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14.02.28 05:30
정부가 해외취업 미끼로 돈 사취하자 항의, 인민의 첫 승리
1995년도부터 시작된 북한의 일명 ‘고난의 행군’으로 약 10년 동안 300만 명이 넘는 아사자가 발생했다. 그러나 2009년도까지는 주민들이 악착같이 돈을 벌어 국가의 배급 없이도 살 수는 있게 되었다.
그러나 국고가 텅 비고 경제적 인플레가 형성되자 김정일과 김정은은 2009년 12월 기습적인 화폐개혁을 단행하였다. 화폐개혁으로 사람들 사이에 “인민들이 좀 살 만하니 정부가 인민들의 주머니 돈을 털어낸다”는 비난이 쏟아지자, 화폐개혁을 주관하였던 당시 당 계획재정부장 박남기를 미국과 남조선 정보기관의 지령을 받은 간첩으로 몰아 총살해버렸다. 또 그의 가족 3대를 요덕에 있는 15호 정치범관리소로 보내고, 강연회를 통해 이를 인민들에게 홍보하는 비열한 만행을 저질렀다. 그러나 많은 인민들은 이에 속지 않고 “박남기만 애매하게 ‘보쌈’에 걸려 죽었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다.
화폐개혁 실패의 책임을 박남기한테만 떠넘긴다는 것은 북한에서 비상식적인 일이다. 이런 큰 정책이 김정일이나 김정은, 당의 비준 없이 추진됐다는 발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김정일은 TV 프로그램이나 신문의 편집까지도 다 보고 관할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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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을 마치고 지하철로 향하는 평양 여성들. 2002년 촬영/교도통신
아득바득 먹고 살기 위하여 저축하였던 돈을 국가에 다 몰수당하고 또다시 식량난 등 생활의 어려움에 처하자 주민들은 노골적으로 김정일과 김정은을 향한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던 중 평양시 당국은 2006년도부터 주민들에게 중국 대련에 있는 양초공장에 데리고 나가 일을 하도록 해주겠다면서 40세 미만 여성 약 500명한테서 1인당 400달러를 거둬들였다. 또, 다른 사람보다 먼저 데리고 나가고 좋은 자리를 주겠다며 평균 400~500달러를 뇌물형식으로 더 받고 나아가
여성들을 희롱까지 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른바 ‘장성무역회사 사건’이다. 이 회사는 평양시 인민위원회(한국으로 보면 서울시청) 도시경영국 산하 기관이었다.
피해자들은 2006년부터 2010년까지 4년 동안 속기만 했다면서 자기들의 돈을 돌려달라고 장성무역회사에 항의했다. 이에 박춘봉 사장은 자기는 그 돈을 하나도 안 쓰고 평양시 인민위원회에서 그 돈을 썼다며 인민위원회로 책임을 떠넘겼다. 하지만 평양시 해당부서에서는 자기들은 그 돈에 대해 모르니 돈을 준 장성무역회사에 가서 찾으라며 책임을 회피했다.
화가 난 피해자들은 각자 개인적으로 간부들을 찾아가 “권력을 이용해 돈을 찾아주면 그 돈의 절반을 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이에 당시 김정일의 정치 권모술에 환멸을 느끼던 일부 간부들은 그들에게 “집단적으로 중앙당에 찾아가 김정일에게 직접 평양시 인민위원회와 장성무역회사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면 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부추겼다.
그 말을 들은 피해자들은 서로 연락을 취하며 각기 형제, 친척, 친구들을 대동한 채 정해진 일시와 장소에 모이기로 했다. 2010년 4월 17일 오전 10시쯤, 이들은 ‘중앙당 1접수’ 문 앞에 모여 국가기관이 개인들의 돈을 사기로 떼먹고 돌려주지 않고 있으니 김정일과 당이 이 억울한 사연을 해결해달라며 약 1시간 동안 항의 겸 호소를 하는 시위를 벌였다. 접수실 앞에는 1000명 정도가 모였고, 그 주변엔 2000명 정도가 모여 여차하면 합세할 요량으로 기회를 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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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시 창광거리에서 단발머리 북한 신여성이 여성 교통안전 보안원 옆을 지나가는 모습. 2007년 10월3일 촬영./청와대 사진기자단
이날 사건은 노골적으로 반(反)김정일·김정은, 반당, 반정부 시위는 아니었으나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중앙당 1접수 앞에까지 몰려가 항의를 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특히 정수분자(精粹分子)들만 살고 있는 평양시민들 속에서 일어난, 북한사상 첫 대중적 시위이자 반사회주의적 행동으로서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사건이었다.
집단적인 행동을 제일 무서워하는 김정일은 화가 나 “사회주의 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대중적 시위행동”이라며 평양시 인민보안국에 지시하여 시위자 전원을 잡아들이라고 지시했다. 즉시 평양시 보안국 기동순찰대 2000명이 투입되어 중앙당 접수 앞에 모여 있는 1000여명을 잡아가자, 주위에서 기회를 엿보던 2000여명은 자진 해산했다.
중앙당 간부들이 김정일에게 “1000여명의 사람들을 다 잡아 처리하면 화폐교환으로 가뜩이나 심리가 뒤틀어진 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확산시킬 수 있다”는 보고를 했다. 이에 김정일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내각에 “조사단을 만들어 그들의 제기사항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하였다.
조사단은 평양시 인민보안국에 가서 구류소에 억류되어 있던 사람들을 만나 사태를 파악한 뒤 평양시 인민위원회와 장성무역회사에 잘못이 있었다고 김정일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들은 김정일은 평양시 인민보안국에게 시위대를 전원 석방하라고 지시하고 평양시 모란봉구역 재판소엔 재판을 빨리 진행해 돈 떼인 사람들에게 돈을 돌려주라고 지시하였다. 평양시민들의 첫 대중적 항의신소(抗議伸訴) 운동은 이렇게 인민의 승리로 끝난 셈이다.
그러나 장성무역회사에서는 이미 돈을 다 탕진하였기 때문에 모란봉구역 재판소가 회사에 남은 돈 8000달러와 잡화상품류 2만달러어치만을 몰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돈으로 500여명의 피해자들에게 다 변상하기가 힘들자 간부들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전액 보상을 해주고 다른 사람들에겐 제대로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보상을 제대로 못받은 일부 피해자는 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돈을 돌려달라며 모란봉구역 재판소 앞에 매일 400~500명씩 집단 항의를 하고 있다고 한다.
장성무역회사 사장 박춘봉은 이전에 김정일의 여동생 김경희가 부장으로 있던 경공업부에서 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김경희와 친분관계를 쌓았기 때문에 사법처리를 면하고 석방됐다. 재판소는 그에게 계속 사장으로 있으면서 돈을 벌어 갚으라는 결정을 내렸다. 사건에 연루된 힘 없는 회사 관계자 3명은 각각 13년, 9년, 7년의 노동교화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분개한 많은 주민들은 평양시 중구역 오탄동에 있는 박춘봉의 집으로 찾아가 집 대문을 도끼로 부수며 난동을 부리기도 하였다.
위 사건은 평양시민들이 처음으로 북한정권 하에서 중앙당에까지 집단적으로 몰려가 김정일에게 항의신소를 진행한 첫 대중적 봉기로 기록될 것이다.
평양 시민들은 각성되어가고 있다. 김정일의 독재정권을 물려받은 김정은이 이제라도 인민을 위한 참신한 새 민주정치를 실시하지 않는다면 각성되어가는 평양시민들의 거센 대중폭동에 직면할 수 있음을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김정은 정권은 김일성의 말을 잊지 말라. “착취와 압박이 심한 곳에는 무조건 반항이 있기 마련이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