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뒤틀리고 있었다.
'소멸의 기원'이 완성되면서 세상의 모든 악한 기운들이 달의섬으로 모여 들었고 그들은 그 중심에 서있었다.
나야트레이, 란지에, 루이잔 강피르, 이솔렛, 그리고 네냐플과 심볼리온의 마법사들.
아이언페이스와의 결전이 끝나고 그들에게 남은 과제는 무사히 탈출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푸른 하늘이 급격히 주황빛으로 물들고 사방에서 번개가 내리 꽃혔다. 바다 너머에서는 검푸른 기운이 섬을 향해 짓쳐 들었다.
사방에서 짐승의 괴성이 메아리 친다. 오로지 살육 만이 목적인 괴수들의 소리. 그 괴물들 역시 소멸의 기원의 영향을 받아 몰려들고 있었다.
휴식을 취할새도 없이 일행은 전투를 준비했다. 몰려오는 적들을 쓰려트리고 바다에 있는 배들로 달려가야 했다.
루이잔 강피르가 앞장 서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아이언페이스의 공격에 맞고 뻗어 있었던 터라 다른 일행보다 훨씬 쌩쌩했다.
산을 어느정도 내려오고 점차 땅이 평탄해지기기 무섭게 괴수 무리가 그들을 형해 달려들었다.
선두에 선 루이잔이 기합을 외치며 달려들었다. 흡사 악어와 늑대를 연상시키는 50-60마리의 괴수들. 그것들을 닥치는 대로 베고 찌르는 루이잔의 검술은 흡사 호랑이의 모습과 같았다.
며칠전에 있었던 보리스와의 대련, 그리고 아이언페이스와의 전투에서 그들이 느꼈던 위화감. 지금 루이잔이 선보이는 검술이 그 위화감의 정체였다.
가나폴리 왕국의 마법이자 검술인 티그리스.
몇년전 실버스컬 결승전에서 보리스 진네만에게 패배한 이후 그는 한층 더 성장하기 위해 그동안 쌓아 올린 모든 것들을 버렸다. 비운 공간을 채워넣기 위해 그는 보리스의 실버스컬 경기 영상들을 하나 하나 분석해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초반 성장이 느린 티그리스의 특성상 얼마전까지는 완전히 티그리스를 채화 시키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지금, 동료들이 모두 지치고 부상 입은 상태일 때. 괴수들을 향해 홀로 달려드는 순간에, 루이잔을 가로 막고 있던 벽이 무너지며 완전히 티그리스의 주인이 된 것이다.
루이잔의 몸이 종횡무진하며 악어와 늑대 떼들을 도륙했다. 사방에 피가 흩날리고 괴수들이 공포에 찬 비명을 내질렸다.
검에 몸을 맞긴 채 날뛰던 루이잔의 시야에 더 이상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보니 살아있는 괴수는 단 한마리도 없었다. 들판 저편에서는 일행들이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은 채 경악한 얼굴로 루이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이잔 혼자서 그 괴수들을 전부 쓸어버린 것이었다.
자신이 한 행동에 당황하는 것은 잠시 뿐이었다. 루이잔은 일행을 이끌고 다시 한번 섬을 달렸다.
.......
벨노어 백작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복부에 칼을 맞고 팔다리에 총을 맞았음에도 여전히 살아 있었다.
하늘과 바다 너머를 훔쳐보고 벨노어는 절망감에 몸을 떨었다.
도망칠 방법은 전혀 없었다.
차라리 과다출혈로 죽었으면 좋으련만, 란지에는 친절하게도 앞으로도 며칠은 살아있을 수 있는 정도에 상처만 남긴 것이었다.
타닥 타닥
산 위에서 사람들이 달려 내려오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벨노어는 비명을 질렸다.
제발 누가 나 좀 구해줘!
윗쪽에서 한 소녀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누가 도와 달라는데?"
"내버려둬. 벨노어야. 양팔과 양다리가 망가진 상태로 버려졌거든"
란지에의 대답에 그들은 바닥에 있는 벨노어를 못 본 척 하며 지나갔다.
란지에와 일행들은 그대로 항구로 달려가서 미리 준비해 둔 보트를 타고 떠났다.
벨노어는 그들이 탄 보트가 프란츠 폰 아르님 전 공작의 배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 사이에도 악한 기운이 섬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10분 정도가 지나자 '소멸의기원'의 힘이 벨노어를 덮쳤다.
벨노어의 팔 다리에서 부터 피부, 혈관, 근육, 신경들을 이루는 단백질이 분해 되기 시작했다.
그의 팔다리가 마치 뜨거운 여름에 방치해둔 아이스크림 처럼 녹아내렸다.
사지에서 쏟아져 나온 피마저 분해되어 평범한 물로 변하고 있었다.
소멸의 기원의 영향이 점차 중심으로 향하며 벨노어의 장기와 몸통이 녹아 없어졌다.
심장마저 녹았지만 벨노어의 뇌는 여전히 살아서 입으로 비명을 질러 댔다.
마침내 어깨를 녹이고 올라온 '소멸의 기원'의 힘의 그의 입, 코, 귀와 눈을 차례차례 녹이고 마침내 머리카락 한 올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한때 벨노어 백작이라고 불리던 액체는 '소멸의 기원'이 완성되면서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
란지에가 이끌던 전투팀이 복귀했다.
그들이 뱃전으로 올라오자 프란츠 폰 아르님, 리체, 티치엘 등이 앞 다투어 달려와 그들을 얼싸 안았다. 클로에는 아무 말 없이 란지에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고 그들은 그 상태로 악수를 했다.
막시민의 상태는 급속도로 안정되고 있었다. 쥬스피앙이 막시민을 업고 달려오는 사이에 그의 상처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막시민은 선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다.
막시민의 혈색이 점차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뒤, 전투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 앉았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공간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차 포탈의 형태로 변해갔다.
마침내 포탈이 열리고 아공간으로 넘어갔던 자들이 복귀했다.
보리스, 조슈아, 이스핀은 포탈을 나오자 마자 막시민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솔렛이 보리스에게 다가와 말했다.
"보리스... 나가서 마지막으로 보지 않을래?"
보리스와 이솔렛이 밖으로 나가고 다른 이들도 그 뒤를 따랐다.
바다 저편에서는 달의섬이 소멸해가고 있었다.
그곳에 살던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산도, 바위도, 계곡도, 달여왕 신앙도, 섬의 모든 문화유적들도.
'소멸의 기원'에 휘말려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달의섬의 멸망이었다.
......
감상에 빠져있던 그들을 깨운 것은 프란츠 폰 아르님 전 공작이었다.
이제 그들과 생존자들은 새로 정착할 곳을 찾아야 했다.
그들은 다시 선실로 들어가 회의를 시작했다.
앞서 한창 대륙에서 전투를 벌일 때 틈틈히 정착지로 적당한 곳을 확인해 두었었다.
이곳이 낫다, 저곳이 낫다 토론이 격렬해 졌을 때 갑자기 유령의 음성이 들려왔다.
엔디미온이 말했다.
'내가 방금 괜찮은 곳을 하나 발견했는데 말이야'
뜬끔 없이 들어온 그 소리에 다들 어리둥절해 있는 동안, 이런 일에 익숙한 보리스가 엔디미온에게 물었다.
"엔디미온, 거기가 어딘대?"
'아름다운 숲과 호수가 있는 곳이야. 보니까 원래 악의 기운이 일대를 잠식하고 있었는데, 소멸의 기원에 의해 정화된 것 같더라고.'
일행들이 집중할 때까지 기다리던 엔디미온이 말을 이었다.
'그런 곳은 왠만한 데보다 훨씬 살기 좋아. 그동안 있던 악의 기운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좋은 것들이 가득 채우거든'
그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 똑똑하고 지혜로운 가나폴리 왕국의 소년왕. 그가 추천한 곳이니 반대가 있을리 없었다.
엔디미온에게 위치 좌표를 들은 뒤 바로 항로를 잡았고, 쥬스피앙이 배에 설치해 둔 황금 엔진에 힘 입어 불과 사흘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곳은 아름다웠다.
잡초들로 가득한 들판은 한 없이 푸르렀고 숲의 나무들은 청량감이 넘쳤다. 숲에 둘러싸인 호수는 대륙 어디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물이 맑았다.
그리고 그 옆에, 폐가가 하나 서 있었다.
과거 전투로 불탄 폐가 였지만 골격만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한 형제가 서로 죽이려 들때 다른 형제는 서로를 지켜주고, 결국 두 관계 모두 형이 죽으며 끝난 비극의 현장.
그 사건은 살아남은 두 동생들에게 시린 겨울을 내렸고 추억의 장소는 매마른 광야가 되어 어떤 생명도 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 기적이 일어났다.
겨울을 지샌 어린 씨앗이 꽃을 피우며 광야에 따뜻한 봄과 생명의 향취를 가져온 것 이었다.
트라바체스의 롱고르드.
한 가문이 종막을 맞이한 그곳에서 새로운 세상의 서막이 열렸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보리스가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곳은 호수 였다.
전에 왔을 때와는 달리 어떤 비극의 냄새도 나지 않았다.
호수 옆에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을까?
저 멀리 달려 오는 것이 적인지 아군인지 분간이 안되는 황혼의 시간.
호수를 붉게 물드는 태양을 바라보며 이솔렛이 그의 곁에 앉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아무말 없이 그의 손을 잡아 주었다.
보리스가 말했다.
"이 곳의 이름은 에메라 호수야."
더 이상 에메라 호수에 아이들을 잡아가는 망령 따위는 없었다.
비극 속에서 단단해진 어른들과, 청년들과, 아이들의 웃음 소리만이 있을 뿐이었다.
<끝>
지금까지 '달의섬의 멸망'을 사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