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빙하기가 끝나고 싹 트는 봄의 내음에 취한 이솔렛은 그것이 꿈 일까 두려웠기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겨울을 지새던 소년이 남기고 간 자그마한 온기가 점점 커져 긴 잠에 빠진 그녀의 행복과 인연을 깨웠다.
요즈렐이 날아와 이솔렛의 어깨에 앉았다. 그녀의 얼굴을 비비면서 요즈렐이 말했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다 끝났으니 이제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고.
스카이볼라가 끌려가는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던 리리오페와 나우폴리온이 말 없이 다가와 이솔렛을 안아주었다.
말은 안했지만 섬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저 어린 소녀가 왜 숨어 살았는지, 그동안 얼마나 큰 고통을 숨기고 있었는지를. 그동안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잘 이겨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이 박수가 되어 흘러나왔다.
공회당을 채운 박수 소리는 이솔렛을 안심시켰다. 지금 상황은 꿈이 아니었고 그녀는 아버지가 마음 놓고 시집 보낼 수 있는 멋진 어른이 되었다.
마침내 녹은 빙하가 시냇물이 되어 이솔렛의 얼굴을 적셨다.
그 모든 것을 흐뭇하게 보던 사제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 섬에 떠날 사람과 남을 사람이 정해지고 이주를 위한 준비가 시작되겠지만 적어도 그것은 저기 있는 소녀의 몫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공회당이 빠져 나간 후 이솔렛과 리리오페, 나우폴리온은 공회당에 한 통로로 향했다. 미리 이야기 했던 대로 헥토르가 꽁꽁 묶인 스카이볼라와 에키온과의 마지막 만남을 허락해 주었다.
스카이볼라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너희가 이겼다고 해서 끝났다고 생각하지 마라."
리리오페가 말했다.
"당신의 거짓말은 모두 들통났고 이렇게 묶여있는 신세지. 그런데 반전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해? 차라리 저기 에키온이 멍청하지 않다는 것을 믿겠다."
"이제는 아버지 취급도 해주지 않는 거냐?"
"생물학적으로 아버지라도 해도 진정한 의미의 아버지는 아니니까 신경 끄시지."
스카이볼라가 비웃었다.
"분명 너희는 다프넨을 찾으러 가겠지. 대륙이 곧 멸망할 것도 모르는 주제에 말이다."
이솔렛과 나우폴리온의 눈빛이 날카로워 졌다.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지?"
"섭정 각하, 그것은 말하면 안되는 사항 아닙니까?"
"에키온, 어차피 저놈들은 다가오는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그러니 사실을 알아도 상관이 없지"
헥토르가 섭정의 목에 칼을 겨룬 상태로 말했다.
"헛소리 말고 본론이나 말해."
"달의 섬 북쪽에 봉인되어 있던 '악의 무구'의 봉인을 풀어 대륙으로 보냈다. 네놈들도 그 책을 읽었으니 무엇인지는 알겠지?"
"대체...언제?"
"글쎄, 한 4년 쯤 되었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조만간 대륙이 멸망한다는 것과 너희가 다프넨과 함께 그것을 저지하려다가 대륙과 함께 사라질 운명이라는 거지."
금기가 풀린 여파로 기절해 있던 보리스가 깨어나 옆을 보니 호기심 많은 악마 데모닉과 그의 조수 탐정이 흥미로운 눈길로 관찰하고 있었다.
"조슈아, 막시민?"
보리스의 냉소에 얼어붙은 그들의 근육은 뇌에서 보낸 도망치라는 명령에 응하지 못했다.
에피비오노가 옆방에 옮겨 둔 두개의 조각상은 보리스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왔다가 한때 사람이던 두개의 종이 인형들이 바닥에 엎어져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티치엘이 막시민의 머리를 깡깡 두드리며 말했다.
"너 이 상태로 자는거야?"
티치엘의 옆에서 막시민을 구경하던 쥬스피앙이 보리스에게 물었다.
"야, 이 새끼 웃는데?"
"냅둬요. 좋은 꿈이라도 꾸나 보죠."
에피비오노가 말했다.
"금기가 풀렸으니 이제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저것들 데리고 필멸의 땅을 나가자꾸나."
쥬스피앙이 말했다.
"저희가 타고 온 비행선이 있습니다."
"그 고물은 완전히 망가졌다."
울상이 된 쥬스피앙을 뒤로 하고 양 옆구리에 두 종이인형을 끼운 보리스와 티치엘, 이스핀이 에피비오노를 따라갔다. 그들이 소원거울 앞에 멈춰 선 후에 보리스가 말했다.
"에피비오노, 소원 거울을 사용하면 우리가 흩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설정을 바꾸면 되니 안심해라. 우리는 제일 먼저 가야할 곳으로 이동할 거다."
에피비오노가 옆으로 비켜서는 것을 본 보리스가 의아해하자 그가 말했다.
"천년 동안 다른 사람이 신성찬트를 부르는 것을 듣지 못했다."
그 말을 들은 보리스가 찬트를 부르자 소원거울이 작동되었고 일행은 모두 성공적으로 문을 넘어갔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것은 거대한 성이었다. 방학 때 친구들을 따라 그 성에 놀러간 적이 있는 보리스는 망설임 없이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준 비취반지 성의 하인들은 소공작이 기절한 채로 들려오자 그들의 주인에게 달려갔다.
조슈아와 막시민을 그들의 방으로 올려보낸 프란츠 폰 아르님은 다른 일행들에게 방을 배정해 주고 아들을 보러 올라갔다.
보리스는 자신의 침대에 누워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했다. 에피비오노가 그에게 걸린 달의 섬의 금기를 풀어주었다. 소멸의 기원 문제를 해결하는데 신성찬트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그럴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그가 했던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이솔렛이 위험에 처한 걸까? 네냐플이 폐쇄되고 여기저기 떠돌아 다닌 탓에 그는 몇달 동안 그녀의 편지를 받지 못했다. 요즈렐이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이솔렛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사랑하는 임에 대한 걱정은 어쩔 수 없이 보리스를 잠 못 들게 했다.
'오랜만이야'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보리스는 일어나 앉았다. 익숙한 목소리였으나 누구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뭐야, 몇년 지났다고 벌써 까먹은 거야? 너 때문에 유령 삐졌어.'
"......엔디미온?"
'이제야 알아보네. 내가 준 주사위 가지고 있지? 그것을 굴리면 날 볼 수 있을거야.'
보리스가 엔디미온의 주사위를 굴리자 금발의 벽안을 가진 그의 유령 친구가 나타났다.
'다프넨, 그동안 잘 지냈어?'
"오랜만이야, 엔디미온. 나는 잘 지냈고 네냐플이라는 학교에 들어가서 좋은 친구들도 많이 사겼어."
'아, 거기 좋은 학교지. 후배님이 거길 다닌다니, 영광인걸?'
"....엔디미온 너 네냐플 학생이었어?"
고개를 끄덕인 엔디미온이 말을 이었다.
'그보다 궁금한 것이 많을 것 같은데, 뭐 부터 물어볼거야? 대답해줄게'
"이솔렛은 잘 있어?"
'역시 그거 먼저 물을 줄 알았어. 그녀는 잘 있고, 곧 섬을 떠날 거야'
"뭐?!"
'너 덕분에 섭정의 권위가 무너지고 섬을 지배하던 금기가 풀렸거든'
<다음화에 계속>
다음화 링크
https://m.cafe.daum.net/rocksoccer/ADrt/722482
원작: 룬의 아이들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