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하이아칸 왕국의 수도, 소드 라 샤펠에 아이언페이스가 서 있었다.
물과 소금, 해산물을 구하기 쉽다는 장점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던 그 곳은 사람 한 명 살지 않는 폐허가 된 도시 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람이 없는 것일 뿐, 생명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제멋대로 자란 수많은 풀들이 자연의 정취를 가져왔고 토끼와 멧돼지, 사슴 등이 마음껏 뛰어 놀았다.
산속에 숨어 살던 늑대와 표범, 호랑이를 비롯한 맹수들이 모습을 드러내 초식 동물들을 잡아 먹었고, 먹이 그물에 의해 생태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아이언 페이스는 강으로 향했다. 소드 라 샤펠을 관통하는 거대한 강에는 돌고래가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그것은 인간들은 알지 못했던 사실이었다. 그동안은 인간들이 버린 폐수에 의해 강이 오염되어서 돌고래들이 돌아오지 못했기에.
이 모든 변화가 2달전, 아이언페이스에 의해 인간들이 몰살 당하면서 일어난 변화였다. 그리고 그는 그러한 사실이 기뻐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생태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파괴하는 존재였다.
식물에서 초식동물, 육식동물로 이어지고, 천적 관계를 통해 유지되는 자연의 생명력.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열이 온도가 높은 곳에서 낮은 것으로 흐르는 것 같이 자연스러운 에너지의 이동.
인간이란 이러한 '엔트로피의 증가'를 자신들의 욕심을 위해 의도적으로 막아 수많은 생명체와 물, 흙, 공기, 불 등 4대 원소에 고통을 주는, 그런 존재였다.
아이언페이스는 기뻤다. 대부분의 인간이 죽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애원하던 것들이 풀려나서 즐겁게 지내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런 아이언페이스의 앞에 마법을 이용한 메시지가 나타났다. 베르나르 공자가 보낸 메시지였다. 베르나르는 그에게 적군이 야습을 하는 것처럼 속인 후에 하룻밤 사이에 철군했다고 보고했다.
이어서 가니미드 다 벨노어의 보고 역시 도착했다. 그의 보고 내용 역시 벨노어의 보고와 대동소이 했다. 아노마라드에서 벨노어와 대적하던 란지에 로젠클란츠가 하룻밤 사이 사라진 것이었다.
예상외의 전개 였지만 아이언페이스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변종 프시키인 그는 바다 너머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마력의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아이언페이스가 눈을 감자, 마법 장막에 의해 감추어져 있던 한 섬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람들 중 그 누구도 몰랐기에 수백년을 산 그조차 눈치 채지 못했던 한 섬. 그리고 그곳에는 '풍요의 기둥'이 있었다. 그곳이 최종전이 벌어질 장소 였다.
한편 달의 섬에서는, 도토리 군단이 보리스와 이솔렛의 뒤를 따라 걷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한 무덤이었다. 원래는 보리스와 이솔렛만 갈 계획 이었지만, 이 전투가 끝나면 그들의 친구의 연인의 아버지의 무덤은 영원히 사라져서 다시는 보러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도토리군단도 같이 가고 싶다고 말했다.
마침내 무덤에 도착하자, 이솔렛이 야생화 하나를 꺾어서 아버지 위에 올려두었다.
"오랜만이에요. 아빠.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이번에는 친구들이랑 같이 왔어요. 섬을 떠나 있는 지난 몇달 동안 대륙 곳곳을 여행하면서 동거동락 했어요."
그녀는 곁에 있던 보리스를 잡아 당겼다.
"이쪽은 제 남자친구, 보리스 진네만 이에요. 몇년 전에 보신 적 있으시죠? 이번에 대륙에 나가서 재회했어요."
"이번이 마지막으로 아빠를 보러 오는 거예요. 며칠 후면 이 섬도, 아빠 무덤도...영원히 사라질 테니까요. 하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저한테는 이제 좋은 친구 들도 생겼고, 사랑하는 연인도 함께 하니까요."
"사랑해요, 아빠."
그 말을 끝으로 이솔렛은 발걸음을 돌렸다. 보리스는 그녀를 쫓아갔지만, 친구들은 각자 무덤에 꽃을 놓아 둔 뒤 일리오스 사제에게 인사 및 다짐을 하고 다 함께 마을로 내려갔다.
마을로 내려가자 클로에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녀는 피난민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기 위한 준비에 한창이었다.
"아이언페이스의 군대가 당도하면, 프란츠 아르님 아저씨가 사람들을 데리고 도주하기로 했어. 그들을 보살피는 것은 나랑 리체, 로즈니스 양이 맡아서 하기로 했고."
리체가 여기 있을 줄 몰랐던 조슈아는 돌하르방으로 뱐해 버렸고, 막시민도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리체가 여기 있다고?"
클로에가 대답했다.
"두달전에 란즈미의 장례식이 있던 것 기억나? 그때 리체도 참석했었어."
"뭐?"
그녀가 조슈아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말했다.
"막시민이 수배 당했는데도 말 안했다면서? 그런 일이면 기꺼이 도울텐데 왜 연락 안했냐고, 자긴 친구도 아니냐고 리체가 그러더라. 막시민은 어쩔 수 없었다지만 조슈아 너는 그러면 안되는 거였다고 화내던데?"
막시민이 조슈아의 등을 토닥이며 말했다.
"가서 두들겨 맞은 후에 싹싹 빌어. 어쩌면 이번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자존심 때문에 후회할 짓 하지 말고. 네냐플에서 리체 보고싶다고 울고 불고 했던 거 기억 안나?"
"누가 울었단 거야!"
"그래? 아니면 말고."
조슈아는 어이가 없어서 막시민을 잠깐 쏘아 봤지만 이내 두들겨 맞기 위해 리체한테 향했다.
조슈아의 뒷모습을 구경하던 그들이게 루이잔 강피르가 다가왔다.
"보리스 진네만, 시간 있습니까?"
"무슨 일 입니까?"
"잠깐 대련을 하고 싶습니다."
벌써 5년 전인가, 그때도 그랬다. 실버스컬이 끝나고 암살자를 피해 폰티나 저택을 급히 떠나던 날에도 루이잔은 앞으로도 가끔씩 대련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보리스는 말 없이 목검을 꺼내 들었다. 루이잔 역시 목검을 들고 반대쪽에 가서 서자 사람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둘러쌌다.
선공은 루이잔 이었다. 루이잔은 스텝을 밟으며 돌진해 보리스의 손목을 노렸다. 보리스가 간단히 쳐내고 루이잔의 가슴을 베려하자 급하게 막으며 뒤로 물려섰다.
연속되는 보리스의 공격이 루이잔을 노렸다. 마치 호랑이 처럼 맹렬한, 예측 불가한 검격이 루이잔을 몰아 붙였다.
루이잔은 보리스의 실력이 실버스컬 당시와는 비교도 할 서 없을 만큼 좋아졌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어째서 일까? 그 당시에 느꼈던 압도적인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깨로 날아드는 공격을 쳐내고 루이잔은 반격에 나섰다. 보리스의 복부를 노리는 것처럼 페이크를 준 뒤 그의 다리를 노리는 공격은 뱀처럼 날아갔지만 이번에도 간단하기 막혔다.
비록 막혔지만 보리스의 몸이 살짝 흐트러 졌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실버스컬 때와는 달리, 제대로 된 공격이 들어간 것이었다!
자신감이 붙은 루이잔이 보리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했던 보리스 역시 냉정함을 되찾고 자세를 고쳐잡았다.
그러다가 한방!
보리스는 베어 들어오는 루이잔의 목검을 쳐서 날려 보낸 후에 목검을 휘둘러 루이잔의 머리를 톡, 하고 쳤다.
순순히 양손을 들고 패배를 인정한 루이잔이 예를 갖추어 인사를 건내었다.같이 인사를 하며 보리스는 방금 전 대련을 곱씹었다.
루이잔 강피르의 실력은 확실히 늘었지만, 이상했다.
본래 어릴 때부터 검을 배워온 사람은 자기 만의 습관을 가지게 된다. 좋지 않은 습관의 경우 수련 과정에서 없애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도 어릴때에 가능한 것이지 루이잔의 나이대에서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 실버스컬 당시 루이잔 강피르가 가지고 있던 습관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거기다가 전투 스타일은 그대로 유지했지만 사용하는 테크닉 역시 완전히 달라졌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렇게 기존의 자신을 버렸음에도 원래보다 강해져서 4-5년 전의 보리스 진네만과 엇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보리스는 웬지 답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별들과 은하수가 하늘을 한바퀴 돌았다.
레오멘티스 교수, 쥬스피앙, 심볼리온을 비롯한 마법사들과 에피비오노는 '풍요의 기둥' 앞에 서 있었다.
그들은 지난 2달간 아이언페이스가 부활하기 전, 칼츠 상단이 대륙 전체에서 긁어 모은 마법 재료를 이용해 무너지던 풍요의 기둥을 복구 시켰고 이제 '소멸의 기원'을 완성 시킬 참이었다.
소멸의 기원을 완성시키면 수천년간 지속된 에피비오노의 삶이 끝나기에 그들은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 12시간 후면, 소멸의 기원이 완성될 것이다.
대륙 연합군은 달의 섬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들은 마법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병력을 묻어두고 적들을 기다렸다.
섬 서북쪽에서는 프란츠 아르님 공작과 클로에, 리체, 티치엘이 이끄는 피난민들이 섬을 출발하고 있었다.
아이언페이스는 저 멀리 보이는 썰물섬을 바라보았다.
과거 암초처럼 보였던 그곳은 이제 완전히 섬의 형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섬 너머로 보이는 바다에서 커다란 배 수십척이 아아언페이스를 향해 달려왔다.
히스파니에가 이끄는 해적단 이었다.
가장 큰 배 에는 선장 히스파니에가 서있었고, 그 옆에는 왼쪽 눈에 시커먼 멍이 있고 회색 머리를 가진 미소년이 서 있었다.
히스파니에가 옆에 있는 조슈아, 아니 조슈아의 몸을 빌린 엔디미온에게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조슈아 한테서 두개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괜찮아. 애초에 내가 보리스에게 도와주겠다고 했는걸. 친구 둬서 이럴 때 써먹어야지 어떻게 하겠어?'
위험하다. 아이언페이스가 그렇게 느낀 순간 엔디미온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바다 여러곳이 소용돌이 치기 시작하면서 물기둥이 솟아 올랐다.
고개를 들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토네이도.
그것들이 10개...아니 15개가 넘었다.
아이언페이스의 괴물 해군을 둘러싼 채로, 이내 엔디미온의 토네이도들이 적들이 탄 배를 갈아버리기 시작했다.
산산조각난 배들 사이로 괴물들의 비명이 울렸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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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룬의 아이들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