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마라드 최고 권력가, 폰티나 공작의 성에서 하인들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인근의 상단에서 사들인 귀한 식료품과 화려한 장식품들이 성문을 넘어오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것 들을 제자리에 배치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명에 따라 그들을 지휘하던 클로에 다 폰티나 양은 시계를 보았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면서 고즈넉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기에 그녀는 하인들에게 휴식을 명했다.
성 안으로 들어간 그녀는 손님방 앞에서 멈췄다. 똑똑하고 노크를 해봤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아니,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음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이곳에 서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안에 있는 그 사람은 여기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걸 알면서도 차마 쫓아내지 못했다. 오랜만에 본 그자는 한눈에 봐도 망가져 있었기에. 지난날 스치고 지나갔을 때 가슴에 맺혔던 이슬 자국이 그를 보고 싶다고 말해서.
가만히 문을 보던 클로에는 한숨을 쉰 후에 발길을 돌렸다. 지금까지 하인들이 식사를 챙겨 손님방 앞에 놓고 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빈 접시만 남아 있었지만 앞에 누군가 있으면 결코 문이 열리지 않았기에.
"에취!"
나우폴리온이 재채기를 하자 옆에 있던 이솔렛이 한심해 하며 말했다.
"그러니까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지난번에 왔을 때도 강에 빠졌으면서 조심성 없이 뛰어가다가 또 빠지다니. 그 머리로 어떻게 검의 사제를 하는 거예요?"
"다프넨. 스승의 흑역사를 마음대로 밝히...내 이 놈을... 에취!"
나우폴리온에 침을 재빨리 피한 헥토르가 문을 열고 리리오페를 불렀다.
"차는 다 됐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 리리오페가 갓 끓인 차를 들고 담요에 파묻혀 있는 나우폴리온에게 건넸다.
나우폴리온이 차를 다 마시고 얼굴에 열이 돌기 시작하자 이솔렛이 신성찬트를 사용했다. 그렇게 묶인 나우폴리온을
눕힌 그들은 차분하게 한번씩 검의 사제의 등짝을 때렸다.
이솔렛이 말했다.
"비명 횡사 할 뻔 한걸 구해준 걸 감사히 여겨요."
가만히 앉아서 고개를 끄덕인 리리오페가 덧붙였다.
"강 옆에 마을이 있었고 마침 이솔렛이 그들과 안면이 있었던 지라 얼어 죽지 않은 거잖아요. 이 정도는 당연히 해도 된다고 생각하시죠?"
인디언밥을 맞고 바닥에 엎어진 전직 환자는 잘못 대답하면 한 대 더 맞을 걸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켈티카에 있는 비취반지성의 응접실에 모인 도토리즈와 이피비오노, 샤를르트 공녀, 아르님 공작은 차를 마시면서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그들이 맞서는 문제는 대륙 전체가 힘을 모아야 하는 문제였기에 제일 먼저 동원 가능한 사람들에 대해 공유하고 있었다.
프란츠 아르님 공작이 말했다.
"일단 삼촌에게 심볼리온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전해드렸다. 폰티나 공작에게도 연락을 했는데, 아무래도 폐하께 보고 드리는 것은 그와 함께 해야 할 것 같구나."
조슈아는 고개를 끄덕인 후 칠판에 히스파니에 노인의 이름을 적었다.
다음은 루시안의 순서 였다.
"풍요의 기둥을 보수하는데 필요한 재료들은 칼츠 상단이 쓸어 오기로 했어!"
"현재 킵에 나가있는 에투알 들이 필멸의 땅의 현 상황을 감시하고 있다."
티치엘이 말했다.
"아버지와 교수님들은 심볼리온과 함께 풍요의 기둥을 찾고 계셔."
"달의 섬을 떠난 사람들 중에 내 검술 스승님과 신성찬트 스승님이 있어. 두 분 모두 각각 가나폴리 왕국에서 전해져 온 검술인 '티그리스'와 '티엘라'를 계승했으니 큰 전력이 될거야."
그 말을 하던 보리스가 막시민을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그 '시간을 멈추는 찬트' 기억나? 그거 이솔렛이 고쳐줄 수 있을 거야. 물론 더 늘리는 것도 가능하고."
기겁한 막시민이 대답했다.
"잠깐 잠깐, 너 나보고 그걸 연주하라는 거냐?"
"그 찬트를 사용하면 풍요의 기둥의 붕괴를 중지시키고 그 동안에 기둥을 보수할 수 있을 거야."
"싫어. 난 안해. 아무도 없는 동굴에 앉아서 같은 곡을 수백번 반복 연주하는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알아? 너가 하면 되는걸 왜 나한테 시켜?"
"난 악기를 다룰줄 몰라."
"그럼 네 여자친구가 하면 되잖아!"
"이솔렛은 싸움을 잘하거든. 넌 싸울줄 모르고. 귀중한 전력을 거기에 쓰는 것보다는 그녀가 전투에 나서고 너가 찬트를 사용하는 것이 낫지 않겠어?"
아무리 궤변의 달인인 막시민 일지라도 대륙의 운명이 걸린 상황에서 팩트에 대응해 떼를 쓰는 모지리는 아니었다.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막시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다시 회의는 이어졌다.
그들이 직면한 문제는 풍요의 기둥 만이 아니었다. 아이언 페이스, 비록 지금은 그가 네냐플에 갇혀 있지만 모든 일이 해결될 때까지 얌전히 있을 거라는 생각은 그 방의 누구도 하지 않았다.
이스핀과 막시민은 지금까지 했던 대로 대륙 각지로 흩어진 오토마톤을 추적하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베르나르 공자와 제레미 경의 행방에 대한 단서를 찾으면 일석이조 일리라.
보리스와 조슈아는 이솔렛, 나우폴리온과 합류한 후에 아이언 페이스의 부하들을 추적하고 루시안은 상단을 통해 거리의 소문을 긁어 모으기로 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거라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슈아는 머릿속에서 떠올린 생각을 그들에게 말했다.
"어쩌면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더 있을 수 있어."
"그게 누군데?"
"그 사람에게 돈만 쥐어주면 알아서 아이언 페이스의 부하들을 박살내고 다닐걸?"
조슈아가 하는 말을 이해한 사람은 막시민 뿐이었기에, 일행은 프라이팬으로 조슈아를 가격해 그 미친 생각을 중단시키지 못했다.
"샐러리맨을 고용할거야."
이미 한번 이곳에 온 적이 있는 이솔렛과 헥토르, 성격이 이상한 나우폴리온과는 달리 달의 섬 사람들은 폰티나 영지의 규모에 점차 하얗게 질려갔다. 책을 읽어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이 거대한 성은 그들이 우물안의 개구리, 아니 지렁이 였다는 것을 뼈 저리게 느끼게 했다.
영지를 걸어간 이솔렛은 기다리고 있던 폰티나 공작에게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요청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님."
"허허, 미스트리에 양의 부탁이면 당연히 도울 수 밖에 없으니 신경쓰지 말게. 그래서 저 분들이 미스트리에 양과 같이 살던 분 들이군."
"그렇습니다. 저희는 모두 가나폴리 왕국의 후예 입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경악했지만 능숙한 정치가 답게 폰티나 공작은 껄껄 웃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분들이었군. 하인들이 방을 안내해 줄테니 가서 짐을 풀게. 저녁에 환영 연회가 있을 테니까 쉬다가 정원으로 내려오면 되네."
나우폴리온이 말했다.
"난 제일 좋은 방으로."
이솔렛이 나우폴리온의 무릎을 걷어차서 주저 앉힌 후에 폰티나 공작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분이 워낙 괴짜여서..."
"괜찮네. 그보다 오느라 힘들었을 테니 어서 가서 쉬게."
구시렁거리는 나우폴리온을 이솔렛이 끌고 다니는데 하인들이 성을 안내하는 동시에 일행에게 방을 배정했다.
그들이 한 방을 스쳐지나가는 것을 본 나우폴리온이 말했다.
"이 방은 왜 그냥 지나치는 건가?"
그의 껄렁한 태도에 화가 났지만 주인의 손님이라 하인은 정중하게 대답을 했다.
"그 방에는 먼저 오신 손님이 묵고 계십니다."
그 말을 들은 나우폴리온이 그대로 문을 걷어찼다.
맙소사!
문짝이 떨어져 나가는 것에 경악한 이솔렛과 리리오페의 혼이 빠져나간 사이, 안을 들여다 본 나우폴리온은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하늘색 머리의 미소년이 한숨을 쉬며 문으로 돌아보다가 그대로 정지했다. 수년전, 여동생을 치료해 준 은인이자 자신이 모신 도련님의 스승이었던 그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월넛 선생님?"
<다음화에 계속>
원작: 룬의 아이들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