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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문 앞에는 '미시오'라는 글자가 여전히 붙어 있었다. 육소봉은 문을 열고
화만루와 함께 걸어들어갔다. 이것은 그가 두 번째로 이 산문을 들어가는
것이었고, 최후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산 중턱엔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었다. 그 셀 수도 없이 많던 보물과 병
기들은 모두 기적처럼 보이지를 않았다. 산 중턱 가운데에 낡은 멍석을 깔
은 작은 돌탁자가 있었는데 곽휴는 맨발인 채로 푸른 옷을 입고 책상다리를
하고서는 그 멍석 위에서 아주 좋은 향기가 나는 술을 데우고 있었다.
육소봉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서 돌계단으로 걸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
다.
"이번엔 제가 아주 시간을 잘 맞춰서 온 것 같습니다." 곽휴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이번엔 별로 이상할 게 없군. 내게 좋은 술이 있기만 하면 자네
가 곧 찾아 오는 게 말일세!" "그러나 전 도리어 좀 이상하게 생각되는데
요."
"뭐가 말인가?"
"당신이 일부러 좋은 술로 절 꾀어 내는 게 아닌가 싶거든요." 곽휴가 큰
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어쨌든 좋은 술이니 자네가 옷을 더럽혀도 상관없다면 여기 앉아 한 잔
들게나." "겁나는데요."
곽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자네가 겁이 난다고?"
"옷이 더럽혀질까봐 겁내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겁난다는 건가?"
"제가 곽천청처럼 그 술을 한잔 마시고 나면 다른 사람이 대신 이 바둑
대국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곽휴가 그를 쳐다보는 눈빛
이 칼집에서 꺼내 든 칼처럼 변했다. 그러나 더 이상 아무 말도 없이 천천
히 술 한 잔을 따라 천천히 마셔버렸다.
육소봉 역시 더 이상 아무 말도 않았다. 그는 이 말로도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앞에 있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이니, 똑똑한 사람에
게 얘기할 때는 한마디면 충분한 까닭이었다.
잠시 후, 곽휴가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자네를 속일 수는 없는 모양이야."
"그러니 당신도 더 이상 절 속이실 필요가 없습니다." "자네는 어떻게 내
가 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나?" 육소봉이 탄식하며 말했다.
"전 원래 생각지 못했었습니다. 처음부터 잘못 생각했었죠." "그래?"
"전 당신과 함철산, 독고일학 모두가 피해자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오직 곽
천청만이 이 사건에서 이득을 얻은 줄 알았지요." "지금은?"
"지금엔 이 사건에서 정말로 이득을 얻은 사람은 단 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곽휴가 말했다.
"그게 바로 나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당신인 것입니다!"
곽휴가 또 술을 따랐다.
"대금붕왕이 죽었으니, 이 세상에 당신에게 금붕왕조에 대한 빚을 청산하
라고 독촉할 사람은 더 이상 없게 되었지요." 곽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
며 말했다.
"원래 내게는 전혀 빚독촉을 하질 않았어. 그런데 요즘 돈을 너무 펑펑
쓰더라구. 돈버는 고통도 모르는 사람이 말이야." "그래서 당신은 그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거로군요!" 곽휴가 차갑게 말했다.
"그런 사람은 죽어야 마땅한 거네!"
"그러나 그가 죽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았죠. 독고일학과 함철산 역시
그의 재산을 나눠 갖기를 바랬으니까." "그 재산은 원래 내것이었네! 나만이
그것을 고생스럽게 모으고 그것을 점점 늘려나갔으니 절대 다른 사람과 나
눠 가질 수는 없었어!" "그래서 그들 역시 죽어야 마땅하다 이건가요?"
"죽지 않으면 안되지!"
육소봉은 탄식하며 말했다.
"그 재산은 사실 서른 명이 평생을 사용한다 해도 다 못쓸 재산입니다.
당신은 이미 이렇게 나이가 많이 들었는데, 설마 그것들을 무덤에 갖고 가
려는 것은 아니겠죠?" 곽휴가 그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했다.
"자네에게 만일 부인이 있다면, 그 부인을 다른 사람과 함께 소유하려 하
겠는가?" "그건 완전히 다른 별개의 문제입니다."
"내게는 그 두 가지가 완전히 똑같다네. 이 재산은 바로 내 부인과 같으
니, 죽는다 해도 절대 다른 사람이 사용하게 할 수는 없어!" "그래서 당신은
우선 곽천청과 상관비연을 이용해서 대금붕왕을 죽이고, 또 나를 이용해서
독고일학과 함철산을 죽이게 했군요." "자네를 찾을 샐각은 원래 없었다네.
허나 자네 외에 이 일을 맡을 다른 사람은 정말 생각나질 않았어." 육소봉
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건 정말일세."
"저야 제가 원해서 당신의 함정에 걸려들었다고는 하지만 곽천청은요? 그
같은 사람이 어떻게 당신의 미끼에 걸려들었지요?" "그건 내가 그런 게 아
니라네."
"그럼 상관비연이?"
곽휴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설마 그녀가 남자들에게 아주 매력 있는 여인이라는 사실을 느끼
지 못했나?" 옆에서 화만루가 쓴웃음을 지었다.
육소봉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당신은 또 어떻게 상관비연을 유혹했지요?"
곽휴가 유유히 말했다.
"내가 비록 늙은이이긴 하나 여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정도는 된다
네. 내게는 여자가 절대로 거절 못할 어떤 물건이 있으니까." "어떤 물건이
오?"
"내 보석들이지."
그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계속 말했다.
"세상에 보석을 좋아하지 않는 여자란 없다네. 세상에 미녀를 좋아 하지
않는 남자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야." "그렇다면 당신은 그 보석들을 상
관비연에게 나눠 주기로 약속하고서 그녀에게 곽천청을 유혹하도록 시킨 건
가요?" 곽휴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들 모두는 그녀의 애인이 곽천청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만. 그녀
가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은 바로 이 늙은이라는 것은 생각지 못하고 말야."
육소봉이 흥분된 어조로 소리치며 말했다.
"그녀가 사랑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 당신의 보석이오!" 곽휴가 웃으며 말
했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건가. 어쨌든 내게 있어서 그녀는 이미 죽은
사람이었어." "당신은 일찍부터 이 일이 끝난 후엔 그녀를 죽여 입을 막을
계획이었군요?" "내 재산을 다른 사람과 나눠 가질 수는 없다고 내가 말했
지 않나?" "그래서 당신은 고의로 육발의 비밀을 나에게 이야기해서 내가
그녀를 죽이길 원했던 거로군요." 육소봉이 다시 말했다.
"곽천청조차도 당신이 이 사건의 진정한 주모자라는 것을 몰랐단 말입니
까?" "당연히 몰랐지. 알았다면 그가 왜 상관비연 대신 한사코 목숨을 내걸
려고 했겠는가?" "그러나 내가 도리어 상관비연을 놓아주리라고는 당신 역
시 생각지 못했지요." "그러니 내가 직접 손을 쓸 수밖에 없었어."
"곽천청은 결코 바보가 아니니, 상관비연의 죽음을 알고는 이 사건에 반
드시 주모자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나와 청풍관에서 만
나기로 약속한 후에 곧장 당신을 찾아온 것이군요." "그는 분명 바보는 아니
네만, 똑똑한 사람도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를때가 있다는 것이 애석할 뿐이
네." "확실히 그는 당신을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니 그도 죽어야 했지."
"당신은 그를 죽인 후에야 그를 청풍관으로 보냈군요." "청풍관의 재산은
내것이니, 언제든지 내가 거둬들일 수 있네." "그래서 당신이 청풍도인에게
당신의 거짓말에 협조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그가 감히 거절하지 못한 거군
요." 곽휴가 유유히 말했다.
"출가한 사람이 거짓말을 했으니 당연히 죽어야 마땅하지!" "당신은 저로
하여금 곽천청이 죄가 두려워서 죽은 것으로 생각하게 해서, 제가 이 사건
에서 손을 떼기를 바랐던 거고요!" 곽휴가 탄식하며 말했다.
"난 분명히 자네가 더 이상 이 일에 관여하지 않기를 바랐다네. 안타깝게
도 그 말 많은 도사가 자네를 해쳤어!" "그가 저를 해쳤다구요?"
"난 그가 어제 저녁 바둑을 두었다는 얘기를 듣고서, 조만간 자네가이 빈
틈을 눈치챌 것을 알게 되었지." "그래서 당신은 아예 청풍관에 불을 질러
태워버린 것이군요." "그 땅은 다른 용도로 쓸 생각이었는데 "
"당신에게는 그 사람들 역시 모두 그 땅과 마찬가지였겠죠. 단지 당신이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할 뿐이었으니까." "그러니 내가 그들을 살리고 싶으
면, 그들이 살 수 있는 것이고, 내가 그들을 죽이고 싶으면, 그들은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걸세!" 육소봉이 말했다.
"당신은 내가 당신에게 이용당하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죠?" "모든 사람
에게는 약점이 있는 법이네. 자네가 그들의 약점을 알 수 만 있다면 누구든
이용할 수 있다네!" "저의 약점이 무엇인데요?"
곽휴가 쌀쌀맞게 말했다.
"자네의 약점은 바로 쓸데없는 일에 참견하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는 거
야!" 그러자 육소봉은 탄식하며 말했다.
"그래서 제가 당신과 한패가 되어 당신 대신 서문취설과 약속해서 당신을
도와 함철산과 독고일학을 죽이게 한 것이군요?" "자네는 모든 일을 다 잘
해냈지. 곽천청이 죽은 후에 손을 떼려고만 했다면 지금부터 자네는 언제든
지 나의 좋은 술을 마실 수도 있고 어려운 일에 부딪힐 때면 나의 재산을
나눠 가질 수도 있었을 거야." 육소봉이 탄식하며 말했다.
"제가 지금도 손을 떼지 않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군요." 곽휴 역시 탄식
하며 말했다.
"자네는 내가 왜 이곳의 물건을 다 옮기려는지 알 수 있을 거야." 육소봉
은 알지 못했다.
곽휴가 이어 말했다.
"왜냐하면 난 이곳을 자네의 무덤으로 이미 준비해 놓았기 때문이야." "이
곳이 무덤이라니, 너무 넓은데요."
곽휴가 유유히 말했다.
"육소봉이 청의제일루 밑에 묻힐 수 있다면, 죽어도 유감이 없겠지." "청
의제일루가 과연 여기라니, 상관비연은 적어도 진실을 말하긴 했군요." "애
석하게도 다른 사람들이 청의제일루가 이곳에 있다고 말하면 할수록 자네는
도리어 더더욱 믿지 않았지." "그렇다면 당신은 당연히 청의백팔루의 총우두
머리겠군요?" 곽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총우두머리라는 그 말은 정말 발음이 듣기 좋구만. 난 그 말 듣기를 아
주 좋아한다네." "설마 당신의 돈을 세는 소리보다도 더 좋다는 겁니까?" 곽
휴가 담담히 말했다.
"난 돈을 세지 않네. 내 돈은 세어봤자 다 셀 수가 없거든." 육소봉이 또
탄식하며 말했다.
"당신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알기야 하겠지만 자
네는 안타깝게도 죽을 때까지 배우지 못할걸세." "난 돈을 무덤에 가지고 갈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곽휴가 박장대소하며 말했다.
"좋아, 아주 좋아."
"아주 좋다구요?"
곽휴가 웃으며 말했다.
"듣자하니 자네는 항상 엄청난 은표를 지니고 다닌다고 하고, 또 한번에
적어도 오천 냥 정도를 쓴다고 하더군." 육소봉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 오천 냥의 은표가 이제 당신 수중에 들어가겠군요." "자네는 돈을 무
덤에 갖고 갈 생각이 없다고 했으니 자네가 죽은 후에 내가 그 은표를 꺼내
갖겠네." "당신은 죽은 사람의 돈조차도 원합니까?"
"어떤 돈이든 모두 원하는 것, 이것이 바로 돈버는 비결 중 하나라네." "
안타깝게도 전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무덤 안에 들어와 있지."
"당신은 저를 죽일 자신이 있습니까?"
"누구든 무덤에 들어온 이상 살아서 나갈 생각은 하지 말아야지." 그를 노
려보는 육소봉의 눈에선 검광과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곽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손이 근질근질한가?"
"확실히 조금은요."
곽휴가 유유히 말했다.
"허나 난 자네와 겨룰 맘이 전혀 없다네. 난 이미 죽게 된 사람과는 싸우
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 그가 가볍게 돌책상을 한번 누르자 갑자기 쾅, 하
는 소리가 나면서 위에서부터 거대한 철 울타리가 내려와 그 돌책상을 덮었
다.
육소봉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은 언제 새가 되었죠? 왜 자신을 새장 안에 가두는 겁니까?" "웃기
나?"
"아주 우습군요."
"내가 가버리고 나면 그렇지 않을걸세. 사람이 곧 죽게 되었다는 것을 알
게 되면 어떤 일이든 우습게 느껴질 리가 없으니까." "내가 이제 굶어 죽게
되었다는 겁니까?"
곽휴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내가 가버리고 나면, 이곳엔 먹을 것이라곤 자네와 자네 친구의 살점뿐
이고, 마실 거라곤 자네들의 피밖에 남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당신이 어
떻게 나가죠?"
"이곳의 유일한 출구는 바로 내가 앉아 있는 이 책상 아래에 있네. 확신
하네만 내가 간 후에 이 출구는 막혀버릴걸세." 육소봉은 안색이 변하며 억
지로 웃으려 애쓰면서 말했다.
"난 아마 그 길로 나갈 수 없을 것 같군요."
"자네가 들어온 산의 문은 바깥에서만 열 수 있다네. 확신컨대 자네대신
밖에서 문을 열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야." "당신은 또 무엇을 확신할
수 있나요?"
곽휴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자네의 은표를 가져가기 위해 당연히 돌아올 것이라는 것." 육소봉
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 내 주머니 안에는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요?" 곽휴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보아하니 자네는 죽어도 조금의 이득조차 내게 양보하지 않으려나보군."
"간신히 아셨군요."
"다행히 가져갈 것이 있긴 있네."
"뭐죠?"
"적어도 자네들이 입은 옷을 벗겨 내서 잡화점에 팔면 조금은 남길 수 있
지 않겠나." "푼돈마저 원한단 말입니까?"
"돈은 항상 좋은 거라네. 아예 없는 것보다는 푼돈이라도 있는 게 낫지."
"좋아요. 당신에게 드리지요."
그는 갑자기 손을 휘둘러 십여 개의 동전을 몰래 숨긴 강풍으로 곽휴를
향해 날렸다.
곽휴가 움직이지도 않고 피하지도 않은 채 이 동전들이 철 울타리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다가 손을 휘두르자, 열두 개의 동전이 돌연 전
부 그의 손바닥 안에 떨어졌다. 이 노인의 수상(手上) 공력의 오묘함은 육소
봉조차 감동받게 했다.
"멋진 솜씨요!"
곽휴는 열두 개의 동전을 매우 조심스럽게 집어넣더니 미소지으며 말했
다.
"돈을 집어넣을 땐 내 무공이 특별히 더 좋아지지." "안타깝게도 이 무공
이 저보다는 좀 손색이 없는 듯하군요." 곽휴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설마 날 격분시켜 뛰쳐나가 자네와 한판 싸움을 벌이도록 유도하
는 것은 아니겠지?" "바로 그 뜻입니다."
"그렇다면 그 생각을 버렸으면 좋겠구만."
"당신은 죽어도 나오지 않을 겁니까?"
"내가 설사 나가려 한다 해도 이미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네." "어째서
요?"
"이 철 울타리는 잘 정련된 철로 만들어진 것으로 순량이 천구백팔십 근
이라네. 설사 철을 진흙처럼 자를 수 있는 칼이 있다 하더라도 자를 수 없
는데, 더더군다나 그런 칼은 신화, 전설 속에서나 가능한 법 아니겠나?" "천
구백팔십 근의 철 새장이나 당연히 아무도 들어올릴 수 없겠군요." "절대로
없지."
"그러니 당신이 나올 수 없을 뿐 아니라, 내가 들어갈 수도 없다는 거군
요." "그러니 자네는 내가 가는 것을 보고 있다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거
지." "당신이 먼저 이 철 새장으로 자기를 덮은 것은 내가 당신과 싸우는게
무서웠기 때문이오?" "난 이미 늙어 여자와 침대 위에서 하는 일도 흥미가
없는데 하물며 싸움이라니?" 육소봉이 화만루의 어깨를 쓰다듬더니 탄식하
며 말했다.
"보아하니 이제 우린 죽을 수밖에 없는 모양이네!"
화만루는 의외로 웃으면서 담담히 말했다.
"보아하니 이것이 바로 그의 마지막 한 수인 모양이야!" "자네는 그의 한
수가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나보군." "허나 우린 아직
한 수를 두지 않았네. 우리에게는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거든." "누구지?"
"자네는 주정을 잊었나?"
육소봉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잊지 않았네."
화만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자네가 지금까지도 계속 웃을 수 있었구만." "그래서 자네는 조금
도 조급해 하지 않았고 말이야." "그는 원래 이곳에 주정을 묶어 놓아선 안
되는 거였지." "맞아."
곽휴의 안색이 거의 변하여 참지 못하고 말했다.
"주정이 이곳에 있는 게 또 뭐가 어떻다는 건가?"
육소봉이 담담히 말했다.
"뭐가 어떻다는 건 아닙니다. 단지 공교롭게도 노대사의 제자라는 것 밖
에는요." 곽휴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노대사?"
"당신도 노대사가 바로 노반조사의 제자이자, 이 세상에서 기관 제작의
제일인자라는 것을 당연히 알 겁니다." "노대사가 죽은 후 최고의 고수가 바
로 주정이지요." "그래서 그가 이곳에 있기만 하면 자네들은 곧 빠져나갈 수
있다 이건가?" "맞습니다."
"그는 분명 이곳에 있네."
"그렇죠."
"바로 뒤에서 자네는 지난 번 이곳을 보았었지."
"압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뛰어난 자라면 왜 아직도 나오지 않고 있지?" "그는 곧
나올 겁니다."
곽휴가 웃으며 말했다.
"설사 그가 지금 나올 수 있다 해도 이미 너무 늦었다네." "왜죠?"
"이곳의 기관 중추는 바로 내가 앉아 있는 바로 여기 아래에 있기 때문이
지." "그래요?"
"내가 나가기만 하면 당연히 그 곳은 부수어져버릴 것이네." "그 이후에는
요?"
"그 이후엔 이곳의 모든 출구는 돌덩이로 막혀 버리는 거지. 그 돌의 중
량은 대략 팔천 근 이상이네. 그러니 " "그러니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 이건가요?" 곽휴가 담담히 말했다.
"설령 노반이 다시 살아난다 해도 이곳에서 다시 죽을 수밖에 없지." "그
래서 이제 당신은 갈 겁니까?"
"나는 본래 이곳에서 자네들과 함께 좀더 얘기할 생각이었지. 죽음을 기
다리는 일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지
금은 생각이 변한 모양이군요?"
"그렇다네!"
"보아하니 제가 당신을 이곳에 붙들어 놓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당신을
전송할 방법도 없는 것 같군요." "그러나 자네는 분명 곧 내 생각이 날걸세.
내가 알기로는 " 그는 미소지으며 손을 휘두르더니 또 말했다.
"내가 여기를 누르기만 하면 난 곧 보이지 않게 되고 자네는 지금 이후엔
다시는 날 볼 수 없게 돼." 그가 그 곳을 누르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그
가 보이지 않게 된 것이 아니고 그의 얼굴에 여유롭게 있던 웃음기가 도리
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네모난 탁자는 여전히 네모난 탁자였다. 그는 본래 단정히 그 위에 앉아
있었는데 지금도 단정히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다만, 얼굴의 표정이 돌연 한
대 얻어맞은 듯하게 변해 있었다.
콩 한 알보다도 더 큰 땀방울이 갑자기 흘러내렸다. 곽휴는 이 탁자 아래
에 바로 출구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탁자 아래에는 분명 출구가 있긴
있었지만 지금은 이 출구가 갑자기 사라진 듯했다.
육소봉이 눈을 껌벅이며 말했다.
"왜 아직도 가지 않고 있지요?"
곽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는 말했다.
"자네 자네 "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더니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육소봉은 한숨을 내몰아 쉬었다. 그런데 그 외에도 또다른 사람이 한숨을
쉬고 있음을 발견했다. 한숨을 쉰 사람은 화만루가 아니라 바로, 상관설아와
여주인이었다. 그녀들은 한숨을 쉬면서 걸어왔는데 얼굴에 모두 봄꽃처럼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상관설아가 말했다.
"보아하니 당신 말이 맞는 것 같네요. 이 사람은 정말 두 손이 있네요?"
여주인은 더욱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러니 그는 세상에 하나뿐인 육소봉이지."
육소봉은 쓴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당신들이 줄곧 나오지 않은 것은 내 손이 두 개인지 아닌지를 보려고 기
다렸던 것인가요?" 상관설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우리들은 본래 당신이 이번에는 절대로 저 늙은 여우를 상대할 방법이
없을 줄 알았어요. 당신이 최후의 한 수를 남겨 놓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질
못했답니다." 여주인이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당신의 이번 최후의 한 수는 정말 아주 오묘했어요." 상관설아가 말했다.
"이 새장은 보래 그가 당신을 상대하기 위한 거였죠. 그런데 자신이 도리
어 새장에 갇혔으니 그 자신이 그러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질 못했을
거예요." 육소봉 역시 웃으며 말했다.
"이 한 수를 바로 '청군입옹(자기가 놓은 함정에 자기가 걸려든다는 뜻)'
이라고 부르지." 여주인이 아주 맑은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당신은 이 방법을 어떻게 생각해냈죠?"
육소봉이 유유히 말했다.
"전 본래 천재니까요."
상관설아가 말했다.
"혹시 당신은 들어오기 전에 이미 그가 그 길로 도망가려 한다는 속셈을
눈치채고 그 길을 미리 막아 놓았던 건 아닌가요?" 육소봉은 대답하지 않았
다.
여주인 또한 참지 못하고 물었다.
"왜 대답하지 않나요? 도대체 무슨 방법을 사용한 거죠?" 육소봉이 돌연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상관설아가 말했다.
"왜죠?"
육소봉이 웃으며 말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절초 하나를 남겨 놓고자 하는 법이니,
당신들 같은 여인네들 앞에선 더더욱 알려 줄 수 없어요." 그는 늙은 여우
처럼 웃더니 갑자기 말했다.
"저의 절초를 만일 당신들이 배워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이후에 제가
무슨 낙으로 살겠습니까?" 사람들이 다 가버리자 화만루 역시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자네는 도대체 어떤 방법을 사용한 건가? 왜 그들에게 알려주려 하지 않
는 거지?" 육소봉의 대답은 아주 기묘했다.
"왜냐하면 나 역시도 모르기 때문이야."
화만루가 놀라 말했다.
"그 입구가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막혔는지 자네 역시 모르겠다고?" "그
렇다네."
화만루는 놀라 멍청해졌다.
"아마도 기관이 갑자기 고장났기 때문일 거야. 아마 어떤 늙은 쥐가 저도
모르는 새에 뛰어들어가 기관을 막아버린 것이거나 " 그는 깊은 생각
에 잠기며 조용히 말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일까? 단지 하늘만 알겠지 " "단지 하늘만
안다고?"
육소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자네는 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결국 막 성공하려는 순간 실패하게 되
는지 그 이유를 알고 있나?" "모르겠네."
"하늘이 그들의 최후를 미리 준비해 놓고 미리 기다리기 때문일 걸세. 그
렇기에 그들의 계획이 아무리 교묘해도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거지." "그래
서 이 최후의 한 수 역시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늘의 뜻이라
는 것이로군." "맞네."
화만루가 돌연 유쾌하게 웃었다.
"왜 웃는가? 내 말이 믿기지 않는 건가?"
화만루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는 설마 내가 정말로 믿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육소
봉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왜 내가 진실을 말할 땐 사람들은 오히려 믿지 않으려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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