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구름이 뭉실 뭉실 떠 있는 하늘에, 바다로부터 물기둥이 솟아 올랐다.
서로 거리를 좁히던 용오름 들이 하나로 합쳐 졌다가 이내 하늘로 올라가며 사라져 갔다.
산산조각난 아이언페이스의 군함과 갈갈이 찢긴 괴물들의 사체 만이 잔잔한 바다의 거짓말을 입증했다.
'무슨 일 있어? 꼴이 왜 그래?'
'야, 이 바다 놈아! 네가 그랬잖아!'
바다와 시체들의 토론을 구경하던 란지에가 망원경을 내렸다.
미를 혐오하고 극도의 이성주의자인 란지에 조차도 방금 본 엔디미온의 마법은 논평할 만한 것이 없었다. 누구나 넋을 놓고 볼 수 밖에 없는, 그런 마법이었다.
한편으로 란지에는 자신의 생각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언제였던가? 그래, 분명 폰티나 영지에서 회의를 진행했을 때였다. 그때 그는 현세대의 마법사들의 역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마법으로 변종 프시키들을 죽일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생각난 것이 바로 가나폴리 왕국의 왕이자 유령인 엔디미온에게 도움을 요청나는 것이었다. 굳이 살아있는 마법사일 필요는 없었으니까. 영매 능력이 없었기에 란지에는 친구인 보리스에게 부탁했고, 그는 흔쾌히 엔디미온에게 물어봐 주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 상황이었다.
란지에가 사색에 잠겨있는 것과는 달리 바다 위에서는 히스파니에가 멍 때리고 있었다.
란지에와는 달리 인생을 즐길 줄 알던 그는 눈앞에서 일어난 일을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엔디미온이 히스파니에의 등을 두드렸다. 정신 차리라고 한 행동이었으나, 엔디미온이 빙의한 몸이 평소 시체놀이를 즐기던 종이인형인 탓에 별 효과는 없었다.
결국 엔디미온은 얼음물을 만들어 히스파니에의 얼굴에 부었다.
잠시 엔디미온을 돌아봤던 히스파니에는 이내 맞은편에 있는 적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엔디미온의 마법이 만든 기회.
히스파니에의 해적단은 일제히 배를 돌려 대포를 장전했다. 하늘을 가르고 날아간 수십개의 포탄들이 아이언페이스들의 군대를 덮쳤다.
배들이 박살나고 구멍을 통해 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인간이던 시절이라면 대처할 수 있던 상황. 하지만 아이언 페이스의 군대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아이언페이스라고 보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가 손을 흔들자 배들이 중심에 뭉쳐 빠른 속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일점돌파. 이번 전투의 목표는 풍요의 기둥을 무력화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빠르게 뚫어내는 것이 이득이었다.
배들이 공격해 들어오는 것을 본 히스피나에는 해적단에게 넓게 퍼지라고 지시했다. 일사 불란하게 학익진을 친 그의 부하들이 이내 아이언페이스의 군대를 포위했다.
히스파니에가 손을 내리자 대포들이 일제히 바다위 한점을 향했다. 포탄에 배들이 박살나고, 침몰하면서도 아이언페이스의 군대는 계속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너무나 얄밉게도 눈앞의 해적들은 백병전을 벌이는 대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포탄만 날려댔다.
마침내 아이언페이스는 전략을 바꾸었다. 직접 나서기로 한 것이다. 바다속에서 솟구쳐 올라온 거대한 에너지가 해적단의 배 한척을 증발 시켰다.
아이언페이스는 프시키와 '악의 무구'가 결합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거대한 에너지를 담는 그릇과, 끝을 알 수 없는 힘의 무기. 그것들이 합쳐진 만큼 아이언페이스가 저들을 모두 날려버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분명 당연한 일이었지만...그러나 증발한 배는 한 척 뿐이었다. 다른 배들에는 마법으로 만든 방어막에 들어 있던 것이었다.
공기중에서 거대한 마나의 흐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직 아이언페이스 만을 목표로 한 마법. 아이언페이스가 몸을 피하자 강력한 화염 마법이 그가 서 있던 자리를 덥쳤다.
화염 마법이 관통한 구멍을 통해 배에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 군함은 곧 침몰할 터였다.
폴짝 뛰어서 옆 군함으로 자리를 옮긴 아이언페이스는 엔디미온을 바라봤다. 고대 가나폴리 왕국의 소년왕. 그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이 전투의 패배는 확정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아이언페이스가 엔디미온에게 몸을 날렸다. 날아가는 몸이 느려졌다. 분명 속박 마법이니라. 소년왕이 온전히 집중할 수 있다면 벗어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할테지만, 과연 그에게 그럴 여유가 있을까?
아이언페이스를 제압한 엔디미온은 윙윙 거리는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비행접시 들이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비행접시들을 본 것은 히스파니에도 마찬가지였다. 해적선들의 대포들이 일제히 하늘을 향해 돌아갔다. 대포들이 불을 뿜기 시작하자 격추된 비행 접시들이 바다에 추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가나폴리 왕국의 병기였던 그것들 역시 대포를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해적선 들도 하나 둘씩 침몰하기 시작했다.
'이대로면 곧 전멸할 거야'
재빨리 판단을 마친 엔디미온이 히스파니에를 돌아 보며 눈짓을 했다. 엔디미온과 같은 생각을 했던 듯이 히스파니에가 빠르게 움직였다.
해적단들은 포격을 중지하고 병장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빠른 진격. 비행접시에 의한 피해를 줄이고 시간을 최대한 끌기 위해서는 백병전을 통해 난전을 유도해야 했다.
한편 엔디미온은 아이언페이스에 대한 속박을 일부 해제해 전격 마법을 발동했다. 대기 중의 수증기를 타고 비행접시 들을 향해 쏘아진 강력한 전기에너지. 10대가 넘는 비행 접시들이 일제히 폭발했다.
그러나 비행접시들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바다 너머에서 100대 가량의 접시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벼락이 쳤다. 비행접시들이 터져 나갔다.
아까와는 달리 엔디미온의 전격 마법은 이제 무작위로 내리치고 있었다. 엔디미온이 아이언페이스와 비행접시를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언페이스가 엔디미온에게 달려 들었다. 엔디미온은 아이언페이스가 밟고 있는 발판을 없앴다. 아이언페이스가 잠깐 휘청하는 사이에 바닷물은 순식간에 아이언페이스를 가두어 버린 채로 얼어 붙었다.
아이언페이스는 몸속의 들어있는 에너지를 방출했다. 열에너지에 의해 얼음들이 순식간에 녹자 그는 검을 든채로 엔디미온에게 달려 들었다.
아이언페이스의 검이 엔디미온의 목을 노렸지만 소년왕은 크게 반응하지 않았다. 그럴만도 했다. 검이 베어 들어오자 그대로 사라져 버렸으니.
?!
환영, 분명 환영일 것이다. 아이언페이스는 크게 당황했다. 변종 프시키로써 마력을 느낄 수 있었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많이 놀랐나 보네?"
등 뒤에서 엔디미온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언페이스가 빙글 돌며 에너지파를 날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에너지파가 그냥 통과해 버린 것이다.
엔디미온은 아이언페이스의 표정을 30초 정도 관찰하다가 말했다.
"몰랐어? 나 유령인걸?"
"......"
이봐, 넌 유령이라도 그 몸은 유령이 아니잖아.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같이 게임이나 하는 것 어때? 참고로 거절은 불가능해."
엔디미온이 주사위를 던지자 주위 풍경이 바뀌었다. 바다가 아니라 숲으로. 아니, 정확히는 숲 가운데에 있는 들판이었다.
그리고 들판 가운데에는 벤치와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에는 보리스가 선물한 최신형 그릇과 컵이 올려져 있었다. 엔디미온이 다가가자 다과가 그릇과 잔을 채우고, 책상 한쪽에는 주사위가 나타났다.
"어차피 나가지도 못할 텐데, 같이 주사위 게임이나 하자."
아이언페이스가 주먹을 휘둘렀지만, 주먹은 엔디미온을 통과해 에꿎은 나무를 박살냈다.
벤치에 앉은 엔디미온이 책상 반대편에 있는 다른 의자를 가리켰다. 마치 앉으라는 듯이.
그러는 중에도 아이언페이스의 머리는 빠르게 굴러갔다. 어차피 자신의 공격은 저 유령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지금 이 환영을 벗어날 수도 없었다. 수백년을 살아왔음에도 볼 기회가 없었던 가나폴리 왕의 마법은 프시키의 능력으로도 파훼가 불가능 했으니까.
만약을 대비해 준비해 둔 안배가 제대로 작동하면 이곳을 벗어날 수 있을테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것에 대해 아이언페이스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아이언페이스의 고민은 빠르게 끝났다. 엔디미온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언페이스는 얌전히 벤치에 앉았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추격자 게임이라고, 해본 적 있어?"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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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룬의 아이들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