이 더욱 거세질 것입니다.
그후 청와대 총무수석 박금옥씨가 저를 조선호텔 조찬에 초대했습니다. 그 때에도 저는 현 정책이 매우 잘못돼 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 김태동 경제수석이 저를 플라자호텔에 초대했습니다. 그 때에도 시스템 강연만 했습니다. 그 후 황원탁 수석이 프레지던트호텔에서 제게 식사를 제안했습니다. 그는 햇볕정책에 신들린 사람이었습니다. 임동원 이론을 앵무새처럼 외우는 것을 보고 매우 실망했습니다. 2001년, 마지막으로 박지원씨가 제게 힐튼호텔에서 점심을 하자며 초대했습니다. 그 때 저는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는 청와대 정책수석이 되었습니다.
박지원씨가 말하더랍니다. 나이 80이 넘은 장군 출신들도 자기를 만나면 자리 하나 얻을까하고 애매한 말들을 하는데 지만원은 자기와 단둘이 만났는데도 김대중을 빨갱이라고 공격했다. 지만원은 깨끗하기는 하더라.
이상이 제가 김대중씨와 쌓았던 인연의 전부였습니다. 저는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잡지 않는 정신적인 한량입니다. 김대중씨 역시 제게 다가왔다 간 사람입니다. 저는 그가 정치를 잘 해주기를 바랬지 그로부터 얻고 싶은 게 없었습니다.
김대중씨의 경우에는 그가 간 것이 아니라 제가 떠난 것입니다. 빅딜이니 워크아웃이니 하는 부정과 비리의 메커니즘을 만들어 돈을 거두고,북한에 대해 노골적인 애정을 보이면서부터 그를 경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제가 그로부터 얻고 싶었던 게 있었다면 그를 비판하지 않고 입을 다물고 있었을 것입니다. 저는 당시 권노갑, 한화갑 등 수많은 실세들로부터도 상당한 호감을 얻고 있었으니까요.
김대중을 의심하고 비판한 동기
강교수님게서 [인물과 사상] 11권을 쓰신 시점은 2000년도입니다. 2001.9.11 미국이 받은 테러 시점을 기점으로 하여 세상이 달라졌듯이 저는 2,000년 1월을 기점으로 하여 김대중에 대한 평가를 전혀 달리했으며 일반 국민들은 2000년6.15를 기점으로 하여 김대중에 대한 평가를 전혀 달리하였습니다.
1995년 5월 스위스 그랜드호텔이서 열린 한.중 세미나, 중국에의 동행, 그의 당선 때까지만 해도 저는 김대중을 신뢰했습니다. 김대중씨로부터 실망한 것은 실현성 없는 100대 과제를 전시용으로 발표하고, 빅딜과 워크아웃을 시작할 때부터였습니다. 빅딜과 워크아웃은 몇 사람의 개혁세력에게 칼춤을 추게 하고 돈을 가져오라는 팬터마임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며 저는 이를 월간지 [선택]과 영남일보 등에 많이 기고했으며 당시 청와대에 있던 김태동 박사와 박금옥 수석에게도 그 위험성에 대해 말해준 바 있습니다. 그후 결정적으로 김대중씨와 임동원씨를 불신한 것은 3가지동기에서였습니다.
첫째, 1999년11월13일부터 금강산 관광이 시작되면서부터였습니다. 1년에 50명이 가도 50만명이 간 것으로 쳐서 1인당 300달러씩 주기로 계약한 것은 북한에 돈을 거져 주기 위한 그럴듯한 포장이라는 판단을 하고부터 김대중-임동원을 경계했습니다. 아니 1998년7.21일 속초에서 북한 잠수정이 그물망에 걸린 것을 임동원이 적극 나서서 마치 북한의 대변인처럼 적극 변호-옹호하는 데에서 임동원-김대중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임동원과 저와의 관계는 남들에게도 알려질 만큼 각별히기도 했지만 저는 그가 1차 통일원장관을 할 때 "당신은 북에 이산가족을 많이 가지고 있다. 김정일이 왜 그들을 인질로 삼아 당신을 조종하려 하지 않겠느냐"며 내려오라는 칼럼까지 썼습니다.
둘째. 김대중씨가 1999년 말 북으로부터 4차레에 걸쳐 [김대중 과거에 대한 협박]을 받은 후 2000년 3월 갑자가 베를린으로 날아가 접선을 요청했고, 돈을 주고 산 접선으로 김정일의 입을 막았으며 돌아오자 마자 “전쟁은 없다”, “휴전선의 지뢰를 제거하라”는 등을 포함해 정신 없이 퍼주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정상회담 대가로 10억 달러 설이 파다했고, 정상회담 발표가 나자마자 미국 정보부 쪽으로부터 흘러나온 그런 류의 이야기들이 이미 언론가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습니다.
셋째 그는 아무런 통제 디바이스 없이 공적자금을 마구 풀었습니다. 저는 이 공적자금에 대해 영남일보 등에 기고를 많이 했습니다.
이들에 대한 자료를 마침 정리해 놓은 게 있어 아래에 제시합니다.
------------------------------------------------------------------------- *DJ는 왜 평양에 갔을까? 1999년 말 김정일로부터 연속적으로 4 치례의 협박이 있었다. 협박 내용은 DJ의 약점을 폭로하는 것이었다. DJ가 북에 간 것은 김정일의 입을 막으려 간 것이라고 본다. --------------------------------------------------------------------------
정상회담은 두 정상의 인격이 동등하게 존중되는 것을 원칙으로 하지만 김대중-김정일과의 만남은 파탄된 두 인격의 만남이었다. 김정일은 나를 만나려면 비밀자금 10억 달러를 내놓으라고 했고, 김대중은 국민 몰래 돈을 바친 후에야 그를 만날 수 있었다. 이를 누가 두 국가 간의 정상회담이라고 부르겠는가.
거기에 더해 5,000만 달러에 대하여는 김정일의 건강식품, 건강도구, 사치품들을 세계각국을 수소문 쇼핑해서 보내주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황제의 자격으로 조공을 받은 것이고, 김대중은 조공을 바친 변방의 임금인 셈이었다. 조공으로 바친 엄청난 금액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기분상하는 것은 국민의 자존심이 도둑질 당했다는 사실이다. 김대중은 국민의 자존심을 몰래 훔쳐다가 김정일에 바친 것이다.
이어서 김대중은 국민 몰래 국가안보를 김정일에 바쳤다. 서둘러 지뢰를 제거하고, 영해가 너무 넓다며 북에 떼어내 주자고 했고, 보안법을 사실상 철페했고, 간첩을 양성화했고, 반미감정을 부추겨 주한미군을 몰아내려 했다. 국민 몰래 언론도 바쳤다. 46개 언론사 사장들을 그에게 보내 사실상의 충성서약을 하도록 만든 것이다.
그는 왜 이렇게 했을까? 그는 23살에 노동당에 입당했고, 정치생활을 하는 동안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자금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되자 김정일은 쾌제를 부르며 서둘러 그를 쥐어짜서 얻을 것을 최대한 빨리 얻으려고 했을 것이다.
[1] 김정일 위성 조직, 한민전의 폭로
1999.7.19, 한민전이 김대중역도의 부정부패행위를 고발한다는 제목으로 먼저 포문을 열었다.
이하 한민전의 고발내용 요약
1982년 김대중은 미국망명 때 전두환에게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그 대가로 30만 달러의 돈을 받았다. 92년 대선 직전 그는 노태우로부터 20억원을 받았다. 전 평민당 창당자금으로 3백억원을 받았고 6공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문제로 궁지에 몰렸던 노태우에게 그것을 유보한다는 대가로 5백억원을 받았다. 노태우로부터 모두 1천2백여억원을 받았다.
60년대말 업자로부터 뇌물을 받아먹고 코카콜라를 끌어들이게 하고는 그것이 문제시되자 재빨리 국회에서 업자를 비판해 이에 분격한 업자로부터 멱살을 잡히고 뺨을 얻어맞은 바 있다. 미국에 망명했을 때 김대중은 미국교포들이 광주학살희생자 유족들에게 전해달라고 기탁한 15만 달러와 한국민주화운동에 써달라고 모금해준 수백만 달러를 자기 주머니에 집어넣고 호화판생활을 해 교포사회의 지탄을 받았다.
87년부터 청와대 권좌에 오르기 전까지 조성하여 친인척명의로 관리해온 비자금은 8천여억원에 달한다. 집권하자마자 개혁」의 구호를 들고 재벌들과 기업주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뜯어냈다. 「재벌구조조정」에서 살아남느냐, 죽느냐 하는 기로에서 재벌들은 살아남기 위해 울며 겨자먹기로 저마다 돈뭉치를 들고 청와대로 찾아갔다. H그룹회장은 1백50억원을 청와대에 상납했다. 이렇게 기업주들로부터 챙긴 검은 돈이 5천억원이다.
구조조정을 한다는 명분으로 기업체들과 은행을 외국투자가들에게 매각하면서 또한 큰 돈벌이를 하고 있다. 김대중은 미국의 에이에스회사가 한국화학의 발전사업을 헐값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해준 대가로 5백억원의 사례금을 받았고 한국의 유망 기간산업의 주식을 헐값으로 팔아 넘기기로 하고 사례금을 받았다. 소로스에게 단기채권시장을 내주고 서울증권을 헐값으로 매입할 수 있게 해준 대가로 4백억원의 사례금을 받은 것을 비롯해서 외국투자가들에게 온갖 이권을 보장해준 대가로 지금까지 받아먹은 돈이 2천억원이다.
1998년 10월, 독도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황금어장을 팔아 넘기는 것을 골자로 한 한일간의 어업협정을 발효시키기로 한 대가로 막대한 돈을 받았다.
전두환, 노태우를 잘 보살펴주면서 그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뜯어내고 있다. 비자금문제와 추징금징수를 무마시켜주기로 하고는 그들로부터 각각 2천억원씩의 사례금을 받았다. 「전 대통령의 예우」를 받을 수 없게 된 전두환에게 외교관여권을 주어 방일행각을 하도록 한 대가로 5백억원의 사례금을 받았다.
[금모금운동]이라는 것을 벌여놓고 막대한 돈을 착복하였다. 국민들로부터 수집한 금붙이들 가운데 일반적인 금붙이는 금괴로 만들어 팔고 값비싼 금패물들은 그대로 외국의 보석상들에게 넘겨 돈벌이를 했는데 그 금액은 대략 2억 달러에 이른다.
인사는 곧 돈줄이었다. 김대중의 인사를 통한 돈 사냥은 주로 장남 김홍일을 통해 벌어지고 있다. 김홍일은 애비의 권세를 등에 업고 정치권은 물론 군과 검찰, 경찰의 인사권에까지 개입하여 돈벌이를 톡톡히 하고 있다. 장성별 한 개의 공정가격이 1억원이라는 것은 공개된 비밀이다. 김대중 부자가 군과 경찰인사를 통해서만 착복한 돈이 6백억원은 넘는다.
김대중의 여섯째 처남 이성호는 해외여행 알선업체인 「평화관광」을 경영하면서 김대중을 등대고 해외 특혜여행을 미끼로 여행자들로부터 막대한 자금을 걷어들이는 한편 유학시절 미국 에리모 대학과 조지 워싱턴대학원에서 친교를 맺었던 인맥들과 짜고 미국현지에 진출한 한국재벌업체들에게 이권을 보장해 준다고 하면서 막대한 돈을 뜯어내 김대중의 금고를 채워주고 있다.
이형택과 이세작 등 처조카들까지 발동해 막대한 비자금을 긁어들이고 있다. 김대중의 처조카인 동화은행 영업1본부장 이형택은 금융계에 손을 뻗쳐 신탁통치로 인해 생사기로에 놓여있는 은행들과 종금사들을 살려주겠다는 담보로 수백억원의 비자금을 걷어들였다.
김대중의 둘째 처남 이경호의 차남인 이세작은 변호사의 간판을 걸고 각종 비리에 걸려든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을 살려준 대가로 막대한 돈을 거두어 들였다. 김대중은 대통령후보 경선 당시 소유한 재산이 9억4천만원인 것으로 신고했고 대선 후의 재산공개 시에는 8억8천만원으로 6천 만원이 줄어든 것으로 공개했지만 지금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 재산은 알려진 것만 해도 1조원이 넘는다.
김대중은 온갖 부정한 방법으로 뜯어낸 돈을 스위스와 싱가포르를 비롯한 외국은행들에 있는 자기의 비밀구좌에 입금시켜 놓았는데 그 규모는 10여억 달러에 달한다.
[2] 북한 부주석 김병식의 편지 폭로
1999.12,5. 북한 김병식 부주석이 1971년 김대중에게 20만 달러를 주면서 동지애로 뜨겁게 포옹했다는 편지를 공개했다. 선생과 처음으로 상면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6년 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요즘 텔레비죤 화면에서 선생의 모습을 볼 때마다 1971년 가을 일본 도꾜 플라쟈 호텔에서 서로 뜨겁게 포옹 하던 때가 생생히 떠오르곤 합니다. 그때는 물론 약소하였습니다. 선생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20만 딸라 밖에 보탬 해 드리지 못한 것 지금도 괴롭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선생을 오늘의 성공에로 이르도록 돕는데 밑거름이 되었다는 생각으로 보람을 찾습니다.
[3] 김정일의 육성 녹음(문에춘추)
이어서 1999년 12월호, 일본 문예춘추지에 김정일이 김대중을 압박하는 육성녹음이 소개됐다. 우리 아버지 수령으로부터 사랑과 배려와 도움을 받고도 배은망덕하다는 내용이었다.
[4] 노동당 선전지, 구국전선의 전단 폭로
같은 시기에 구국전선이라는 노동당 기관잡지와 전단을 통해 김대중이 스위스 은행에 10억 달러를 보관하고있다고 폭로했다. 이 책자와 전단은 한국의 휴전선과 해외교포들에게 뿌려졌다. 바라는 요지는 김대중이 김일성 주석의 은혜에 빨리 보답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대중의 6.15 접선
이에 당황했을 김대중이 2000년3월, 갑자기 베를린으로 날아가 접선을 요청했다. 김정일의 입을 빨리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제까지 민간단체를 통해 북한을 도와주었지만 도와준 양이 변변치 못했다. 좀 넉넉하게 도와주려면 아무래도 정부가 앞장서야 할 것 같다. 그러려면 명분이 필요하다. 정상회담을 열자는 요지의 선언이었다. 김정일은 쾌히 그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차안에서 단둘이 55분간 접선을 했다. 색깔로 의심받아온 그가 대열을 이탈해 적장과 단둘이 1시간씩이나 밀담을 나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접선과정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소문과 추측만 무성하다.
하지만 그 접선 이후에 나타난 김대중의 행동은 결코 대한민국 대통령의 행동이 아니라 약점 잡힌 사나이의 허둥대는 행동이었다. 김정일이 앉아라하면 앉고 서라하면 서야 하는 사람으로 비쳤다. 그 후의 남북한간 거래는 거래가 아니라 한쪽 협박하고 다른 한 쪽은 그 협박에 못이겨 허겁지겁 대국민 명분을 만들어가면서 퍼주기만 하는 약점잡힌 전주에 불과했다. 이를 어떻게 정상회담이라 볼 수 있으며 대북정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김대중의 좌익성향
그는 적장인 김정일을 식견 있고 합리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지도자"라며 찬양했습니다. 2000년, 엄청난 돈을 들여 개최한 제3차 ASSEM회의를 김정일 외교장으로 활용하면서 유럽국가들을 상대로 북한과 수교하라고 종용했습니다. 스스로 김정일 영업부장을 자처한 것입니다.
국민과 국회의 동의도 없이 김정일과 연방제 통일안에 합의 서명했습니다. 용서할 수 없는 초법행위요 국가보안법 위반행위입니다.
연합사령관이 미의회에서 증언을 했습니다. "2000년 한 해에 이루어진 북한의 전력 증강은 과거 5년 치에 해당한다", "지난해의 훈련은 10년이래 최대 규모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김대중은 이를 쉬쉬하고 감췄습니다. 한국군의 군사훈련을 모두 축소 생략했습니다. 2001년에 수백억원의 예산을 들여 대대적으로 준비한 6.25행사도 못하게 했습니다.
2001. 2월, 미국방문 전, DJ는 평화선언을 획책했다가 부시에게 저지당했습니다. 1973년 월맹의 레둑토와 키신저가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맞고 노벨상을 탔습니다. 2년 후인 1975년 월맹은 순식간에 월남을 삼켜버렸습니다. 800 - 1,200 만이 재교육 캠프에서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이슬"로 사라질 뻔했습니다.
지난 2월 김정일 방문이 임박하다며 갑자기 중령급 이상 20%를 삭감시키라고 했습니다. 반 DJ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라는 의혹이 일자 즉각 없던 일로 처리했습니다. .
평양에서 오자마자 전쟁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적을 의심해야할 위치에 있는 최고 통수권자가 적을 의심하지 말라고 하면 바로 그가 내통자로 의심받아야 합니다.
스스로 주한미군 지위변경, 보안법 철폐를 주장하여 지하에서 활동하던 좌익들에게 면죄부를 주어 공공연히 주한미군 추방 운동을 전개하도록 길을 터 주었습니다.
국정원으로 하여금 사회단체를 초청해 김정일의 초 호화판 생일잔치 비디오를 보여주고 김정일이 식견있는 지도자이며 매우 합리적인 지도자라고 선전하게 했습니다.
국정원으로 하여금 언론 및 사회단체 간부를 데려다가 전쟁은 없다고 교육케 했습니다. "110 만 대군은 남침용이 아니라 일자리가 없어서 붙들어 둔 것이다". "서부전선에 콘크리트 장애물과 지뢰를 설치한 것은 옛날 장군이 바보였기 때문이다", "고속도로와 철로는 방어하는 우리에게 더 유리하다"는 식의 교육을 했습니다. 많은 언론 사 간부들이 교육내용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는 평양에서 돌아오자 마자 2000.12.31일까지 무조건 지뢰를 제거하라 명했습니다.
2001. 6.2부터 6일간 북한의 대형 선박들이 제주영해 및 NLL을 유린했을 때, 그는 이에 분노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3가지 특혜를 북한에 주려했습니다. (1) 이번 통과에 대해서는 6.15정신으로 수용한다. (2) 제주해협 통항권을 북한에게도 개방한다 (3) 앞으로 북한이 사전 통보만 해주면 NLL을 언제든 통과할 수 있게 한다. 반면 UNC사령관은 북한에게 "귀측은 한국영토를 침범했다. 강력 히 경고한다"는 메시지를 6.2일 밤 2시30분에 보냈습니다. 김대중과 임동원은 영해를 북한에 내주자 했고, 8군사령관은 북한에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 우리 영토를 지켜주었습니다.
연천의 제5땅굴은 법정에서도 땅굴이라고 사실상의 판단이 내려졌는데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먼저 나서서 "천연동굴"이라고 못박았습니다.
북한이 사건을 일으킬 때마다 북한을 감쌌습니다. 1998. 7.12일 북괴 잠수정이 속초 앞 바다 꽁치망에 걸렸습니다. 꽁치망에 걸릴 정도의 작은 잠수정 속에 든 공작원은 그야말로 독 안에 든 쥐였습니다. 공작원을 생포하면 공작내용이 모두 드러납니다. 해군은 그 잠수정을 밧줄에 매달고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줄이 끊어졌다며 수중에 빠추어 죽였습니다. 북한에 대한 정보가 모두 수장된 것입니다.
1999.6.15일. 연평해전 마지막 날에 북한 경비정을 들이받는 것은 순전히 현장 지휘관의 배짱이었습니다. 당시 우리 해군은 북괴 해군함정 10척중 어뢰정 1척을 격침하고 중소형 경비정 5척을 대파함으로써 북방한계선을 확고히 수호하여 온 국민을 기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 지휘관은 곧 예편당했습니다.
2001년 기무사 대공처장이 1년여에 걸쳐 "좌익세력의 대군침투 실상"이라는 보고서를 냈습니다. 군에 1,000명 이상의 좌익이 있고, 이들이 정관계 좌익들과 연루돼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조성태 장관은 이를 전국 지휘관에게 배포하라고 했습니다. 바로 이 시기에 이유 없이 국방장관이 경질됐습니다. 2001.3.26일, 김동신이 국방장관이 되었습니다. 김동신은 2001.6.30일 염준장을 해외출장 중에 보직해임 시키고 이어서 예편을 시켰습니다.
2002.6.29일 서해 도발에 대해서도 그는 북한을 옹호했습니다. 국군 장병들이 북괴의 테러에 의해 5명씩이나 죽고 22명이 중상을 입었는데 대통령이란 사람이 빨간 넥타이를 매고 일본으로 공놀이 구경을 나갔습니다. 그리고 북한을 이렇게 감쌌습니다. "이번 사태는 우발적인 것이다", "김정일은 개입하지 않았다. 그는 이런 지시를 내릴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대북지원과 금강산 사업은 계속돼야 한다". 장관과 합참의장 등은 장병들의 빈소를 단 한번도 찾지 않았습니다.
2002년6월 그의 핵심참모인 임동원은 남북협상이 잘 되어가고 있는데 미국이 방해를 놓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대북지원은 인도적인 차원에서 무조건적이어야 하며 이를 반대하는 자들은 비인도적인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북한이 남침할 것이라는 생각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했습니다. 우리 군은 북한에 비해 월등한 군사력을 갖고 있으니 염려할 것 없다 했습니다. 연방제란 국방과 외교권만을 통합해서 갖고, 서로가 자기 체제를 유지하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 없다고 했습니다. 그야말로 빨갱이가 아니고는 할 수 없는 말들을 거침없이 털어놨습니다.
황장엽을 박해했습니다. "정치인과 언론인들을 만나지 말 것, 외부 강연에 나가지 말 것, 책을 출판하지 말 것, 탈북자동지회 소식지인 '민족통일'을 내보지 말 것, 민간 차원의 대북 민주화 사업에 참가하지 말 것" 등을 강요했습니다. 그리고 황장엽, 김덕홍씨를 연금상태로 가뒀습니다. 국정원이 이용호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 정현준 게이트, 윤태식 게이트 모두를 주도했습니다. 그 검은 돈이 어디에 쓰여졌겠습니까?
2001. 8. 15-21간 이적단체인 범민련을 창구로 사용하여 평양과 거래했습니다. 평양에서 열린 적화통일 행사에 337명을 날치기식으로 보냈습니다. 안보회의와 통일부가 불가로 결정했는데도 불구하고 김대중과 임동원이 날치기로 보낸 것입니다. 이 중 100여명이 국가보안법을 위반했습니다.
이들은 연방제 통일 운동에 눈물을 흘리고 찬양했습니다. 만경대정신 이어 받아 통일 위업 이룩하자, 노동자계급 앞장서 조국의 자주적 통일 앞당기자,백두산 정기를 타고나신 장군님이시라 훌륭한 장군님이 되신 것 같습니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 일부는 김일성을 찬양하는'한별을 우러러'라는 노래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 중 처벌된 사람은 없습니다.
이로 인해 임동원이 2001.9.3일 국회해임건의안에 의해 쫓겨났지만 1주일만인 9.11일에 장관급 특보에 다시 기용됐습니다. 국회와 국민의 눈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 후 임동원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의심하지 말자. 의심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이렇게 말하며 국민의 대북경계심을 와해시켰습니다.
그는 김정일과 5시간 면담한 후 돌아와 국방부에 압력을 넣어 주적개념을 땅에 묻게 했습니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2002. 5. 24, 국방백서 발간 무기한 연기했습니다.
1999.4.6일, 그는 '주한미군 지위변경 발언을 했습니다. 그는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까지 열어 "주한미군 지위변경 문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는 발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소원은 바로 이번 4.9일날 성취되었습니다.
2,000. 9. 2일 63명의 비전향 장기수를 아무런 대가 없이 영웅으로 만들어 북송했습니다.
월간조선 2000년 9월호에는 청와대 여비서가 했다는 말이 실려있습니다. "벌써부터 우리 장관들이 김정일 국방위원장님께 잘 보이려고 애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 김정일 국방위원장님을 뵙게 되었으니 저처럼 크나큰 영광을 지닌 사람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2000년 8.11일, 대통령이 46개 언론사 사장들을 김정일에 보냈습니다. 그들은 국빈대접을 받으며 행복해 했습니다. 김정일의 술자리 매너에 반했습니다. 더러는 귀국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김정일을 찬양하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상호비방 중지를 내용으로 하는 '남북언론합의문'을 교환했습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한 보도를 저들의 입맛에 맞추어 주었습니다.
그 때 김정일은 참으로 무서운 말을 했습니다. "통일은 내가 맘먹을 탓이다", "내 힘은 군력에서 나온다".
그래도 언론사 사장들은 그 말을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김정일의 이미지를 부각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김정일을 위대한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국민이 9.7%나 된다 합니다. 초등학생의 90%가 김정일을 김대중보다 훨씬 더 위대한 사람이라 한답니다. 부인들 사회에도 김정일 오빠부대가 생겼다 합니다. 2002.6.29 서해사태에서 우군 6명이 사망했고 21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좌익대통령은 설사 먼저 얻어맞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먼저 발포하지 말라며 우리 병사의 손발을 묶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북한군의 손발은 풀려있었습니다. 북한군은 남한의 대통령이 자기들 편이라며 사기가 등등했습니다. 우리 병사들이 대통령을 믿고 방심할 때 북은 여지없이 테러를 가했습니다. 반전-평화 세력은 이렇게 억울하게 테러를 당한 데 대해서는 촛불하나 켜지 않고, 김정일을 비난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장갑차의 좁은 창 때문에 발생한 단순교통사고에 대해서는 미선아-효순아 , 왜 어린 너희들이 미국놈들에게 희생당해야 했느냐!며 수만 개의 촛불을 켜면서 미국을 증오했습니다. 부시대통령 초상화에 불을 지르고 성조기까지 태웠습니다. 이는 미국 내에 반한감정을 유발시켰고, 한국상품 불매운동과 주한미군 철수론까지 야기시켜 국익은 물론 국가안보를 결정적으로 훼손했습니다.
학교와 방송과 신문들이 좌익전선의 첨병이기를 자임했습니다. 여론의 70% 이상을 방송이 좌우한다 합니다. 이를 악용하여 국민을 집단-최면 시킵니다. 그 결과 스스로를 좌익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이 좌익이 내는 목소리를 냅니다. 핵무기는 민족무기다. 왜 미국은 가져도 되고 북한이 가지면 안 되느냐. 미국은 침략자다.
한국인들이 이렇듯 환각상태에 있을 때 김정일은 무엇을 했습니까? 남북정상이 만난 직후에 김정일이 지시한 공문 내용을 보십시오. "나의 통일관은 무력통일관이다", "인민군대는 반미, 반일, 반괴뢰 구호를 더 높이 들고 계급의 총창을 보다 날카롭게 벼려야 한다", "원쑤들과 한 번은 싸워서 결판을 내야 한다"고 다그쳤습니다.
2003년1월호 문예춘추는 남한을 사상적으로 와해시키라는 김정일의 극비 문서를 입수하여 게재했습니다. 그 중에는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적군와해공작은 전쟁승리의 중요한 조건의 하나입니다. 대포를 쏘고 총을 쏘는 것만으로는 적과 싸워 이길 수 없습니다. 와해공작을 강화하는 것 이야말로 적을 사상적으로 무장해제 시킬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한을 사상적으로 무장해제 시키는데 총진군하라는 교시를 내렸습니다.
2년전, 전교조가 [이겨레 살리는 통일]이라는 통일교육지침서를 배부했습니다. 북침이라는 설도 유력하니 학생들에게 6.25를 누가 일으켰는지를 따지지 말도록 가르쳐라. 단지 학생들에게 사진과 비디오 등을 통해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를 가르쳐라. 이 세상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나라는 미국뿐이라고 가르쳐라. 그래서 미국은 인류의 적이자 우리의 적이라고 가르쳐라. 그 다음의 적은 남한 내 친미-반공 기득권 냉전세력임을 가르쳐라. 북한은 우리의 동포이며 더욱 더 도와주어야 한다고 가르쳐라. 토론-연극-윷놀이를 통해 미국과 냉전세력을 증오하게 만들라.
아이들에게 확인해 보십시오. 옛날 북한 어린이들이 미국을 증오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 자식들이 그 모양이 되었습니다. 통일교육지침서의 표지에는 활짝 웃는 인민군 얼굴이 크게 부각돼 있고, 그 주위를 수많은 얼굴들이 꽃잎처럼 감싸고 있습니다. 인민군이 중심이 된 통일사회가 영상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더욱 기막힌 것은 정부가 이를 방조한다는 사실입니다.
지난 2.28일 전남 광주시 교육감이 교장을 잘못 임명했다고 전교조에 반성문을 썼습니다. 이번 4월6일 전교조는 예산군 서승목 교장을 자살로 내몰았습니다. 이번 서교장 사건은 교장과 담임을 모두 전교조 통제 하에 두기 위한 대대적인 작전을 펴다가 저질러진 사건입니다. 교장을 비리 및 비행의 주범으로 몰아가는 게 저들의 상투적인 수법입니다. 뜻 있는 분들이 사재를 털어 설립한 사학들이 줄줄이 탈취되어 이념교육장으로 변하고 있습니다. [민]자 돌림 폭력 교수들이 소위 [교수협의회]라는 걸 만들어 선동과 폭력으로 재단이사장을 내쫓고 주인 행세를 하면서 직위와 돈을 나누어 갖고, 이념교육을 시킵니다. 30개 정도의 대학교가 이렇게 빼앗기고 있는데도 매우 희한하게도 정부는 이에 적극 공조하고 있습니다. 교육계 중앙에도 검은 세력이 있는 것입니다. [조아세]라는 홍위병 집단이 난동을 부립니다. 조아세는 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의 약자라 합니다. 문성근, 명계남 등이 폭력 정예 집단을 만들어 우익신문들을 공격합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우익신문들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선택한 신문을 저들이 무슨 권리로 없애자 합니까? 간판은 [민주화]이지만 내용은 [볼쉐비키 혁명]입니다.
문성근이 누구입니까? 문익환 목사의 아들입니다. 문익환 목사는 북한에서 기념우표가 발행될 만큼 영웅으로 추대되어 있는 좌익입니다. 그런 그가 한국에서는 통일의 사도로 불렸습니다. 통일이 민족의 염원이라 하지만 이런 사람들이 지금 벌이는 통일은 절대로 막아야 합니다.
통일운동에 앞장 선 한완상을 보십시오. 그는 김대중이 평양에서 돌아온 그 다음 날인 6.16일, 인민군 111구가 묻혀있는 파주시의 '북한군묘지' 를 찾아 잡초를 뽑으면서 통일이 임박했다고 고했습니다. 이어서 2000. 10. 5일, 노동당 창건 55돌 기념행사에 가서 축사를 읽었고 남북한 군을 통합하여 한겨레군을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이 때에 누가 같이 갔습니까? 김근태와 이부영 등 6명이 대동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통일전선에 앞장 서 있는 것입니다. 매우 위험한 세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무조건 반통일 세력이 돼야 합니다. 그래야 저들이 설자리를 잃게 됩니다.
대통령이 반전운동을 격려합니다. 주권이 있고, 그 주권을 지키기 위한 군대가 있으면 전쟁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군대란 적과 싸우라고 있는 것이고, 총은 필요할 때 쏘라고, 국민이 피땀 흘려 마련해준 것입니다. 비싸게 이룩한 한국군은 자유에의 침략자들을 상대로 언제든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급박한 시기에 미선이-효순이 파들은 어째서 극렬한 방법으로 반전운동을 벌여야 하며, 국가가 어려울 때 국민에게 나서달라고 말해야 할 정부는 어째서 이런 반애국적 행동을 묵인합니까?
저들은 민족이라는 말을 내걸며 이런 짓을 합니다. 도대체 [민족]이라는 게 왜 중요합니까? 가장 잘 사는 미국을 보십시오. 그 나라에 무슨 민족이 있습니까. 민족이라는 말은 순수한 국민들로 하여금 미국과 일본을 증오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위장용어]입니다. 사상과 사고방식, 지적 수준이 같으면 이민족간에도 사랑하고 결혼합니다. 하지만 이것들이 다르면 형제지간, 부자지간에도 싸우고 죽입니다.
말지와 한겨레신문에 대해
강 교수님은 “또 [한겨레]와 [월간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과거 그 매체들에 왜 기고를 했던 것인지 그것도 밝혀야 할 것이다”라며 해명을 제안하셨습니다.
저는 언제나 언론사에서 글을 써달라는 부탁해올 때에만 글을 씁니다. 김대중 집권 이전에는 말지와 한겨레로부터 가끔 글을 요청받았고, 요청받을 때마다 써주었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만일 지금 다시 글을 써 달라고 하면 기꺼이 쓸 것입니다. 지난 3월에도 말지 기자의 인터뷰에 흔쾌히 응한 바 있습니다. 지금 세인들은 그들을 좌익지라고 하지만 좌익지일수록 저는그들의 기고 요청을 반갑게 받아들일 것입니다. 지금은 웬 일인지 조중동도 제게 글을 요청하지 않습니다. 중앙일보 권영빈 주필은 저를 "지만원 류의 꼴보수"라며 꼴통으로 치부합니다.
소송에 대한 역지사지에 대하여
교수님은 “또 지만원은 최근 자싱에 대한 비판에 대해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하고 있는데 과거 수많은 명예훼손을 당했으며 지금도 당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역지사지할 뜻은 없는지 그것도 묻고싶다”고 주문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해명은 오마이뉴스를 상대로 한 소장으로 대체할까 합니다.
청 구 원 인
1. 원피고들
(가) 원고는 군사전문가이며 시스템공학자입니다.
(나) 피고(1) 주식회사오마이뉴스는 오마이뉴스(ohmynews) 이름의 인터넷신문을 경영하는 회사이고, 피고(2) 권태윤은 피고(1)을 위하여 오마이뉴스인터넷신문의 기사를 쓰는 사람입니다.
2. 원고가 대표로 있는 시스템사회운동본부의 광고
원고는 2002. 8. 16. 동아일보 2면에『대국민경계령!』의 광고(이하 본건광고라 약칭)(갑1)를 게재한바 있습니다. 1975. 월남공화국이 패망한 뒤 부통령, 야당대통령후보, 군사령관 일부가 공산 월맹의 고정간첩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나라의 안전보장은 1%의 위험도 간과(看過)해서는 안된다는 본보기입니다.
비밀경찰 스타지(STASI) 비밀기록이 최근에 공개되었는데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의 집권당시 사회민주당 원내총무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간첩이었던 것이 최근에 밝혀졌습니다.
한반도 통일의 주도권(헤게모니) 장악을 위한『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수령지배 전체주의』와 사이의 현실의 투쟁에 눈을 감는 안이한 일부 정치인, 일부 시민에 대한 경고를 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위하여 꼭 필요하다는 확신에서 원고가 본건 광고를 게재하였던 것입니다.
3. 피고(2)가 작성하고 피고(1)이 게재한 명예훼손 기사
2002. 8. 24. 피고(2)가 기사 작성하고 피고(1)이 오마이뉴스인터넷신문에 게재한 기사는 『지만원과 늑대』(이하 본건 기사라 약칭)(갑2)와 같습니다.
4. 본건 기사는 공공문제(public issue)에 관한『사실보도』 또는『이론 토론』이 아니고 원고의 명예를 저하 추락시키려는 실행적 악의(actual malice)를 가지고 쓴 글입니다.
(가) 본건 기사는 원고의 본건 광고 내용 가운데 들어있는 사실주장과 의견논리에 대한 반론(反論)이나 다른 이견(異見)을 사실보도하거나 또는 논리전개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본건 기사는 공공의 광장(public forum)에 내놓는 사실보도나 논리주장이 되지 못합니다.
(나) 본건 기사의 핵심부분들을 순서대로 쓰면 다음과 같습니다.
(a)『지만원과 늑대』(제목)
(b)『정신질환자들을 순교자로 만들지는 말자』(부제목)
(c)『놀라지 마시라. 이 글은 정신병동에 입원중인 '공인된' 정신질환자가 주절거린 말이 아니다. 이 글은 '시스템사회운동본부 대표'라는 거창한(?) 직함은 물론 '박사'라는 학위까지 가진, 겉보기엔 멀쩡한 사람이 일간지 5단통광고로 대문짝하게 실어놓은 글이다』
(d)『'먹고 살기도 힘들 정도'인 분이 자기만 '만원'짜리요 다른 사람은 '십원'짜리도 못된다고 생각해 어리석은 우리들을 일깨워주기 위해 썼다는 글인데, 여러분은 이게 믿어지는가?』
(e)『물론 버젓이 실린 광고문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을 것이다. 건강한 상식과 이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런 정신 나간 글로 다수를 선동하는 광기를 드러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일부 언론들이 이런 정신분열증적인 글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실어 주었다는 사실이다.』
(f)『게다가 '지만원류'의 파괴적 정신분열증세를 보여준 이가 과거에도 한둘이 아니었고, 요즘에도 개인은 물론 집단들까지 이런 부류가 부지기수(不知其數)인 상황이다.』
(g)『며칠 전 지하철에서 나는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멀쩡하게 생긴 한 청년이 열차에 오르더니 꽥꽥 소리를 지르며 객차 안 통로를 왔다갔다 하는가하면, 이 사람 저 사람 앞에 다가가 괜히 고함을 지르며 자기 머릴 흔들기도 하고, 객차의 천장을 바라보며 비명을 지르기도 하는 등 한바탕 난리를 쳤기 때문이다. 증세가 좀 심한 정신질환자임이 분명했다. 가족들은 있는지, 왜 중증인 그를 입원시켜 치료하지 않는지도 궁금했지만,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저토록 망가진 이유가 무엇인지도 참 궁금했다. 어쨌든 그날 아침 그 청년이 객차를 오가며 보인 행동은 승객들을 불안과 두려움으로 몰아가기 충분했다. 오히려 자신의 정신 시스템부터 검증받고 바로잡는 것이 더 급할 것으로 보이는, 지만원이란 사람의 악의적 선동문구를 접하면서 단번에 지하철에서 만났던 그 정신질환자를 떠올린 것이 지나친 나의 상상력일까. 그 청년이 소수의 승객을 대상으로 불안과 공포를 조성했다면, 지만원의 이번 광고문은 그 대상이 다수 국민들이란 차이를 빼면 하나도 틀릴 것이 없다. 이처럼 '지만원류'의 사람들은 남들이야 듣건 말건 자기 최면에 빠져 끊임없이 민족을 이간질시키고, 전쟁을 선동하며 공포를 조장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겉보기에는 멀쩡한 사람들이다. 몸은 멀쩡 한데 심각한 정신의 질환을 앓고 있는 것이다.』
(h)『지만원씨는 박사학위를 가졌으니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다. 결국 배움의 양과 정신적 분열증이나 기타 정신질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모양이다. 오히려 '식자우환(識字憂患)'이란 말도 있고 보면 '많이 배우되잘못 배우는 것이 모든 정신질환의 원인은 아닐까'란 생각도 해본다.』
(i)『<대국민 경계령, 좌익세력 최후의 발악이 시작됩니다>란 제목으로 시작되는 그의 신문광고문을 보노라면, 이 사람의 분열적 정신상태에 대해 그래서 분노보다는 측은한 맘이 앞선다. 그도 '이 사회가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을까?』
(j)『사실 이런 부류들, 갈등을 조장하고, 전쟁과 분열을 선동하고, 제정신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하지 못할 말과 글을 쏟아내는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공통점이 있다. 권력과 입신출세에 대한 무한욕망과 그것을 이루지 못한 데 대한 좌절과 분노가 깊다는 점이다.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출세와 권력에 대한 욕망을 안 가진 이가 있겠느냐고 하겠지만, 그들은 그 정도가 지나치다 못해 병적일 정도로 과하기에 문제다. 그래서 이들은 자신을 살피기보다는 자신을 간택해주지 않는 정권, 자신의 존재가치를 몰라주는 권력에 대한 한없는 증오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 정권을 끝장내고 야당이 집권하면 자기가 비로소 인정받고 출세할 수 있을 것이란 착각 속에서 이성을 잃고 마구 울부짖는 것이다. 마치 보름달만 뜨면 울부짖는다는 늑대들처럼, 정권 교체기라는 보름달이 뜨면 그들은 광기를 드러내고 울부짖으며 사람들의 단잠을 깨우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다.』
(k)『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과 말다툼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섣불리 맞대응을 해봤자 오히려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다. 자신의 말과 글이 얼마나 해악을 끼치는 것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무조건 몽둥이만 들 수 없는 것은 그런 이유다.』
(l)『지만원류의 사람들도 자신들의 울부짖음에 대해 과격한 반응이 오면 마침내 자신이 순교자라도 되는 양 착각할 것이 분명하다. 결국 말 같지 않은 말에는 무대응이 상책일 수 있는 것이다. 늑대의 울부짖음은 늑대만의 것일 뿐, 사람이라면 달밤에 밖에 나가 그런 늑대의 울부짖음에 맞춰 함께 울부짖는 정신 나간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다) 위 본건 기사의 핵심부분들은 전부 원고의 인격을 짓밟으려고 원고를 정신병자로 몰고 심지어 출세욕망이『병적일 정도로 과하기에 문제다』라는 엉터리 진단까지 쓰는 방법을 택하고 있습니다. 본건 기사는 원고의 사회적 가치 내지 평가를 침해 내지 파탄시키려는 악의 (malice)를 가진 것입니다. 이 악의는 우연한 것이 아니고 실질(實質)을 가져 오려는 의도의 악의 즉 실행적(actual) 악의입니다. 실행적 악의(actual malice)는 설사 공공문제(public issue)를 다루거나 공공 인물(public figure)을 비판하는 경우라도 범해서는 안되는 것인데 피고들은 이를 범한 것입니다. 미국에서 확립된 판례상 실행적 악의(actual malice)는『허위라는 것을 알고서 공표하거나, 사실인가 여부를 무시하고 공표하는 것(publishing with knowledge of falsity or with reckless disregard for the truth)입니다.(갑3, 178쪽 내지 190쪽). 본건 기사는 원고가『파괴적 정신분열증세』를 보이고『자기가 인정받고 출세할 수 있을 것이란 착각』을 한다고 허위사실을 공표한 것으로서, 이는 『사실인가 여부를 무시하고 공표한 것』(reckless disregard for the truth)를 훨씬 넘어서『허위라는 것을 알고서 공표한 것(with knowledge of falsity)입니다.
5. 본건 기사는 의견을 표명하는 방법도 동원하였습니다.
타인의 명예훼손은『의견을 표명하는 방법』으로 행해질 수도 있습니다.(대법원 98다31356, 2000다37524, 37531). 어떤 의견의 표현이 그 전제로서 사실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경우는 물론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에 의하더라도 그 표현의 전취지에 비추어 어떤 사실의 존재를 암시하고 또 이로써 특정인의 사회적 가치 내지 평가를 침해할 가능성이 있으며 명예훼손으로 되는 것(대법원 99다6203, 2000다37524, 37531)입니다. 본건 기사는 원고에 대한『정신분열증환자』『인정받고 출세할 수 있을 것이란 착각』과 같은 허위사실 공표인 동시에 의견표명이며『간접적이고 우회적인 방법』으로 원고의 명예를 훼손한 것입니다.
6. 원고의 손해
(가) 피고들의 본건 인터넷신문기사는 원고의 인격과 명예를 허위조작과 악의로 훼손하였습니다.
(나) 원고는 어려서부터 나라를 지키는 군인의 명예를 마음과 몸에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육군사관학교 22기로 입학하여 1966. 육군포병장교로 임관한 후 1967. 육군소위로서 월남전에 참전하여 백마부대 28연대 관측장교로 전투에 복무하였고, 1969.에 귀국하였다가 그해 다시 육군포병대위로서 백마부대 28연대 포대장으로 전투에 복무하여 인헌무공훈장을 받은 사람입니다.
1971. 5. 월남전에서 귀국하여 합동참모본부정보국에 근무하다가 1974.부터 1975.까지 사이 미국 캘리포니아 소재 미해군대학원에서 수학하고 석사학위를 받은 후 국방부에서 최첨단 국방관리제도연구요원으로 근무하였고, 1977. 부터 위 미해군대학원에서 연구하여 시스템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1980. 10.에 귀국하여 국방연구소에서 연구하다가 1987.에 대령으로 퇴임한 후 다시 1987.부터 미해군대학원에서 부교수로 재직하다가 1990.에 귀국하여 사회발전시스템연구소 소장으로서, 대한민국의 국방, 통일, 사회시스템에 관하여 연구와 저술, 강연, 기업진단 등을 통하여 내 나라의 안전보장과 번영에 기여하는데 가장 큰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다) 피고(1)은 인터넷신문을 운영하는 불입자본금 1,505,815,000원의 주식회사입니다. 그 직원 숫자, 2001. 1. 1.부터 현재까지 월간수입, 월간지출, 그리고 2001 회계연도의 손익계산내용을 원고로서는 모릅니다. 이 점을 법원에서 피 고(1)에게 석명을 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피고(2)는 오마이뉴스 외에 어느 다른 신문기자를 더 근무하였는지 원고로서는 모릅니다. 피고(2)가 스스로 국회의원 비서를 한 것으로 기재하고 있는 데 어느 당의 어느 국회의원 비서를 하였는지 원고로서는 모르나 이 점도 법정에서 석명을 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라) 피고(1)의 2001. 1. 1.부터 현재까지의 매월 수입, 지출과 2001. 회계연도의 손익계산을 참작하고 피고(2)의 경력을 참작하여 원고의 인격, 명예를 훼손한 위자료액을 계산해야 하지만 우선 최소한도 1억원과 본건 소장송달 다음날부터 지연손해금과 변론종결일 이후의 소송촉진지연금을 청구하는 것입니다.
-------------------------------------- 이상으로 강교수님게서 궁굼해 하시는 사항들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바삐 지내다 보니 오늘에야 강교수님의 요청이 담긴 [인물과사상24호]를 접하고 서둘러 해명해 보았습니다. 미진한 점이 있으면 다시 요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강 교수님의 무궁한 발전을 빌어드립니다.
2003. 6. 23
지만원 드림
|
|
 |
 |
function zb_img_check(){
var zb_main_table_width = document.zb_get_table_width.width;
var zb_target_resize_num = document.zb_target_resize.length;
for(i=0;i zb_main_table_width) {
document.zb_target_resize[i].width = zb_main_table_width;
}
}
}
window.[안내]태그제한으로등록되지않습니다-xxonload = zb_img_chec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