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지에는 마치 동물원에 사는 원숭이가 된 것 같아 저 사람들을 오물통에 던져 넣고 싶었다. 하긴, 당연한 건가.
납치 당해 이곳에 온 후로 방에서 나오지 않은 내가 저기 저 주인집 문을 부숴버리는 손님과 아는 사이인 것도 황당한 것 일텐데 환영 연회 까지 참석했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넓은 식탁의 주인 자리에 앉아 있던 폰티나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를 향하자 입을 열었다.
"아노마라드 왕국의 공작이자 한명의 시민으로써 위대한 마법 왕국, 가나폴리의 후손들을 뵌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본 연회는 과거 제 목숨을 구해준 카민 미스트리에의 딸과 그 일행을 위한 것이니 마음껏 즐겨 주시기 바랍니다."
축사를 끝낸 공작이 잔을 들어 올려 건배를 외치자 달의 섬 사람들도 앞에 놓인 포도주를 어색하게 집어들고 조금씩 홀짝였다.
아, 물론 전에도 연회에 참여해 본 적 있다는 금발 여성과 주인집 방 문짝을 뜯어내는 괴짜 검사는 빼고 말이다. 이솔렛 이라고 불리는 금발 여성은 성에 숨어 사는 공주 같이 우아하게 술잔을 기울였고 월넛 선생님은 입에 포도주를 들이 붓고 있었다.
일부러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란지에가 월넛 선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전혀 변하지 않으셨군요."
"넌 많이 변한 것 같구나, 란지에. 란즈미는 잘 있냐?"
란지에는 살짝 놀랐다. 자신에게는 그가 평생의 은인이기에 잊지 않고 있었지만, 월넛 선생에게 자신은 한때 가르치던 제자의 시종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란지에 뿐만 아니라 아팠던 그의 여동생도 기억해 주다니. 자신에게 있을거라 기대하지 않았던 따스한 느낌이 란지에의 가슴을 적셨다.
"......란즈미는 잘 있습니다. 그때 월넛 선생님이 도와 주신 후로 점점 나아져서 지금은 원하면 밖에 나가서 산책도 합니다."
월넛 선생이 란지에를 바라본다. 아니, 그의 깊은 눈빛이 란지에의 감정을 숨긴 금고를 부수고 강제로 '느끼게'한다.
참 잘 자랐다고. 다행이라고.
옆에서는 이솔렛이 폰티나 영애에게 보리스 미스트리에의 행방을 아는지 묻고 있었다.
란지에가 말했다.
"보리스는 지금 켈티카에 있습니다."
월넛 선생과 그 일행의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었다.
"네냐플이 폐쇄되고 그의 친구인 막시민 리프크네에게 수배령이 내려졌었습니다. 그래서 보리스와 막시민이 소속된 '도토리 빌라'의 사람들은 마법사들의 추적을 피하고 막시민을 다시 만나기 위해 길을 나누어 켈티카로 향했습니다."
생각보다 쉽게 다프넨의 행방을 알게된 것에 기뻐하던 것도 잠시였다.
과거 보리스의 편지에서 란지에에 대한 내용을 읽은 적이 있는 이솔렛이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보리스가 말했는데, 너도 도토리 빌라 잖아? 무슨 일로 여기 있는거지?"
"납치 당했습니다."
당황한 이솔렛과 달리 월넛 선생은 호탕하게 웃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물었다.
"네냐플이 폐쇄 되기 전에 막시민으로부터 권총 1자루를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뾰족한 수가 없어 시일을 끌던 중 아이언페이스라는 유령 같이 생긴 존재에게 습격을 당했습니다. 간신히 그를 정화 장치에 가두고 기숙사에 가서 잠이 들었는데, 일어나보니 마차에 태워져 이곳으로 배달되고 있었습니다."
자다가 납치당했다는 이야기에 이솔렛이 고개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월넛 선생이 물었다.
"보리스가 켈티카의 어디에서 묵고 있는지는 아느냐?"
"아르님 공작가의 영지인 비취반지성에서 지낸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월넛 선생이 속으로 웃었다. 공작가라면 켈티카에 도착해서 찾아 가기도 쉬울 것이다. 그 광경을 구경하던 폰티나 공작이 말했다.
"마침 저도 여기 란지에와 같이 켈티카에 가서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하룻밤 자고 내일 같이 출발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솔렛, 나우폴리온, 리리오페, 헥토르가 잠깐 대화를 나눈 후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물론 란지에는 왜 자신이 그들과 같이 가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연회는 그 후로 몇 시간 동안 이어졌다. 흠뻑 즐긴 사람들이 하나 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는 중에 란지에는 월넛선생이 나오는 것을 보고 뒤따라 나왔다. 아까 연회 중에 제대로 못한 감사 인사를 마저 하기 위해서 였다.
옆에 사람들이 완전히 사라지자 월넛 선생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나우폴리온 이다."
"란지에...로젠클란츠 입니다."
다음날, 아침을 먹고 그들은 마차에 나누어 타서 여행을 시작했다. 폰티나 공작의 배려로 란지에는 나우폴리온, 이솔렛과 같은 마차에 타고 있었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주로 란지에와 나우폴리온이었다. 그들은 지난 몇 년간 있었던 일들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말하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은인이 위험에 빠질 것을 우려한 란지에가 '민중의 벗'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것이다.
별이 빛나는 밤이 몇 차례 지나간 후에 마차는 켈티카에 도착했다. 비취반지성으로 향하는 마차에서 밖을 내다보던 이솔렛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40미터 가량 떨어진 곳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식당을 나서고 있었다. 그들 중 한명이 익숙한 색이었다. 흔히 사랑하는 사람은 어디서든 알아 볼 수 있다고 한다. 아버지가 어머니와의 일화를 말하면서 그 말을 했을 때 이솔렛은 100% 믿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람의 특징을 본능적으로 몸이 기억하기 때문에 언제든지 알 수 있다는 것을.
마차를 돌려서 가기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이솔렛과 나우폴리온이 내렸다. 달렸다.
친구들과 식당을 나오던 보리스가 무언가에 이끌려 고개를 돌린다. 산속의 시냇물 만큼 맑은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이쪽으로 달려오는 두 사람을 비춘다.
가슴속에 숨 죽여 있던 그리움이 눈물이 되어 나온다. 바람에 살랑 살랑 흔들리는 나뭇잎과 달려오는 이솔렛을 제외한 모든 것이 정지해 있다.
보리스는 달려가 이솔렛을 마주 안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입을 열 필요는 없었다. 그들의 몸 속에서 온기가 되어 서로를 적셨으니까.
그 광경을 보던 친구들은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재회한 연인이 무엇을 할 지 알고 있었기에.
오직 엔디미온 만이 구경하는 가운데, 보리스와 이솔렛의 입술이 겹쳐졌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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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룬의 아이들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