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민의 상태는 처참했다.
그의 머리카락은 단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았고 양쪽 눈이 있던 자리에서 검은 재가 후드득 떨어졌다.
옷이 타서 드러난 몸에 붉은 화상 자국으로 가득했고 무릎아래가 사라진 다리에서 쏟아져 나온 피가 흙과 섞여 반죽을 형성했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막시민이 살아 있다는 사실이었다.
심지어 의식을 잃은 것도 아니었다. 막시민에게 달려가며 이스핀이 낸 비명 소리는 막시민의 비명에 묻혀 사라졌다.
친구들이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었다. 제일 먼저 다가간 보리스는 망토를 벗어 막시민의 다리에 강하게 묶었고 이솔렛은 신성 찬트를 사용해 막시민을 치료하려 했다.
하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동맥이 손상된 탓인지 다리가 꽁꽁 묶였음에도 피가 울컥 울컥 쏟아져 나왔고 찬트를 통해 시급한 손상은 막았지만 여전히 상태가 심각했다.
막시민이 죽을 것이다. 그 사실이 이스핀의 가슴을 강타했다.
폭발치듯 솟구치는 감정에 이스핀은 자신을 통제하기 힘들었다. 지금 당장 달려가 죽어가는 막시민을 안고 울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스핀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머니도, 로랑도, 베르나르도 그녀를 떠나갔다. 이 여정을 함께하며 친해진 데보라와 청어절임은 그녀를 위해 죽었다. 막시민 마저 잃고 싶지는 않았다.
산 아래쪽에서 탁탁하고 발소리가 울렸다. 란지에와 병사들이 산길을 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란지에는 일행들에게 합류하기도 전에 상황을 파악한 듯 했다.
그는 한걸음에 달려와 막시민의 몸에 포션을 있는대로 퍼부었다.
그 덕에 자잘한 상처는 어느정도 아물었지만 이 이상 포션이나 치료 마법을 이용하면 막시민의 몸이 못 버틸 터였다.
이스핀과 친구들은 막시민을 둘러싼 채로 서 있었다. 아직 막시민이 살아 있었지만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침울해진 그들은 누구도 상황 정리를 하지 않았다.
'계속 그러고 있을거야?'
허공을 가로지른 목소리가 그들의 귀에 닿았다.
어린아이 같이 장난기 어린 말투 속에 숨어있는 수천년 유령 생활의 연륜. 엔디미온 이었다.
엔디미온이 고용한 전문 통역사 보리스가 대답했다.
"이미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봤어. 하지만 막시민을 살릴 뾰족한 수가 없다고."
'다프넨, 오이지스를 살렸을 때 기억해?'
물론 기억하고 있었다.
보리스가 달의섬에서 지내던 시절, 그의 친구 오이지스가 에키온 패거리의 린치와 방화에 휘말려 위독한 적이 있었다.
그때 보리스는 달의섬 유령들의 대장이자 엔디미온의 아버지인 섭정왕을 상대로 한 내기에서 승리해 오이지스를 살릴 수 있었다.
"그때 그 방법을 쓰면 막시민을 살릴 수 있는 거야?"
'그래. 하지만 이번에는 여러명이 한 팀으로 움직여야 해. 저 아이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거든'
보리스가 친구들을 돌아 봤다.
보리스가 대표로 질문 했을 뿐,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엔디미온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들의 굳은 결의가 표정을 통해 드러나 있었다.
다시 고개를 돌린 보리스가 말했다.
"우리 모두 아공간에 들어가면 되는거야?"
'아니, 단 3명이 한계야. 나머지는 짐과 사람들을 이끌고 당장 빠져나가야해. 곧 소멸의 기원이 달의섬과 세상의 악한 기운을 모조리 봉인할 거야'
누가 막시민을 구하러 갈지는 명백했다.
보리스가 가진 주사위는 유령들과의 추격자 게임에서 필수적 이었고, 섭정왕의 전략에 맞서려면 데모닉 조슈아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이스핀은 조슈아 다음으로 막시민과 친분이 깊었기에 선발 되었다.
그들은 유령들의 공간에 들어갔다.
오래전에 그랬던 것처럼 수 많은 영혼들이 무리를 지어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다가가자 섭정왕이 보리스를 보고 아는체를 했다.
'오랜만 이구나'
보리스가 대답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물론 나는 잘 지냈지. 가만 보니 예전과 많이 달라졌구나. 그때는 약하고 미숙한 부분이 있었는데, 훨씬 단단해 졌어'
"칭찬 감사합니다. 저희가 어찌하여 왔는지는 이미 알고 계시겠죠?"
'물론 알고 있지. 이번에는 시간이 얼마 없으니 빨리 진행해야 겠군.'
섭정왕은 유령들을 물리고 게임을 준비했다.
'규칙은 지난번과 같다. 추격자 게임을 해서 너희가 이기면 그 아이가 살아날 것이고, 패배하면 죽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보리스와 이스핀, 조슈아는 미리 상의한 대로 움직였다.
엔디미온이 선물한 주사위를 보리스가 던지면, 조슈아가 결과 계산해 최선의 수를 세운다.
'너는 서두르는 것이 좋을 거다. 지금 그 아이에게서 영혼이 떨어져 나가고 있으니 너무 늦으면 설사 살아나더라도 기억이 온전치 못할 것이다.'
이스핀은 게임에 참여하는 대신 섭정왕이 알려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숲길을 걸으면서 나는 발소리 만이 사박사박 울렸다. 사방에 우거진 나무들에 가려 길을 찾기 힘들었다.
아무리 에투알이라고 해도 지도도, 나침반도 없는 곳에서 움직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무작정 가면 조난 당할 것이 뻔했기에 이스핀은 잠시 멈추어 주변을 살폈다.
태양이라도 떠 있었으면 그림자를 이용해 방향을 알 수 있겠지만 유령들의 세계에는 태양이 없었다.
막막해진 이스핀이 한숨을 터트렸다.
그때, 앞에 있는 풀들 사이에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이스핀이 가까이 가보니 반딧불이 하나가 날아 다니고 있었다.
그 반딧불이는 이스핀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다가 한 방향으로 날아갔다.
이스핀이 그대로 멈추어 있자 답답해진 반딧불이가 이스핀에게 왔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을 반복했다.
"따라오라고?"
반딧불이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스핀은 반딧불이를 손에 올린 채 인도해 주는 길을 걸어갔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그 반딧불이는 마치 로랑 처럼 굳은 충성심과 절개를 갖춘 것 같았다.
과거 어느날, 로랑과 단 둘이 고립되었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이스핀은 로랑이 앞장서는 길을 졸졸 뒤따라 갔었다. 지금처럼.
이스핀이 향하는 방향에서 빛이 조각 조각 날아왔다.
빛을 손을 대 보니 머릿속에서 촤르륵 하고 영상이 펼쳐졌다. 난로가 타고 있는 방에서 한 여성이 의자에 앉아 있었다. 여성은 팔에 아기를 안고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
이스핀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날아온 빛은 막시민의 기억이었고 저분은 막시민의 어머니다.
빛을 소중히 갈무리해서 주머니에 넣은 뒤 이스핀은 총총 거리며 걸어갔다.
이윽고 숲이 끝나면서 사막이 나타났다.
길을 안내하던 반딧불이가 사막 여우와 함께 이스핀에게 다가왔다.
자신은 여기까지 라는 듯 여우를 인사 시킨 뒤 숲속으로 사라졌다.
반딧불이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사막여우가 이스핀에게 컹 하고 짖은 뒤 터벅터벅 걸어갔다.
여우를 뒤따라 가면서 이스핀은 그리운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그리운지는 알 수 없었다. 이스핀이 기억하지 못하는 오래전의 기억. 어쩌면 이스핀의 어머니, 델핀 대공비가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이스핀은 또다시 날아든 빛 무리를 손으로 잡았다. 6-7살 정도의 막시민 이었다. 기억 속의 그는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서리를 하고 있었다.
사막이 끝나자 나타난 것은 빙하 지대였다. 사막여우는 다가온 북극곰한테 이스핀을 넘겨준 뒤 걸어가는 이스핀의 뒷모습을 계속 지켜 보았다.
북극곰은 마치 이스핀의 아버지 같았다. 무뚝뚝하고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이스핀이 발을 헛디디자 급히 달려와 넘어지지 않게 받혀 주었다.
막시민의 이번 기억속에는 조슈아가 있었다. 아직 꼬꼬마 였던 그들은 코츠볼트의 들판을 뛰어 놀고 있었다. 막시민에게서 보기 힘들었던 어린 아이 다운 모습. 이스핀은 자신이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빙하지대가 끝나자 나타난 것은 들판 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방금 본 코츠볼트의 들판이었다.
그곳에서 이스핀을 안내한 것은 강아지 였다. 베르나르를 연상시키는 다정하고 순한 강아지가 이스핀을 이끌고 걸어갔다.
이스핀은 날아온 빛 덩어리를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막시민의 기억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 기억 속에서 막시민은 필경사의 조수였다. 평소 같이 출근하던 그는 한 소녀가 들판을 뒤지던 모습을 목격했다. 막시민이 다가가면서 들어난 그 소녀의 얼굴은... 어린 시절의 이스핀 이었다.
'나는 그런 건 없고, 한번 만나고 싶은 애가 있지. 내가 필경사의 조수로 일하고 있을 때 였는데, 어떤 여자애가 어떤 여자애를 도와주니까 걔가 언젠가 다시 보자고 하더라고'
분명 비취반지성에서 막시민이 그렇게 말했었다.
이스핀은 생각했다. 나는 뭐라고 했더라?
'나도 한번 만나고 싶은 사람은 있지. 내가 어릴때 한 시골에 여행을 갔다가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린 적이 있는데 어떤 시골애가 찾아줬어.'
너무나도 확실했다.
그때 이스핀은 코츠볼트에 여행을 갔었고, 잃어버린 어머니의 유품을 막시민이 찾아 주었다.
그토록 그리워 하고 언젠가 다시 보기를 원했던 사람이 계속 곁에 있었다.
이스핀은 달려가기 시작했다.
코츠볼트의 들판이 끝나는 지점에 막시민이 누워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막시민의 상처가 빠르게 낫고 있었다. 아무래도 조슈아와 보리스가 내기에서 이긴 듯 했다.
이스핀은 주머니에 든 빛 들을 막시민에게 가져다 대었다.
빛이 막시민에게 흡수되면서 회복 속도가 빨라졌다.
막시민은 안고 있는 채로 이스핀은 감정을 추슬렀다.
막시민이 깨어나면 무슨 말을 할까?
무수한 말들이 있었지만 가장 강렬한 감정은 하나 뿐이었다.
상처가 완전히 사라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음 소리와 함께 눈을 떴다.
옛날에 이스핀을 도와준 시골 소년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 막시민에 심볼리온에게 잡혀갔을 때 그녀를 집어 삼켰던 감정. 중상을 입은 막시민이 언젠가 살아 돌아오면 하고 싶던 말.
"......보고 싶었어"
<다음화에 계속>
최종화 링크
https://m.cafe.daum.net/rocksoccer/ADrt/722517
원작: 룬의 아이들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