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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상관비연의 죽음과 육소봉의 위기
(1)
밤이 깊었다.
방안의 공기는 차고 냉랭했다.
육소봉과 상관비연의 대화는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계속되었다. 정곡을
찌르는 듯한 육소봉의 날카로운 질문에 아름다웠던 상관비연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육소봉이 물었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금붕왕조의 재산을 자기네 함철산에게로 다시 가져와
달라고 설득했던 것이로군? 누구든 그 엄청난 재산을 가지게 된다면, 금방
이라도 두각을 나타낼 수 있을 테니까." 상관비연이 대꾸했다.
"난 다른 사람이 가만히 앉아서 남의 공을 가로채는 게 싫었어요." "그래
서 당신은 애인과 함께 묘책을 생각해 내게 되었군." "처음엔 그 늙고 어리
석은 대금붕왕만 죽일 작정이었어요. 한데, 우리가 변장시켜서 보낸 사람으
로 상관단봉을 속일 순 없었죠. 아무리 교묘히 변장시켰더라도 " "그래
도 당신은 아예 상관단봉까지 함께 죽여버리게 된 것이로군." "그래요."
"두 사람은 너무도 닮았고 당신은 또 어려서부터 그녀의 목소리를 흉내낼
수 있었으니, 공주 행세를 하기엔 딱 알맞았겠군, 그래. 그 재미가 어땠나?"
상관비연이 말했다.
"별 재미는 없었어요."
육소봉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이런 종류의 비밀을 당연히 그 말 많은 꼬마에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을
거고, 그래서 줄곧 설아를 속여왔던 것이로군. 우습게도 설아는 오히려 당신
이 상관단봉의 독수에 걸렸다고 오해하게 되었고 말이지." 상관비연이 한탄
스레 말했다.
"그 어린 년은 말도 많을 뿐 아니라, 일도 많이 저지르고 다니죠." 육소봉
이 말했다.
"난 당신이 왜 직접 곽휴 일당을 찾아가지 않았는지가 궁금했다오." 상관
비연이 말했다.
"대금붕왕에게는 분명 비밀스런 표식이 있는데, 그것은 당시 함께 도망갔
던 신하들만이 알고 있어서, 누가 그의 인척으로 변장을 하더라도 그 늙은
여우 같은 곽휴를 속일 순 없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기 ㄸ문이에
요." "당신은 그때도 그가 발가락이 여섯 개라는 사실을 몰랐소?" 상관비연
이 말했다.
"몰랐었으니까 감히 모험을 하지 않았죠."
육소봉이 말했다.
"그래서 당신들은 먼저 사람 하나를 뽑아 당신들 대신 그 늙은 여우를 죽
이러 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됐던 것이로군." 상관비
연이 말했다.
"그래요."
육소봉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허나 그런 사람을 찾기란 결코 쉽진 않았을 거요. 왜냐하면 그는 곽휴
일당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천성적으로 쓸데
없는 일에 참견하기를 좋아하는 더러운 성격도 갖고 있어야 할 테니까." 상
관비연이 말했다.
"그런 사람을 찾는 건 확실히 어렵더군요. 당신 외에는 다른 사람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어요." 육소봉이 장탄식하며 쓰게 웃었다.
"보아하니 나 같은 사람이 이 세상엔 그다지 많지 않은가 보군." 상관비연
이 말했다.
"또한 당신이 진정으로 원해서 손을 쓰게 만드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었
어요." 육소봉이 말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기 좋아할 뿐 아니라, 시키
는 대로 하지 않으려는 노새 같은 성질도 좀 가지고 있지." 상관비연은 그
말에 소리내어 웃었다.
"당신이 그토록 자기 자신을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몰랐네요." "당신들은
일부러 구혼수 일당을 통해 날 방해하려고 했지. 당신들은 어떤 사람이 내
일을 못하게 하면 할수록 난 일부러 더 하려고 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으니
까 말야." 상관비연이 웃으며 말했다.
"산서성의 노새 역시 그렇답니다."
육소봉이 말했다.
"후에 당신들은 일부러 소추우와 독고방을 죽여 내게 경고했지. 같은 이
유로." "그건 그들이 이미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
당신이 그 오래된 무덤에서 노랫가락으로 우리를 유인하고, 일부러 대야에
몇 가닥의 머리카락을 남겨놓았던 것도, 오직 화만루로 하여금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믿게끔 하기 위해서였나?" "그것 역시 당신들이 다시는
그 어린 년의 말을 믿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어요." 육소봉이 말했다.
"당신은 설아가 창 밖에서 몰래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그녀의
눈앞에서 유여한을 죽였지?" 상관비연이 차갑게 말했다.
"그 어린 년은 나와 유여한이 일부러 짜고서 그녀에게 보여주기 위한 연
극이라는 것을 당연히 알 수 없었죠." 육소봉이 말했다.
"유여한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는 더더욱 그녀가 거짓
말을 했다고 생각하게 될 테고 말이지." 육소봉이 다시 한숨을 쉬더니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불쌍하게도 유여한이 살아서 나타난 것을 보았을 때, 그녀의 표정은 정
말 살아 있는 귀신이라도 만난 듯했었지. 감히 말도 못하고 얌전히 그를 따
라갔으니 말이야."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 어린 년을 가두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일찍 알았어야 했는데 안타깝게
도 " 육소봉이 말했다.
"안타깝게도 그간 당신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던 데다가 당신 역시 우
리가 돌아와 그녀를 못 보면 더욱 의심을 하게 될까 봐 걱정했겠소." 상관
비연이 냉소적으로 말했다.
"어떤 때 난 당신이 바로 내 마음속에 들어와 앉아 있는 것처럼 생각돼
요. 마치 내 생각을 전부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육소봉이 말했다.
"당신은 일부러 또 화만루 앞에 한번 나타났죠. 죄명을 곽휴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서 말이야." "맞아요."
육소봉이 탄식하며 말했다.
"난 당신이 어떻게 그를 속였는지 이상하오. 그는 특별한 귀를 가졌을 뿐
만 아니라 코 역시 특별해서, 설사 당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하더라도
당신의 냄새는 맡을 수 있었을텐데 " 모든 사람의 몸에는 다른 사람과
구분되는 특유의 체취가 있어서 말소리도다도 더 쉽게 구별되기도 한다.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건 내가 매번 그를 만날 때마다 일부러 몸에 아주 진한 향수를 뿌려놓
았다가, 상관비연의 신분으로 나타날 때는 그 향기를 깨끗이 없애버렸기 때
문이에요." 육소봉이 말했다.
"주도면밀하군, 그래."
상관비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난 여자예요. 여자란 위험한 모험은 원치 않죠."
"그렇다면 당신은 왜 유여한이 날 죽이러 가기를 원했소?" 상관비연이 유
유히 말했다.
"당연히 당신은 그 이유를 알텐데요."
육소봉이 말했다.
"당신에게 더 이상 쓸모가 없으니까 내 손을 빌려 그를 죽일 생각을 했단
말인가?" 상관비연이 숨을 길게 내쉬더니 냉랭한 어조로 말했다.
"사실 당신이 살인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진작 알았어야 했는데. 그
렇지 않았다면 함철산 역시 내가 손쓸 필요도 없었을텐데 말예요."
상관비연이 나타나면서부터 곁에서 두 사람을 지켜보던 유여한은 갑자기
사람이 변한 것처럼 아주 조용해졌다.
매번 유여한이 그녀를 볼 때면, 그의 외눈에서는 아주 부드러운 빛이 발
산되곤 했었다.
육소봉과 상관비연의 대화는 날카로운 비수처럼 유여한의 가슴을 찔러왔
다.
그는 떨면서 말했다.
"당신 당신은 정말 내가 죽기를 원했었소?"
상관비연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차갑게 말했다.
"사실 당신은 진작에 죽었어야 해요. 당신 같은 사람이 살아봤자 무슨 의
미가 있겠어요?" 유여한이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은, 예전의 당신은 "
상관비연이 말했다.
"예전에 내가 했던 말들은 당연히 전부 당신을 속이기 위한 것이었소. 설
마 당신은 내가 정말로 당신을 좋아한다고 여기진 않았겠죠?" 유여한의 온
몸은 차디차게 얼어붙은 듯 꼼짝 않고 그곳에 서서 멍청하게 그녀를 바라보
았는데, 그 외눈에는 원망이 가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픈 애정으로 충
만하였다. 그리곤 얼마 지나서야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맞는 말이오. 당신이 정말로 날 좋아할 리는 없소. 나 역시 잘 알고 있었
다오. 난 단지 줄곧 나 자신을 속이면서 내 마음을 다독여왔던 것뿐이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렇게 미련한 바보는 아니군요."
유여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손을 돌려 칼을 뽑아 자신의
가슴에 퍽 꽂았다.
칼 끝은 마침내 그의 가슴을 뚫고 등뒤에서 선명한 핏줄기를 뿜게 하더니
벽면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엔 조금의 미동도 없었다. 그에게는 이러한 행위가 고통
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움인 듯이 보였다.
그의 눈에서는 갑자기 빛이 돌았고 갑자기 웃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죽음은 원래 괴로운 일이 아니었소. 그대 앞에서 죽을 수 있으니 난 오
히려 " 그는 말을 채 끝맺지도 못하고 쓰러졌다.
육소봉은 그를 막지 않았다. 아니 막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한 사람이 편
안히 죽을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확실히 살아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일이기도 했다.
"다정(多情)은 예로부터 부질없는 한을 남긴다더니 그는 정말 정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정을 잘못 사용한 것이 애석할 따름이오." 육소봉은 상
관비연을 보며 갑자기 이 무정한 여인에 대한 말할 수 없는 혐오감을 느겼
다.
이러한 느낌은 괴로움이 아니라 혐오감, 바로 독사를 만났을 때 사람들이
느끼는 그런 잔인한 느낌이었다.
육소봉이 차갑게 말했다.
"당신도 바보 같은 일을 저질렀군."
상관비연이 말했다.
"네?"
"당신은 그를 죽음에까지는 내몰지 말았어야 했소." "어째서죠?"
"그가 살아 있었다면 적어도 내가 당신을 죽이는 비극까지는 가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오." 상관비연이 다급히, 그러나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날 죽이겠다구요? 당신이, 잔인하게 날 죽여요?"
"난 분명히 살인은 피해왔고 더더욱 여인을 죽이는 일은 싫소. 그러나 당
신은 예외요." 상관비연이 비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된 마당에, 당신은 왜 아직도 손을 쓰지 않죠?" 육소봉이 말했다.
"난 급하지 않소!"
상관비연이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당신은 당연히 급하지 않겠죠. 어쨌든 난 이미 도망갈 수 없는 데다가,
당신은 분명 내게 물어볼 말도 있을 테니까요." "당신도 바보는 아니군."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이 내게 묻고 싶은 건 내가 어떻게 당신이 쫓아오기 전에 먼저 유여
한으로 하여금 늙은이의 발가락 하나를 잘라오게 시킬 수 있었는가 하는 거
죠?" 육소봉이 말했다.
"그 점이라면 나 역시 물을 필요도 없소."
"이미 알고 있단 말예요?"
"비둘기는 당연히 사람보단 빠르니까."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은 정말 똑똑하군요."
육소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원래 이 비밀은 엽수주가 알게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상관비연이 말
했다.
"당신은 단지 그녀에게만 얘기했나요?"
"그렇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은 아무 뜻 없이 말한 건가요. 아니면 일부러 그녀를 시험해 볼 생
각이었나요?" 육소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난 결코 그녀를 해칠 생각은 없었소. 그녀 역시 가련한 사람이니까." 상
관비연은 갑자기 냉소하며 말했다.
"당신은 사람을 잘못 봤어요. 그 여자는 비록 겉보기에는 진실해 보이지
만, 사실은 타고난 창녀예요." 육소봉이 말했다.
"단지 그녀가 당신이 좋아한 사람을 좋아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렇단 말이
오?" 상관비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유여한을 이용한 것처럼 그녀를 이용했을 뿐이에요." 육소봉이 말했
다.
"엽수주가 이 비밀을 그에게 말해 주었고, 그는 곧 비둘기를 이용해서 당
신에게 알려온 것이군." 상관비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표정을 아주
부드럽게 고치면서 말했다.
"검은 비둘기는 원래 우리들의 연애 편지를 보낼 때 쓰던 것이었지요. 지
금처럼 또 다른 쓰임이 있게 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가 이미 구
혼수와 철면판관을 시켜 그 대신 일을 처리하도록 했다면, 설마 그가 바로
청의루의 노인이란 말은 아니겠지?" "맞춰봐요."
"모르겠소."
"설마 내가 말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나요?"
육소봉이 말했다.
"지금은 물론 내게 말해줄 리가 없겠지."
상관비연이 말했다.
"앞으로도 내 입으로 말해줄 리는 없어요. 당신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 영
원히 알 수 없을 거예요." 육소봉이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여자이니까."
상관비연이 말했다.
"여자니까 또 뭐가 어떻다는 거예요?"
육소봉이 차갑게 말했다.
"당신같이 아름다운 여인이 만일 코가 잘려나간다면 분명 아주 못생겨 보
이겠지." 상관비연이 엉겁결에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 설마 잔인하게 내 코를 자르겠다는 건가요?" 육소봉
이 당당히 말했다.
"만약 내 마음이 아주 연약하다고 짐작했다면 그건 착각이오." 상관비연이
놀라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만일 그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당신이 내
코를 잘라버리겠다 이건가요?" "먼저 코를 자르고 그 다음엔 귀를 자르겠
소."
상관비연이 비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입에서 그렇게 흉한 소리가 나오다니. 난 당신이 절대 그런분이
아니라는 걸 알아요." 육소봉이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그렇다면 시험해 보겠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은 시험도 못 해볼 거예요. 왜냐면 당신은 절대로 코 없는 친구를
좋아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다행히 당신은 이미 내 친구가 아니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비록 난 아니지만 화만루와 주정은 친구잖아요."
육소봉의 안색이 또 한번 변했다.
상관비연이 유유히 말했다.
"당신이 만일 내 코를 자른다면 그들은 아마도 머리조차 온전치 못할 거
예요. 머리 없는 것이 코 없는 것보다 더 보기 싫지 않겠어요?" 육소봉이
그녀를 노려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은 이것이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육소봉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설마 화만루가 당신에게 또 속아넘어갔다는 것을 나더러 믿으라
는 거요?" 상관비연이 말했다.
"난 그를 한 번 속여봤으니 두 번 역시도 가능하단 말이죠." "바보만이 두
번씩이나 속아넘어가는 법이오. 그는 절대 바보가 아니오." "하지만 그는 정
이 많은 사람이에요. 바보는 두 번 속아넘어가는 것이 고작이지만, 정이 많
은 사람은 백번이라도 속아넘어가는 법이랍니다." 육소봉이 말했다.
"설마 주정도 정이 많은 사람이란 말이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는 아니에요. 하지만 그는 너무나 게으르지요."
육소봉이 말했다.
"게으른 사람에게도 장점은 있지."
"네?"
"게을러서 움직이는 것조차 싫어하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속아 넘어
갈 수 있겠소?" 상관비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같이 게으른 사람을 속이기란 확실히 쉽진 않지요. 다행히 그의 주변
엔 좋은 친구들이 몇 사람 있기 때문에 그에게 은표를 보내서 그것으로 그
를 속일 수 있었답니다." 육소봉은 이제 웃지 않았다.
상관비연이 갑자기 말했다.
"당신은 당연히 그가 자기 친구 때문에 머리를 선물하는 것을 가만보고
있지는 않겠죠? 더군다나 아주 아리따운 여주인(노반랑)이 그와 함께 죽는
다면 말이죠." 육소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주인은 항상 주인보다 더 게을렀는데 이번엔 어찌 왔단 말이오?" 상관
비연이 말했다.
"그녀는 당신이 반드시 구해주러 올 것을 알았기 때문에 당신을 기다린
것이지요." 육소봉이 말했다.
"그녀가 어디에서 날 기다렸단 말이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알고 싶어요?"
"아주 궁금하오."
"내가 당신을 모시고 갈 것 같나요?"
"그럴 리 없겠지."
"틀렸어요. 내가 만일 당신을 모셔갈 맘이 없었다면 왜 당신에게 알려줬
겠어요?" 육소봉이 말했다.
"적어도 지금은 날 데려갈 리 없지 않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은 정말 똑똑하군요."
육소봉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 친구가 아주 게으른 데다가 바보인 것이 안타까울 뿐이오." 상관비연
이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당신의 친구들이니, 당연히 그들을 구하러 가야만
해요." 육소봉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생각중이오."
상관비연이 음흉스럽게 말했다.
"뭘 생각해요?"
"난 먼저 당신이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보고서 따라가겠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내가 당신에게 바라는 일은 아주 쉬운 일뿐이랍니다." "무슨 일이오?"
"단지 내 대신 사람을 죽여주면 되는 거예요. 당신에게 살인은 어려운 일
이 아니니까요." 육소봉이 말했다.
"그것 역시 당신이 내게 어떤 사람을 죽여달라는 것인가를 먼저 알아야만
하겠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누구요?"
"서문취설!"
육소봉이 소리내서 웃었다.
"당신은 나더러 지금 그 사람을 죽여달라는 거요? 아니면 그 사람이 날
죽이기를 원하는 거요?"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연히 당신이 그 사람을 죽이길 바라지요. 그는 날 모욕했다구요. 그 사
람처럼 날 모욕한 사람은 여태껏 한 사람도 없었어요." 육소봉이 말했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죽이고 싶단 말이오? 여자들의 소견이란 정말 좁단
말이야. 내가 만일 그를 죽이지 못하고 도리어 내가 그에게 죽임을 당한다
면?"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건 당신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당신이 황천길로 가면 분명 여러 친
구들이 당신과 함께 갈 테니까요." 육소봉이 탄식하며 말했다.
"보아하니 난 이미 다른 선택을 할 여지가 없는 것 같군." "맞아요. 조금
도 없어요."
"그가 죽든 내가 죽든 당신은 어찌 되어도 모두 기쁘겠군 그래." 상관비연
이 말했다.
"양심상 말하자면 가령 당신들 둘이 모두 죽는다 해도, 난 상심할 까닭은
없어요." 육소봉이 말했다.
"당신이란 사람에게도 양심이란 게 있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연히 있죠. 그러니까 난 당신이 그를 죽여서 그의 목숨 하나로 화만루
등 세 사람의 목숨과 바꾸길 바라는 거예요." 육소봉이 탄식하면서 말했다.
"이 거래는 그다지 손해보는 장사는 아닌 것 같은데, 난 그가 어디에 있
는지도 모르고 있으니 안타깝군." 상관비연이 담담히 말했다.
"당신은 분명 그를 찾아낼 수 있어요."
육소봉이 말했다.
"내가 어떻게 찾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날 그가 손수청을 데리고 갔으니, 당연히 손수청의 목숨을 구하기 위
해서는 무슨 방도를 사용했을 거예요." 육소봉이 말했다.
"그가 가끔은 사람을 구하기도 하는구료."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러니까 그는 지금 분명히 손수청을 치료할 수 있는 곳에 있을 거예요.
그 부근에서 치료할 수 있을 만한 곳은 당신도 당연히 알텐데요." 육소봉이
말했다.
"하지만 죽은 사람은 치료할 필요가 없지 않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맞아요."
육소봉이 말했다.
"그러니 이 점도 물어봐야만 되겠군. 손수청이 당신의 비봉침에 맞은 후
에 그를 치료할 방도가 있소?" 상관비연이 쌀쌀맞게 말했다.
"그녀가 맞은 건 비봉침이 아니라 비연침이에요. 그건 본디 구할 방도가
없지만 서문취설은 아마도 그녀를 살려낼 거예요." 육소봉이 말했다.
"어떻게?"
상관비연이 말했다.
"비연침의 독은 보통 암기와는 달라서 비연침을 맞은 후 가만히 누워 있
으면 분명 죽게 되어요." "그래서 석수설은 죽었군."
상관비연이 말했다.
"하지만 서문취설은 도리어 손수청을 데리고 온 산을 헤매고 다녔어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녀의 독성이 발산되어 살아날 가능성이 생기는 거
죠." 육소봉이 말했다.
"그날 당신은 몰래 그녀를 쏜 후에도 자리를 뜨지 않았었군." 상관비연이
웃으며 말했다.
"당신 같은 고수들 앞에서 내가 어찌 도망갈 수 있겠어요? 그래서 난 아
예 그곳에 드러누워서 당신들이 날 찾아 쫓아갔을 때도 계속 보고만 있었어
요." 육소봉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 정말 간도 크군!"
상관비연이 말했다.
"난 당신들이 감히 내가 그곳에 그냥 머물러 있으리라곤 생각 못할 줄 이
미 알았어요." 육소봉이 말했다.
"당신은 우리들이 모두 가버린 후에야 나온 거로군?"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때는 화만루 혼자 있었죠. 그가 날 절대로 의심 못할 것도 알았어요.
가령 내가 눈을 검다고 하고 검은 것을 희다고 해도, 그는 믿지 않을 수 없
겠죠." 육소봉이 말했다.
"어째서?"
상관비연이 웃으며 말했다.
"왜냐하면 그는 날 좋아하니까요. 남자가 여자에게 빠지게 되면 정말 어
쩔 방법이 없는 거예요." 육소봉이 말했다.
"당신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가 속임수에 빠져도 당연하다는 거요?" 상관
비연이 말했다.
"그건 자기 스스로가 진정으로 원한 것이고, 내가 그 사람더러 반드시 날
좋아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니니까 저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죠." 육소봉이 갑
자기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내가 지금 당신에게 해줄 말은 딱 한 가지뿐이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말해 보세요."
육소봉이 말했다.
"뒤를 돌아보시오, 내 말이 무슨 말인가 알게 될 거요." 상관비연이 고개
를 돌리자, 자기의 온몸이 갑자기 검고 어두운 큰동굴 안으로 떨어지는 듯
한 기분을 느꼈다.
방안은 어두웠는데, 한 사람이 조용히 그 어둠 속에 서서 조금도 움직이
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화만루!"
상관비연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불렀다.
화만루의 표정은 오히려 담담했다. 고통이나 분노도 전혀 없는 듯했다.
상관비연은 그를 보면서 놀라 물었다.
"당신 당신이 어떻게 이곳엘 왔죠?"
화만루는 담담히 말했다.
"걸어왔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그렇지만 난 난 분명히 당신의 혈도를 막아놓았었는데!" 화만루가
말했다.
"다른 사람이 당신의 혈도를 누를 때, 당신이 만일 진기를 그 혈도 부근
에 밀어넣을 수 있다면, 조금 후엔 아마도 막힌 혈도를 뚫을 방법을 알게
될 것이오. 난 마침 그 방법을 좀 알고 있었을 뿐이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설마 내가 당신에게 손쓸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단 말인가요? 그래서 당신
은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단 말인가요?" 화만루가 잘라 말했다.
"난 내 친구가 날 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것을 결코 원하
지 않는다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은 내가 좀전에 한 말을 모두 들었군요."
화만루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당신은 화나지 않았나요?"
화만루가 담담히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소. 거기에다가, 당신은 확실히 나더
러 당신을 좋아해 달라고 한 적이 없소." 화만루의 마음속에는 단지 사랑이
있을 뿐, 원망이 없었기 때문에 아주 평온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상관비연의 얼굴엔 낙망의 빛이 역력했다.
육소봉도 그를 보고 있다가 가볍게 탄식하며 말했다.
"이 사람은 정말 군자로군."
화만루가 웃으며 말했다.
"군자와 바보는 어떤 때엔 별 차이가 없는 법이라네." 육소봉이 말했다.
"주인은?"
화만루가 말했다.
"주인은 당연히 여주인과 함께 있지."
육소봉이 말했다.
"그들은 왜 오지 않나?"
화만루가 말했다.
"그들은 설아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중이네."
육소봉이 씁쓸하게 말했다.
"보아하니 그들이 속임수에 빠질 시간이 가까왔구먼 그래." 사실 육소봉은
그들이 왜 오지 않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를 위해 속임수에 빠진 것이
므로, 그는 그들을 보면 좀 무안한 맘이 들 게 뻔했다. 그들은 결코 그가 무
안함을 느끼길 원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설아 역시 그의 언니를 만나고 싶어하지 않았으므로 이런 상황에서 만난
다면 서로 마음이 편할 리가 없었다.
상관비연은 마침내 길게 한번 탄식하더니 말했다.
"당신이 방금 한 얘기를 이제서야 알겠어요."
"뭘?"
상관비연이 말했다.
"내가 한 일은 아주 미련한 짓이었어요."
육소봉이 물었다.
"왜?"
"난 줄곧 당신들을 바보라고 여겼었는데, 진짜 바보는 바로 나였다는 것
을 이제서야 알겠어요." 그녀는 또 한번 장탄식하더니 말했다.
"그렇지만 당신이 정말로 내 코를 잘라버렸다면 그가 누군지 말 안했을
거예요." 육소봉이 말했다.
"그 사람도 본래 정이 많은 사람이겠지."
상관비연이 처량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빠져도 그것 역시 대책 없는 일이에요." 화만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맞는 말이오."
상관비연이 말했다.
"정말로 난 당신에게 미안할 뿐이에요. 만일 당신이 날 죽인다 해도 이젠
당신을 탓하지 않겠어요!" 화만루가 말했다.
"난 당신을 해칠 생각이 전혀 없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당신은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세요?"
화만루가 말했다.
"별로, 아무것도."
상관비연은 감동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당신은 당신은 날 그냥 놓아주겠다는 건가요?" 화만루는 아무런
말도 않고 갑자기 몸을 돌려 천천히 걸어나갔다. 육소봉은 한숨을 쉬더니
의외로 그의 뒤를 따라가버렸다.
상관비연은 놀라 그들을 보더니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지금 분명 내가 그를 찾아갈 것을 알고 일부러 날 놓아주고서는
몰래 따라오려는 거죠!" 육소봉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난 그렇게 할 필요가 없소."
상관비연이 말했다.
"어째서죠?"
육소봉이 말했다.
"왜냐하면 난 그가 누구인지 이미 알기 때문이오."
상관비연은 안색이 바뀌며 큰소리로 말했다.
"그가 누구인지 당신이 안다고요? 그가 누구죠?" 육소봉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은 채 화만루를 뒤쫓아서 어두운 복도를 걸어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집은 한 조각의 어둠이었다.
상관비연 혼자 그 어둠 속에 서 있다가 갑자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냉
기 때문인가. 아니면 공포 때문인가? 화원은 어둠 속에 잠겨 고요했고, 바람
결에 묻어나는 꽃향기는 황혼 전보다도 더욱 짙어진 듯했다. 십여 개의 추
성(秋星)이 막 솟아올랐다가는 구름에 곧 가라워졌다.
화만루는 천천히 한떨기 월계화 앞까지 걸어나가서야 비로소 가볍게 한숨
을 내쉬더니 말했다.
"그녀는 가련한 여자야."
육소봉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화만루는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잊은 것처럼.
화만루가 말했다.
"모든 사람은 잘못을 저지를 때가 있는 법이지. 그녀가 비록 잘못을 저질
렀다고는 하지만 " 육소봉은 그의 말을 자르고 말했다.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아야 한다네. 누가 잘못을 저지르든지간에 모두
대가를 치러야 해." 화만루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는 그녀를 놓아주었잖나."
육소봉이 말했다.
"그건 아마도 어떤 사람이 분명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네." 화만루가 말했다.
"누가? 그녀의 애인이?"
육소봉이 말했다.
"애인은 아니야. 그는 정이 없는 사람이야."
화만루가 말했다.
"자네는 정말로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나?"
"아니."
화만루가 말했다.
"그녀가 말한 것이 그럼 정말이란 말인가? 자네는 몰래 그녀를 따라갈 생
각인가?" 육소봉은 웃으며 말했다.
"비록 군자는 아니네만 내가 한 말에 책임을 못 질 정도는 아니네." 화만
루가 말했다.
"자네가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또 그녀를 쫓아가지도 않는다면,
자네는 그냥 그렇게 신경쓰지 않고 내버려둘 셈이란 말인가?" 육소봉이 말
했다.
"내버려둘 수야 없지."
화만루가 말했다.
"난 자네 생각을 이해 못하겠네."
육소봉이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을 찾아가지 않는다 해도 그 사람은 반드시 날 찾아올걸세."
"자신 있나?"
"적어도 백에 칠십 정도는 자신이 있네."
화만루가 말했다.
"그래?"
육소봉이 말했다.
"그는 분명히 내가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니 어찌
날 살려두고자 하겠는가?" 화만루가 말했다.
"자네가 좀전에 일부러 그렇게 말한 것은 자네를 찾아오게 하기 위해서였
나?" 육소봉이 말했다.
"내가 그렇게 말한 것은 상관비연 또한 구하기 위해서였다네." 화만루가
말했다.
"자네가 과연 그가 누군지 알고 있다면, 그가 상관비연을 죽여 입을 막을
필요가 없다는 거군." 육소봉이 또 웃으며 말했다.
"적어도 지금 제일 먼저 죽어야 할 사람은 상관비연이 아니라 바로 나이
지." 화만루가 말했다.
"단지 자네가 좀전에 한 말을 그가 듣지 못한 것이 애석하군." 육소봉이
말했다.
"그는 들었다네!"
화만루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는 설마 조금 전에 그가 여기에 있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는 지
금도 분명히 이곳에 있다네."
화만루가 말했다.
"그러니까 그는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고, 언제든지 자네를 죽일 수 있다
는 것이군." 육소봉이 말했다.
"맞네."
화만루가 말했다.
"하지만 자네는 별로 신경쓰는 것 같지 않구먼."
육소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 가장 큰 장점이지. 그러나 "
그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화만루의 안색이 변하는 것을 보았
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독하였습니다
즐~~~~감!
감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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