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깬 이스핀은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분명히 오빠의 검에 맞고 의식을 잃었는데?
이스핀의 얼굴 위로 인영들이 드리워 졌다.
그녀를 내려다 보는 6개의 어린 얼굴들 이었다.
차림새가 자신이 아는 한 사람과 비슷한 아이들.
아니 청년들 인가? 십대 중반은 되어 보이는데.
맏이로 보이는 한 아이가 말했다.
“괜찮으세요? 아까 보니까 피를 많이 흘리셨던데요.”
이스핀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아이들이 강제로 눕혔다.
“오빠가 약초 캐러 갔는데 곧 올거예요.”
약초? 오빠? 그럼 이 아이들은 막시민의 동생들 인가.
이스핀은 네냐플에 입학한 이후의 막시민의 모습을 조사했지, 그 전까지의 막시민의 모습은 알지 못했다.
실제로 콜레트의 성에 조슈아 폰 아르님이 찾아올 것을 예상 못했지 않았던가.
분명 오랜만에 막시민이 돌아온 것일테도 그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분들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도 자식이 갑자기 또래 여자애를 데리고 왔음에도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상했다.
그렇기에 이스핀은 다른 것을 물었다. 어린 애들이 불편하지 않았으면 했기 때문이다.
“여기가 어디인지 물어도 되겠니?”
처음 그녀의 안부를 물었던 소녀가 대답했다.
”여기는 코츠볼트 고요. 오빠가 언니를 히스파니에 할아버지 집으로 옮겼어요. 할아버지는 최근에 바쁘셔서 저희가 언니를 돌보고 있었고요.”
히스파니에라면 이스핀도 알고 있었다.
조슈아가 그들을 기꺼이 도와줄 사람으로 작성한 목록을 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황상 그를 매개로 막시민과 조슈아가 친해진 것 같았다.
그렇게 한동안 수다를 떨다 보니 문이 열리고 막시민이 들어 왔다.
“일마, 시켜둔 것들은 다 끝냈지?”
그동안 이스핀과 대화를 나누던 소녀가 대답했다.
“응, 준비 다 끝내 뒀어. 바로 약만 만들면 될거야.”
그 말을 들은 막시민은 방에서 주전자를 챙겨서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마 리프크네가 이스핀에게 말했다.
“저희는 부모님이 안 계세요.”
이스핀은 당황했다.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동안 대화를 다른 방향으로 유도 했었다.
그런데 스스로 말해버리다니.
“오빠가 4살일 때부터 저희들을 돌보았어요. 구걸도 하고, 서리도 하고, 산에 풀 중에서 먹어보지 않은 것이 없었어요.”
이스핀은 가만히 그 말을 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지금까지 오빠가 데려온 친구는 단 한명 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언니가 두번째 고요.”
이스핀은 첫번째가 아마 조슈아일 거라고 짐작했다.
“솔직히 언니가 오빠랑 무슨 사이인지는 잘 모르겠어요. 동료 일지, 친구 일지, 아니면 그 이상의 관계일지. 그래도 오빠한테 소중한 사람인 것은 확실한 것 같아서 말하는 거예요.”
일마 리프크네가 말을 이었다.
“저희는 오빠가 이제 자신의 삶을 살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어린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가고 싶은 곳에 갔으면 좋겠어요. 저희도 이제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자랐으니까요.”
“그러니까 도와주세요. 오빠 성격상 저희가 말해도 안 듣고 계속 저희를 지켜줄려고 할테니까, 오빠 친구들이 잘 이끌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이스핀이 생각이 잠기자 일마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았다. 대신 이스핀의 안색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 아마 막시민이 부탁한 거겠지.
30분 쯤 지나자 막시민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쟁반에는 미음과 독특한 냄새가 나는 액체가 있었다.
일마 숟가락으로 미음을 푸며 말했다.
“드세요. 이 약은 산속에서 나는 약초를 달린 건데, 출혈이 심할때 좋아요.“
어릴적 아플 때 간호해 주었던 오빠가 생각나, 이스핀은 울적해졌다. 이제 그들은 예전의 관계로 돌아가지 못할 터 였다.
앞에서는 일마가 여전히 수저를 내밀고 있었다. 끊어진 인연과 계속될 인연. 이스핀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는대로 받아 먹었다.
이스핀이 식사를 마치고 약도 먹는 것을 확인한 막시민이 동생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아마 편하게 있으라는 의미겠지. 침대에서 뒹굴던 이스핀은 마침내 잠이 들었다.
아이언 페이스는 산 정상에 올라 주변을 둘러 보았다. 구름 한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로 푸른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아이언 페이스 옆에 서 있던 한 남자가 말했다. 이스핀은 본 적 없는 자였다.
“쇠의 왕이시여, 정말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아이언 페이스가 말했다.
“본래 이 자연은 인간의 것이 아니였다. 수많은 동식물과 곤충들의 것이었지.”
몸을 숙인 아이언 페이스가 꽃의 향기를 맡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스핀은 소름이 돋았다. 저자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자였나?
”그리고 생태계는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었지. 그리고 그것을….너희 인간이 망가트렸다.“
남자가 물었다.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이언페이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영상이 나타났다.
대륙 곳곳에서 고통 받는 생태계의 모습들.
인간이 농사를 짓기 위해 불태워 지는 숲과 집을 잃은 야생 동물들.
평생을 좁은 우리에서 살다가 도축당하는 가축들.
인간이 버린 마법 부산물에 오염되는 강과 바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 베어진 나무들과 민둥산의 모습.
장식품으로 쓰일 상아를 얻기 위해 사냥 당하는 코끼리들.
사내에게 걸어간 아이언 페이스가 이마에 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인간들이 사라진 세계가, 아름답지 않나?”
아이언페이스가 사내에게 보여주는 환상이 이스핀의 머릿속에 흘려 들어왔다.
짹짹하고 산속 시냇가에서 노래 부르는 종달새.
푸른 들판에서 풀을 뜯는 양들과 그들 주위를 껑충 껑충 뛰어 다니는 토끼들.
맑은 강을 헤엄치는 돌고래들의 모습.
사내가 황홀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름답습니다.”
아이언페이스가 흡족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그가 진짜 왕인 것처럼 묵직한 걸음이었다.
“자네가 나를 꺼내 주었으니 소원을 하나 들어 주도록 허지.”
사내가 절을 하며 대답했다.
“폐하! 수년전 저의 집에서 일하던 하인이, 저를 배신하고 저희 가문을 몰락시켰습니다.”
악마가 교수로 초빙할 만한 웃음을 지으면서 사내는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것은 그 하인의 여동생이 쓰던 머리끈 입니다.”
머리끈을 바닥에 내려둔 채 아이언 페이스가 땅을 손으로 짚었다.
이스핀은 소름이 돋았다. 옅은 광기가 보이는 얼굴로 아이언 페이스가 명령했다.
“일어나라”
이스핀은 식은 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었다. 방금 전 꾼 꿈이 아직 생생했다. 아니, 어쩌면 현실 일지도 몰랐다.
인기척을 느낀 막시민이 방으로 들어왔다.
“무슨 잠자는 숲속의 공주도 아니고, 20시간 동안 이나 한번도 안 깨냐?”
이스핀이 다급히 물었다.
”동생들은 어디 갔어?“
”걔들? 너 먹인다고 한달 월급 털어서 소고기 사러 갔다. 그러니까 얌전히 누워서 이거나 먹고 있어.“
죽과 약을 건내며 막시민이 말했다.
”꿈에서 아이언 페이스가 나타났어.“
막시민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설마, ‘사과’ 때문이냐?“
사과. 이스핀에게 ‘블러디드’ 능력을 주고 꿈을 통해 아이언 페이스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 정체 불명의 과일.
그렇기에 막시민은 그냥 넘길 수 없었다.
“꿈에서 아이언 페이스가 인간을 몰살시킬 거라고 했어.“
약을 두 모금 만에 다 마신 뒤, 이스핀은 막시민을 따라 마을로 향했다. 아직 달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녀는 군용 식량을 씹으며 바삐 걸었다.
5분쯤 갔을까, 마을에서 불길이 치솟으며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울렸다. 불안해진 막시민과 이스핀이 조심스럽게 마을로 숨어들었다.
인간 형상을 한 괴물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도망치던 한 남성의 목을 괴물이 물어 뜯자, 그 사람도 괴물로 변해 다른 사람들을 물어 뜯었다.
한 검사가 검을 휘두르자 괴물의 목이 떨어졌다. 그러나, 머리를 잃은 몸이 달려 들어 그를 넘어트리고 머리가 통통 뛰어 물어 뜯었다.
한쪽에서는 괴물들이 어린 아이를 산채로 잡아먹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막시민은 이스핀을 이끌어 어릴 때 드나들던 개구멍으로 이동했다.
마침내 푸줏간에 도착한 순간, 그들은 막시민의 동생들을 볼 수 있었다. 6명이 모두 함께 있었다.
이스핀이 황급히 막시민의 눈을 가렸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치우고 동생들을 바라 보았다.
한치의 냉정함도 잃지 않은 채, 분노와 슬픔으로 가득찬 얼굴로.
괴물들이 동생들의 배를 가르고 살과 내장을 뜯어 먹는 광경을 머릿속에 새겼다.
<다음화에 계속>
다음화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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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룬의 아이들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