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검사장으로 승진할 때도 몇 가지 우여곡절이 따랐다. 당시 검찰 인사를 앞두고 2000년 7월 10일자 <문화일보>가 1면 기사로 서울지검 산하의 지청장들이 모두 검사장으로 승진하게 되지만 서부지청장 만큼은 승진 후보에서 탈락된 상태라고 기사를 내보낸 것이었다. 재경 지청장들이 검사장 승진 1순위로 꼽히는 것은 관례였으나, 유독 나만 제외되었다는 얘기였다. 동부와 남부, 북부, 의정부 등 다른 지청에서도 사법연수원 동기들이 지청장을 맡고 있을 때였다.
그 기사가 아니라도 나로서는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상황이다. 서부지청장을 지내는 동안 출입기자들에게 밉보인 나머지 불리한 기사만 연달아 보도되었기 때문에 승진에는 특히 불리한 처지였다. 나는 원칙대로 한다고 한 것이었는데 기자들의 반응이 너무 감정적이었다. 그렇다고 도중에 슬며시 후퇴하기에는 내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정치적으로도 너무 곤란한 입장이었다. 김대중 정부 출범 초기부터 정권 실세를 구속하였으니 승진을 바라기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거기에 검찰 윗선의 만류를 뿌리치고 장영자 구권 화폐사기사건을 수사했고, 당시 서울시 간부로 재직하고 있던 이희호 여사의 실세 측근 인물을 구속수사한 일까지 있었다. 범죄정보기획관 시절의 정보사항에 대해서도 눈총을 받고 있었다. 정치권의 입장에서 본다면 승진 인사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눈치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일이었다.
- 구권화폐 사기 사건으로 구속 수감된 장영자씨가 2000년 5월19일 서울지검 서부지원에서 호송차에 오르기 직전 자신도 피해자라고 항변하는 모습/허영한 기자
오죽하면 대검 간부로부터 “지청장은 조용히 기다리기만 하면 저절로 검사장으로 승진하게 되는데 왜 쓸데없이 문제를 일으키느냐”는 질책까지 받아야 했다. 아마 <문화일보> 출입기자가 그런 배경을 어디선가 주워듣고 심층 취재를 했던 모양이다. 나는 그 기사를 읽으면서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 정말로 검찰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몇 번이나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불행한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나도 인사 발표에서 검사장 승진 대상자 명단에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정말로 신문기사의 내용대로 승진에서 탈락되었다면 나는 여지없이 사표를 냈을 것이다. 평소 주머니에 깊숙이 넣어 다니던 것이 사표였다.
사실은, 내가 승진에 너무 등한한 것처럼 보였는지 주변에서는 청탁운동 좀 하라며 부추기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순천지청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변호사 출신의 어느 감사위원은 “실력이 없는 사람도 정권 실세에게 잘 보여서 승진하는 마당인데 왜 높은 사람들을 찾아다니지 않느냐”며 마치 자기 일인 것처럼 나를 채근하기도 했다. 그보다 훨씬 전의 얘기지만, 서부지청 특수부장 시절에는 어느 건설업자로부터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측근인 장학로 비서관을 소개해 주겠다는 제의를 받은 일도 있었다.
그러나 스스로 인사 청탁을 한다는 게 도무지 내키지가 않았다. 남들이 알면 과연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염려가 먼저였다. 인사에 집착하기보다는 언제라도 훌훌 털고 떠나면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는데도 탈락시킨다면 그런 조직에 더 이상 몸을 맡기고 있을 필요도 없을 터였다. 어쨌든, 그러한 우여곡절을 극복하고 드디어 검사장으로 승진하게 되었던 것이니, 나로서도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검사장으로 승진하면서 법무연수원 기획부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내가 미국 유학을 거쳐 순천지청 다음으로 발령받았던 근무처가 법무연수원이었고, 그 당시 상관으로 모셨던 정경식, 이건개, 정성진 검사장이 차례로 거쳐 갔던 자리가 바로 기획부장이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수원 시내의 동수원 호텔 근처에 위치하던 연수원 청사가 이미 지금의 용인시 구성읍의 새 청사로 옮겨가 있을 때였다.
법무연수원의 주요 업무는 검사 및 교도관을 포함한 법무부 직원들을 효율적으로 연수시키는 한편 연수제도의 개선안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연수 업무의 속성상 비슷한 교육과정이 대상자만을 바꾸어 계속 진행되기 마련이었으므로 크게 바쁠 일은 없었다. 검사로서 일단 수사 업무에서 벗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여유를 누릴 만했다.
나는 일선 검사들에게도 휴식을 겸한 재충전의 기회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안된 것이 안식년제였다. 검찰 충원 인원이 해마다 늘어나면서 고등 검찰청으로 발령을 받는 대상자가 덩달아 늘어날 만큼 인사적체 현상도 엿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대학 교수들 처럼 안식년제를 도입하여 검사들을 외국 대학에서 재충전을 시킬 수 있다면 서로가 만족할 수 있을 것이었다. 미국 유학 시절의 내 경험도 새롭게 떠올랐다.
하지만 당시 검찰국장은 내 의견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취지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외국에 유학을 보내려면 예산이 필요했지만 당장 예산을 확보할 방안이 없었던 것이다. 안식년제 유학 방안은 그 후임 검찰국장 때 성사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검사들이 짧게는 6개월, 또는 1년씩의 기간을 정해 외국 대학이나 사법기관에 연수를 다녀오고 있는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