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을 날아다니는 전투기 들이 윙윙 소리를 내며 울었다.
포격이 지나간 마을을 바라보는 루시안의 눈에는 특유의 즐거움이 사라져 있었다.
아노마라드 칼츠 상단의 자제라는 사실은 그의 삶을 살육과 거리가 멀게 만들었고 특유의 낙천적인 성격을 지키게 했다.
어릴때부터 도망자로 살았던 보리스, 귀족들에게 고문을 당했던 란지에, ‘데모닉’이라는 기질 때문에 언제 미쳐도 이상하지 않은 삶을 사는 조슈아, 4살 때부터 홀로 어린 동생들을 먹여 살려야 했던 막시민.
어딘가 망가져 있던 그들이 루시안과 친해진 것은 아마도 철저한 선의에서 나오는 끝 없는 밝은 에너지와 순수한 천진 난만함 이었으리라.
이제 그 루시안은 폰티나의 죽음과 함께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아이언페이스가 일으킨 전쟁을 보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의 손으로 미사일을 날려 사람을 죽였다.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진 물 이라도 다른 물질이 첨가되면 더 이상 순수한 물이 아닌 것처럼 루시안의 마음에는 죽음의 얼룩이 평생 남아 있을 것이다.
나야트레이는 그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전사인 그녀는 이미 겪어본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루시안을 위로하는 대신 다른 일을 했다.
깡!
나야트레이에게 뒤통수를 얻어 맞은 루시안이 쓰러졌다.
“정신차려. 다른 친구들도 잃을려고?"
나야트레이를 올려다보는 루시안의 멍한 눈빛에 약간의 이성이 돌아오고 있었다.
“소멸의 기원이 완성되기 전까지 아이언페이스를 저지하지 못하면 네 친구들도 다 죽을 거라는 걸 몰라서 그렇게 있는거야?”
“나도 사람을 죽여 봐서 네 감정이 어떨지는 잘 알아. 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어. 살 사람은 살아야해.”
머리를 다리 사이에 묻은 채 고민하던 루시안이 답했다.
“맞아… 보리스도, 막시민도, 조슈아도, 이스핀도… 모두 싸우고 있어. 이 지옥도를 견디면서… 그래서 나는 친구들의 발목을 잡고 싶지 않아.”
정신을 차린 루시안이 조종석에 앉았다.
“나야트레이. 넌 여기에서 내려.”
나야트레이가 멀뚱히 서서 루시안을 바라봤다.
루시안이 설명했다.
“넌 검사잖아. 그것도 필멸의 땅을 혈혈 단신으로 지나갔던 뛰어난 검사지. 그럼 당연히 전투기에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려가서 검을 휘둘려야 하는 것 아니야?”
“그건 맞는데… 나 혼자 간게 아니라 보리스랑 같이 갔었거든?”
“그럼 더더욱 내려가야지. 옛 동료가 저기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 그냥 보기만 할려고?”
그런 것이 아니었다. 사실 나야트레이는 진작 밖에 나가 싸우고 싶었지만 루시안이 걱정되어서 남아 있던 거였다. 다른 차원의 세계 길바닥에서 노숙하다가 정이 든걸 어떡하라고…
“……”
“왜? 너 혹시 겁 먹었어?"
“아니거든!”
나야트레이는 곧바로 전투기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루시안은 황당해하며 조종에 집중했다.
“뭐… 괜찮겠지?”
루시안은 전투기 설치되어 있는 통신 장치를 들었다.
루시안과 나야트레이가 가져온 통신 장치.
’늙은이의 우물‘을 통해 원래 세계로 돌아온 그들은 기다리고 있던 리리오페와 달의섬 사람들에게 통신 장비의 중계기를 넘기고 전장으로 날아왔다.
달의섬 사람들이 장비를 제대로 작동시킨 덕에 루시안과 폰티나 전 공작의 통신이 연결된 것이었다.
“리리오페, 사람들에게 현 상황을 전달해줘.”
루시안의 말을 들은 리리오페가 헥토르에게 명령했다.
“들었지?”
헥토르는 통신 장비의 채널을 전체로 돌린 후에 메시지를 전달했다.
‘아! 아! 달의섬의 헥토르 입니다. 현재 아이언페이스는 폰티나 전 공작이 이끄는 매복군을 제압하고 풍요의 기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현재 속도면 소멸의 기원이 완성되기 전에 기둥에 도착할 것 같습니다. 풍요의 기둥을 지키고 있는 나우플리온, 루이잔 강피르, 이스핀 샤를, 샐러리맨, 막시민 리프크네는 전투를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막시민이 투덜거렸다.
그는 벌써 9시간 째 쉬지도 못하고 ‘시간을 멈추는 찬트’을 연주하는 중이었다.
“그놈은 벌써오냐. 이왕이면 포도주 한병이나 가지고 오지. 수백년 넘게 산 놈이 예의가 없어 참.”
잠시 숨을 고른 헥토르가 말을 이었다.
‘베르나르 대공자는 현재 절벽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가 곧 도착할 터이니 보리스와 이솔렛은 준비해 주십시오.‘
절벽. 그 장소는 베르나르를 상대하기 위해 보리스와 이솔렛이 선택한 장소였다.
그 곳은 과거 이솔렛이 보리스에게 신성찬트를 가르치던 장소 였고, 허공에 둥둥 떠있는 땅 덩어리는 눈에 보이지 않은 계단을 이용하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었다.
발 밑에 아무것도 없는 하늘에서 벌어지는 전투. 발 한번 잘못 움직이면 절벽에서 그대로 추락할 것이다.
다행히 보리스와 이솔렛은 계단과 허공을 구분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고, 심지어 보리스는 에키온의 음모에 걸려 절벽 아래로 추락했다가 윈터러의 도움으로 산 적도 있었다.
이곳이라면 ‘악의 무구’를 가진 베르나르라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믿으면서 베르나르를 기다렸다.
한편 란지에는 헥토르의 통신을 듣고 있었다.
‘프란츠 아르님 전 공작이 이끄는 탈출대는 가니미드 다 벨노어가 이끄는 함대와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두고 무사히 탈출에 성공했습니다.’
란지에는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다. 클로에와 민간인들이 안전하게 탈출해서.
‘벨노어는 리체 아브릴 양의 단검에 찔려 바다로 추락했으며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육지로부터 거리가 수 km 떨어져 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란지에는 냉정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그가 이끄는 부대는 섬을 돌아서 공격하는 벨노어의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매복해 있었다.
그런데 이미 벨노어의 군대는 전멸했으니 더 이상 여기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적의 군대는 총 3방향으로 밀고 들어왔다. 한 갈래인 벨노어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하고 베르나르는 보리스와 이솔렛을 상대하러 갔으며, 아이언페이스는 풍요의 기둥으로 쾌속 진격하고 있었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악의 무구’를 가진 베르나르는 오직 윈터러를 가진 보리스와 신성찬트를 사용하는 이솔렛 만이 상대할 수 있다.
아이언페이스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고, 어떻게든 그의 발목을 질질 잡아 끌지 않고는 작전 성공을 기대할 수 없었다.
지금은 ‘풍요의 기둥’에 지원을 가는 것이 맞으리라.
란지에는 병사들에게 짐을 챙겨 ‘기둥’으로 향하라고 명령했다.
5분이 지나 그들이 자리를 이동하러 할 때였다.
란지에의 등 뒤에서 부스럭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사람의 인형이 나타났다.
바다로 이어진 숲속에서 나타난 그는 벨노어였다.
어떻게 살아있는 지에 대한 설명은 숨을 헐떡이며 생략한 벨노어는 눈앞에 있는 사람들을 보고 경악했다.
“어?”
기껏 바다에서 기어 나왔더니 마주친 것이 무장한 군대라니!
그것도 자기를 알아보고 분노와 적개심을 숨기지 않는 자들이었다.
도망쳐야 한다.
벨노어는 그 자리에서 왔던 길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총성이 울렸다.
왼쪽 어깨의 총을 맞고 쓰러진 그는 엉금 엉금 기어서 도망가려 했지만 이어서 날아온 총알이 오른쪽 다리를 관통했다.
아프다.
아까 복부에 칼을 맞았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다.
어깨도, 다리도 불에 지져지는 듯 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란지에는 그런 벨노어를 가만히 내려보았다.
란즈미를 죽게 만든 자다.
막시민의 동생들을 죽게 만든 자다.
보리스의 형, 예프넨 진네만이 남긴 유품을 빼았으려고 보리스를 속인 것도 모자라 예프넨의 무덤을 파헤친 자다.
클로에의 아버지인 폰티나 전 공작을 죽게 만든 것도 이 자였다.
분노가 란지에의 몸을 잠식할 수록 역설적으로 그의 머리는 점점 맑아졌다.
란지에는 벨노어에게 어떻게 분노를 쏟아내야 할지 잘 알고 있었다.
귀족의식에 찌들어 살던 그라면 한낱 하인이던 란지에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은 없을 것이다.
란지에는 허리를 굽혀 벨노어의 관자놀이에 총구를 겨누었다.
두려움에 질린 벨노어가 덜덜 떨면서 말했다.
“살… 살려주세요. 제발..”
란지에가 대답했다.
“그래?”
고개를 갸웃거리던 란지에가 말했다.
“그럼, 울면서 빌어봐. 빌어서 네 바닥을 증명해봐. 그럼 안 죽일게.”
벨노어의 얼굴에 감출 수 없는 생기가 돌았다.
그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란지에 로젠크란츠 님. 제발 살려주십시오.”
란지에가 대답했다.
“음~ 이걸로는 부족한데.”
벨노어의 몸이 떨렸다.
“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란지에가 말했다.
“삼궤고구도.”
벨노어가 알아듣지 못하자 란지에가 말을 이었다.
“세번 절하고 아홉번 조아리라고.”
벨노아가 그대로 시행하자 란지에가 벨노어의 머리에서 총을 거두었다.
그리고 벨노어가 화색을 띄자 즉시 총을 발포했다.
목표는 오른쪽 어깨와 왼쪽 다리.
벨노어의 멀쩡했던 사지를 망가트린 것이다.
벨노어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자 란지에가 말했다.
“난 죽이지 않는다고 했지, 살려서 보내준다고는 안했는데.”
그게 그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벨노어가 항의하기에는 고통이 너무 컸다.
란지에가 아랑곳 않고 말했다.
“이제 네 길은 두 가지야. ‘소멸의 기원’이 완성될 때 휘말려서 소멸되거나, 임무의 실패한 죄를 물어 아이언 페이스에게 살해당하겠지.”
양 팔다리가 총에 맞은 이상 벨노어가 도망칠 방법도 없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던 란지에는 군사들과 함께 기둥으로 걸어가게 시작했다.
“그럼, 수고해”
<다음화에 계속>
https://m.cafe.daum.net/rocksoccer/ADrt/722511
원작: 룬의 아이들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