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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만이야. 100년! 너를 이렇게 보낼 수 없어……. 어떻게서든…….’
절박하게 내뱉어지는 마음속의 외침. 그 웅웅거림이 온 몸을 잠식하는 듯하였다. 자신도 모르는 새에 눈물이 온 얼굴을 적셨다. 릴리는 저 멀리서 희미하게 빛나는 성곽 위 불빛을 보았다. 드디어 도착했다. 릴리는 검붉은 피로 물든 두 손을 덜덜 떨며, 근처 수풀 속으로 들어갔다. 땅을 평평하게 만들기 위해 손등이 까질 때까지 땅을 쳤다. 그 위에 품에 안고 있던 담요에 싸인 아기, 메그릴을 올려놓았다. 메그릴은 어느새 잠에서 깨어, 큰 두 눈동자를 데구룩 굴리고 있었다. 릴리는 눈물을 훔치고, 자신의 품을 뒤져 홍옥을 가죽 끈에 꿴, 목걸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목걸이를 담요 안에 껴 넣으며, 릴리는 허리를 깊게 숙여서 메그릴을 껴안았다. 그리곤 메그릴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넌 화룡의 아이야, 메그릴. 그걸 잊어서는 안 돼……. 결코…….”
릴리는 조용히 몸을 다시 일으켰다.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나왔지만, 그 눈빛만은 결연했다. 그녀는 양 손을 쫙 펴서 메그릴의 배 부근에 갖다 대었다.
[……이 세계의 모든 열(熱)을 가지고 있는 것에 고하노니. 그대들의 주인은 다름 아닌 이 아이이며, 그대들은 성충으로 인하야 아이를 가호해야할 것을 명하노라……. 모든 열은 강하되 유순하고 존재하되 보이지 아니한다……]
낮은 목소리로 릴리는 끊임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그럴수록 그녀의 양 손에선 파앗, 하는 소리와 함께 붉은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빛은 그녀의 손에서 뻗어 나와 메그릴의 온 몸을 감쌌다. 약 5분 쯤 지났을까, 메그릴을 감쌌던 빛이 천천히 배로 되돌아와 뭉쳤다. 그리곤 배꼽 안으로 빛이 들어가더니, 이윽고 빛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하…하하……됐어. 됐어…….”
릴리는 곧 쓰러질 것처럼 숨을 헐떡이며 중얼거렸다. 메그릴은 여전히 두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다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선연한 붉은 빛으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검은 색으로 변한 것뿐이었다. 화룡이라는 유일한 표식인 그 선홍빛의 눈동자가,
그렇게 사라졌다.
릴리는 숨을 고르며 다시 메그릴을 안아 들었다. 꽉 깨문 아랫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그러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이대로……이대로 몰락하지 않는다.”
쥐어짜듯 흘러나온 목소리가 차가운 밤공기를 울린다.
* * * * *
“오늘은 모든 일에 차질이 없어야 한다! 모두 알아듣겠지? 카르티안 주인님께서 석 달만에 돌아오시는 길이니, 한 치의 불편함도 없이 해야 해!”
“예, 마스터!”
“그래, 그래. 아~주 좋아. 얼른 자기 위치로 돌아가도……아니, 잠깐만!”
마스터란 불린 뚱뚱한 여성, 페니는 그녀의 두툼한 손을 내저었다. 그와 동시에, 30명의 하인들이 일제히 다시 열을 맞춰 섰다. 페니는 그녀의 작은 눈동자를 더 좁게 하며 사람들의 수를 세기 시작했다. ……그래, 분명히 31명이 되어야 한단 말이야. 그래서 아주 께름칙하게 한 명이 항상 남곤 하는. 페니는 혹시 해서 다시 한 번 수를 세어 보았지만 그래도 30명이다. 하나가 부족하다! 페니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통일된 메이드 복장을 입고 있는 수많은 하인들 사이를 지나갔다. 그리곤 깨달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메그으으리이일!!”
페니의 볼살이 마구 떨리며 얼굴이 새빨개졌다. 페니는 두 팔을 붕붕 휘둘렀다. 하인들은 일제히 긴장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맥스! 어서 이 씹어 먹을 꼬맹이를 잡아 와!”
“예!”
페니의 뒤에 서있던 심복 맥스가 뛰어 나갔다. 페니는 얼굴을 씰룩씰룩했다. 화가 날대로 났다는 표시였다. 오늘 저녁도 없군, 30명의 하인들은 동시에 생각했다. 마음 같아선 진창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그들은 가까스로 참았다. 그랬다간 오늘 저녁뿐만 아니라 내일까지 쫄딱 굶어야 할 것이었다. 페니는 한참을 서성거리며 분을 삭이지 못하고 있다가, 단박에 눈을 세모꼴로 하고 하인들에게 소리쳤다.
“이 바보 같은 새끼들이 여기서 뭐하는 거야! 빨리 각자 자기 위치로 꺼져 버려!”
하인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재빨리 방을 빠져나갔다. 우루루, 한 번에 빠져나가는 하인들을 바라보더니 페니도 결국 방을 나갔다. 쾅! 방문이 떨어져나갈 듯 세게 닫히고 방 안이 고요해졌을 때 즈음이었다.
탁……. 방구석에 있는 낡은 서랍장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열린 문 사이로 빠꼼히 내밀어진 얼굴은, 다름 아닌 메그릴이었다. 메그릴은 두리번거리며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곤 그제야 서랍장에서 빠져나왔다. 휘유, 한숨을 내쉬며 메그릴은 씩 웃었다.
“하여간! 그 뚱땡이 아줌마는 바보라니깐.”
메그릴은 킥킥대며 자신의 짧은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짧게 커트해서 목 언저리까지 밖에 오지 않은 머리와 편한 바지와 윗옷. 어딜 봐도 열 두셋 정도의 사내아이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물론 다른 이들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메그릴은 이 카르티안 성의 열 네 살 난 말썽꾸러기 남자 하인 중 하나,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물론 그 말썽이라는 게 가끔 도를 지나치긴 했지만.
메그릴은 방 안을 서성거리며 이젠 어떻게 해야 좋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취미도 말썽이요, 특기도 말썽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이 성에 포함된 몸종. 오늘같이 바쁜 날은 하나의 손이라도 부족했다. 잔심부름할 남자 하인은 더더욱 중요한 상황이었고. 그런 날에 화끈하게 땡땡이를 쳐버린 입장이었지만,
메그릴 나름대로 변명거리는 있었다.
‘또 날 부를 거란 말이야, 그 카르티안인가 뭐시기 하는 그 놈…….’
메그릴은 동그란 얼굴을 팍 찡그리며, 카르티안 공작을 떠올렸다. 메그릴은 주인이자 귀족인 정도라고 밖에 몰랐지만, 사실상 카르티안 공작은 꽤 입지 있는 인물이었다. 그의 영지는 에트페 제국 안에서 가장 부유한 영지 중 하나에 속했으며, 4대 공작가의 가주이기도 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그는 일 년의 반 이상을 자신의 영지가 아닌 수도로 올라가 있었다. 뭐, 이런 사실이야 메그릴이 알고 있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아하지만…….
메그릴은 그저 짜증나는 주인일 뿐이었다.
그는 수도에 올라가 있다가 석 달에 한 번씩 이런 식으로 영지에 되돌아오곤 했다. 그것이면 좋았다. 허나 올 때마다 메그릴은 부른다는 게 문제였다. 불러서 한다는 게 아주 시시한 거였다. 그래, 하인 생활은 어렵지 않느냐(메그릴은 이 질문의 의도 자체가 궁금했다! 마치 시집 간 딸에게 시집살이가 힘들지 않느냐 물어보는 말투였다), 요즘 들어 무어에 흥미가 생겼냐, 밥 먹는 거나 자는 건 어떠냐 등……대답하기도 안 하기도 아주 애매한 질문들이었다.
메그릴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아주 오늘 하루 내내 카르티안 공작의 부름을 피해야겠단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공작에게 다녀오고 나면 동료 하인들에게 질문공세가 쏟아진다. 공작과의 대화도 대화였지만 그 질문들이 더 싫었다.
“우씨!”
메그릴은 투덜대다가 풀썩 바닥에 앉았다. 한숨부터 나온다. 카르티안 공작이 마치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원흉 같았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메그릴이 습관적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 때였다. 큰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메그릴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와 마주했다.
“아……하하……. 페니 아줌마…….”
“너 이 새끼!!”
페니는 살을 출렁거리며 다가와 메그릴의 귀를 잡아들었다. “아야야!” 아줌마, 이러다가 귀가 떨어지겠어요! 제발! 메그릴이 끊임없이 외쳤지만 페니는 놓을 생각을 안 했다. 메그릴은 페니에게 질질 끌려가며 아양을 떨었다.
“아줌마, 잘못했어요오……. 앗, 아줌마! 오늘따라 더 예뻐 보이시는 것 같은데요! 완전 여신! 저 아줌마와 나이차이가 스무살은 넘게 나겠지만, 왠지……아줌마라면 괜찮을 것 같……”
“그 입 안 다물면 죽을 줄 알아라.”
“헙, 옙.”
메그릴은 울상을 지으며 이제 순순히 페니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페니는 몇 발자국을 더 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메그릴의 귀를 잡고 있던 손도 놓았다. 메그릴이 뭐냐는 듯 바라보자, 페니가 볼을 씰룩거리며 말했다.
“카르티안 주인님께서 돌아오셨다.”
“어……예. 조, 좋은 일이네요! 하, 하하…….”
“지금 당장 올라오라 하신다.”
“……옛?”
“뭘 봐. 올라가봐. 아참, 오늘 밤 네 밥은 없다.”
메그릴은 픽 웃는 페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억지웃음을 짓곤 공작의 방으로 향했다. 페니가 못 듣게 젠장할, 이라고 중얼거리며.
* * * * *
똑똑.
“들어오게.”
메그릴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쉬었다가 문을 열었다. 고풍스러운 책상 앞에 카르티안 공작이 앉아 있었다. 새치 있는 머리가 오히려 중후한 멋을 더해주는 데다가, 눈주름과 이마주름마저 우아스러워 보이는 사람이다. 메그릴은 그를 대할 때마다 온 몸이 오그라들 것 같았다. 마치……거대한 산 앞에 서 있는 느낌이다. 침을 꼴깍 삼키며 메그릴이 고개를 숙였다. 카르티안 공작은 턱짓으로 의자에 앉으라고 지시했다. 메그릴은 화, 황공합니다! 하고 소리치곤 의자에 앉아서 공작을 빤히 바라보았다.
공작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메그릴, 지금 몇 살이지?”
“열 네 살입니다.”
“그래, 많이 컸군……. 힘들지는 않은가?”
“예, 예? 아, 아니요. 소인 몸종생활 힘들다 말다 할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요. 그저 충실히 몸을 바칠……”
“아니지, 아니야. 그걸 물은 게 아닐세. 열 셋이 되었으니 이제 어엿한 숙녀의 나이대가 아닌가. 그리 남자 행색을 하고 있는 것이 영 마음에 걸려서 말이야…….”
“……아, 아니요…….”
메그릴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가슴 쪽으로 눈길이 갔다. 완벽한 수평면……. 힘들고 자시고 할 것도 없다.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은 단언컨대 단 한 사람도 없다. 메그릴도 스스로 남자가 아닌가 착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거기다가 비록 몸 하나 누우면 꽉 찬 공간이었지만, 공작의 배려로 메그릴만 독방을 썼다. 그에 대한 하인들의 불만을 공작은 한 마디로 일약했다. “내 마음일세.” 거기에 토를 달 사람을 아무도 없었다. 메그릴은 힐끗 카르티안 공작을 바라보며, 저런 말을 왜 하는 걸까에 대해 머리를 핑핑 돌렸다. 아무래도 모르겠다. 보면 볼수록 무섭고 알 수 없는 사람이다.
카르티안 공작은 양 손에 깍지를 끼더니 말했다.
“왜 내가 너에게 남자 아이 행색을 하라 했지……?”
“더, 더 이상 여종은 필요하지 않으신다 하셨습니다. 받아들이면 그 뚱땡이 아줌……아니, 페니 마스터께서 곤란해 하실 거라구요……. 근데 저희 어머니와 인연이 있으셔서 저를 꼭 받아들여야 하셨기 때, 때문…….”
“그래. 하지만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예?”
메그릴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멀뚱 카르티안 공작을 바라보았다.
“내 첫째 딸 케닌이 너보다 딱 2살밖에 많지 않지. 이 성에선 네가 그 애와 가장 터울이 적다.”
“네.”
“원래 귀족가의 자제들은 열여섯 살 때까지 수도에 있는 예속관에서 예절 교육을 받게 되어 있지. 이제 과정이 끝났고, 곧 이 곳으로 되돌아 올 걸세. 그러면 전속 하인이 필요 하겠지.”
“어, 예……그렇겠습죠.”
“그 전속 하인으로 널 쓰려고 마음먹었었다.”
“어, 어째서요?”
“전속 하인을 여인으로 쓸 수 없어. 그게 전통이지. 그러나 케닌 그 아이는 안타깝게도 남성을 기피한다.”
“아…….”
메그릴은 얼핏 하인들에게 주워들은 기억이 났다. 케닌은 짙은 갈색머리에 빨려갈 것 같은 푸른 눈을 하고 있는 절색이라 했다. 여러 곳에서 케닌이 18살 성인이 되는 날 당장에 혼사를 치르자고 끊임없는 추파가 들어온다 했다. 그런데도 언약하나 맺지 않고 이리 지내는 것은 케닌의 병 때문이라고……. 남자와 접촉은커녕 1m 안에만 들어와도 까무러친다 했다. 메그릴은 그 말을 들었을 때 헹, 그런 게 어디 있어? 하며 비웃었던 게 떠올랐다. 그게 진짜였다니! 메그릴은 손을 꽉 쥐었다. 카르티안 공작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서 너 밖에 없다. 너가 적임자야. 너를 지금 이 순간부터 케닌 폰 카르티안의 전속 하인으로 임명한다.”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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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긴가요 ^^;;
중간에 끊기가 애매해서 그냥 늘렸습니다
에라..모르겠다....
남장을 시킨 이유는 당연히 변명이구요
이미 화룡의 자손이 딸이라는 게 밝혀졌기 때문에
행여나 추적당할까 싶어 남장을 시키게 된 게 진짜 이유입니다^^;
근데 어쩌다보니 케닌이 남성 기피증...ㅋㅋ 운명인지
p.s 아참 너무 길다 싶으면 말해주세요 다음편부턴 분량조절을.....
첫댓글:)++ 로 길지 않아요, 남장이라 다음편이 정말 기대되겠네요 케닌과의 이야기가 벌써부터 궁금해지네요/잘읽었습니다아 건필하세요
항상 댓글 감사히 받고 있습니다 S2 슬슬 인물들이 하나씩 등장을 하는 중이에요 ㅋㅋㅋㅋ 감사합니다
ㅠ_ㅠ아진짜너무기대가된다능.....ㅋㅋㅋㅋㅋ
감사합니다 ^0^!
화룡의 아이가 어떻게 성장해 갈지 기대!
정주행하셨근요 ㅠ0ㅠ 그저 감읍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