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복도를 걷던 클로에는 한 방문 앞에 멈추어 똑똑하고 문을 두드렀다.
"들어오세여!"
클로에가 문을 열고 방에 들어가자 작은 금발 소녀가 그녀를 반겼다.
"란즈미, 책 읽고 있었어?"
란즈미가 짜잔하고 책 표지를 보여주었다.
"클로에 언니가 준 '가나폴리 왕국사'를 읽고 있었어요!"
"어머, 그렇게 좋아해 주니까 한권 더 사주고 싶은데?"
"그것보다는...우리 산책가요!"
클로에가 은은하게 미소를 띈채 대답했다.
"그럼, 정원을 한바퀴 돌고 오자."
란즈미는 클로에가 건네준 옷을 후다닥 입고 휠체어에 올라탔다. 그들은 정원을 거닐면서 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릴 때 소아마비를 앓은 후유증으로 꽃을 본 적이 거의 없었기에, 란즈미의 호기심과 클로에의 지식은 시냇물 흐르듯이 이야기 꽃을 피웠다.
"언니"
란즈미가 심각한 얼굴로 클로에를 불렀다.
"란즈미, 무슨 일인데?"
"언니, 우리 오빠 좋아하죠?"
클로에의 얼굴이 태양이 자러가면서 남긴 노을처럼 물들었다. 어린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는 자신이 란지에를 많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럴줄 알았어요!"
란즈미는 웃으며 재잘거렸다.
"언니가 오빠를 볼때마다 얼굴에 대놓고 써있었거든요! '나는 란지에 로젠클란츠를 사랑한다'라고요."
"그게...그정도로 티났어?"
"에이~ 저 밖에 몰라요. 제가 어릴때 부터 남의 눈빛에 담담긴 감정을 읽는 데 익숙했거든요."
클로에는 화제를 돌려야 하나 생각했다. 이 아이가 남의 감정을 잘 읽게 된 것도 아이의 고통스러운 과거 때문이니까.
"그래서! 저는 언니와 오빠가 꼭! 결혼했으면 좋겠어요."
"뭐?"
사교계에 입성한 후 필요한 모습을 연기하는데 능숙해 졌지만, 이번만큼은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드러내고 말았다.
"오빠가 어릴때부터 저를 돌본다고 고생했는데, 이제는 가정을 꾸리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정신을 다 잡은 클로에는 란즈미의 말을 경청했다.
"언니라면, 오빠를 행복하게 해줄 거라고 생각해요.비록 지금은 방에 틀어 박혀 있지만, 언니가 넣어주는 책과 식사도 계속 받잖아요. 거기다가 레시피를 연구해서 오빠가 좋아하는 시짜매 절임도 재현했고요. 거기다가 결정적으로, 언니는 오빠한테 필요한 것과 좋아하는 것들을 본능적으로 파악하고 있으니까요."
뭐라 답해야 할지 알지 못했기에, 클로에는 란즈미에게 정원을 좀더 구경 시킨 후에 집으로 들어갔다.
클로에는 세수를 해서 붉어진 얼굴을 식힌 후에 란지에의 방을 찾아갔다. 문을 두드린지 몇분 지나지 않아 란지에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가시죠"
그들은 응접실로 들어가 마법을 펼쳤다. 그러자 응접실 중앙에 여러개의 화면이 떠올랐다.
네냐플의 레오멘티스 교수, 에투알의 단장, 마지막으로 란지에와 클로에.
그들은 세계멸망에 대응하기 위해 움직이는 대 아이언페이스 전선의 한 축을 담당하는 인물들 이었고, 그날은 2달전부터 1주일에 한번씩 있는 지도부 회의가 있는 날이었다.
에투알의 단장이 제일 먼저 말문을 텄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특별한 변화가 없습니다. 필멸의 땅의 확장 속도를 늦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다음 순서는 레오멘티스 교수 였다.
"지난 1주일간 우리는 큰 진전을 이루어 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풍요의 기둥'의 위치를 알아냈다는 사실입니다."
에투알의 단장이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그곳은 어디 있습니까?"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풍요의 기둥'은 '달의 섬'에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고, 심볼리온에서 정확한 위치 파악을 위해 정찰대를 파견했습니다."
"'달의 섬'이면 가나폴리 왕국의 후예들이 살던 섬 아닌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프시키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엄청난 성과임이 분명했다. '메타모르포시'가 일어난 변종 프시키들은 이스핀 샤를의 '블러디드' 능력을 사용해야만 죽일 수 있었으니까.
란지에가 물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레오멘티스 교수가 답했다.
"총과 대포 입니다."
"네?"
아니, 분명 프시키는 물리적 공격은 통하지 않고 마법적인 공격만 통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녀가 자세하게 설명하기 시적했다.
"프시키는 근본적으로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가 보는 형상은 에너지를 담는 그릇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릇을 파괴하면 프시키를 죽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물리력으로 프시키를 죽일 수 없고 마법으로만 소멸시킬 수 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그것은 단지 인간이 가할 수 있는 물리력에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최근 밝혀졌습니다. 1달 전 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되기 시작한 총과 대포로 실험해 본 결과, 프시키를 성공적으로 파괴했습니다."
"그리고 메타모르포시로 생성된 변종 프시키에 대응하기 위한 힌트도 얻었습니다. 에피비오노 님에 따르면, 샤를르트 대공녀 님이 가진 '블러디드' 능력은 프시키가 가진 에너지와의 공명 현상을 이용해 프시키를 소멸시킨다고 합니다."
"프시키 내부의 있는 에너지가 '블러디드' 능력과 공명하면서 에너지를 가두어 둔 그릇을 파괴한 것입니다. 그점으로 보아, 변종 프시키를 마법으로 소멸시킨 사례가 없는 것은 기존 프시키에 비해 수용 가능한 마력의 용량이 기하 급수 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입니다."
란지에의 옆에 있던 클로에가 물었다.
"그럼, 마법사들을 끌어 모으면 '메타모르포시'도 해결할 수 있는 건가요?"
"이론 상으로는 그렇지만.. 에피비오노 님에 따르면 가나폴리 왕국의 왕 정도의 역량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지금 당장은 군인들에게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군요."
란지에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굳이 살아 있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클로에가 자료를 공중에 띄우고 란지에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신을 차린 란지에는 자료를 띄우고 하나 하나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 1주일 동안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알려드려야 할 것은 아이언페이스가 운영하던 철강 길드를 찾아냈다는 사실입니다. 현재 그들을 추적하는 중인 보리스, 이솔렛, 조슈아에 의해 발견 되었습니다."
그들이 보고 있는 화면에 쟁반 모양 장치가 나타났다.
"이것은 그들이 개발중이던 기계로, 분석 결과 비행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으며 총과 폭탄 등 다양한 무기를 설치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가나폴리 왕국에서 사용되던 각종 무기가 복원되어 실제 작동이 가능했습니다."
"오를란느 측에서는 3일전에 베르나르 대공자가 갇혀있는 장소를 알아냈으며, 지금 구출 작전이 진행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칼츠 상단은 대륙 전체에서 '풍요의 기둥' 보수 및 곧 있을 전쟁에 대비한 물자들을 쓸어 담아 '달의 섬'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샐러리맨은, 아이언페이스가 탈출하지 못하도록 지키라는 명령을 받고 네냐플로 향하고 있다고 합니다."
사실 아이언페이스의 심장이 담긴 오토마톤도 막시민이 5개 중 3개를 찾아냈지만, 숨겨야 하는 사실도 있는 법이었다.
회의를 마친 란지에는 곧장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란즈미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빠, 일 다 끝났어?"
란지에는 옆에 앉아 란즈미의 머리카락을 쓰다 듬었다.
"응, 오늘은 끝났어."
"오빠는 이 싸움이 끝나면 무엇을 하고 싶어?"
"글쎄,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오빠가 생각해보고 말해줄게."
"그럼 우리 여행가자! 나랑, 오빠랑, 클로에 언니랑 셋이!"
"응? 걔는 왜?"
"클로에 언니가 나 재미있게 해주기도 하고, 오빠랑 있을 때면 언니가 행복해 보여서!"
무슨 말이지? 란지에는 동생의 말에 의아해 했다. 아니, 무슨 뜻인지 알지만 모르고 싶었다.
란지에가 엄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란즈미, 클로에 씨는 바쁜 분이야. 그리고 아직 다리도 불편한데, 여행은 너무 이른 것 같다."
"괜찮아! 엔디미온 폐하가 다리 고쳐주겠다고 하셨는걸! 거기다가 언니도 좋다고 했어!"
동생한테 약한 란지에는 더 이상 그녀의 말을 반박하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어디서 고양이 소리 들리지 않았어?"
야아~옹!
네냐플의 작은 고양이는 자기를 바라보는 개를 향해 울었다. 그 고양이는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해도 '재단사'라는 이명으로 불린 암살자, 류스노 덴 이었다.
트라바체스 칸 통령의 4익 중 유일한 생존자로써 겨울의 검의 새 주인, 보리스 진네만의 행보를 감시하기 위해 네냐플에 잡입했던 그는 종그날의 실수로 인해 안고니나 커튼에 휘말려 고양이로 변한 것이었다.
너무나도 간단한 임무에 반쯤 즐기러 온 것과는 달리 그의 네냐플 생활은 고행의 연속이었다.
저기 저 스노우라는 멍멍이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물론, 대마법사의 딸이라는 금발 소녀가 고양이 액체설을 증명한다며 그를 실험체로 쓰거나 시험 기간이 만든 네냐플 좀비들의 잔해에 파묻힌 것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고양이의 예민한 감각에 무언가가 걸렸다. 터벅 터벅. 일정한 박자로 들리는 발소리. 몇개월 만에 사람의 발소리가 네냐플을 울렸다.
네발로 급하게 달려간 고양이는 풀숲에 몸을 숨긴 채 길을 걷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사람이다. 저놈이 여기 무슨 일로 온거지? 딸을 네냐플에 보내려는 건가?
그가 지켜보는 사이 벨노어는 토끼굴에 도착했다. 네냐플에서 일어난 메타포르포시의 여파로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는 쉽게 문을 따고 들어갔다.
문이 열리자 느껴지는 불길한 기운. 류스노 덴은 암살자 였지만, 암살대상이 아닌 사람들이 해를 입는 것을 즐기지는 않았다. 이곳은 네냐플. 누구에게 해를 끼치지도, 누군가가 해치려 하지도 않는 학문 주의자 들의 세상.
류스노 덴은 아무 상관 없는 벨노어에 의해 그들이 피해를 보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인정하지 않지만, 그동안 이곳에 나름 정이 들기도 했다.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고양이가 포도원으로 뛰어 든다. 뚜벅 뚜벅 건물 내부에 울리는 구두 소리와 그 뒤를 살금 살금 쫓아가는 작은 고양이.
마침내 정화 장치에 도착한 벨노어는 램프를 둔채 여러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막아야 한다!
류스노 덴은 앞 발톱을 세운 채로 달려 들었다.
야옹!
그의 할퀴기 공격은 너무나도 간단하게 막혔다. 아무리 전설적인 암살자라도, 고양이는 고양이일 뿐이었다. 류스노 덴의 목 뒷덜미를 잡은 채 반대편으로 휙! 던진 후에, 벨노어는 정화 장치를 개방했다.
쏴아아!
정화장치에서 흘러나오는 불길한 연기. 이윽고 연기는 한 남성의 형체로 변했다.
"아노마라드 출신 인간 벨노어가 '쇠의 왕'을 뵙습니다."
아이언 페이스는 자신에게 절하는 벨노어를 흘끗 바라 본 후에 류스노 덴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쥐 새끼가 있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림자에서 금발머리 남자가 걸어 나왔다.
"소문 대로 눈치가 빠르군. 쇠 인간 씨, 네놈이 나오지 못하게 하라는 의뢰를 받았음에도 한발 늦었으니까 다시 처넣는 것은 내가 해야 겠지?"
샐러리맨은 류스노 덴을 신경쓰지 않은 채 아이언페이스에게 검을 겨누었다.
아이언페이스가 탈출하는 것과 동시에 인간으로 돌아 온 류스노 덴도 검을 빼들었다. 딴 생각을 잠깐 하면서. 미친 놈인가? 저놈에서 나온 불길한 기운이 방을 가득 채웠는데 그걸 모른다고?
하지만 류스노 덴도 옆의 남자가 누군지 잘 알고 있었다. 샐러리맨. 돈만 주면 무슨 짓이든 하면서도 살인에서 예술을 추구하는 미친 사람. 그러나 지금 같이 검을 든 사람이 그 라는 사실이 퍽 든든했다.
<다음 화에 계속>
다음화 링크
https://m.cafe.daum.net/rocksoccer/ADrt/722495
원작: 룬의 아이들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