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전투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음에도 하늘은 여전히 푸르렀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옆에 앉아있는 소녀는 보리스가 옛 추억에 잠기게 만들었다.
그들은 과거 그곳에서 신성찬트 수업을 하곤 했다.
보리스는 학교에 가는 대신 이솔렛에게 신성찬트를 배웠고, 이솔렛은 그에게 아버지와 같이 놀던 장소를 알려준 것이었다.
깍아지른 듯한 절벽 위에 둥둥 떠있는 바위들. 그리고 졀벽과 바위를 연결하는 투명한 계단.
수년전에 그들을 즐겁게 했던 장소가 이제는 전장이 되었다.
이솔렛이 보리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상념에 잠겨 있던 보리스가 고개를 돌리자 수화로 말했다.
'지금 저 숲에서 누군가 다가오고 있어'
이솔렛의 말을 본 보리스가 정신을 집중하자 확실히 살기가 느껴졌다.
그가 말했다.
'헥토르가 연락한 내용을 생각해보면 베르나르 공자일 가능성이 높아요'
'준비는 된거지?'
'물론이죠'
그들이 검을 들고 전투를 준비하자 이내 베르나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베르나르는 허공에 서 있는 보리스와 이솔렛을 향해 말했다.
"여기 계셨군요."
두 소년 소녀가 대답을 하지 않자 베르나르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저랑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을 것 같으니, 이제 시작해 볼까요?"
베르나르가 땅을 박찼다.
그는 계단을 오르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찾기 위해 시행착오를 겪는 것보다 강력한 점프로 한번에 적에게 도달하는 것이 나았다.
보리스는 그들 앞에 뛰어든 베르나르에게 검을 휘둘렀다.
사선으로 베어 들어간 검은 베르나르의 옆구리를 노렸지만 이내 베르나르가 치겨든 검에 막혔다.
악의무구로 강화된 베르나르의 힘은 보리스가 휘두르는 힘과 검의 무게를 버티기에 충분했다.
베르나르가 힘을 주어 윈터러를 밀어내자 보리스가 스텝을 밟으며 뒤로 물러났다.
보리스가 밀려나는 것을 확인한 베르나르가 그에게 달려 들었다.
그렇게 보리스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베르나르의 검이 흔들렸다.
베르나르가 발을 헛 디든 것이다.
추락할 뻔한 베르나르의 몸이 흐느적 거리며 중심을 잡았지만, 이미 공격 타이밍을 한차례 놓친 후였다.
그틈을 노려 이솔렛과 보리스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그들은 투명계단을 전속력으로 달려 베르나르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윈터러의 검격이 베르나르의 목을 노렸고 이솔렛의 쌍검이 베르나르의 오른손과 심장을 노렸다.
아무리 한끗 차이로 윈터러를 회피한 베르나르가 검을 휘둘러 심장을 방어했다.
급소는 방어에 성공했지만 티엘라의 힘이 오른손을 베고 지나갔다.
황급히 처음 위치로 되돌아간 베르나르가 오른손을 지혈했다.
고대 가나폴리 왕국에서 내려온 마법 검술인 티엘라와 티그리스.
보리스의 검술인 티그리스와 이솔렛의 검술인 티엘라는 악의무구의 힘으로 강화된 그의 신체에 타격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보리스가 검에 에너지를 모았다.
마치 차가운 빙하를 연상시키는 새하얀 에너지가 윈터러에 가득차기를 기다렸다.
보리스가 무엇을 준비하든 베르나르는 눈 뜨고 당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검에 악의 무구의 기운을 두르고 그를 향해 달려 들었다.
'별을 꿈꾸는 자는 복이 있나니, 북극성이 그의 길을 밝힐 것이오. 누군가를 지키고자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달이 그를 비출 것이오. 심연을 걷는 자는 복이 있나니 하늘이 그를 바라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길을 막는 대적자는 그 어떤 별도, 달도, 하늘도 그를 위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시 였던가? 아니면 기도 였던가?
신성찬트는 본래 강렬한 열망을 담은 노래 이자 마법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편의 시인 동시에 하늘에 바치는 기도이기도 했다.
이솔렛은 베르나르의 검에 있는 악의 무구의 힘을 눈치 챘다. 그녀는 악의무구의 위험성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보리스가 다치지 않았으면 하였다.
그 생각은 의식할 틈도 없이 이솔렛의 가슴을 강타했고 강력한 신성찬트의 보호막이 만들어 졌다.
보리스가 아직 준비를 끝나지 못한 사이에 날아든 베르나르의 공격은 이솔렛의 방어막에 막혔다. 그리고 반사되어 오히려 베르나르를 날려 버렸다.
튕겨나가 구른 베르나르는 계단을 잡아 추락을 면했다.
그 사이 준비를 마친 보리스가 윈터러를 휘두르자 강력한 냉기가 베르나르를 덮쳤다.
새하얗게 변한 세상을 윈터러의 힘이 꽁꽁 얼렸다.
달의섬의 숲 들은 완전히 얼어 붙어 작은 충격에도 쉽게 바스러 졌고 몇시간 전까지 마을이었던 폐허에는 빙판이 생겨났다.
냉기의 구름에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상태에서 이솔렛이 쌍검을 휘둘렀다.
새하얀 세상에서 툭 튀어나온 베르나르의 검.
악의무구 중 하나인 투구의 힘을 이용해 보리스의 공격을 버텨낸 뒤, 오로지 감각 만을 이용해 이솔렛을 공격한 것이었다.
어디가 발을 딛는 곳인지, 어디가 허공일지 모르는 계단에서 벌어지는 격전.
그 환경에 익숙한 보리스와 이솔렛이 능숙하게 움직이면서 그를 몰아부치는 것에 반해 베르나르의 운신의 폭은 너무나도 좁았다.
그 작은 움직임의 범위는 적에게 번번이 공격의 기회를 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럴 때는 난전으로 몰고가야 했다. 좁은 공간에서 정신없이 벌어지는 전투는 환경에 의한 변수를 최소화 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 베르나르는 이솔렛을 힘으로 몰아 붙였다.
아무리 찬트로 강화했을 지라도 남성과 여성의 신체 능력 차이는 존재했다.
이내 이솔렛이 서서히 밀리기 시작하는 것을 본 보리스가 베르나르에게 달려 들었다.
베르나르가 보리스의 공격을 피해 이솔렛에서 떨어지자 그들은 주저 없이 베르나르에게 검을 휘둘렀다.
치고 빠진다.
보리스와 이솔렛은 베르나르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쉴새없이 공격을 가했다.
마치 태어난 직후 부터 평생 한팀으로 2인 3각 경기를 뛰어 온 것처럼 그들의 합은 매우 잘 맞았다.
보리스의 검이 찌르고 들어가면 이솔렛은 베르나르를 베어 들어갔다. 반대로 보리스가 베어 들어가면 이솔렛이 찌르고 들어갔다.
베르나르가 하나를 막으면 다른 쪽에서 급소를 공격해 들어 왔고 베르나르가 역습을 가할 때면 그들은 서로를 지켜주었다.
굳이 말하지 않았다.
신호를 주지도 않았다.
그저 서로의 눈빛을 볼 뿐.
그거면 상대가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알기에 충분했다.
베르나르는 내심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좁은 계단에서 근접전을 유도하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티그리스와 티엘라, 신성찬트는 악의 무구에 맞설 수 있는 힘이었지만 그것 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한명이 아니라 둘이었기에 가능한 전투. 설사 베르나르 본인과 이스핀이 호흡을 맞추더라도 불가능한 경지일 것이 분명했다.
베르나르는 이스핀이 추락할까 걱정되어 제대로 싸우지 못했을 것이고 이스핀도 마찬가지 였으리라.
갑자기 베르나르는 보리스와 이솔렛이 부러워 졌다.
만약 아이언페이스가 강제로 악의 무구를 그에게 씌우지 않았더라면..
베르나르가 잠깐 주의가 흐트려진 사이 하늘에 얼음 칼날이 생겨났다.
보리스가 윈터러를 휘두르는 것을 신호로 얼음들이 베르나르를 향해 날아 들었다.
상념에서 벗어난 베르나르가 검을 휘둘러 얼음 칼날 들을 산산 조각내었다.
그 사이 이솔렛은 허공에 서 있었다.
저기도 계단 이었던가?
아니, 아니다.
이솔렛이 서 있는 곳이 계단일리가 없었다.
방금 전에 벌어진 근접전을 통해 베르나르는 계단의 범위를 대략적으로 파악해 둔 상태였다.
그렇다면 저것은..
이솔렛이 쌍검을 휘두르며 허공 위에서 달렸다.
그녀는 찬트를 이용해 공중을 평지와 같이 움직이는 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쇄도해 들어 오는 이솔렛의 공격을 베르나르가 간신히 막아내자 또다른 곳에서 공격이 날아 들었다.
보리스 진네만이 휘두르는 윈터러.
그 역시 이솔렛을 통해 허공을 걷는 기술을 익힌 것이었다.
그들은 허공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사방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베르나르는 어쩔 수 없이 방어에만 급급했다.
움직임이 계단으로 제한된 그로써는 보리스와 이솔렛의 기동력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베르나르가 버티는 것도 잠시 뿐이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베르나르의 공격과 방어가 하나 같이 법도를 잃어갔고 점점 빈틈이 생겨났다.
이솔렛의 쌍검이 베르나르의 목과 다리를 노리고 들어왔다.
베르나르가 간신히 검으로 공격을 방어한 채 뒤로 물러났지만 어느 순간 그는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이솔렛의 검은 사실 속임수 였고, 그 사이에 찬트를 이용해 베르나르를 속박한 것이었다.
그리고 베르나르의 심장을 꿰뚫는 보리스의 검.
보리스가 베르나르의 가슴에서 윈터러를 뽑았다.
그가 윈터러를 휘두르자 베르나르에게 씌워진 악의 무구, 은빛 투구가 완전히 파괴 되었다.
베르나르가 피를 토하면서 주저 앉았다.
심장이 파괴되었기에 숨을 쉴수 없었고, 숨을 쉴 수 없었기에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본래 말이란 허파를 통해 나오는 공기를 조절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내 그동안 간직해 두었던 2개의 쪽지를 꺼냈다.
언젠가 비취반지 성에 찾아가 동생을 그리워 하면서 결심한 대로 였다.
그대로 베르나르의 숨이 끊어졌다.
이솔렛이 베르나르의 시신이 쥐고 있는 쪽지를 빼내어 펼쳤다.
최후의 순간에 꺼낸 만큼 중요한 것이니라. 일단 그 쪽지 내용을 확인해야 앞으로의 일을 결정할 수 있었다.
하나에는 이스핀을 위해 베르나르가 남긴 안배가 적혀 있었다. 그동안 그가 알아냈던 아이언페이스의 약점.
또다른 하나는 그들을 향한 편지였다. 막시민, 보리스, 이솔렛, 그들을 비롯해 이스핀과 함께 싸운 모두에게 남긴 편지. 이스핀을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이스핀에게 미안하다고. 그 편지에는 그동안 베르니르가 했던 일들이 적혀 있었다.
베르나르는 실종된 당시 아이언페이스에 의해 강제로 악의 무구가 씌워졌다. 그렇게 된 이상 그는 죽은 목숨이었다. 살아있는 상태로 악의 무구를 파괴할 방법이 없을 뿐만 아니라 대놓고 방해하면 아이언페이스에게 살해당할 터였다.
그렇게 된 이상 베르나르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 밖에 없었다. 악역을 자처하는 것.
그는 아이언페이스에게 충성하는 척 하면서 뒤에서는 아이언페이스의 약점을 조사했고, 아이언페이스와 인간 사이의 전쟁이 발발했을 때는 교묘하게 움직이며 아이언페이스가 이기지 못하게 방해 했다.
그 결과 심볼리온과 네냐플의 마법사들이 달의섬에서 '소멸의 기원'을 완성하고, 아이언페이스를 소멸시킬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모든 것이 베르나르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스핀과 막시민, 에투알들이 베르나르를 발견한 그날.
그때 베르나르는 이스핀을 칼로 찌르고, 동생이 아끼던 사람들을 살해했다. 하지만 그로써는 그게 최선 이었다. 동생을 살릴 방법은 그것 밖에 없었기에.
그 함정은 아이언페이스가 직접 준비한 것이었다. 어설프게 행동했을 때 이스핀이 무사히 살아나갈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제일 먼저 이스핀을 찔렀다. 마음만 먹으면 이스핀의 심장을 단번에 찌를 수 있었음에도 그러지 않았다. 악의무구의 힘을 이용하면 이스핀은 시한부 상태가 됨에도, 그러지 않았다. 단지 피를 좀 흘리게 했을 뿐. 그게 이스핀이 살 가능성이 제일 높았으니까.
그 후에는 막시민이 이스핀을 데리고 무사히 도망칠 수 있도록 일부러 느긋하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이 이스핀을 살리기 위해 연기하는 것임을 들키면, 아이언페이스의 부하들이 그자리에서 직접 이스핀을 죽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어쩔 수 없이 이스핀을 보호하려는 에투알들을 죽이고 그들의 시신에게 추격을 맡기었다.
마치 그들이 필사적으로 이스핀을 보호하려한 결과 간발의 차로 놓친 것처럼 속이기 위해서.
그때 베르나르가 막시민에게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이스핀을 잘 부탁한다는 그 말.
그동안 막시민의 행보를 지켜봐 왔고, 막시민이라면 이스핀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한 말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베르나르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앞으로 동생과 그의 관계가 파탄날 것이기에. 아끼는 사람들을 잃은 동생이 힘들어 할 것이기에. 그리고 그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그녀를 찔러야 했기에.
결국 이스핀은 행복해질 거라고. 모든 일이 끝나고 누군가는 그녀를 사랑해 줄거라고. 그리운 사람들에 대한 기억이 떠오를 때면 그녀를 위로해 줄 사람이 있을 거라고.
베르나르는 끊임없이 자신을 세뇌해야 했다.
그렇게 베르나르는 악역을 연기하며, 언젠가 윈터러에 의해 사망하고 악의 무구에서 해방되는 것을 기다렸다.
<다음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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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룬의 아이들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