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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화만루는 결코 쉽게 놀라서 얼굴이 변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육소봉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무슨 일인가?"
화만루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피비린내!"
육소봉이 말했다.
"무슨 피! 누구의 피란 말인가?"
화만루가 말했다.
"상관비연의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
그것은 상관비연의 피였다.
그녀의 인후는 이미 절단되었고, 피는 아직 굳지 않았다. 그녀의 굳어버린
얼굴에는 놀람과 공포가 가득했는데, 대금붕왕이 죽을 때의 표정과 흡사했
다.
확실히 그녀 또한 자기 자신을 죽이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결국 독수
에 걸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죽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녀
의 애인인가? 아니면 정이 없는 사람인가? 사람은 없고 단지 한조각 어둠만
이 있을 뿐이었다.
바람결에 묻어나는 피비린내는 아주 짙었다. 화만루가 암연히 말했다.
"그가 역시 그녀를 죽였군!"
육소봉이 신음을 토했다.
"으음!"
화만루가 말했다.
"그는 자네가 한 말을 전혀 믿지 않았던 모양이야." 육소봉의 얼굴이 일그
러졌다.
"으음!"
화만루가 말했다.
"당장 상관비연을 죽여 입을 막았으니, 세상엔 이제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없는 것이네." 육소봉이 말했다.
"그렇군."
화만루가 말했다.
"그러니 자네도 영원히 그를 찾지 못하겠는데."
"난 다만 누가 잘못을 저질렀든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
뿐이네." 화만루가 암연히 말했다.
"상관비연은 확실히 그 대가를 치렀네만, 그녀를 죽인 사람은?" 그녀를 죽
인 사람은 이미 어둠 속에 사라져버렸다. 아마 영원히 어둠 속에 묻혀 있을
지도 모른다.
육소봉은 갑자기 화만루의 손을 꽉 쥐더니 말했다.
"주인은?"
주인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본디 그들을 가두어놓았던 지하실에는 아무
도 없었다. 오래된 붉은 탁자는 바닥에 엎어져 있고 탁자 위의 주전자와 잔
은 모두 깨져 있었다.
육소봉이 말했다.
"그들은 한바탕 싸웠던 것이 분명하군."
화만루가 말했다.
"자네는 그 사람이 와서 주정 등을 끌고 갔다고 생각하나?" 육소봉은 차
갑게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그는 나 때문에 마음이 놓이지 않아 주정 등을 데리고 가 날
위협하고자 하는 모양이야." 화만루가 말했다.
"그가 순식간에 그들을 끌고 갈 수 있었던 걸로 보아 무공이 절대로 자네
에게 뒤떨어지지 않을걸세." 육소봉이 말했다.
"누가 뭐라나, 그의 무공이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적 없네." 화만루가
말했다.
"이렇게 무공이 높은 사람은 몇 없다네."
육소봉이 말했다.
"그러나 그는 실수한 거야."
화만루가 말했다.
"그렇지, 그는 쓸데없는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 육소봉이
말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그가 실수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준 것에 다름
없지." 화만루가 탄식하며 말했다.
"내가 말했지 않았나. 사람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른다고." 육소봉이 말했
다.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은 누구든지 마찬가지라네."
집은 무덤처럼 조용했다.
열 명이나 되는 사람이 조용히 앉아 육소봉을 바라보고 있었다. 범대선생,
간이선생, 시정칠협과 산서애는 이미 엄청나게 술을 많이 마시고 술상을 물
렸다.
친구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다보면 취하기 전에 술상을 물리기란 쉽지 않
은 법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정신이 말짱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취한
빛이 전혀 없고 오히려 기괴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그중 산서애의 표정은
더욱 어두운 빛을 띠고 있었다.
그는 육소봉을 응시하다가 갑자기 말했다.
"자네는 정말로 이 사건의 주모자가 그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육소봉이
고개를 끄덕이자 산서애가 이어 말했다.
"자신 있나?"
육소봉은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우리는 친구이고, 저는 당신들과 그의 관계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자신
이 없다면 왜 당신들을 찾아왔겠습니까?" 산서애는 두 주먹을 불끈 쥐더니
갑자기 책상을 쾅, 내리치고는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곽천청이 정말로 이 일을 저릴렀다면 나는 지금부터 그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겠소!" 범대선생이 차갑게 말했다.
"하지만 난 아직도 그가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다고 믿지 않소." 육소봉
이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로 믿을 수 없었습니다만, 그 이외에는 다른 사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범대선생이 말했다.
"그래?"
육소봉이 말했다.
"그만이 순식간에 주정 등 세 명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범대선생이 말했
다.
"이유가 충분치 않네."
육소봉이 말했다.
"그렇다면 그만이 금붕왕조의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함철산이 가
장 신임하는 사람이니까요." 범대선생이 말했다.
"그것 역시 불충분해."
육소봉이 말했다.
"그만이 이 사건에서 이득을 얻는 사람입니다. 함철산이 죽었으니 주광보
기각은 이제 그의 것이 되었어요." 함철산은 곽휴와 마찬가지로 늙은 악당
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그가 태감이라는 것을 의심하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육소봉이 말했다.
"그의 신분과 무공을 가지고 다른 일을 꾸미지 않았다면 무엇 때문에 함
철산 같은 사람의 부하가 되려고 했겠습니까?" 이 점은 범대선생조차 부인
할 수 없었다.
육소봉이 말했다.
"강호에선 청의제일루가 뜻밖에도 주광보기각 안에 있다는 것을 생각해낼
수 있는 사람이 절대로 없습니다!" 산서애가 놀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청의제일루가 주광보기각 안에 있다는 건가?"
육소봉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독고일학이 이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왔던 것이고, 그래서 곽천청이 먼
저 그의 내공이 소실되었다는 핑계를 대고는 그를 서문취설의 손에 죽게 만
든 것입니다." 이때 화만루는 줄곧 곁에 앉아 있다가 넌지시 말했다.
"손수청, 석수설 역시 그 비밀을 얘기하려고 했기 때문에 상관비연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산서애가 말했다.
"그녀들이 만일 이 비밀을 알았다면, 마수진과 엽수주는 어째서 모르고
있었단 말이오?" 육소봉이 말했다.
"그녀들도 알고 있었습니다!"
산서애가 말했다.
"허나 그녀들은 여전히 살아 있지 않소?"
육소봉이 말했다.
"엽수주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은, 상관비연처럼 그녀 또한 영준하고 무공
높은 곽천청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입니다." 산서애가 말했다.
"마수진은?"
육소봉이 말했다.
"만일 제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그녀 또한 반드시 곽천청의 손에 죽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엽수주가 그녀를 죽였을 가능성도 있구요." 산서애가 말했
다.
"그가 자네의 목표를 바꾸기 위해 산 뒤의 그 작은 누각을 얘기해서 자네
가 곽휴를 찾아가게 했던 것이로군." 육소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그 작은 누각에서 죽든 아니면 곽휴가 제 손에 죽든, 이 일은 모두
끝나게 되는 것이고, 그는 이 순간부터 아무런 걱정이 없게 되는 것이지요!"
산서애가 말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네가 그 괴팍한 노인과 아주 오래된 친구라는 것을 전
혀 생각지 못했었군." 육소봉이 말했다.
"그는 이 일의 결과를 알고 싶었기 때문에 엽수주더러 바깥에서 기다리며
소식을 알아오라고 했지요." 산서애가 말했다.
"단지 한 사람만이 자네들이 곽휴를 찾아가려는 것을 알았지." 육소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지만 엽수주는 한마디 잘못 말한 것이 있었습니다." 산서애가 말했
다.
"그녀가 무슨 말을 잘못 했나?"
육소봉이 말했다.
"그녀는 독고일학과 석수설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해서 그곳에 남아 있겠
다고 말했지요." 산서애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독고일학은 한 장문의 신분인데 어찌 그렇게 대충 매장할 수 있다는 말
이오?" 육소봉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엽수주는 어쨌든 현명하고 양심 있는 여자여서 어떻게 거짓말을 해야 할
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산서애는 한숨을 내쉬더니 씁쓸히 웃으며 말했다.
"자네 앞에서 거짓말을 하는 건 확실히 쉬운 일이 아니야." 육소봉이 말했
다.
"하지만 전 그녀 앞에서 발가락 여섯 개의 비밀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래
서 그녀는 곧장 곽천청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지요. 주광보기각과 곽휴의
누각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으니까요." 산서애가 말했다.
"그래서 곽천청만이 이렇게 빨리 그녀의 소식을 얻을 수 있었던 게로군."
육소봉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산서애가 말했다.
"자네는 일부러 이 비밀을 그녀에게 알려준 것인가, 아니면 아무 뜻 없이
그랬나?" 육소봉은 직접 대답하지 않고서 웃으며 말했다.
"저는 당시 그녀가 그곳에 나타나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것만 느끼고 있었
을 뿐입니다. 저는 좀 이상하다고만 느꼈지요." 산서애가 그를 보면서 또 탄
식하더니 말했다.
"자네를 육소봉이라고 불러서는 안되는 거였어. 자네는 한 마리 작은 여
우일세." 육소봉도 탄식하면서 말했다.
"하지만 전 도리어 곽천청을 존경합니다. 그는 정말 아주 생각이 주도면
밀하고, 냉철한 두뇌의 소유자여서 이 사건을 바둑에 비유하자면 상대방의
모든 수를 전부 계산하고 있던 셈이니까요." 산서애가 말했다.
"단지 그가 최후의 한걸음을 잘못 내디딘 것이 애석할 뿐이군 그래." 육소
봉이 말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쯤 잘못을 저지르기 마련입니다. 그 또한 사람이니까
요." 범대선생이 돌연 차갑게 웃더니 말했다.
"설령 그가 최후의 한 수를 잘못 두지 않았다 하더라도 자네는 여전히 그
를 찾아낼 수 있었겠지." 육소봉이 말했다.
"적어도 그때는 확실치 않았었습니다."
범대선생이 말했다.
"지금은?"
육소봉이 말했다.
"지금도 완전히 확신은 못합니다. 백에 구십 정도라고 할까요." 범대선생
이 말했다.
"자네는 왜 우리들을 찾아온 건가?"
육소봉이 말했다.
"당신들은 저의 친구들이고, 전 절대로 그와 싸우지 않겠노라고 당신들과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범대선생이 말했다.
"우리는 이미 친구 사이가 아니지 않나!"
육소봉이 말했다.
"아직은 친구이기 때문에 제가 온 것입니다."
범대선생이 말했다.
"자네의 약속을 거두어 가기 위해서 말인가?"
육소봉이 말했다.
"누가 잘못을 저질렀든, 모두 대가는 처러야 합니다. 곽천청도 마찬가지구
요!" 범대선생이 말했다.
"자네는 설마 우리더러 자네를 도와 그를 죽이러 가자는 건 아니겠지?" "
전 단지 당신들이 그에게 가서 내일 해가 뜰 때 제가 청풍관에서 그를 기다
리겠노라는 말을 전해주십사 하는 것뿐입니다!" 범대선생이 말했다.
"좋네."
그는 갑자기 몸을 날리더니 눈에 날카로운 빛을 발하며 육소봉을 응시했
다.
"덤비게나!"
육소봉이 말했다.
"덤비다니요? 무슨 말씀인지?"
범대선생이 말했다.
"출수(出手) 하게!"
육소봉이 말했다.
"제 말을 믿지 않는단 말입니까?"
범대선생이 말했다.
"난 단지 곽천청이 천금문의 장문이라는 것을 알 뿐이네. 범천의는 바로
천금문의 제자일세." 육소봉이 말했다.
"그래서 당신은!"
범대선생이 말했다.
"그래서 나 범천의가 살기 위해선 다른 사람이 곽천청을 죽이러 가게 할
수가 없다는 거네." 산서애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의를 위해서는 부모 형제도 돌보지 말라고 했는데, 자네는 이 말을 들
어보지 못했나?" 범대선생이 미소를 날리며 말했다.
"들어는 봤지만, 난 이미 전부 잊어버렸다네!"
간이선생 또한 천천히 일어나면서 말했다.
"우리는 본디 흑백이 불분명하고 경중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지." 만두를
팔던 사람이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이런 인간은 죽어야 마땅하다!"
간이선생이 말했다.
"맞네. 죽어야 마땅해."
만두를 파는 사람이 말했다.
"단지 애석한 것은 나 포우아도 바로 그런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이지." 간
이선생이 말했다.
"그러니 너 역시 죽어야겠군."
포우아가 말했다.
"죽어야 마땅하지. 그것도 지금 당장 죽어야 마땅해." 그는 갑자기 뛰어올
라 표창처럼 곧장 담으로 돌진해갔다.
그러나 그는 벽으로 돌진하지 않고 육소봉의 가슴에 와 부딪쳤다. 육소봉
은 그의 앞을 막아 섰다.
포우아는 공중으로 높이 솟아 몸을 돌려 두 발을 대들보 위에 디디고는,
곧장 석판을 잘라 갔으나, 석판을 자르지는 못하고 한 손이 그의 가슴을 가
볍게 쓰다듬는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가 단정히 똑바로 서자 바로 코앞에
큰 키에 고상하면서도 안색이 창백한 한 사람을 마주하게 되었다.
곽천청!
모든 사람은 전부 멍청해졌다. 육소봉조차도 얼이 빠졌다. 곽천청이 이 시
간에, 이 장소에 나타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가 나타나
리라고 감히 누가 생각했겠는가.
곽천청의 안색은 비록 창백했지만 표정은 아주 냉정했다.
포우아는 두 주먹을 꽉 쥐고는 떨면서 말했다.
"자네, 자네는 왜 날 죽이지 못하게 하는가?"
곽천청이 말했다.
"당신은 죽어야 합니까?"
포우아가 이빨을 물며 말했다.
"난 죽어야만 해."
"당신들이 만일 전부 죽어야만 한다면 천금문 전체가 사라져야 한다는 뜻
도 됩니다. 그러길 원하는 건 아니겠죠?" 포우아는 아주 멍청해졌다.
곽천청이 말했다.
"천금문이 당신들에게 무공을 전수한 것은, 당신들 스스로 죽으라고한 것
이 결코 아닙니다!" 포우아가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
곽천청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당신들과 무슨 관계지요. 다른 일 때문이라면 당신들 전부가 모두
죽어버린다 해도 전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포우아가 말했다.
"그러나 지금 자네는 "
곽천청이 말했다.
"지금 전 다만 당신들이 절 위해 죽기를 원치 않을 뿐입니다. 후에 어떤
만두 파는 사람이 저를 위해 죽었다는 말이 퍼지기라도 한다면 나 곽천청은
죄인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는 갑자기 가슴 속에서 면죽패를 꺼내서는 뚝
짤라버리며 말했다.
"나 곽천청은 재산도 있고 세력도 있습니다. 전 이미 이렇게 가난한 장문
을 맡을 생각이 없어졌으니, 지금부터 저와 당신들 천금문은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만일 누가 또다시 감히 저를 천금문 문하라고 말한다면, 전 그의
혀를 먼저 잘라버리고, 또 그의 두 발을 절단내겠습니다.
포우아는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눈이 붉어지면서 땅바닥에 엎드려서는
대성 통곡하기 시작했다.
산서애의 눈도 붉어져서 갑자기 하늘을 바라보며 미친 듯이 웃더니 말했
다.
"좋다. 곽천청. 넌 결국 곽씨 성을 가진 자로, 간신히 이 곽씨 성을 모독하
지 않았어." 곽천청은 그들을 한번 쳐다보지도 않은 채, 천천히 몸을 돌려
육소봉을 응시했다. 육소봉도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육소봉이 갑자기 길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왜 자네였나? 공교롭게도 왜 하필 자네란 말인가?" 곽천청이 차갑게 말
했다.
"자네 같은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영원히 알 수 없을걸세." 육소봉이 말
했다.
"난 자네가 뭔가 아주 놀라운 큰일을 할 것으로 알고 있었다네. 자네는
아버지의 큰 그늘 아래에서 한평생 보낼 생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런
일을 하리라곤 상상할 수 없었네." 곽천청이 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일이 바로 큰일이네. 나 곽천청 이외에 누가 또 해낼 수 있단 말인
가!" 육소봉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확실히 다른 사람은 할 수 없지."
곽천청이 말했다.
"자네 외에는 내 일을 망칠 수 있는 사람도 없지!"
그는 갑자기 하늘을 쳐다보며 길게 탄식하더니 말했다.
"이 세상에 나 곽천청이 있는 이상, 자네, 육소봉은 살아 있을 수 없어!" "
그래서."
"그래서 우리 두 사람 사이에선 결국 한 사람이 죽지 않으면 안 되네. 허
나 자네가 죽을지 내가 죽을지는 모르겠군." 육소봉은 길게 탄식하더니 말
했다.
"내일 해가 뜰 때면 아마 알게 될걸세."
곽천청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매일 매일에는 내일이 있으니, 내일의 약속을 오늘로 바꾼들 어떠하랴?"
그는 갑자기 몸을 돌려 문 밖으로 사라져 갔고, 단지 그의 냉담한 소리만이
멀리서 들려왔다.
"오늘 황혼 무렵에 청풍관 밖에서 자네를 기다리고 있겠네!"
황혼, 청풍관.
청풍관은 푸른 산 위에 있었는데, 푸른 산 위의 하늘은 이미 석양에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안개도 없이 옅은 흰구름이 멀리 어렴풋하게 떠 있는 것이 마치 안개처럼
보였다. 바람이 한 차례 불자 푸른 소나무 사이의 갈까마귀들이 놀라 날며
서쪽 하늘을 한번 빙, 감돌았다. 석양은 더욱 옅어졌다. 저녁 빛이 대지를
자욱하게 덮어갔다. 육소봉은 온 산에 창망한 저녁 빛을 마주 대하자 마음
이 저녁 빛보다도 더더욱 무거웠다.
화만루 역시 아주 적막한 듯 탄식하며 말했다.
"곽천청은 아직 안 왔는가!"
"그는 분명 올걸세."
"난 그가 이런 사람이라곤 생각지 못했다네. 그는 본래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육소봉이 침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공교롭게도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네." "이건 아마 그가 너무
교만해서 모든 사람을 다 이기려 할 뿐만 아니라 자기 아버지까지도 이기려
는 생각 때문에 그리된 것이지." "교만함은 본디 아주 멍청하고 어리석은 것
이지."
사람들이 너무 교만해지면 분명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게 되는 법이다.
화만루가 말했다.
"역시 교만하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책임을 미룰 생각을 하지 않는거라
네." 육소봉은 한참 침묵하더니 갑자기 물었다.
"자네가 만일 나라면 그를 놓아주겠나?"
"난 자네가 아닐세."
육소봉은 길게 탄식하더니 말했다.
"다행히 자네는 내가 아니지, 나 역시 자네가 아니고." 화만루는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
다.
청풍관, 그 오래되고 무거운 대문이 막 열렸다. 황의를 입은 도동이 등롱
을 들고서 걸어나왔다. 또 한 사람이 그 뒤에 서 있었는데, 곽천청이 아니라
황포도인이었다.
이 도인은 커다란 도포를 입었는데 머리는 이미 반백이었고 얼굴에는 아
주 엄숙한 표정을 띠고서 가벼운 걸음으로 걸어왔다. 보아하니 무공은 전혀
연마하지 않은 듯 보였다. 그는 사방을 한번 둘러보더니 곧장 육소봉에게로
걸어와 예를 갖추고 말했다.
"시주께서는 육소봉 공자가 아니신지요?"
육소봉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포장께서는?"
"빈도는 청풍이라고 합니다. 이 작은 도관의 주지이지요." "도장께서는 곽
천청의 친구가 아니십니까?"
"곽시주와 빈도는 바둑 친구로, 매달 빈도가 있는 이곳에 와서 며칠씩 머
물곤 했습니다." "지금 그 사람은?"
청풍의 얼굴에는 갑자기 아주 이상한 표정이 떠올랐다.
"빈도가 이곳에 온 것은 바로 시주를 모시고 그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입
니다." "그는 어디에 있는지요?"
청풍이 느릿느릿 말했다.
"그는 빈도의 방에서 기다린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작은 뜰은 아주 고
요했고 반쯤 열린 창 안에는 향불 연기가 가득했고, 가벼운 바람이 사방으
로 흩어지고 있었다. 문은 잠그지 않고 닫아만 둔 채였다.
육소봉은 작은 뜰을 지나갔다. 청풍이 문을 밀자 곽천청이 보였다. 그러나
곽천청은 영원히 그를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곽천청은 청풍도인의 침대에 죽어 있었다. 침대 옆의 책상 위에는 벽옥으
로 무늬를 새겨 놓은 잔이 있었는데 그 잔에는 아직도 술이 남아 있었다.
독주가! 곽천청의 얼굴은 회색 빛이었고, 눈과 코, 입에는 아직도 깨끗이 닦
아놓은 혈흔을 볼 수 있었다. 육소봉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청풍도인의 표정은 아주 참담했다.
"그가 왔을 때, 전 그가 어제 다 못둔 그 바둑을 두러 온 줄 알았었습니
다. 그에게 새로운 묘수가 있는 줄 알고 그 수를 어떻게 피해 갈까 생각하
고 있었죠. 그가 오늘 바둑을 둘 마음이 없다고 말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
까?" "그는 단지 술만 마시고자 했습니까?"
청풍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제서야 빈도는 그의 표정이 이상하고, 마음이 무겁게 보이는 것을 발
견했습니다. 또 그는 계속 한숨 지으며 무언가 중얼거리더군요." "그가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는 인생 백년이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는 말을 하는 것 같더군요.
또 이 세상에 이미 곽천청이 있는데 왜 공교롭게도 또 많은 육소봉이 나타
나야 하는가 하는 말도 했습니다." 육소봉은 쓰게 웃다가 참지 못하고 물었
다.
"이 술은 당신이 마련해준 것인가요?"
"술은 이곳에 있던 것입니다만, 술잔은 그가 직접 가져왔지요. 그는 천성
적으로 결벽증이 심해 다른 사람이 썼던 물건을 사용치 않았어요." 육소봉
은 술잔을 들어 냄새를 맡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과연 술잔에 독이 있군요."
"그는 몇 차례 술잔을 들었다가 다시 놓곤 했습니다. 마치 어려운 문제를
만나 결정을 못내리고 있는 듯했지요. 빈도가 그를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
그가 갑자기 하늘을 보며 세 번 크게 웃더니 술을 모두 마셔버렸습니다."
이 근심 가득한 도인은 두 손을 모아 합장하더니 우울하게 말했다.
"빈도는 그가 그처럼 젊은데 세상을 버리리라곤 정말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눈에는 이미 눈물이 맺히는 듯했다.
육소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잠시 시간이
지나서야 깊게 탄식하면서 말했다.
"그가 또 다른 사람의 얘기는 하지 않던가요?"
"없었습니다."
"주정의 이름을 들먹이지 않던가요?"
"아니요."
침상 옆에는 두다 만 바둑판이 놓여 있었다.
청풍이 중얼거렸다.
"세상일이 아주 변화무상하군요. 이 바둑판은 여전히 있는데 그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누가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육소봉이 갑자
기 말했다.
"그는 검을 돌을 두었습니까?"
"빈도는 언제나 그에게 한 수를 양보했었지요."
육소봉은 검은 바둑돌을 쥐고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내려 놓으
며 말했다.
"제가 그 대신 한 수 두겠습니다."
청풍이 처연히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두면 검은 돌이 지고 맙니다."
"이것 외에는 달리 둘 곳이 없습니다."
"이 판은 본래 그가 진 것입니다. 그 역시 알고는 있었습니다만, 줄곧 인
정하지 않으려 했을 따름이지요." 육소봉이 먼 곳을 응시하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허나 그는 이제 결국 패배를 인정했지요. 바둑은 바로 인생과 같아서 한
수만 잘못 두면 지고 마니까." 청풍은 갑자기 소매를 휘둘러 그 두다 만 바
둑판을 어지러뜨리고는 유유히 말했다.
"인생은 바로 바둑과 마찬가지니, 이기고 지는 것에 연연해할 필요가 뭐
있겠습니까?" "만일 진지할 필요가 없다면 또 이 바둑은 뭐하러 두겠습니
까?" 청풍은 그를 한번 보고, 두 손을 모아 합장하더니 천천히 눈을 감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바람이 한차례 불어 창문을 열어젖혔다. 밤은 이
미 대지를 자욱이 덮고 있었다.
육소봉은 침상에 누워 가슴 위에 놓인 술잔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술잔은
그의 가슴에 오랫동안 놓여 있었으나, 지금까지 전혀 마시지 않은 채 그대
로 두고 있었다. 그는 술을 마실 생각이 전혀 없는 듯이 보였다.
화만루가 말했다.
"자네 지금 주정을 생각하고 있나?"
육소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죽게 되면 마음이 선해지는 법이지. 곽천청이 이미 죽기로 결심
했던 바니, 반드시 더 이상 살인이라는 업보를 저질렀을 리가 없네. 지금 그
들은 아마도 무사히 집에 돌아갔을 거야." 이 말은 육소봉을 위로하는 말일
뿐 아니라, 그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기도 했다. 육소봉은 마치 듣지 않는 듯
했다.
화만루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어찌 되었든 이 시합은 결국 자네가 이긴 셈이네." 육소봉은 갑자기 한번
길게 탄식하더니 말했다.
"허나 최후의 한 수는, 나 자신이 둔 게 아니야."
"자네 뜻대로 두어진 것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네."
그는 또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난 비록 이기긴 했어도, 진 것 보다 더 괴롭다네." 화만루 역시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그는 왜 이 남은 바둑을 다 두려 하지 않았을까?"
"그 스스로 이미 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마치 어제 역시
바둑을 다 두려하지 않았던 것처럼 " 이 말을 다 마치는 순간, 육소봉
은 갑자기 침상에서 뛰어 올랐다. 가슴 위의 술잔이 땡그랑, 하고 떨어지더
니 땅에 떨어져 깨져버렸다.
화만루는 그가 여태까지 자기의 잔을 깨뜨리지 않으려 했음을 알고 있었
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이 말을 전부 잊어버린 듯 멍하게 놀라서 그곳에 서
있었다. 단지 몸이 머리 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떨리고 있음을 느낄 뿐이었
다.
화만루는 그가 왜 그러는지 전혀 묻지 않았다. 화만루는 그가 스스로 말
해 줄 것을 알고 있었다.
육소봉이 갑자기 말했다.
"어제도 그는 바둑을 다 두지 않았지?"
"그렇지."
"어제도 그는 청풍관에서 바둑을 두었지?"
화만루의 안색도 변했다.
육소봉이 말했다.
"상관비연이 만일 그의 손에 죽었다면, 그가 어떻게 어제 저녁에 이곳에
서 바둑을 둘 수 있었을까?" 상관비연은 수백 리 밖에 있었으니, 설사 곽천
청에게 기다란 날개가있었다 하더라도 하루 동안 갔다 올 방법은 없는 것이
었다. 상관비연은 바로 어제 저녁에 죽었으니까.
화만루는 손발이 차가와짐을 느끼며 탄식하듯 말했다.
"우리가 혹시 그를 오해한 것이 아닐까?"
육소봉은 두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적어도 상관비연은 그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네."
"왜 그는 변명을 하지 않았을까?"
"그가 나와 청풍관에서 만나기로 한 것은 바로 그 도인이 어제 자신과 청
풍관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음을 증명해 주길 바랐기 때문일 거야." "그가 혼
자 변명해 보았자 자네가 전혀 믿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
안타깝게도 그는 변명할 기회조차 없게 되었군."
"그렇다면, 그는 당연히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던 게 아니지 않은가?" "
절대로 아니지."
"그렇다면 누가 그를 죽였을까?"
"그를 죽인 사람은 바로 상관비연을 죽인 사람과 동일범일 거야." "그 사
람이야말로 이 사건의 진정한 주모자고."
"그렇지."
"청풍도인 역시 그에게 매수당했군. 그의 거짓말을 도와주었으니." "출가
한 사람도 사람은 사람이니까."
"그렇다면 청풍도인은 분명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겠군!" 육소봉은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그러니 난 지금 청풍도인이 아직 살아 있기만을 바랄 뿐이네." 그러나 그
의 바람은 무너졌다. 그들이 다시 청풍관에 돌아왔을 때, 청풍관은 이미 한
줌의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도망갈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단 한
명도.
사나운 불길은 무정했다. 불을 지른 사람은 더욱 무정했다. 그 사람이 누
구란 말인가? 청풍관은 산의 앞쪽에 있었고, 곽휴의 작은 누각은 산의 뒷편
에 있었다. 산 앞쪽은 한 줌의 잿더미로 변해버렸으나, 산 뒷편은 여전히 평
화롭고 고요했다.
첫댓글 즐독하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즐~~~~감!
즐감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