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귀정 눈꼽재기창 / 신순임
두둥실 흘러가는 보름달 따라
밤 마실 나섰는데
희끄므리한 안강평야 뒤로
고층건물 야경 물어 나르는 반딧불
회화나무 꽃등 켜 밤길 밝히네
솟을대문 앞에 서서
인기척 안으로 실어보내도
문지기 소식 없어
행랑채 눈꼽재기창 밀어보니
성독*소리 취한 반딧불
상쇠 상모 돌리듯 빙빙 뜰 돌리고
배롱나무 걸터앉은 보름달
한자 한자 받아 적으며 글월 훔치느라
모기가 물어도 모르는데
누(樓)에 오르니 무성한 나락 그림자
독락당 가는 길 가리어
옥산길 가늠도 아니되는데
회재 할배 시 두수
‘영귀정을 오르며’가
달빛에 도드라지네
* 성독 : 글을 소리 내어 읽음
* 회재 : 이언적(1491-1553)
- 신순임 시집『양동 물봉골 이야기 둘』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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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강 이씨 문중에서 이언적 선생을 기리는 곳으로는
이언적이 태어난 양동마을과 낙향해서 몸을 의탁한
옥산마을이 있다.
선생과 정실부인 사이엔 적자가 없어 5촌 조카 이응인을
양자로 받아들여 무첨당을 종가로 해서 지금껏 뒤를
잇고 있다. (시인은 종가의 며느리이기도 하다).
친자이면서 서자인 이전인은 유배지까지 따르며
자식 된 도리를 다하여 독락당 재산을 물려받았으니
또한 지금껏 후손이 뒤를 잇는 계기가 되었다.
옥산서원의 서얼 허통 문제로 갈등을 겪기도 했던
양 집안은 무시로 변하는 세태 속에서도 옛 문화와
전통을 잘 이어오고 있다.
영귀정은 무첨당 위쪽 언덕에 자리 잡아 안강평야가
내다보이는 곳이다. 안강평야 저쪽 편엔 독락당이 있다.
논어에서 인용한 걸로 알려진 영귀(詠歸)는 벼슬에
연연하기보다는 맑은 물에 놀다가 노래하며 돌아오겠다는
것인데, 실제 이언적 선생의 시에도 오랫동안 속세에
시달린 몸을 말하며 술 한 단지 이고 언덕을 오르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다.
종부인 시인은 밤 마실 나왔다가 반딧불이 따라
영귀정에 이르렀나 보다.
닫힌 대문 대신 손바닥만 한 눈꼽재기창으로 반딧불을
다시 보고 마치 선생의 글 읽는 소리 따라 반딧불이가
춤추고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는다.
이미 <무첨당의 오월>, <앵두세배>, <양동 물봉골 이야기>
등으로 전통 문화와 종가 문화 그리고 세상살이의
이모저모를 풀어내왔던 시인답게 보름밤의 풍경을,
과거와 현재를 이으며 순간적으로 잘 포착해낸 것이다.
영귀정 들어가는 솟을대문엔 이호문(二乎門)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앞의 논어에서 가져왔다는 말이 맞겠지만,
손님이 두 번은 불러야 나온다는 의미로 장난스럽게
새기기도 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생각이 문득 든다.
두 아들을 생각하며 양동 무첨당 쪽으로 한 번,
옥산 독락당 쪽으로 한 번 공평하게 불러보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당신의 상식에 따라 법통을 잇는
일도 중요하고 그 못지않게 피를 잇는 것도 중요하다면,
더하고 덜할 것 없이 둘 다 嫡子인 거다.
/ 이동훈 시인
이 시인의 시평에 덧붙여 지난 해 신 시인께서 보내주신
시집, <양동 물봉골 이야기 둘> 감사한 마음으로 애송하며
간직하고 있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시인께서만 쓰실 수 있는 시편들...건필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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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산
양동마을은 경주시 강동면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유서 깊은 양반마을로 1984년 12월 20일 중요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고, 2010년 7월 31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34차 회의에서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한국에서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전통마을인 양동마을은
한국 최대 규모와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표적인
조선시대 同姓취락으로써 월성 손(孫)씨, 여강 이(李)씨
양성의 양반가문이 서로 경쟁 및 협동하며 600여년의
역사를 일궈온 마을이다.
이황의 스승이자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大)학자 이언적을
비롯하여 지금까지도 주로 학자들을 많이 배출하고 있는
마을로 이 마을에서만 조선시대 과거급제자가 116명에
달했다.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전통가옥의 수는 전국 최다로
이를 포함하여 국보 1점, 보물 4점, 중요민속자료 12점,
경상북도지정문화재 7점 등 도합 24점의 국가지정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1992년 영국의 찰스 황태자가 방문한
곳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